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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탕건짜기
▲망건짜기
▲갓양태만드는 모습
참고내용
갓일(중요무형문화재 제4호)
◆ 지정번호 : 중요무형문화재 제 4호
◆ 지정년월일 : 1985년 2월 1일
◆ 기능보유자 ①총모자(보유자) : 金 仁(1920년생)
②양 태(보유자) : 張順子(1940년생)
갓일은 우리나라 남해안 지방과 제주도에서 주로 전승되어 왔다. 남해안 지방의 경우 거의 남성들에 따른 작업이었음에도 반하여 제주도에서는 온통 여성들이 감당해 온다. 갓일은 제주도 부녀자들의 맵시고운 솜씨를 자랑하는 대표적인 수공예로서 〈갓.양태〉을 일컫는다. 〈양태〉는 갓의 밑둘레 밖으로 넓게 바닥이 된 부분이고, 〈양태〉위의 부분은 〈갓모자〉인데 양태는 대오리로, 모자는 말총으로 만든다.
갓은 가볍고 사뿐한데다가 양반으로서, 사내로서의 품위를 유연하게 드러내 준다. 따라서 나폴레옹도 세인트 헬레나에 유배중이었을 때 한국의 갓을 쓰고 넉넉한 여유를 찾고자 했다는 일화를 남겼다. 또한 공자의 제자인 子路는 政敵(정적)에 의하여 죽음에 맞닥뜨렸을 때에 冠(관)을 똑바로 고쳐 쓰고 관끈을 졸라맨 다음에야 의연히 숨을 거두었다고 한다. 갓을 참으로 소중히 여겨왔음은 성년의례를 冠禮(관례)라 하고 어른됨의 표상으로 갓을 씌워 주었다는 데서도 입증된다.
우리나라 남성들은 예전에 정장을 하려면 우선 머리에 망건을 두르고 탕건을 쓴 다음에 갓을 썼다. 따라서 갓일이라 하면 망건·탕건·갓을 겯는 일 모두를 통틀어 말하는 뜻임과 더불어, 그 뜻을 좁혀서 갓을 겯는 일만을 뜻하기도 한다. 여기에서는 갓을 겯는 일만으로 국한해서 그 대강을 살펴본다.
갓은 갓양태와 갓모자로 나누어진다. 갓 밑 둘레 바깥으로 넓게 바닥이 된 부분을 갓양태라 하는데, 이를 줄여서 '양태'·'갓양'이라고도 하면, 제주에서는 '양대'라 부르기도 한다. 갓양태 위의 머리에 씌워지는 부분이 갓모자인데 '총모자'라고도 하며 이를 줄여서 '모자'라 이르기도 한다. 갓 양태의 재료는 대오리이고, 갓모자의 재료는 말총이다.
우리나라의 갓은 제주도와 통영·거제도 사람들이 주로 결어왔다. 통영이나 거제도에서는 남성들이 갓양태나 갓모자 겯기를 주로 담당해 왔는데, 제주도의 갓 겯기는 모두 여성들의 몫이었다. 제주도 일부지역에서 치러졌던 갓일은 지난날의 중요한 소득원이었다. 농어업에 힘쓰는 사이, 농한기 또는 밤에 부업으로 갓양태와 갓모자를 결음으로써 기계에 크게 이바지했다. 1925년 당시 제주도내에서 갓양태 겯기에 종사하던 호수만 해도 13,700호에 이르렀고, 1930년 한 해에만 갓양태 175,600개, 갓모자 83,770개를 생산했다니 그 규모가 얼마나 대단했는가를 짐작할 만하다.
제주도는 예로부터 말이 많은 고장이었다. 갓모자·탕건·망건을 결을 재료로 손쉽게 구할 수 있었으므로 이런 일이 손쉽게 번졌을 줄 안다. 갓앙태를 겯는 대나무 역시 제주도의 특산이었다는 점을 주목한다면 갓양태 겯기 역시 제주도 일부지역에 극성스레 번졌었다는 사실을 곧 이해할 수 있다.
