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세기 진보 지식인 지도 /
③ 에티엔 발리바르 Etienne Balibar
1942년 프랑스 아발롱에서 태어나 파리고등사범학교에서 루이 알튀세르를 사사하고, 네덜란드 네이메헌대에서 철학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1961년 프랑스 공산당에 입당하나, 1981년 당의 보수적인 이주노동자 정책을 비판했다는 이유로 축출된다. 현재 파리 10대학 명예교수이자 미국 어바인대 교수다. 이데올로기, 국가, 시민권 문제 등을 이론화하지 못한 마르크스주의의 한계를 넘어서기 위해 1980년대부터 대중들의 교통양식에 대한 스피노자의 논의를 적극 수용했다. 이를 기반으로 해방과 변혁이라는 근대 정치의 두 가지 상에 동일성들과 경계들의 폭력을 대상으로 하는 시민인륜(civility)의 정치를 추가할 것을 주장했다. 우리말로 번역된 책으로는 <민주주의와 독재> <역사유물론 연구> <마르크스의 철학, 마르크스의 정치> <대중들의 공포>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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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제도화된 민주주의는 역설적으로 반민주적 조건을 내장하고 있고, 민주주의가 멈춰서는 ‘경계들’을 갖게 된다. ‘국민경계’는 그 안에서 민주주의가 작동할 수 있는 유효한 조건이지만, 국민이 아닌 자들에 대한 차별을 제도화하고 민주주의를 무효로 만드는 야누스적 성격을 갖는다.
지금 세계 곳곳에는 때아닌 만리장성들이 건설되고 있다. 중동에는 본디 테러리스트를 막을 목적으로 세웠지만, 이제 팔레스타인 사람들이 일자리를 찾아 이스라엘로 오는 길을 차단하는 콘크리트 장벽이 있다. 또 북아프리카의 스페인령 주변에는 유럽과 아프리카 사이의 지브롤터 해협을 건너려는 이주자들을 막기 위한 감시초소 장벽이 있고, 아메리카 쪽으로 눈을 돌리면 미국-멕시코 국경에 세워진 9척 높이의 일명 ‘죽음의 장벽’이 있다. 세계화 시대에 상품들이 자유롭게 유통된다고 해서, 사람들도 자유롭게 이동하는 것은 아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장벽을 넘다 죽어갔다. 이렇게 죽은 자들의 영혼을 달래기 위해 ‘죽음의 장벽’ 멕시코 쪽 벽면에 주민들은 여러 벽화를 그려 놓았다. 거기에는 이런 문구가 적혀 있다. “우리는 경계를 침범하지 않았다. 경계가 우리를 침범해 온 것이다.”
다시 말해서, 사람들은 당면한 삶의 필요에 따라 이동한 것뿐인데 이를 막아서는 경계야말로 부당한 것 아니냐는 항의다. 그러나 이 문구는 또한, 지금 우리 사회에는 도처에 경계가 생겨나고 있다는 사실을 증언해준다. 경계는 이제 국경 위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사회 곳곳에서 복제되고 증식되고 있으며, 그렇게 “우리를 침범해 오고 있는 중”이다. 이주자들에 대한 감시와 차별이 제도화됨에 따라, 사회는 일정한 경계선 안에서 동질성을 누리는 공동체가 아니라, 점점 더 다양한 경계선들에 의해 분할된 공간으로 변모해 가고 있다.
외부 식민지들이 공식적으로 지도에서 사라진 시대에 중심국들의 국경 안에는 새로운 식민지들이 은밀하게 건설되고 있으며, 제국주의 국가의 옛 경계를 방어하던 비민주적 제도와 통치술도 모습을 바꿔 중심 안에 속속 복귀하고 있다. 도시 내 게토나 도시 외곽 빈민촌의 형식을 취하는 이러한 내부 식민지들은 세계 중심국들의 메트로폴리스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다. 고속도로 같은 장애물이 그곳을 에워쌈으로써 분리(segregation)의 장벽을 이루고, 경찰은 국경을 지키는 군인처럼 이 내적 경계를 방어한다.
경계들의 이러한 폭발적 증식 속에서 우리가 목격하는 것은 우리가 ‘민주주의’라고 불렀던 것의 소멸이다. 어떤 이가 피부색을 이유로 검문당하고 강제송환되거나 심지어 죽임을 당할 때 민주주의는 파괴된다. 곳곳에서 아파르트헤이트에 견줄 만한 제도적 인종주의가 출현하고, 과거 민주주의의 상대적 성과들이 소실된다. 이른바 “내국인들”은 초과착취되는 이주자들의 상황에 스스로 처하게 될 것을 두려워하면서 권리의 현저한 후퇴를 감내하거나, 자신의 경제적 곤궁에 대한 불만을 이주자들에 대한 증오로 투사하는 극우 포퓰리즘에 휩쓸린다.
