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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바마시대와 한국 9

세상보기---------/사람 사는 세상

by 자청비 2009. 2. 21. 11: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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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바마시대와 한국

2. 오바마가 떠맡은 국제적 짐들

오바마 대통령은 경제위기만으로도 밤에 잠을 제대로 이룰 수 없을 텐데, 심각한 문제는 나라 밖에도 수두룩하다. 오바마가 국제사회에서 해결해야 할 문제들은 아들 부시와 ‘네오콘’이 뿌린 독버섯의 씨앗에서 끝을 모르고 자란 문어발 같은 것이다. 그것은 거슬러 올라가서 로널드 레이건에서 비롯되고 아버지 부시가 더 악성으로 만들어버린 이른바 ‘일방주의’와 ‘일국 패권주의’의 산물이다. 사람은 왼쪽과 오른쪽이 균형을 이루어야 바로 걷고, 건강하게 생각할 수 있다. 그런데 레이건 이래 공화당 대통령들은 오른쪽으로만 걸어가면서 왼쪽은 보지도 않으려 들었다. 그들에게는 중간도 없었다.

‘일방주의’와 ‘패권주의’로만 치달은 공화당


로널드 레이건(Ronald Reagan, 1911~2004)은 요즈음도 미국인들 다수가 역대 대통령들 중 ‘가장 위대한’ 축에 든다고 꼽는 인물이다. 나는 그의 재임기간에는 물론이고 퇴임 뒤에도 그것이 미국인들의 정치적 문맹에서 비롯된 ‘우상 숭배’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런 미신은 아직도 미국에 굳게 뿌리를 내리고 있다.

잘 알려져 있듯이 레이건은 영화배우 출신이었다. 그런데 그는 단순한 연기자가 아니라 다분히 정치적인 배우였다. 그는 유레카대학을 졸업하고 아이오와대학교 미식축구 중계방송팀에 취직한다. 그는 그 뒤 라디오방송의 야구 담당 아나운서로 일하다가 1937년에 워너브러더스영화사의 연기자로 들어간다. 레이건의 영화배우 경력은 ‘2류’라는 평을 넘어서기 어려웠다. 왜냐하면 그가 할리우드에서 주로‘b급 영화들’에 출연했기 때문이다.

레이건은 1941년에 영화배우조합(SAG)의 이사가 된 뒤 1947년에 마침내 이사장으로 뽑힌다. 그는 할리우드가 험한 사건들을 겪던 시기에 노사분규에 개입해서 사용자들에게 유리한 쪽으로 해결책을 마련했다는 비판을 받는다. 그는 또, 1947년에 월트 디즈니와 함께 하원의 ‘비미국적 활동 조사위원회’(HUAC)에서 ‘할리우드 블랙리스트’에 오른 영화인들에 대해 증언한다. 레이건은 미국 영화계에서 공산주의자들의 위협은 심각하다고 말함으로써, 뚜렷한 증거도 없이 ‘빨갱이’로 몰린 동료 영화인들을 궁지로 몰아넣는다. 단순히 그의 증언 때문만은 아니었지만 ‘냉전’시대의 비이성적 ‘마녀사냥’에 몰린 에드워드 드미트릭 감독 등 ‘할리우드의 10인’(Hollywood 10)은 오래 동안 영화계를 떠나 있어야 했다.

레이건, 공화당으로 옮겨서


프랭클린 루스벨트를 존경하는 민주당원이었던 레이건은 1950년대에 ‘더 작은 연방정부’를 바라면서 공화당으로 옮긴다. 본격적으로 정치에 뛰어든 그는 1967년에 캘리포니아 주지사에 당선된 뒤 8년 간 연임한다. 그는 1976년에 현직 대통령이던 제럴드 포드에 도전해서 대통령후보로 나섰다가 실패하고, 마침내 1980년 대선에서 민주당의 지미 카터를 누르고 대통령이 된다. 그때 그는 무려 미국 50개 주 중 44개 주에서 이겼다. 이것으로 미국에서 ‘레이건 신화’가 시작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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