모든 갓일은 갑오경장을 고비로 단발령이 내림으로써 점차 사양길로 접어들더니 제주도에서도 1960년대말에 이르면서 자취를 감추었다. 넓은 의미의 갓일은 제주시를 중심으로 동쪽으로는 조천읍 일대로부터 서쪽으로는 애월읍 동부까지로 국한되어 치러졌다. 다른 이유가 있는지는 모르지만, 갓일을 치르는 지역이 국한되었음은 이 일대에는 朝天浦(조천포)·禾北浦(화북포)·山底浦(산저포)가 있어 그 제품을 곳곳으로 수송하는 데 유리했을 뿐더러, 제주도의 대나무가 모자라자 영남 일대에서 대오리를 수입해 들이는 데도 유리했을 것이 중요한 이유가 아닐까 짐작된다.
갓장수들은 관덕정과 삼양·조천 등지에서 벌어졌던 오일장날마다 갓양태·갓모자·탕건·망건을 잔뜩 사들이고, 전국 도처, 심지어는 멀리 북간도까지 부치곤 했다. 그 과정에서 갓양태와 갓모자를 따로따로 사들일 경우 이를 하나의 갓으로 꾸미는 작업이 필요했다. 이는 주로 통영의 남성들이(예 : 최상근) 제주시 삼도 2동 무근성에 들어와서 갓방을 차렸던 적도 있다.
갓양태를 겯는 대나무는 제주도산을 썼다. 제주도에서 자라는 대나무가 부족하자, 광복 직후까지도 일부러 배를 동원해서 경상남도 하동과 진주 등지에서 분죽이란 대나무를 실어와서 수요자에게 나누곤 했다. 갓양태를 겯는 데 쓰이는 연장중 대표적인 것은 '양태판이'다. '양태판이'는 벚나무나 느티나무의 널빤지로 만들어진 직경 28cm쯤의 정단형인데 '텅에'위에 얹어 갓양태를 겯는다.
갓양태의 제작과정은 크게 두 가지로 나뉜다. 하나는 실처럼 가느다란 대오리를 만드는 일이요, 또 하나는 그 대오리로써 잣양태를 겯는 일이다. 대오리를 만드는 일도 꽤 번거롭다. 우선 대 마디와 마디 사이를 톱으로 동강치고, 두어 차례 쪼개고 나서 불필요한 속부분은 떼어 없앤다. 겉껍질만 솥에 넣고 재에 섞어서 아홉 시간쯤 삶는다. 삶은 대를 '속튼대'를 도화지 두께 정도로 얄팍하게 훑어 다듬고는, 0.5mm 정도의 간격으로 칼금을 내어서 한 가닥씩 잡아당기면 실오라기처럼 가느다랗게 쪼개어 진다. 그 다음에 세 가지 과정을 거치면서 갓양태를 겯는다. 첫째는 '쌀'이라는 날대를 실로 엮는 일이요, 둘째는 나선형으로 겯는 일이며, 셋째는 '빗대'를 비스듬히 꽂는 과정이다.
오일장을 통하여 갓양태를 사들인 상인들은 제품을 아교로 단단하게 굳힌 다음 한본토로 수출한다. 갓양태는 統營(통영) 등지의 갓방에서 따로 사들인 갓모자와 어울리어 온전한 갓이 된다.
