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빤스 한장 걸친 내 마라톤 인생 이제 35㎞ 통과”
‘오뚝이 마라토너’ 봉달이 이봉주
“한물 갔다고요? 신경 안써요 쓰러질듯 늘 다시 일어났으니…
내달 시카고대회 인생 건 승부”
- “들어오세요.” 턱수염이 더부룩한 사내가 호텔방에서 ‘팬티’ 바람으로 손님을 맞았다. 등받이가 달린 의자를 끌어당겨 권하더니, 자신은 침대 끄트머리에 걸터앉았다.
‘국민 마라토너’ 이봉주(37·삼성전자). 하지만 사람들은 아직도 ‘봉달이’라는 별명을 더 좋아한다. “한물갔다”는 평가를 받던 이봉주는 지난 3월 다시 날갯짓을 하며 날아올랐다. 서울국제마라톤 겸 동아마라톤에서 막판 짜릿한 역전극을 펼치며 우승을 했다.
이봉주는 추석을 앞두고 충남 공주에서 훈련 중이었다. 오인환 감독과 함께 마라톤 인생을 건 승부를 준비하고 있었다. 오는 10월7일 미국 시카고에서 열리는 시카고마라톤이 무대다. 추석 당일에 차례만 지낸 뒤 28일 미국으로 떠날 예정이다.
금강변 도로를 오가며 훈련에 열중하고 있는 이봉주를 만났다.
―턱수염을 또 기르는군요.
“네. 출전할 경기가 잡히고 훈련에 들어가면 그때부터 턱수염을 기릅니다. 콧수염은 안 길러요. 1997년쯤부터 그랬던 거 같아요. 이번에도 지난 7월부터 기르고 있습니다. 손질은 해줘야 합니다. 안 그러면 엄청 지저분해지거든요. 뭐랄까, 나 자신에 대한 암시라고 할까요? 턱수염을 다듬으면서 대회가 임박했다는 걸 다시 마음에 새기고 각오를 다집니다. 도 닦는 심정이지요.”
―모발 이식 수술도 받았지요?
“네, 2002년에 2000개 심었고, 2003년에 추가로 2004개를 심었지요. 그때는 2004년 아테네올림픽에서 좋은 성적을 올리라는 의미에서 의사선생님께서 그렇게 해주셨는데, 성적은 기대에 못 미쳤죠.”
―땀이 너무 흘러 내려서 머리를 심었던 것인가요?
“아닙니다. 그때 제가 30대 중반이었는데, 머리카락이 너무 많이 빠져서 늙어 보이더라고요. 그래서 머리카락을 심은 거죠. 지금 훨씬 젊어 보이지 않나요? 외모에 대한 콤플렉스를 조금이라도 해결한다는 건 심리적으로도 좋은 것 같아요. 사진을 볼 때면 정말 하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죠.”
―그럼 예전에 쌍꺼풀 수술했던 건…. 그때는 땀이 눈으로 들어가는 걸 막기 위해서였다는 보도가 있었는데.
“그것도 사실은 그냥 제가 하고 싶었어요. 자꾸만 눈꺼풀이 처지면서 작은 눈이 점점 더 작아 보였거든요. 땀 때문에 수술했다는 얘기가 나온 건 주위에서 저를 좋게 봐주셔서 그런 거였죠.”
너무 솔직하다. 언론에 보도된 대로 그냥 둘러대면 될 텐데…. 면전에서 물어봤기 때문일까? 자세히 보니 오른쪽 위에 치아가 없다. 임플란트를 해야 하는데, 시간이 없어서 틀니를 끼고 다닌다고 또 털어놓았다. 쑥스러운 듯 고개를 숙이는 그의 눈빛을 따라가다 보니, 맨발이 보였다. 발톱이 거의 다 일그러져 있었다. 오른쪽 둘째와 셋째 발가락에는 피멍이 맺혀 있었다. 언제 생겼는지 기억이 없지만, 없어지지도 않는다고 했다. 그의 발바닥은 가운데까지 거의 일자로 평평한 ‘평발’이었다. 한때 ‘군대에도 못 가는 결격 사유’로 꼽혔던 평발을 가진 그가 마라톤을 뛰고 있는 것이다. 그뿐이 아니다. 그는 ‘짝발’이다. 왼발이 253.9㎜, 오른발이 249.5㎜로 차이가 난다.
