<행정자치부 규탄 성명서>
행정자치부는 ‘동사무소’ 이름 변경을 즉각 중단하라.
행정자치부는 금년 9월 1일부터 각 동의 ‘사무소’ 이름을 ‘주민센터’로 바꾸고 9월 중에 현판 교체를 완료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이는 주민 생활 서비스 전달체계 혁신이 전국적으로 완료되어 금년 7월부터 동사무소가 복지·문화·고용·생활체육 등 주민 생활 서비스를 주민 맞춤형으로 제공하는 통합서비스기관으로 전환됨에 따라 달라진 동사무소의 기능에 걸맞은 새로운 명칭을 부여하고, 주민에게 이를 널리 알려 주민생활서비스 활용도를 높이기 위한 것이라고 밝혔다.
동사무소의 기능이 주민 생활의 다양한 분야를 지원하는 방향으로 바뀐 것은 행정의 발전이라 평가한다. 그러나 우리 한글문화연대는 행정자치부의 혁신 노력이 왜 하필이면 ‘센터’라는 외래어로 마무리되는가에 대해 심각하게 문제를 제기하지 않을 수 없다.
첫째, 외래어를 실생활에서 무분별하게 남용하여 우리말을 파괴하는 풍조를 정부가 나서서 장려하는 꼴이다. ‘주민센터’로 이름을 바꾸면 그에 따라 현판과 유도 간판, 발급 문서, 지도, 지리안내기 등이 모두 ‘센터’라는 외래어를 사용할 것이다. 알다시피 동사무소는 초·중등학교 다음으로 숫자가 많은 공공기관이다. 이번에 행정자치부가 이름을 바꾸는 동사무소는 전국에서 이천 개가 넘는다. 그러니 그 파급 효과는 어떠할 것인가? 일반 주민들은 일상에서 외래어 남용을 문제로 느끼지 않게 되고, 그 결과 우리말은 급속히 순수성을 잃어갈 것이다. 일본 제국주의 침략기에 우리말과 글을 지키기 위해 노력한 선조들에게 부끄럽지도 않단 말인가?
둘째, 행정자치부는 ‘주민센터’가 부르기 쉽고, 주민 중심의 통합서비스 제공기관 임을 쉽게 인식할 수 있는 명칭으로써국민과 관계 공무원 등을 대상으로 설문조사를 실시하고 ‘동사무소명칭선정자문위원회’의 자문을 거쳐 결정된 것이라고 밝혔다. 행정자치부의 독단으로 결정한 게 아니라 의견을 모으고 외부의 자문 절차를 거쳐 만든 이름이니 자신들에겐 책임이 없고 문제될 것도 없다는 주장이다. 그러나 절차에 하자가 없다 하여 문제가 없는 것은 결코 아니다. 근본적으로 공무원은 국민 전체의 봉사자로서 민주적이고 능률적인 행정을 구현할 책임이 있다. 그리고 여기는 조상 대대로 내려 온 우리 말과 한글을 쓰는 한국 땅이며, 이 명칭 개정을 준비한 행정자치부 공무원이나 이 이름을 사용할 동사무소의 공무원 모두 한국의 공무원이다. 그렇다면 우리 말로 부르기 쉽고 뜻도 걸맞은 이름을 먼저 찾아 나서고, 한글 관련 학계나 시민단체의 의견을 우선 구해야 하건만 행정자치부는 그런 노력을 전혀 기울이지 않았다. 앙상한 요식 절차를 거쳤다고 하여 공무원으로서의 기본 임무를 충실히 했다고 볼 수 없는 것이다.
셋째, ‘센터’라는 이름을 사용하는 것은 민주주의의 기본 정신에도 위배된다. 민주주의의 핵심은 다양한 의사 소통을 통한 공동선의 구현 과정에 있다. 따라서 의사 소통의 매개인 언어 민주주의는 정치사회적 민주주의의 기초인 바, 공공 기관이 이름을 영어로 사용하면서 어찌 주민 생활의 중심이 되겠다고 하는가? 이는 영어 사대주의에서 비롯된 것인 바, 주민의 의식이 아직 성숙되지 않았다고 하여 행정자치부가 이번의 명칭 개편에서 지방 읍·면사무소를 제외한 조치에서 분명히 알 수 있다. ‘센터’라는 영어가 안 통한다는 것이 곧 의식의 미성숙이라는 뜻이니, 농어촌 지역에서 생활하는 국민들을 깔보는 마음이 너무나도 분명하지 않은가?
넷째, 현판과 안내 간판, 각종 문서 발급, 지도, 지리안내기 등등에 들어갈 돈은 어찌할 것인가? 국민의 혈세를 마치 연말에 길바닥 파헤치듯 또 낭비하려는 것인가? 예전엔 ‘119’를 불 끄는 곳으로만 알았었다. 그러나 국민들은 119의 기능이 확장된 걸 잘 알고 있고, 위급한 일이 생기면 바로 119를 찾는다. 새 술을 새 부대에 담아 보겠다는 의도는 이해가 가지만, 변화하는 동사무소의 기능을 잘 홍보하기만 해도 헛돈 쓰지 않고 행정 혁신의 노력은 성공할 수 있다. 혁신은 이름을 바꾸는 데 있는 게 아니다. 일하는 방법과 생각을 바꾸지 않는 한 모양만 다른 구태의연한 꼴을 면치 못할 것이다.
이에 우리 한글문화연대는 행정자치부가 동사무소의 이름을 ‘주민센터’로 바꾸려는 시도를 즉시 중단할 것을 엄중히 요구한다. 영어 사대주의에 빠져 우리말과 우리 문화를 파괴할 뿐만 아니라 온 국민에게 혼란을 주고 귀중한 혈세만 낭비할 이번 조치를 당장 중단하라.
<우리의 요구> 1. 명분 없고 영어사대주의에 빠진 동사무소 이름 변경을 즉각 중단하라. 2. 이름 변경이 행정 목표 상 불가피하다면 국어전문가, 한글운동시민단체 등의 자문을 받아 새로이 실행하라.
2007년 8월 31일
한글문화연대 대표 고경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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