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문·방송이 만들어낸 이상한 말들
신문은 우리나라 국민의 국어실력이 낮아지는 이유에 대해 "청소년층을 지배하는 인터넷 문명과 사회 전반의 한글경시 풍조 때문"이라고 국어학자의 말을 인용해 보도했다. 신문은 또 "상표와 광고, 간판, 잡지 이름은 국적불명의 외국어투성이고 인기 가수의 이름과 그들이 부르는 노래 말에도 우리말과 영어가 뒤범벅돼 있다"고 지적했다. 방송이나 신문 등 언론매체 또한 필요 이상으로 외국어를 많이 사용한다는 겸허한 자기 비판도 곁들였다. 당연한 지적이고 옳은 비판이다.
언론매체의 외국어 남용은 비판받아 마땅하고 또 자제해야 한다. 그러나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어법에 맞지 않고 사전에 올라 있지도 않은 이상한 말들을 만들어 내지 말아야 한다. 신문 방송에서 한번 만들어 잘못 쓴 이상한 말들은 바로바로 독자나 시청자들에게 전달되고 그것이 바른말 바른 표현으로 인식돼 버리기 때문이다. 신문 방송이 분별없이 써대는 다음의 몇가지 말들은 우리가 조금만 주의를 기울이면 오용되지 않았을 것이라는 아쉬움이 남는다. 늦었지만 이제부터라도 바로 써야 하겠다.
알콩달콩
"이웃끼리 훈훈한 정을 나누며 '알콩달콩' 살아가는 섬마을 사람들의 정겨운 이야기를 들려드렸습니다." 어느 방송의 리포터가 방송을 끝내면서 하는 말이다. 그러나 알콩달콩이라는 말은 어느 사전에도 올라 있지 않다. 그러나 '알콩달콩'이라는 말은 요즘 신문 방송 할 것 없이 무분별하게 쓰는 실정이다.
역시나
어떤 대상의 동작이나 상태가 다른 대상에도 마찬가지로 나타나거나 작용함을 이르는 말인 '또한'이나 '예상한 바대로', '늘 그렇듯이'의 뜻을 이르는 말로 '역시'가 있다. '네가 바쁘다면 나도 역시 바쁜 사람이다' '설마 했는데 역시 내 짐작대로구만' 등과 같이 쓰이는 말로 부사다. 부사 중에서 '행여나'와 '혹시나'는 각각 '행여'와 '혹시'의 힘줌말로 사전에 올라 있지만 '역시나'는 올라 있지 않다. 다만 '퍽으나', '퍽이나' 따위는 '퍽'으로 바로잡아 놓았다. 그런데도 지금은 '역시'보다 '역시나'가 오히려 더 많이 쓰일 정도다. 바로 잡으려고 노력하거나 쓰임을 멈출 수 없다면 하루 바삐 사전에 올려야 한다.
표심(票心)
선거철만 되면 어김없이 신문 방송의 선거 전문용어(?)로 대접받는 말이 '표심'이다. '침묵하는 표심잡기 막판 대혼전' '얼어붙은 표심 안개속' '표심이 정치지도 바꾼다' '막판 표심잡기 총력' 등등 선거 기사에서 쉽게 볼 수 있는 용어다. 여기서 표심은 민심이다. 말을 만들어서 상황에 맞게 편리하게 쓸 수도 있겠지만 국민의 공감대가 없는 조어는 언어질서를 파괴하고 혼란만 야기할 뿐이다. 이제 또 대선의 계절이 돌아왔다. 이번 선거에서는 표심이라는 말을 버리고 민심을 되찾을 수 있을까.
입소문
사람들의 입에서 입으로 전해져 널리 알려진 어떤 일이나 사실을 이르는 바른마ㅏㄹ은 소문이다. 일반적으로 진실 여부가 객관적으로 확실하게 밝혀지지 않은 사실을 가리킨다. '소문만 요란했지 별 것 아니더구만''소문난 잔치에 먹을 것 없다' 등과 같이 쓰이는 말이다. 그런데 요즘 신문과 방송에는 군더더기 접두사 '입'을 붙여 '입소문'이라고 표현하는 바람에 따라 쓰는 언중이 늘고 있다. '전하는 말' 자체가 입으로 퍼뜨리는 것이기 때문에 �이 '소문' 앞에 '입'을 붙일 필요는 없다. 국민의 바른말글살이를 위해서라도 신문 방송은 이제부터라도 '입소문'은 내지 말고 '소문'만 내야 한다.
조폭
'조폭'은 '조직폭력'의 줄인 말로 노태우 정부 당시 범죄와의 전쟁을 선포하면서 신문 방송에서 조금씩 쓰이다가 영화 '조폭마누라' 이후 언중에서 조차 자주 쓰는 말이다. 그런데 '조폭' 즉 '조직폭력'이란 집단이 행사하는 폭력을 뜻하는 말이다. 그런데 언론이나 언중 사이에서는 '조폭'을 '조직폭력배'의 준말로 쓰고 있는데 '조직폭력배'에서 '조직'은 이미 '집단'의 듯이 있고 폭력배의 '배'는 '무리'라는 뜻이므로 '조직폭력배'라고 하면 안된다. 따라서 '조직폭력배' 대신 '폭력배' 나 '폭력조직'이라고 써야 옳다.
따라서 영화 '조폭마누라'도 어법에 맞지 않는 말이다. 영화를 보면 '폭력조직원인 마누라'나 '폭력배 두목 인 마누라'라는 의미다. 그런데 '조폭마누라'라고 제목은 '사람의 마누라'가 아닌 '조직폭력(행위)의 마누라'라는 얼토당토 않은 의미가 된다. '조직폭력배의 마누라'라고 해도 말이 안된다. 여러 사람의 마누라가 되기 때문이다.