―마라톤이 힘든 운동이잖아요. 왜 마라톤을 하게 됐나요?
“저는 천안에서 태어났어요. 아버님께서 농사를 지으셨는데, 먹고살기 빠듯했죠. 2남2녀 중 제가 막내입니다. 큰 누나는 초등학교 졸업하고 곧바로 도시로 일하러 나가야 했어요. 전 공부에는 별 취미는 없었고…. 고등학교 진학한 뒤 육상을 시작했죠. 다른 운동은 돈이 많이 들겠더라고요. 형이 레슬링을 하다가 부모님 반대로 중간에 포기했어요. 운동하려면 이런저런 돈이 들어가는데, 그걸 감당할 형편이 아니었거든요. 그런데, 육상 선수들을 보니, ‘빤쓰(팬티)’ 하나 입고 뛰면 되겠다 싶었어요. 그래서 육상을 시작했죠. 단거리보다는 장거리가 더 성적이 좋았고, 고등학교 졸업 후에야 본격적으로 마라톤을 하게 됐습니다.”
이봉주는 1990년 전국체육대회에서 처음으로 마라톤 풀코스를 소화했다. “앞사람만 보고 정신없이 뛰었다”는 그는 2등을 차지했다. 이후 17년 동안 풀코스에 37번이나 도전해 35번을 완주했다. 성실함과 인내. 그의 천성은 마라톤에 꼭 맞았다. 20세 이후 한 번도 체중이 56~57㎏을 벗어난 적이 없다. 마라톤 훈련과 대회에서 뛴 거리만 합쳐도 15만2000㎞가 넘는다. 지구를 3.8바퀴(한 바퀴는 약 4만㎞) 이상 달린 셈이다. 라이벌이자 동갑내기 친구인 황영조 국민체육진흥공단 감독은 5년 동안 8회의 풀코스 완주를 기록한 뒤 은퇴했다.
―정말 마라톤을 오래했지요. 곧 마흔인데, 자신의 인생을 마라톤에 비교한다면 어느 정도에 와 있다고 생각하나요?
“글쎄요. 지금 35㎞ 지점쯤을 달리고 있는 셈일 겁니다. 이제 힘들고 중요한 고비는 넘어섰다고 봐야죠. 마무리가 중요할 것 같아요. 마무리를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마라톤 결과가 달라지듯이 제 인생에 대한 평가도 달라지겠죠.”
―일찌감치 지도자의 길로 나선 황영조 감독을 보면 어떤 생각이 드나요? 친구 사이라고 하던데.
“우리 둘은 걸어온 길이 같았죠. 나이도 동갑이고, 고등학교 때 1년씩 꿇었던 것도 같아요. 하지만, 영조가 먼저 꽃을 피웠죠. 그 친구는 정말 타고난 마라토너라고 생각해요. 영조 덕분에 지금 아내(김미순 씨)도 만났지요. 영조랑 삼척에 놀러 갔을 때 친구의 친구를 데리고 나왔는데, 지금 애들 엄마였죠. 첫눈에 반했어요. 음…. 영조는 일찍 운동을 그만두면서, 지도자 생활을 하면서 경력을 쌓아가고 있어요. 하지만 전 아직도 선수 생활을 하고 있죠. 사회에서 어울리며 함께 살아가는 측면에서 생각하면 제가 떨어진다고 생각해요.”
―마라톤을 그만두고 싶다는 생각은 한 번도 안 해봤나요?
