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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바마시대와 한국 11

세상보기---------/사람 사는 세상

by 자청비 2009. 3. 16. 1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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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바마시대와 한국 11

3. 미국의 가난뱅이와 가난한 나라들

미국에 처음 가보는 사람들은 그 나라가 너무나 넓고 크다는 사실에 놀라지만 그것이 전부는 아니다. ‘세계 경제의 수도’라고 불리는 뉴욕의 맨해튼에 있는 주요 거리들을 둘러보면 마치 콘크리트의 숲 같지만 그 나름으로 아름다움과 견실함을 아울러 갖춘 고층건물들이 올려다보는 사람을 압도한다.

그러나 ‘미국은 참으로 잘 사는 나라로구나’라고 생각하는 순간, 머리를 혼란스럽게 하는 일이 곧 벌어진다. 뉴욕 한복판 네거리에서 자동차가 교통신호가 바뀌기를 기다리는 짧은 순간에 한 사내가 본네트 위로 훌쩍 뛰어올라 걸레조각으로 유리를 몇 번 문지른다. 그러고는 운전석 창문으로 와서 손을 내민다. 소액 동전이 없으면 1달러를 주어야 물러선다. 그런 사람들 중에는 흑인이 많지만 백인도 적지 않다.

손수레가 ‘집’인 홈리스

더욱 놀라운 것은 대도시 한복판에서 손수레를 끌고 가는 사람들, 그것도 여자들이 아주 많다는 사실이다. 그 ‘이동 가옥’안에는 아이들이 서너 명쯤 쪼그리고 앉아 있는가 하면 ‘살림살이들’이 얹혀 있다. 이른바 ‘홈리스 피플(homeless people, 우리말로는 노숙자)은 문자 그대로 집 없는 사람들이다.(홈리스는 우리나라의 무주택자, 곧 자기 집 없이 셋방살이를 하는 이들과는 개념이 다르다)

나는 1989년 4월 초에 미국 땅을 처음 밟았는데 거기는 북서부의 아름다운 도시 시애틀이었다. 지금부터 20년 전인 그 무렵 시애틀은 인접한 캐나다의 밴쿠버와 더불어 전 세계에서 살고 싶은 도시 1,2위에 들던 곳이었다. 그런데 그 ‘우아한’ 도회지의 한복판을 홈리스의 손수레들이 지나가고 있었다. 그들이 밤에 어디서 자는지 궁금해서 한국 교민에게 물어보았더니 우리나라처럼 지하철역 안에 ‘이부자리’를 깔거나 교회 또는 공회당 같은 데서 밤을 보낸다는 것이었다. 그런 잠자리를 구하지 못한 이들이 겨울철에 얼어 죽는 일도 드물지 않다.

그 무렵은 로널드 레이건이 임기를 마치고 아버지 부시가 취임한 지 석달이 채 안 되는 때였다. ‘세계 최강의 부자나라’라고 늘 자랑하던 레이건에게 홈리스는 해결이 불가능한 골칫거리였다. 그 짐을 부시가 떠안았으나 그에게도 묘책이 있을 리 없었다.

 
인구 3억중 2.2%가 노숙자 신세인 셈

세월이 흘러 2008년에 서브프라임 모기지 파동이 벌어지자 홈리스는 급격히 늘어난다. 비우량 주택을 담보로 잡히고 집을 산 사람들이 원리금을 제때 내지 못한 채 일정 기간을 보내면 집을 포기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런 지경이 아니더라도 실업자나 이혼여성으로서 가계를 꾸릴 수 없는 이들도 자녀들을 이끌고 거리를 방황하는 홈리스가 된다.
 

미국 주택· 도시개발부는 2008년 7월에 의회에 보고서를 제출했는데, 2007년 1월의 단 하루에 한 시점을 조사한 결과 미국 전역에서 보호시설에 들어 있거나 그렇지 않은 홈리스가 67만 1,888명으로 나타났다고 한다. 인구 3억중 2.2%가 노숙자 신세인 셈이다.