한편, 제주도의 말총으로 갓모자가 별도로 결여진다. 갓모자의 줄임말은 '모자'이며, 제주도에서는 '모저'·'모재'라고도 한다. 갓모자만이 아니라, 말총으로는 탕건·망건·전자관 등도 결였다. 제주도의 말총으로 그 수요를 충당할 수 없을 때에는 개별적으로 일본에서 말총을 수입해서 쓰기도 했는데, 이를 '왜총'이라고 일컬었다. 말총은 질기고 유연하며, 머리에 쓰면 감촉에 좋다. 제주도민과 제주말은 인연이 깊다. 제주말은 예전에 소중한 진상품이었을 뿐더러, 버거운 농사일을 줄곧 도와왔고, 그 말총은 갓모자·탕건·망건·정자관 등을 겯는 데도 소중한 재료로 활용되었기 때문이다.
갓모자는 '골거리'위에 나무로 만든 '골'을 걸어놓고 결어간다. 갓모자의 제작과정은 세 단계로 나누어진다. 곧 첫째는 갓모자를 겯는 일, 둘째는 새까맣게 먹칠하는 일, 셋째는 갓양태와 더불어 온전한 갓을 꾸미는 일이다.
갓모자는 왕골방석을 겯기 시작하는 방법으로 우물 정[井]꼴로 서로 어울리면서 정상 부분으로부터 겯기 시작한다. 점차 옆면으로 결어서 내려오는데, 정상부분을 결어 가는 동안, 날줄과 날줄 사이사이에 몇 차례 사잇줄을 끼워 넣는다. 따라서 상품일 경우에는 처음에 80줄로 시작된 날줄의 수효가 무려 400줄로 불어나기도 한다. 옆면을 결어 가는 줄을 '몸줄'이라 하는데, 몸줄의 수효 역시 상품이면 200줄에 이르기도 한다.
갓장수들은 오일장날에 갓모자를 사들이고는 몸줄의 간격을 조절하고 솥에서 삶은 다음에 먹칠을 한다. 솥에서 삶은 목적은 갓모자의 모습을 고정시키기 위함이다. 먹칠을 하는 까닭은 색을 고르게 하고 윤기가 나도록 하는 데 있다. 먹칠을 할 때에는 말총을 붓모양으로 묵은 '사지'를 쓴다. 종래 제주도의 갓모자는 그 품질의 우열에 따라서 '진계량'·'중계량'·'장내기' 등 세 종류로 나누어지는데, 가로 세로의 줄 수효가 많을수록 상품으로 친다.
머리를 덮는 부분인 갓모자와 얼굴을 가리는 차양부분인 갓양태는 이처럼 그 재료부터 말총과 대오리로 나누어지고, 각각 따로따로 결어진다. 갓양태와 갓모자를 하나로 어울리어 하나의 갓을 꾸미는 작업은 갓방에서 치러진다. 넓은 뜻의 갓은 크게 두 부류로 나누어진다. 하나는 삿갓 모양의 방갓형이요, 또하나는 갓(흑립) 모양의 패랭이형이다. 방갓형으로는 삿갓·방갓·전모 등이 있고, 패랭이형으로는 초립·흑립·전립·주립·백립 등이 있다. 우리가 보통 갓이라고 하면 흑립을 가리키는 것이 일반적이다.
세월의 흐름에 따라 흑립의 모습도 변화무쌍했다. 특히 갓모자의 높이가 얼마쯤이 적절한가, 갓양태의 넓이는 어느 정도가 적절한가에 대한 논의가 조선조를 통하여 엎치락뒤치락 끊임없이 되풀이 되었다. 한참 큰 갓이 유행하는가 하면, 작은 갓으로 탈바꿈하는 등, 갓 모양을 두고 국가적 차원에서 왈가왈부했음도 주목하거니와 그만큼 우리 조상들은 갓을 소중히 여겼다는 사실도 입증된다. 그 신분에 따라서 각기 다른 흑립을 썼었으며, 갓끈이나 갓 정상의 정자(頂子)의 꾸밈새 역시 그 재료에 따라 신분을 상징하기도 했다. 유연하고도 가벼운 한국의 갓은 한국인다운 기품을 드러내며, 인류가 고안해낸 관모 가운데 가장 우아한 관모라고 자부할 만하다.