“마라톤을 시작하고 얼마 안 됐을 때죠. 1992년이니…. 하프마라톤 한국 신기록 세우고, 잘 나가다가 무릎 부상을 당했어요. 바르셀로나 올림픽 선발전에서 뛰다가 중도 포기했죠. 그런데 영조는 그때 올림픽 나가서 금메달을 따고, 국민적인 영웅이 됐죠. 정말 그때 마음 고생 많이 했어요.”
―그래도 큰 부상 없이 17년 동안 마라톤을 뛰었으면 행복한 선수생활 아닌가요?
“그럼요. 마라톤 선수들은 족저근막염(발바닥의 근막을 과다하게 사용하여 염증이 생기는 것)으로 수술도 자주 하는데, 전 몸에 칼은 안 댔거든요. 쌍꺼풀 수술 말고는….”
―돈은 좀 모았습니까?
“수원에 집이 있고, 땅도 좀 있고, 건물도 있고…. 언제까지 달릴 수 있는 것도 아니기 때문에 미리미리 준비를 좀 했죠. 아내가 야무지게 관리를 잘합니다. 복 받은 거죠.”
2002년 4월21일 결혼한 이봉주는 우석(4), 승진(3) 등 두 아들을 얻었다. 그의 큰아들은 인터넷에서 일찌감치 스타가 됐다. 커다란 눈과 귀여운 외모가 아버지와는 너무 ‘대조’가 됐기 때문이다. 이봉주는 지난봄 아들과 함께 정유회사 광고에 출연하기도 했다.
―아이들이 잘생겼던데, 보고 싶지 않나요?
“하루에 세 번 정도 전화를 합니다. 올해 우승할 때도 우석이가 전화해서 ‘아빠, 힘내세요. 우리가 있잖아요~’라는 노래를 불러줬습니다. 정말 힘이 났습니다. 훈련이나 출전 때문에 집을 비울 때가 잦아서 아이들에게 항상 미안하죠. 가족들보다 오인환 감독님과 함께 지낸 시간이 더 많거든요. 집에 가면 함께 놀아주려고 노력합니다. 큰 녀석은 책 읽어주는 걸 무척 좋아해요. 화장실에 앉아서도 책 읽어달라고 하거든요. 화장실 문 열어놓고 볼 일을 보고, 전 그 앞에 쭈그리고 앉아서 책을 읽어주고…. 그때가 제일 행복하죠.”
―아이들이 마라톤을 한다면 시킬 건가요?
“글쎄요. 너무 힘든 일이라…. 자기가 하겠다면 시켜야지요. 음, 점을 봤는데, 우석이는 아빠보다 운동으로 이름을 더 날릴 거라고 하더군요. 둘째는 손재주가 뛰어나서 유명해진다고 하고요.”
―2004년쯤 CF에서 마라톤 전쟁의 승리 소식을 알리려고 달렸던 아테네 병사의 복장을 하고 출연한 적이 있었죠?
“어휴, 말도 마세요. 그때 생각하면 지금도 쑥스럽습니다. 2000년에 시드니 올림픽을 앞두고 ‘엄니’(어머니)하고 외치는 ‘이봉주 광고’가 있었지만, 그건 제가 직접 나오는 게 아니라 진흙 인형이 대신 나오는 거였거든요. 이틀 동안 거의 쉬지 않고 찍었는데, 정말 혼 났어요. 지금도 길에서 만나는 학생들이 ‘이봉주도 달았다. 봉주르 라이프!’라면서 흉내를 내죠. 좀 민망하기도 하지만, 그 덕분에 사람들이 저를 친근한 이미지로 봐 주시는 것 같아요.”
―이제 조만간 은퇴하게 될 텐데, 은퇴하면 어떤 일을 할 생각인가요?
“제가 마라톤 선수가 아니었다면, 아마 목장을 하고 있었을 겁니다. 어려서부터 그게 꿈이었어요. 하지만 마라톤과 관련된 일을 해야겠지요. 제가 마라톤을 하면서, 얻은 게 많아요. 좋은 사람들, 돈, 명예…. 마라톤이 아니었다면 지금의 이봉주도 없었을 겁니다. 이젠 제가 마라톤에 갚아야 할 차례라고 생각해요.”