최근의 통계를 보면 미국의 국민 1인당 연평균소득은 4만7,025달러로 세계 6위이다. 그러나 상위 계층 1%의 소득이 전체의 21.2%(2005년)를 차지하는 것을 감안하면 빈곤층의 소득은 훨씬 밑으로 떨어질 것이다. 2007년도에 미국의 빈곤층은 12.5%였다. 이들은 오바마 대통령이 최우선적으로 도움의 손길을 뻗어야 할 사람들이다.

게다가 미국의 실업률은 2008년에 7.2%였고, 경제성장률은 2008년 3/4분기에 -0.5%로 내려앉았다. 국가채무는 2008년 11월 현재 10조5,540억 달러나 된다. 오바마는 어디서부터 이 난제들을 풀어야 할지 감감할 것이다.

 성인 100명 가운데 1명은 감옥에

 미국의 양극화가 빚어내는 빈부 격차는 그야말로 살인적인 결과를 낳는다. 부자와 빈자의 차이를 보여주는 지표는 여럿이 있지만, 가장 상징적인 것이 수감률(감옥에 들어가 있는 사람의 수를 전체 인구로 나눈 것)이다. 미국은 기록된 수감률과 재소자 총 수가 세계에서 제일 높다. 2008년 초의 재소자는 230만여 명으로 성인 100명 당 1명을 넘었다. 수감률이 1980년 수치의 7배쯤 되니, 로널드 레이건 대통령 취임 이후 27년 동안 범죄율이 얼마나 높아졌는가를 여실히 알 수 있다. 이런 비율은 경제협력개발기구(0ECD) 가입국 중 ‘1위’로, 2위인 폴란드의 3배가 넘는 것이다. 그런데 놀라운 사실은 아프리카계 아메리카인(흑인을 인종 구분 없이 부르는 말) 남성의 수감률이 백인의 6배 가량이고, 히스패닉계(스페인어를 쓰는 중남미 사람들. 미국에는 멕시코계가 가장 많음)의 3배쯤 된다는 것이다.

범죄의 원인은 다양하지만 그중 으뜸은 가난이라고 볼 수 있다. 흑인이 백인보다 훨씬 많이 법을 어기는 것은 그들의 인종적 특성 때문이 아니라 체제와 환경 탓임을 앞에서 말콤 엑스의 경우를 들어 자세히 살펴본 바 있다. 내가 본 1990년대 중반의 미국에서는 중고등학교를 중퇴한 흑인 청소년들이 ‘쿨한’ 나이키 운동화 한 벌을 사려고 몇 십 달러를 강탈하다 구치소로 가는 경우가 적지 않았다.

오바마는 흑인들의 이런 현실을 누구 못지않게 잘 알고 있을 것이다. 콜럼비아대학을 졸업한 뒤 4년 동안 뉴욕에서 일하다가 24세 때인 1985년부터 만 3년을 시카고 외곽 사우스사이드의 빈민지역에서 일했기 때문이다.

그곳은 경찰의 보호를 비롯한 시민 서비스가 느리거나 불완전하며 공원들이 방치되어 있고 학교는 예산 부족에 시달렸다. 뿐만 아니라 상점들은 문을 닫고 판자로 막아 놓았으며, 때로 떠날 여유가 없는 사람만 남아 있는 듯한 곳이었다. 그런 곳에서 하늘을 찌르는 실업률, 범죄율, 고교 중퇴율, 10대 임신율로 상황이 점점 나빠지고 있는 이웃들에 대한 환경 개선과 상황 대처만이라도 도우려 했던 지역사회 활동가들과 사우스사이드 교회의 자원봉사자들로 이루어진 작은 네트워크와 함께 일하면서 오바마는 향후 출마할 때 하려고 했던 것들을 그대로 했다. 문을 두드리고, 교회 지하실, 학교 카페테리아, 공영주택 단지, 점심 카운터, 이발소, 길거리에서 열리는 주민 모임에 나갔다. (<버락 오바마의 삶>, 139~40쪽)

청소년 시절에 작가가 되고 싶어했고, 인종 차별의 아픔을 뼈저리게 겪은 오바마가 사우스사이드 흑인들의 비참한 삶을 세 해 동안이나 보면서 가슴이 메어지는 듯한 고통을 느끼지 않았을 리 없다.

