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의 향기 느껴지는 디지털 세상의 중심은…
'신세대'임에도 필카ㆍ보드게임ㆍLP판에 열광하는 이유
타인과 호흡하는 '아날로그적 삶'에 대한 향수 아닐까
회사원 김 아무개(37)씨는 자칭 `아날로그족'(analogue 族)이다. MP3 플레이어와 CD대신 잡음 소리마저 정겹다는 LP(Long Playing) 판으로 음악을 감상한다. 일정관리는 PDA나 노트북이 아닌 수첩으로 대신한지 오래됐다. 손목에는 매일 매일 밥을 줘야 째깍 째깍 소리를 내며 가는 수동시계를 차고, 최근에는 로모(LOMO)라는 수동식 카메라 찍는 재미에 푹 빠져있다.
요즘 들어 김 씨처럼 아날로그 문화에 마음을 빼앗기는 사람들이 늘고 있다.
아날로그족이란 말은 지난 2003년 신조어 사전에 처음 등장한 말로, `컴퓨터나 PDA 같은 디지털 기기 대신 일기장이나 플래너로 시간과 정보를 관리하는 사람'으로 정의된다.
하지만 최근에는 아날로그족의 의미가 더욱 넓어져 `편리하지만 차가운 느낌의 디지털보다는 다소 불편하지만 따뜻하고 인간적인 냄새가 나는 무언가를 향유하는 사람들'이란 의미로도 쓰이고 있다.
모든 것이 0과 1의 조합인 디지털 세상에서 우리의 몸과 맘이 다시 아날로그로 끌려가는 이유는 무엇일까. 아날로그라는 말에 녹아있는 따듯한 정감과 사람 내음, 과거에 대한 추억과 향수 때문은 아닐까.
아날로그족들이 탐닉하는 문화는 가만 살펴보면 우리 아버지와 어머니 세대에서는 보편적이었던 문화들이었다. 그런 점에서 본다면 아날로그 열풍은 과거로의 회귀일 수 있지만, 사실은 그 이상의 무엇이 있다.
PC게임에 해박한 요즘 젊은이들 가운데는 이른바 아날로그 게임으로 불리는 보드게임에 열중하는 이가 적지 않다고 한다. 주사위, 다트 던지기, 카드놀이 등을 할 수 있는
보드게임 카페는 이미 성업 중에 있다.
보드게임족들이 이구동성을 말하는 보드게임의 장점은 `사람 내음'을 느낄 수 있다는 것이다. 혼자 헤드셋을 끼고 마우스와 좌판을 두드리며 하는 컴퓨터 게임의 삭막함보다는 친구들과 얘기를 나누며 여유로운 시간을 보낼 수 있는 보드게임에서 사람의 정을 느낀다는 것이다.
LP판 마니아들은 "LP판을 통해 흘러나오는 음악이 나만의 음악"이라고 말한다. 대량복제가 가능한 CD와 MP3 파일과는 달리, LP판은 판마다 잡음이 다르고, 또 음악과 함께 들려오는 `지지직'하는 잡음마저 편안함과 따듯함을 준다고 한다.
사진분야에서는 로모로 대표되는 수동 카메라 마니아층이 두텁다. 수동 카메라는 디지털카메라와는 달리 필름을 직접 끼워야하고, 사진관에서 현상과 인화과정을 거치기 때문에 `기다림'이 필요하다. 디지털카메라는 잘못 나오면 바로 지워버리지만, 수동식 카메라는 그럴 수도 없다. 30대 후반의 세대라면 경험해봤겠지만, 수동식 카메라로 찍은 필름을 사진관에 맡기고 사진이 나오기를 기다릴 때는 `설레임'마저 느낀다.
시계도 그렇다. 요즘이야 거의 모든 시계가 건전지로 작동한다. 전자시계는 물론이고 초침과 분침이 있는 시계도 안을 들여다보면 건전지로 작동하는 쿼츠(Quarz)다. 하지만 최근들어 매일 매일 태엽을 감아주거나, 팔의 움직임으로 자동으로 태엽을 감는 기계식 수동시계가 다시 인기를 끌고 있다.
수동식 시계는 쿼츠나 전자시계보다 정확성이 떨어진다. 수천원만을 호가하는 수동식 시계도 하루에 5∼10초 가량의 오차가 생긴다. 쿼츠가 1년에 1∼2초의 오차가 나는 것에 비교하면 기능적인 면에서는 경쟁이 안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수동식 시계가 인기를 끄는 이유는 무엇보다도 시계주인이 관심을 가져주지 않으면 멎어버리는, 그래서 시계와 시계주인이 한 호흡을 하고 있다는 느낌을 주기 때문이란다.
최근의 아날로그 열풍은 디지털 시대에는 느낄 수 없는 무언가를 채워준다는 점에서, 단순히 과거로의 회귀라기보다는 디지털과 아날로그의 조화라는 측면이 더 강하다. 그 부족한 부분은 바로 `인간적인 것에 대한 향수'다. 디지털이 채워주지 못하는 무언가를 채워주는 아날로그 덕분에 디지털 세상은 오히려 더욱 풍요로워지는 것은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