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라톤 인생’ 막 내리는 이봉주, ‘인생 마라톤’은 계속된다
[쿠키 스포츠] 봉달이(마라토너 이봉주)가 우리 곁을 떠난다.
동네 약수터에서 만날 것 같은 친근한 외모로 10년 넘게 한국 마라톤을 이끌었던 이봉주(1970년생)도 마흔이라는 세월의 무게를 피해갈 수 없었다. 1996년 애틀랜타 올림픽 은메달, 2001년 보스턴 마라톤 우승, 개인 통산 40번째 풀코스 완주는 그가 우리에게 준 선물이다.
◇국민 마라토너의 마지막 완주=이봉주는 15일 서울 세종로∼잠실종합운동장간 42.195㎞코스에서 열린 2009 서울국제마라톤에서 14위(2시간16분46초)로 골인했다. 이 레이스를 마지막으로 이봉주는 1990년부터 시작된 마라톤 선수 생활 19년을 마감하고 은퇴했다.
이봉주가 이날 기록한 40번째 마라톤 풀코스 완주는 세계적으로 보기 드문 기록이다. 국제육상경기연맹(IAAF)은 개별 선수의 마라톤 풀코스 완주 횟수를 공식 집계하지는 않는다. 다만 대한육상연맹측은 “20년 가까이 마라토너로 뛰면서 40차례 완주했다는 얘기는 세계 마라톤 역사상 들어본 적이 없다”고 밝혔다.
이봉주는 애당초 이번 대회 성적 자체에는 큰 관심이 없었다. 더 나은 기록을 내면 물론 좋지만 자신의 마라톤 인생을 어떻게 마무리할 것인지가 주된 고민이었다. 이봉주는 지난해 베이징 올림픽 뒤 소속 팀 삼성전자 육상단 홈페이지에 올린 인사말에서 “남은 선수 생활 동안 큰 대회 우승과 같은 좋은 성적을 노리기보다는 후배들과 함께 달리며 제 경험과 노하우를 전하고 싶습니다”라고 썼다.
◇인생 마라톤 준비하는 봉달이=언제부터인가 국민들은 이봉주가 몇 위를 했는지에 일희일비하지 않았다. 그가 달려준 것만으로 고마웠고, 끝까지 포기하지 않는 그의 태도에서 용기와 힘을 얻었다.
이봉주는 본인 최고의 소망이었던 올림픽 금메달의 꿈은 이루지 못했다. 1992년 바르셀로나 올림픽 금메달(황영조)에 이은 한국 선수 2연패 기대 속에 출전한 1996년 애틀랜타 대회 은메달이 이봉주의 올림픽 최고 성적이었다. 이봉주는 2000년 시드니 올림픽에서 레이스 도중 넘어지는 불운으로 24위에 머물렀다. 2004 아테네 올림픽과 2008 베이징 올림픽에서는 각각 14위와 28위에 그쳤다. 국민들도 고개를 숙인 채 올림픽 스타디움을 걸어나가는 그의 모습에 함께 아파했다.
이봉주는 2004년 아테네 올림픽 이후 은퇴를 심각하게 고려했으나 2003년과 2004년에 태어난 두 아들에게 자랑스러운 금메달리스트 아버지로 남기 위해 베이징 올림픽에 다시 도전했다고 어느 인터뷰에서 밝힌 적이 있다.
이봉주는 이날 마지막 완주 뒤 “그동안 국민들의 많은 관심이 오늘의 저를 있게 해주셨다. 국민들이 안 계셨다면 여기까지 오기 어려웠을 것”이라고 겸손해했다. 이봉주는 “은튀 이후 계획은 아직 결정된 게 없지만 후배 양성에 도움이 되고 싶다”고 밝혔다. ‘봉달이’ 이봉주가 ‘마라톤 인생’을 뛰어넘어 ‘인생 마라톤’을 살아갈 준비를 하고 있다.