“할렘에서는 자동차 문을 열지 마세요”

내가 직접 눈으로 본 흑인들의 삶은 절망과 자포자기 그 자체였다. 1989년 4월 중순 언론인으로서 취재를 하러 뉴욕 맨해튼의 할렘에 갔던 때 일이다. 한인 교민이 자동차에 나를 태우고 할렘으로 들어서기 전에 이렇게 당부했다. “절대로 창문을 열지 마세요. 권총이나 칼이 들어올 수도 있으니까요.” 나는 잔뜩 긴장한 채, 할렘 거리를 천천히 달리는 자동차 조수석에 앉아서 밖을 내다보았다. 10대부터 30대까지 흑인 남녀들이 길가에 앉아서 담배나 마약 같은 것을 피우면서 섬뜩한 눈초리로 우리 차를 꼬나보고 있었다. ‘1980년대 말에 이렇다면 말콤 엑스가 여기서 범죄꾼으로 살던 30여 년 전에는 어땠을까?’

내가 더욱 놀란 것은 그 교민을 따라서 한국인이 운영하는 보석상을 보러 간 때였다. 입구에는 아예 감옥처럼 철문이 달려 있었다. 손님이 안으로 들어가서 보석을 보자고 하면 한 손이 겨우 들어가게 파여진 구멍 안쪽에 점원이 물건을 내려놓는다. 흑인들이 칼로 그의 손을 찍고 보석을 강탈할 수도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었다.

오바마는 할렘거리와 인접한 콜럼비아대를 다녔으므로 그런 광경을 보았을 것이다. 요즈음 언론의 보도를 보면 흑인들과 뉴욕시가 그런 할렘을 시민과 관광객이 안심하고 다닐 수 있는 ‘명소’로 개발했다고 한다. 그러나 어쨌든 미국 여러 곳에는 그런 공포의 거리들이 여전히 있을 것이다. 오바마 대통령이 양극화의 맨 아래쪽에 있는 다수 흑인들과 소수민족, 그리고 수는 그보다 적지만 비참하기는 마찬가지인 백인 빈민들의 삶을 어떻게 향상시킬는지 궁금하다.

생존의 한계에서 사는 사람들

버락 오바마가 ‘나는 미국 대통령으로서 세계의 모든 곳에서 일어나는 분쟁에 개입해서 평화적으로 해결하겠다’고 선언한 적도 없고, 실제로 그럴 수도 없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전임 대통령 대다수처럼, 생존의 한계 아래에서 목숨만을 지탱하고 있는 사람들을  외면해서는 안 될 것이다. 그의 대통령 당선을 기뻐한 많은 이들이 적어도 그는 아프리카를 비롯해서 아시아, 중남미, 그리고 다른 여러 지역의 빈민들이 겪고 있는 고통을 머리와 가슴으로 함께 느낄 수 있는 인간이라고 여겼을 것이기 때문이다.

세계은행은 한 사람이 하루 1달러 미만을 버는 것을 ‘극도의 빈곤’, 2달러 아래를 ‘중간층 빈곤’이라고 규정하고 있다. 이 은행의 통계에 따르면 2001년에는 세계 인구 중 11억여 명이 극빈, 27억여 명이 ‘중간 빈곤’으로 드러났다고 한다. 이 비율을 2009년 현재 추산한 지구 인구 67억5,000만 명에 대입하면 3분의 2 가까이가 빈곤층인 셈이다.

