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바마는 ‘친북좌파’(?)
[이채훈PD의 터닝포인트] ‘이름 붙이기’는 이제 그만!
<PD저널>
미국 대선이 화제이니 그 얘기로 시작하자. ‘욕하다’란 뜻의 영어로 ‘call names’라는 말이 있다. 입에 올리기 민망한 단어들로 상대방 이름을 붙여서 부르는 게 바로 욕이라는 것이다. 미 대선 과정에서 오바마에게 ‘엘리트’(elite), ‘사회주의자’(socialist)라는 딱지를 붙인 사람들이 있었다. 오바마와 모택동, 오바마와 마르크스를 합성한 캐리커처도 나돌았다. ‘버락 후세인 오바마’라는 이름이 미국적이지 않은데다가 중동 독재자를 연상시킨다는 시비도 있었다.
미국 사회에도 매카시즘이 조금 남아 있지만 이번 선거에서는 큰 영향을 미치지 못했다. 맘에 들지 않는 사람 욕하는 것은 그리 좋은 일이 아니지만, 이해할 수 있긴 하다. 인지상정이니까. 이런 일은 정도의 차이는 있어도 어느 나라나 다 있는 일이니까.
그런데 한국이라면 어떨까? 오바마는 한국의 일부 신문이나 뉴라이트가 그 동안 보여준 기준으로 판단하면 ‘친북 좌파’ 혐의가 짙다. 95%의 서민을 위한 감세, 분배 위주의 경제 정책, 의료 보험을 비롯한 사회보장 확대 등등, 그들이 보면 모두 ‘좌파적’ 정책들이다. 게다가 북의 지도자 김정일과도 만나겠다니 ‘친북 좌파’ 아닌지 의심할 만하다.
만약 오바마가 한국에서 대선에 출마했다면
욕이란 것은 받지 않으면 그 욕을 뱉은 사람에게 돌아간다고 한다. 누가 나더러 ‘병신’이라하더라도 내가 ‘병신’ 아니면 그만인 것이다. 그 욕을 입에 올린 사람이 뭔가 잘못 생각했을 뿐이다. 그러나 한국에서 ‘좌파’라는 욕은 그렇지 않다. 이 말에는 증오, 저주, 심지어 살기가 담겨 있다. 해방 정국에서 최근까지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빨갱이’로 낙인찍혀 목숨을 잃고 고초를 겪었는가. 비극의 기억에서 자유롭지 못한 우리는 아직도 ‘좌파’라는 말에 본능적으로 움츠러들지 않을 수 없다.
이 ‘좌파’라는 욕은 일방적이다. 김창룡 교수가 지적했듯, ‘좌우 프레임’은 경향, 한겨레에서는 거의 나타나지 않는 반면 조선, 중앙, 동아에서 자주 볼 수 있다(언론광장 2008. 11월 월례포럼 발제문 참고). 게다가 이 신문들과 뉴라이트가 권력자 편에 서서 반대자들을 ‘좌파’로 몰고 ‘소탕’하는데 협력한다면 우리 사회가 갈망하는 ‘소통’이 실종될 것이다. 증오와 불신의 찬바람만 휑하니 부는 황량한 땅이 되고 말 것이다.
김창룡 교수의 지적대로 이 말을 쓰려면 ‘좌파 세력’이 누구를 지칭하는 것인지 분명히 정의해야 한다. “언론사 스스로 좌우 프레임에 갇혀 저널리즘의 원칙에 충실하지 못하게 된다면 한국 언론 전체의 신뢰를 추락시키는 결과가 될 것”이라는 그의 지적에 전적으로 공감한다(언론광장 2008. 11월 월례포럼 발제문 참고).
새삼스럽지만, 그들이 말하는 ‘좌파’의 범위는 너무 넓고 자의적이다. 자칭 사회주의자는 물론 김대중 ․ 노무현 정권 관계자도 그들이 보면 ‘친북좌파’다. 유모차 아줌마든 누리꾼이든 맘에 안 들면 모두 ‘좌파’다. 귀에 걸면 귀걸이고 코에 걸면 코걸이다. 국가보안법은 ‘법제화’한 폭력이고, 이 사람들은 ‘인격화’된 국가보안법이다.
좌우 구분은 시대착오적이다. 이념 대립의 시대는 이미 한참 전에 끝났다. 반세기 전에 횡행했던 마녀사냥의 으스스한 냄새를 끝없이 퍼뜨리는 것은 이제 누구에게도 도움이 되지 않는다. 이들이 ‘좌파’라는 말을 즐겨 쓰는 것은 집단 이익 때문일 가능성이 높다. ‘우파’를 자처함으로써 고정 소비자를 결집시키자는 계산이 깔려 있다는 것이다. 이는 위기감의 발로일 수도 있다. 수십년간 누려온 기득권을 위협하는 세력들에게 ‘좌파’라는 딱지를 붙이고, 이 말을 되풀이 쓰다 보니 스스로 세뇌되어 당연한 듯 사용하고 있다는 것이다. 김대중, 강천석 등 유명 논객들 뿐 아니라 젊은 기자들도 ‘좌파’란 말을 거리낌 없이 쓰는 걸 보면 어처구니없다.