이러한 상황을 이해하고 그 대안을 모색하기 위해 반드시 참조해야 할 철학자가 에티엔 발리바르다. 발리바르는 1960년대부터 그의 스승인 루이 알튀세르와 함께, 스피노자의 관점을 도입함으로써 마르크스주의의 발본적 개조를 도모해온 철학자다. 특히 80~90년대를 통과하면서 그는 민주주의에 대한 스피노자의 논의와 그 난점을 분석하는 한편, 이를 근대 국가의 민족형태에 대한 역사적 분석과 연관시킴으로써 “민주주의의 경계들”에 대한 독창적인 논의를 생산해왔다.
스피노자는 민주주의를 하나의 정치체제로 정의하지 못한 채 <정치론>을 미완성으로 남겨두었다. 그런데 발리바르에 따르면, 이것은 결함이 아니라 오히려 엄밀한 사고의 결과다. 민주주의란 본디 하나의 정치체제에 주어질 수 있는 이름이 아니라는 것이다. 민주주의는 민주정을 포함한 모든 종류의 정치체제를 ‘민주화’하는 대중의 실천일 따름이다. 이러한 실천은 원칙적으로 종결될 수 있는 것이 아니기에, 항상 “더 많은 민주주의”를 향한 운동으로 재개될 수밖에 없다. 거꾸로, 실존하는 모든 정치체제는 정도의 차이가 있다고 해도 여전히 민주화되어야 할 것으로 남는다. 모든 제도화된 “민주주의”는 역설적으로 민주주의를 위한 반민주적 조건을 내장하고 있으며, 따라서 민주주의가 멈춰서는 “경계들”을 갖게 된다.
발리바르는 이러한 민주주의의 근대적 경계가 바로 국민 경계에 놓여 있었다고 지적한다. 그는 민주주의가 최대한 달성되었다고 하는 서구의 “복지국가들”조차 국민 경계 안에서 다소간 평등한 사회권을 보장하려는 시도였다고 평가한다. 곧 국민 경계는 그 안에서 민주주의가 작동할 수 있는 유효한 조건이었지만, 동시에 국민 성원이 아닌 자들에 대한 차별을 제도화하고 그 너머에서 민주주의를 무효로 만드는 야누스적 성격을 가졌다는 것이다. 마치 멕시코 쪽 벽면에 그려진 벽화가 미국 쪽에서는 한 점도 발견되지 않듯이 말이다.
70년대 말부터 시작된 자본 주도의 신자유주의적 세계화는 국민 경계가 가졌던 이러한 전략적 기능을 심각하게 교란했다. 이른바 ‘복지국가의 위기’라는 것도 경계의 위기로 이해될 수 있다. 자본이 국경을 넘어 움직이자 자본과 국가권력을 통제할 수 있는 시민들의 역량도 그만큼 위축되었고, 정치는 초국가적 기술관료들이나 국제법 전문가들의 수중으로 넘어가 버렸다. 하지만 경계가 위기에 처했다는 것이 곧 경계가 사라지고 있다는 말은 아니다. 오히려 오늘날 경계는 복잡성을 더해가면서 인구통제와 민주주의의 제한을 위한 수단으로 그 반민주적 성격을 노골화하고 있다.
발리바르는 이러한 상황에 대한 대안으로 “경계들의 민주화”를 제안한다. 이제까지 우리는 경계 내에서의 민주주의를 고민해 왔지만, 이제 본격적으로 경계들의 민주주의를 고민할 때가 왔다는 것이다. 이는 경계들을 단순히 철거하고 세계공동체의 단일한 시민권으로 나아가자는 말은 아니다. 경계들의 제거는 더 많은 폭력으로 귀결될 수 있다. 문제는 경계들을 이루는 반민주적 제도들을 변혁하고 경계들의 내부와 외부가 민주적으로 교통하게 만들기 위한 실험과 실천을 정치의 중심 과제로 제시하는 것이다. 상이한 정치공동체에 속하는 사람들이 자기가 거주하는 바로 그곳에서 더는 “시민”과 “이방인”(또는 “적”)이 아닌, 평등한 권리를 누리는 서로-시민들(co-citizens)로 만날 수 있는 조건을 창출하기 위한 정치가 발명되어야 한다.
오늘날 유일하게 가능한 정치는 세계정치이며, 시민권은 국민들을 관통하는 관(貫)국가적(transnational) 수준에서 다시 태어나야 한다. 그리고 이 점에서 이주자들은 “우리”와 더불어 더 많은 민주주의를 위한 운동을 재개할 동료 능동 시민들로 인정되어야 한다. 발리바르의 최근 작업이 우리에게 인식하도록 촉구하는 것은 바로 이러한 민주적 정치의 새로운 지형이다.
최원/시카고 로욜라대 박사과정 수료
최원씨는 1968년 태어나 연세대 금속공학과를 중퇴하고 미국으로 유학해, 2000년 뉴욕 주립대학 철학과를 졸업했다. 2002년 뉴스쿨대에서 철학과 석사학위를 받은 뒤 시카고 로욜라대학에서 박사논문을 준비 중이다. 에티엔 발리바르의 <대중들의 공포>를 우리말로 옮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