호텔 방을 둘러봤다. 옷걸이에 걸린 옷은 트레이닝복이 전부다. 가방 속도 마찬가지. 신발도 운동화뿐이다. 로열젤리, 벌꿀, 녹차, 붕어진액이 곳곳에 놓여 있다. 한쪽 바닥에는 체중계와 아령, 발바닥 지압기도 보였다. 작은 테이블 위에는 호랑이 인형과 ‘신도 버린 사람들’이라는 책이 갈피가 접힌 채 놓여 있었다.
―아니, 건강원도 아니고, 뭐가 이리 많습니까?
“좀, 그렇죠? 서른다섯 살 넘어가니깐 몸이 예전 같지 않더군요. 붕어진액은 함께 육상을 했던 친구가 직접 낚시로 잡은 붕어를 고아서 보내준 겁니다. 내년 베이징올림픽 때까지는 자기가 책임지겠다면서요. 훈련 중에는 다른 음료수를 안 마시고, 꿀물이랑 녹차 정도만 마시죠. 지금도 영양제 같은 건 안 먹습니다.”
- ―팬들이 보내주는 약도 있을 텐데. 뭐가 제일 기억에 남나요?
“북한에 함봉실이라는 마라톤 선수가 있죠. 국제 대회에서 자주 만나서 이것저것 챙겨줬더니, 2005년 인천아시아육상선수권에 오면서 구렁이 두 마리를 삶아서 병에 넣어 몰래 가져와서 선물로 주더군요. 암수 한 쌍을 먹어야 효험이 있다면서…. 그런데 더운 날씨에 상하고 말았어요. 주위에선 시체 썩는 냄새가 난다고 난리였죠. 봉실이가 구렁이를 삶아서 살점을 젓가락으로 떼어먹으라고 했는데, 도저히 못 먹겠더군요.”
―책을 많이 읽나 봅니다.
“아내가 이번에 읽으라고 사준 책입니다. 인도의 ‘불가촉천민(不可觸賤民)’이라고 손도 닿으면 안 된다는 계급 차별을 받는 사람들이 역경을 딛고 성공하는 이야기입니다. 세상에는 정말 대단한 사람들이 많아요. 전지 훈련을 오면 숙소에서 꼼짝하지 않기 때문에 책을 주로 읽습니다. 1년에 한 30권쯤 읽게 되는 것 같아요.”
―음악도 자주 듣나요?
“가요를 주로 듣습니다. 댄스곡이나 발라드나 폭넓게 듣는 편이죠. 이상하게 듣다 보면 ‘70·80’쪽으로 가긴 하는데…. 노래방에 가면 ‘사람이 꽃보다 아름다워’를 부릅니다. 가사도 좋고…. 어, 못 믿으시는 눈치이신데, 저 노래 잘해요.”
―호랑이 인형은 뭡니까? 아이들 주려고 샀나요?
“어, 그게…. 어제 저녁 먹고 들어오는 길에 오락실이 있길래…. 왜 총 쏴서 맞히면 주는 거 있잖아요. 심심해서 해 봤는데, 잘 맞더라고요. 상품으로 받은 겁니다.”
호텔 방에서 이야기를 나누다가 훈련 시간이 됐다. 기자가 가방을 챙기는 사이, 잠시 쭈뼛대던 그는 옷을 ‘훌러덩’ 벗었다. 옷을 갈아입는 그를 곁눈질로 훔쳐봤다. 온몸이 근육덩어리였다.
훈련은 지켜보는 것만으로도 힘이 들었다. 코스모스 위로 내리꽂는 가을 햇볕이 따가웠다. 2시간여 도로를 달린 이봉주는 머리에 마시던 물을 쏟아 부었다. 숙소로 돌아와서 다시 마주 앉았다.
―가끔 술 생각이 나지는 않나요?