망건장(중요무형문화재 제66호)
◆ 지정번호 : 중요무형문화재 제 66호
◆ 지정년월일 : 1987년 1월 5일
◆ 기능보유자 : 이수여(李受汝, 1923년생)
망건은 갓을 쓸 때에 머리털이 흐트러지지 않도록 이마로부터 뒷머리쪽으로 둘러치는 띠인데. 너비 7cm 쯤의 너부죽한 머리띠 모양이다. 이마와 머리 뒤로 두르고 끄나풀로 졸라매게 되어 있다. 우선 망건을 두르고 나서 탕건과 갓을 쓴다. 따라서 망건은 관모라기보다 머리장식의 하나라고도 볼 수 있다.
망건의 재료는 말총이다. 다만 〈五洲衍文長箋散橋(오주연문장전산교)〉에는 망건을 결어서 쓰는 제도가 명나라 태조때에 비롯되어 道士가 명주실로 망건을 결었었다고 하였으며 《지봉유설》에는 중국·한국·유구(琉球) 사람들만 망건을 썼었다고 적혀 있다.
우리나라의 망건은 명나라에서 전래되었다고 하지만, 그 재료나 용도 및 형태가 서로 다르다. 《세종실록》 2년 경자조에 말총으로 결은 망건을 명나라의 사신에게 선물했다는 기록이 전해지는 점으로 보아, 중국으로부터 망건이 우리나라에 수입된 것은 사실이지만, 말총을 재료로 하여 겯는 방법은 우리나라에서 창안되고 되레 중국으로 역수출된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본래 명주실로 겯던 망건이 우리나라에 들어와 토착화되면서 말총으로써 만드는 뛰어난 착안과 더불어 품위있게 정제된 제품을 생산한 것은 16세기 후반부터인 듯 여겨진다. 말총공예는 조선조를 통틀어 매우 성행되었었다. 망건을 결을 때에는 나무로 된 망건골에 걸어서 작업하고, 제품은 끓는 물에 삶음으로써 헝크러지지 않게 고정시킨다.
망건 역시 갓양태·갓모자·탕건과 더불어 제주도 여인들의 소중한 소득원이었다. 1925년 한 해 동안만 하더라도 제주도에서만 712호에서 망건을 59,000개나 생산했었다니, 조선조 때로 치올라간다면 그 규모가 얼마나 대단했었는가를 짐작하기 어렵지 않다. 전승되는 <망건노래>에서도 "한 간에는 옷 믿은 망건 / 한 간에는 집 믿은 망건 / 정의좁쌀 내 믿은 망건 / 함덕 짚신 내 믿은 망건"(북제주군)이라는 謠詞(요사)를 볼 수 있다.
곧 망건을 결어 얻은 소득으로써 옷·집이나 좁쌀, 또는 짚신을 마련할 수 있었다는 구체적인 사실을 알게 된다. 우리가 여기에서 주목할 바는 단순한 용돈 마련에 그치지 않고 집이나 옷을 살 수 있을 만큼 상당한 소득을 올릴 수 있음을 강조했다는 점에 있다. 그만큼 망건 제작에서 얻는 제주민의 소득은 대단했다.
19세기까지만 하더라도 망건의 명산지는 대구·공주·석성·김제·평양 등지로 확산됐지만, 지금은 중요무형문화재로 지정된 기능보유자 등 제주도 여성 몇 분에 의하여 겨우 그 명맥이 이어지는 정도에 그친다. 또한 망건에는 貫子(관자)를 다는데, 그 관자는 신분을 표상했었으므로 벼슬에 따라서 그 구분이 엄격했음도 주목된다. 어쨌든 망건은 중국에서 수입되었지만, 말총 망건을 한국에서 알뜰히 꾸며지고 중국으로 역수출되었다는 점은 주목해야 마땅하다. <출처 : Daum 신지식 작성일자 2006-04-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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