마라톤 인생 20년, 마지막 레이스 마친 '봉달이' 이봉주
스포츠서울
“국민들의 성원이 오늘의 나를 만들었고 여기까지 오게 했다. 아쉬움이 남기도 하지만 홀가분하다.”
최선을 다한 자의 모습은 아름답다고 했던가. 15일 40세에 현역 마지막 레이스를 마친 이봉주(삼성전자)의 얼굴에서 힘든 모습도. 14위(2시간16분46초)라는 저조한 성적에 대한 아쉬움도 찾을 수 없었다. 그동안 두 어깨를 짓눌러왔던 마음의 부담을 털어버리기라도 한듯 차라리 후련하다는 표정이었다. 20년 마라톤 인생에서 항상 그랬 듯 마지막까지 최선을 다한데서 오는 당당함이리라.
비롯 순위는 기대에 못미쳤지만 이날의 주인공은 단연 ‘국민 마라토너’ 이봉주였다. 출발선에서 몸을 푸는 그를 향해 ‘꽃보다 봉주’라는 플래카드를 걸고 응원을 보냈던 시민들은 그가 달려가는 거리마다 뛰어나와 고별 레이스를 축복했다. “훈련때 회복이 더디고 오늘 컨디션이 좋지 않아 완주가 걱정됐지만 경기를 하면서 잘 풀려서 다행이었다”는 말처럼 그런 응원이 그에게 또 힘이 됐다.
이봉주는 국내 뿐 아니라 국외에서도 주목받는 불굴의 마라토너로 유명하다. 세계정상급 선수로 통산 40차례 풀코스 완주(42번 도전)는 찾아보기 어렵다. 이에 대해 대한육상경기연맹은 40세 가까이 현역에서 활동했던 ‘달리는 철학자’ 스티브 모네게티(호주)가 아마추어 대회까지 포함해 40차례 정도 완주했을 것으로 추정될 뿐 풀코스 완주에 대한 공식 집계는 없다고 설명한다.
이봉주는 1990년 제71회 전국체육대회를 통해 마라톤 인생을 시작했고 첫 번째 풀코스 완주에 성공했다. “단출한 반바지 하나면 뛸 수 있었다”는 것이 가난한 시골출신인 그가 마라톤을 택한 이유다. 사실 그는 마라톤을 하기에는 약점이 많았다. 일단 왼발이 253.9㎜. 오른발이 249.5㎜로 차이가 나는 짝발이다. 황영조가 가지고 있던 스피드도 없었다. 하지만 그런 약점을 끝까지 포기하지 않는 근성과 성실함으로 버텨냈다. 혹독한 훈련도 “어렸을 적부터 가난한 시골에서 힘들게 고생하며 자식들 뒷바라지하던 어머니를 생각하면 오히려 호강하는 것이나 다름없다”며 이를 악물었다.
친구인 황영조에 가려 늘 ‘2인자’라는 설움을 받았어도 묵묵히 앞만 보고 달렸던 그는 결국 그 꾸준함과 성실함으로 영광을 안고만다. 1996년 애틀랜타올림픽에서는 은메달을 차지했고. 2000년 도쿄마라톤에서 2시간7분20초로 아직도 깨지지 않는 한국기록을 세웠으며. 2001년 보스턴마라톤에서 우승해 온 국민의 사랑을 독차지했다. 올림픽에만 4회 연속 출전한 것도 기네스북에 남을 일이다.
마지막 레이스를 마친 이봉주는 아직도 ‘포스트 이봉주’가 나타나지 않는 지지부진한 후배들에 대해 “잘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면서도 “더 열심히 하고 노력도 많이 했으면 한다”는 따끔한 충고도 잊지 않았다. 9월 공식적인 은퇴경기를 가질 예정이지만 이번 대회를 끝으로 사실상 은퇴를 한 것과 다름없는 그는 앞으로의 진로에 대해서는 “결정된 것은 아무 것도 없다. 시간을 두고 생각해 봐야 할 것 같다”고 말했다. 다만 “그동안 국민들에게 받은 사랑을 반드시 한국 마라톤 발전에 기여하는 것으로 돌려주고 싶다”고 했다.