“왜 안 나겠습니까? 나지요. 하지만 대회를 앞두면 3개월 전부터 한 방울도 입에 대지 않습니다. 사실 술에 대해서는 좋지 않은 기억이 있거든요. 아버님께서 술을 입에 달고 사셨어요. (이봉주의 부친은 2001년 3월에 췌장암으로 세상을 떠났다) 점심이고, 저녁이고…. 주사(酒邪)가 좀 있으셨어요. 어머니께서 너무 고생을 하셨죠. ‘난 어른이 되어도 술을 마시지 말아야지’ 하고 생각했죠.”
―그래도 결국 본인도 술을 마시게 된 거군요.
“피는 어쩔 수 없나 봅니다. 저도 술이 세더라고요. 20대 때는 소주 6병 정도를 마셔도 별로 취하질 않았어요. 요즘은 조금 줄었지요. 다행히 저는 술 취하면 곧바로 잠자는 스타일이라, 사고는 없었습니다. 다른 사람들은 영조(황영조 감독)가 저보다 술이 셀 거라고 생각하시는데, 술로는 영조가 저한테 안 되죠.”
―올해 초만 해도 ‘이봉주는 이제 한물갔다’고 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런 얘기 들으면 기분이 어떤가요?
“뭐, 처음도 아닌 걸요. 1997년에도 그랬고, 그전에도 들은 거 같은데…. 물론 그런 얘기 들으면 기분은 나쁘죠. 하지만 그런 거 신경 안 쓰고, 내 훈련에만 전념했어요. 그게 되니깐 여기까지 온 거고요. 주위에서 저보고 ‘오뚝이 인생’이라고 하시더군요. 쓰러질 듯하면서 일어나고, 또 쓰러질 듯하다가 다시 일어났으니까요. 사람들이 저를 좋아해 주시는 이유가 이거 아닐까 생각합니다.”
―이봉주 선수의 뒤를 이을 만한 재목이 없다는 얘기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나요?
“요즘 젊은 선수들 보면 너무 나약해진 것 같습니다. 옛날하고는 차이가 있는 것 같아요. 힘든 고비가 왔을 때 참고 이겨내야 하는데, 쉽게 포기하는 경향이 많아요. 노력 없이는 아무것도 안 된다는 것을 인정하려고 들지를 않아요. 남이 시키는 것만해서는 안 되는데, 시키는 것도 못 따라가는 경우가 많으니….”
―이봉주 선수를 보면서 힘을 얻는다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누군가가 나를 보고 힘을 얻는다는 것은 기분 좋은 일입니다. 제가 지난 3월 서울국제마라톤에서 역전 우승을 한 다음에 어떤 어르신께서 제게 편지를 보내오셨습니다. ‘나같이 힘없는 늙은이는 그냥 조용히 살다가 죽는 게 순리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제 전성기가 지났다고 생각했던 이봉주 선수가 우승하는 걸 보고 나도 무슨 일이든 다시 할 수 있겠다는 용기를 얻었다. 고맙다’ 이런 내용이었지요. 저도 그 편지를 보고 ‘아, 이젠 나 혼자 달리는 것이 아니구나’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언제까지 마라톤을 할 생각입니까?
“우선 오는 10월 시카고마라톤에서 제가 갖고 있는 한국최고기록(2시간7분20초)에 도전해 볼 생각입니다. 그리고 마지막 목표는 내년 베이징 올림픽에서 금메달을 따는 거죠. 제가 올림픽 금메달을 못 걸어봤거든요.(이봉주는 1996년 애틀랜타 올림픽에서 은메달을 땄다)”
―베이징올림픽이 은퇴 경기가 되는 건가요?
“아닙니다. 올림픽을 뛰고 나서 내년 가을쯤에 열리는 대회에서 마지막으로 뛰고 싶습니다. 욕심 같아서는 대회 공식 명칭에 ‘이봉주 은퇴 경기’라는 게 붙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럴 만한 자격을 얻으려면 몇 번 안 남은 대회에서 정말 멋진 모습을 보여드려야겠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