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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은 머리 외국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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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자청비 2008. 3. 19. 09: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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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검은 머리 외국인'


한라일보 : 2008. 02.27

 

 

취임 축하글을 쓰느라 늦춰진 글이다. 다름 아닌 이명박 특검의 이야기다. 미리 밝히지만, 수사 내용에 대해 시비하려는 것이 아니다. 어쨌든 특검은 사건을 속속들이 들여다보았다. 우리는 풍문으로밖에 들은 것이 없다. 그런 우리가 수사 내용에 대해 왈가왈부한다면, 그것은 서울을 본 적이 없는 시골 사람이 서울 사람에게 청계천 이야기를 떠드는 거나 같을 것이다.

수사(搜査)가 아니라 수사(修辭)에 대해 이야기하려는 것이다. 정호영 특검은 BBK 수사를 "검은 머리 외국인에게 대한민국이 우롱당한 사건"이라는 말로 마무리했다. 여기서 '검은 머리 외국인'은 김경준씨를 가리킨다.

특검은 김 씨를 사기꾼으로 결론 지었다. 그 결론이 틀렸다는 것이 아니다. 그에 대한 판단은 최종적으로 법원이 내릴 것이다. 필자가 역겨웠던 것은 '검은 머리 외국인'이라는 비유의 특검적 함의(含意)였다.

지은 사람이 '검은 머리 외국인'이기 때문에 죄가 더 커지는 것은 아니다. 물론 더 작아지는 것도 아니다. 지은 자가 내국인이면 죄가 가볍고, 외국인이면 무겁고, 한국계 외국인이면 더 무거워지는가. '검은 머리 외국인'은 법률적으로 아무런 의미와 가치가 없는 말이다.

특검의 속계산은 짐작할 수 있다. 김 씨가 '검은 머리 외국인'라는 점을 환기시킴으로써 국민의 애국심을 자극하고 싶었던 것이다. 논리적으로는 '선동(煽動)에 의한 논증'에 해당하는 오류이고, 역사적으로는 인민재판의 수법이다. 이는 오류일 뿐 아니라 사악한 수사법(修辭法)이다.

그 비유가 재외(在外)한국인-특검 식 표현으로는 '머리 검은 외국인'-들에게 어떻게 들릴까 생각하면 모골(毛骨)이 다 송연(悚然)해진다. 그리고 '검은 머리 외국인'을 차별하는 사람이면 '검은 피부 한국인'-예컨대 결혼이민여성-에 대해서도 그럴 공산이 크다.

그러나 필자가 진짜 개탄해 마지 않는 것은 그런 비유를 그냥 베껴 대서특필한 대한민국 언론의 생각 없음이다. 그 언론들도 한편으로는 '글로벌 마인드'를 열심히 떠든다. 세계화를 하고 싶으면, '아륀지' 발음을 공부하기 전에, '외국인'에 대한 막힌 사고부터 뚫어야 한다. <편집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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