40살 이봉주는 이제 20년을 달려왔던 42.195㎞. 그 익숙했던 주로에서 벗어나 새로운 인생의 마라톤을 시작하려 한다. 새 출발선에서 다음 총성을 기다리는 그의 마라톤 인생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여적]고마워요, 봉달씨
<경향신문>
봉달이 이봉주 선수가 오늘 서울국제마라톤 경기를 끝으로 은퇴했다. 우리 나이 마흔에 마흔번째 풀코스를 완주했다. 서울시장이 꽃다발을 건네며 그를 껴안았다. 시장이 아홉살이나 위였지만 그가 더 늙어 보였다. 세월보다 더 빨리 달려서 그랬을까. 그의 얼굴은 그을려 까맣고 텁텁했다. 정말 태양 아래 열심히 달렸다. 돌아보면 길고도 험한 여정이었다. 길고도 오래 달려본 사람은 안다. 달릴 때마다 서너 차례의 고비가 온다는 것을. 늘 한계가 찾아 온다. 심장이 터질 듯하고, 한 발도 내디디기 어렵다. 그는 날마다 달렸다. 날마다 지치고, 날마다 고통스러웠다. 은퇴한 어떤 유명 마라토너가 말했다. “너무나 힘이 들어 달리는 트럭에 뛰어들고 싶었다.” 우리의 봉달이는 그래도 묵묵히 달렸다. 그에게는 특별한 표정이 없다. 아마 숱한 고통을 참아냈기 때문일 것이다. 그래서 속기(俗氣)마저 지워졌을 것이다.
도쿄마라톤에서 세운 2시간7분20초의 기록은 아직도 깨지지 않는 한국기록이다. 하지만 그는 준우승을 차지한 애틀랜타 올림픽과 우승을 거둔 보스턴 마라톤, 그리고 24위를 차지한 시드니 올림픽이 가장 기억에 남는다고 술회한다. 시드니 올림픽에서는 국민의 하늘 같은 성원을 받았지만 레이스 도중 넘어지는 불운에 울어야 했다. 악몽의 대회를 특별히 기억하는 것은 인생 마라톤의 또 다른 깨침일 것이다. 그는 기록보다 달리는 것 자체를 즐겼다. 우리의 봉달이는 넘어져도 일어나 달렸다. 잊을 만하면 나타나 우리를 감동시켰다. 2년 전에는 서울마라톤에서 기적 같은 우승을 일궈냈다. 모두 봉달이를 외쳤다. 그가 있어 한국 마라톤은 변방으로 밀려나지 않았다.
그는 수줍고 겸손하다. 외모에는 술수나 잔꾀가 묻어있지 않다. 정녕 아이스크림 한 개, 소주 한 잔 건네고 싶은 사람이다. 그렇듯 한결같이 곁에 있을 줄 알았는데 그가 떠난다. 이번 은퇴경기는 많이 힘들었단다. 세월이라는 또 다른 지구의 중력이 그의 발목을 당기고 있음이다. 인생 마라톤에서는 이제야 반환점을 돌았다. 어떤 길이 펼쳐지더라도 훌륭하게 완주하길 바란다. 말의 인플레가 심한 요즘이지만 그는 국민 마라토너였다. 그가 달리면 우리도 함께 달렸다. 그가 있어 진정 행복했다. 은퇴했으니, 이제부터 봉달씨로 불러야겠다. 고마워요, 봉달씨.
오바마시대와 한국 11 (0) | 2009.03.16 |
---|---|
'무한도전'의 촌철살인 (0) | 2009.03.16 |
오바마시대와 한국 10 (0) | 2009.02.26 |
오바마시대와 한국 9 (0) | 2009.02.21 |
오바마시대와 한국 8 (0) | 2009.02.1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