그들의 행태를 비판하는 쪽도 이름붙이기의 유혹을 느끼기는 마찬가지다. 이명박 정부의 촛불 탄압과 언론 장악을 목도하며 ‘5공식 파시즘’이란 말이 자연스레 나오고 있다. 물론 5공 때처럼 극단적인 폭력과 고문을 자행할 수는 없다. 최소한의 동의와 설득을 바탕으로 통치해야 하는 시대이므로 이 말이 꼭 맞는다고 할 수 없다. 그러나 여건만 주어지면 전두환 시절처럼 하고 싶다는 유혹을 느낄 법도 하니 ‘5공식 파시즘’이란 말이 꼭 틀린 것도 아니다. 이명박 정부을 ‘파시즘’ 쪽으로 끌고 가려는 일부 신문과 뉴라이트의 본질이 바로 파시즘을 닮았다는 데에 별 이견이 없는 듯하다.
지금은 성찰의 실종시대, 보통 사람의 수준에 부합하는 프레임 설정해야
이러한 이름 붙이기에 대한 비판도 있다. 강준만 교수는 <인물과 사상> 10월호에서 ‘성찰의 실종’을 지적하며 “보통 사람의 이해 수준과 정서에 부합하는 프레임을 설정하는 게 아니라 운동 프로페셔널의 관점에서 프레임을 설정해 놓고 대중은 따라 오라는 식”이라고 일침을 놓았다. “개혁 진보가 아무리 ‘5공 파시즘’을 외쳐 봤자, 지난 노무현 정권 등에서 신뢰를 잃었기 때문에 대중이 볼 때는 모든 게 양측의 ‘밥그릇 싸움’으로만 보일 뿐”이라는 것이다. 강 교수는 “현장, 지역에서 출발해야 한다. 작고 낮은 곳에서부터 시작해야 한다.”고 덧붙였다.
김윤철 서강대 사회과학연구소 연구원은 “(대중은) ‘5공’이니 ‘파시즘’이니 규정하는 것에 별 관심도 없을 것이다. 대다수의 관심은 여전히 ‘경제 활성화’라고 본다”고 지적하고, “반독재, 반민주, 반파시즘 전선을 만들어 싸우는 것보다 지금 더 중요한 것은 치밀한 여론전과 대안을 통한 지난한 설득과정”이라고 강조했다(<시사인>, 제59호 참조).
‘보수’를 자칭하는 사람들 입에서 이런 비판이 나왔다면 얼마나 좋을까 생각해 본다. 이른바 ‘보수’ 측 사람들의 대다수는 우리 사회의 과거와 미래에 대해 진지하게 성찰하고 책임 있는 대안을 제시하는 대신 기득권에 집착하며 반대자에게 ‘친북 좌파’ 딱지를 붙이는데 열중이다. 그러니 ‘파시스트’라고 욕을 먹는 것이다. 책임감과 톨레랑스를 갖춘 ‘좋은’ 보수가 아쉽다.
서로 ‘파시스트’, ‘좌파’라는 식으로 이름붙이는 부질없는 짓을 중단하자고 공개 제안이라도 해 볼까 생각해 본다. 물론 부질없는 짓이다. 이념적 확신 때문이든 집단 이익 때문이든 그들이 스스로 ‘이름 붙이기’를 중단할 가능성은 없어 보인다. 그렇다면 광고 불매 운동으로 압력을 가하는 것이 유일한 대안인데, 이 또한 '불법'으로 규정하는 세상이니 답답할 뿐이다. 소비자 운동을 불법으로 탄압하는 건 위헌 아닐까? 법률 전문가들께 진지하게 묻고 싶다.
누구나 아는 김춘수의 시 한 구절이 떠오른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었을 때 / 그는 나에게로 와서 / 꽃이 되었다.” 모든 개인은 유니크하다. 자기 이름이 있다. 사람은 누구나 자기 이름 불러 주는 것을 좋아한다. 서로 인정하고 공존하는 사회를 위해서는 원래 이름을 불러 줘야 한다.
고유한 이름이 아닌 자의적인 ‘이름 붙이기’는 오만하고 무례하다. 더구나 한국 사회에서 ‘좌파’라는 저주로 낙인 찍는 것은 일방적인 폭력에 다름 아니다. 요즘 신문을 보니 다행히 미국 대선 결과를 놓고 ‘친북좌파가 집권했다’고 한 신문은 없었다. 불필요한 ‘이름 붙이기’는 이제 그만! 인간에 대한 예의가 새삼 그립다.
<이채훈 MBC PD webmaster@pdjourna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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