첫승
스포츠 관련 기사에서 '첫승'이라는 단어가 자주 눈에 띄는데 이것도 바른 말이 아니다. '첫승'이란 처음 승리함을 이르는 말로 쓰는 듯한데 사전에 표제어로 오르지도 않았을 뿐더러 어법상 맞지 않는 말이다. '첫승'에서 앞 음절 '첫'은 관형사로는 처음의 뜻으로 '첫 공연' '첫 시도'와 같이 쓰이고 접두사로는 일부 명사 앞에 붙어 그것이 처음임을 나타내는 말로 '첫걸음' '첫겨울' '첫사랑' '첫서리'와 같이 쓰이는 말이다. '첫'은 고유말로서 고유말끼리 어울리고 한자말과 어울리려면 '첫' 뒤에 자립명사가 와야 한다. '첫승'에서 승은 한자말로서 승리, 승부, 승패, 낙승, 대승, 신승, 우승 따위처럼 다른 한자말과 결합해야 자립명사가 될 수 있으므로 '첫+승'은 성립될 수가 없는 말이다. 다만 첫길, 첫날, 첫닭, 첫돌, 첫딸, 첫삽, 첫손 따위는 끝음절이 모두 고유말이므로 어울릴 수 있는 말이다. 또 첫수(手), 첫차(車), 첫판(版) 등은 다른 한자말과 결합이 필요없는 자립명사이므로 첫과 어울릴 수 있는 말이다. '첫승'이 올바른 쓰임새가 되려면 '첫승리'라고 해야 옳다.
고졸출신
신문의 스포츠면을 보면 선수소개 기사중 '고줄출신'이라는 말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졸업은 출신과 맥이 통하는 의미를 지닌 말이므로 고등학교 졸업이나 고등학교 출신으로 쓰면 족하다. 정착 고교졸업이나 고교출신으로 표현해야 하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학력을 굳이 소개할 필요가 없다. 대졸 선수들의 학력은 소개하지 않으면서 고졸선수임을 강조하는 것은 야구선수에게도 대졸이라는 간판이 꼭 필요해서일까.
구명운동
구명운동은 죽어가는 사람을 살리는데 많은 사람들이 뜻을 같이 하고 정성을 모으자는 운동이다. 그런데 요즘 이 말이 엉뚱하게 쓰이는 사례가 많다. 특히 형사사건으로 구속된 피의자를 석방되도록 탄원하는 경우에도 구명운동이라고 표현하는데 이는 올바른 표현이 아니다. 그럴 경우 풀려나도록 힘을 모은다거나 노력한다고 하고 구태여 운동을 쓰고 싶다면 '석방운동'이라고 해야 한다.
수입산
외국에서 사들여온 농수산물을 수입 농수산물이라고 한다. 그런데 신문 방송에서 '수입' 뒤에 불필요한 산(産)을 붙여 수입산 OO이라고 표현하는 바람에 언중사이에서조차 수입이 아닌 수입산이라고 쓰는 경우가 많다. 산은 산지의 뜻으로 국산, 외국산 혹은 미국산, 일본산, 제주산 등으로 쓰이는 말이다. 수입은 외국에서 물품 따위를 사들이는 행위를 이르는 말이지 국명이나 지명이 아니다.
가짜목사 행세
신분을 사칭하여 선량한 사람들의 금품을 갈취하거나 여성들을 농락하다가 법망에 걸려드는 파렴치한에 대한 보도를 접할 때가 있다. 이들은 주로 경찰이나 의사, 대학생, 군장교, 목사 등을 사칭해 피해자에게 접근해 사기를 치는 경우가 많다. 이같은 사건이 나면 신문 방송은 '경찰관 행세, 의사 행세, 고위장교 행세' 를 했다고 보도한다. 그런데 가짜가 진짜인 것처럼 행동한 것을 '가짜 목사 행세'를 했다고 보도하면 그 가짜는 자신이 가짜라는 것을 밝힌 셈이 된다. 그냥 '목사 행세'라고만 하면 된다.
상습사고지역
상습이란 좋지 않은 일을 늘 버릇처럼 되풀이하는 것을 뜻하는 말로 상습뒤에는 고의성이 있고 부정적인 뜻을 지닌 말이 따른다. 상습강도, 상습공갈 등이다. 이처럼 상습은 사람의 나쁜 행위 앞에 써야 하는 말인데 그 결과가 나쁘다고 해서 불의의 사고 수해 따위의 자연현상 앞에 쓰는 것은 적절치 않다. 신문 방송 등에서 자주 쓰는 말로 상습사고지역, 상습수해지역, 상습침수지역 등이 있는데 '사고 많은 곳' '수해 잦은 지역' '침수 잦은 지역' 등이면 족하고 무엇보다 그같은 지역이 없도록 해야할 것이다.
세례
기독교에서 신자가 될 때 베푸는 의식을 일러 '세례'라고 한다. 종파에 따라 다르나 대개 안수 목사가 머리에 점수함으로써 원죄를 씻고 새로운 생명으로 소생함을 상징한다. 그런데 사전들이 쏟아지는 공격, 비난, 제재 따위의 뜻으로도 올려놓는 바람에 세례의 근본 뜻이 왜곡되고 있다. 주먹세례, 물세례, 계란세례 등 부정적 의미로 쓰이는 경우가 많다.<김선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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