2008년 3월, <문화방송>의 현장보도 프로그램인 ‘W’가 충격적인 사실을 보도했다. 카리브해의 아이티(세계 최빈국 중 하나)에서 어린이들과 어른들이 ‘진흙 쿠키’를 먹고 있는 장면이었다. 식량난이 극심해서 밀가루나 쌀로 만든 음식은 도저히 살 수 없는 가난한 사람들이 그런 쿠키로 주린 배를 채운다는 것이었다. 진흙으로 ‘끼니’를 때우는 어린이들 중에는 올챙이처럼 배가 볼록하게 튀어나온 아이들이 많았는데, 팔다리에 살이라고는 거의 없이 뼈만 앙상하게 드러나 있었다. 보도진은 진흙쿠키를 생산하는 공장까지 생생하게 보여주었다.

지구상에는 이런 나라가 한둘이 아니다. 아프리카의 수단, 에티오피아를 비롯해서 아시아의 방글라데시와 미얀마, 그리고 누구보다도 가까운 우리 겨레가 사는 북한의 어린이들이 하루 세 끼를 제대로 먹지 못하고 있다.


국방비는 늘고, 원조는 줄고

조지 부시 2세의 임기만 보더라도 미국은 자국의 빈곤층에 관심을 거의 보이지 않았을 뿐 아니라 다른 나라들에는 냉혹할 정도로 인색했다. 2006년에 미국은 국제 원조를 가장 많이 한 나라(220억7,000만 달러)였으나, 이 액수는 국민총소득(GNI)의 0.2%로서 스웨덴의 1.04%, 영국의 0.52%보다 훨씬 뒤지는 것이었다. 그런데 부시 행정부는 2005 회계연도 총 예산 2조4,000억 달러 중 4,500억 달러를 국방비로 썼다. 국방비를 5%만 줄였더라도 국제 원조액이 배로 늘었을 것이다. 그 돈은 세계 다른 나라들의 국방비 전액과 거의 맞먹고, 미국보다 인구가 4배 이상 많은 중국의 8배가 넘는 것이었다.

오바마가 대통령에 취임하기 전에 의회에서 확정된 2009년도 국방예산은 5,154억4,000만 달러로, 전년도보다 5.7%가 늘었다. 이것은 오바마가 크게도 적게도 줄이기 어려운 예산이다. 그러니 그가 행정부 수장으로서 2010년도 국방비를 어떻게 절감해서 미국과 다른 나라들의 빈민들에게 할애할는지를 지켜볼 일이다.

4. 의료 혜택 밖에서 죽어야 하는 사람들

인간은 먹고 자고 입는 것을 가장 중요하게 여긴다. 그런데 67억이 넘는 세계 인구 중 다수가 의식주를 해결하지 못하고 있다. 특히 선진국이라고 하는 미국, 독일, 프랑스, 영국, 일본에도 그런 사람들이 있다. 이것은 어떻게 보면 완벽한 해결이 불가능한 문제이다.

그러나 생존의 필수조건인 의식주 말고도, 삶과 죽음의 문제가 걸려 있는 의료 혜택에서 멀리 벗어난 사람들이 너무나 많다는 것은 참으로 심각한 일이다. 미국의 경우, 2006년에 전체 인구의 16%인 4,700만여 명이 건강보험 없이 살고 있었다. 그중 37%인 1,740만여 명은 가구의 한 해 소득이 5만 달러가 넘는 이들이었다. 국민 한 사람이 부담해야 하는 연간 의료비가 6,000달러에 가까우니 한 가정이 네 식구라면 2만 달러 이상을 내야 한다. 그러니 연소득 5만 달러인 가구가 건강보험을 포기하고 목숨을 운명에 맡기고 살 수밖에 없는 것이다.

건강보험 포기하고 목숨은 운명에 맡길 수밖에

자연치유나 민간요법에 기대어 병을 고치는 가난한 나라들과 달리, 의료체계가 발달한 나라들에서 건강보험 없이 산다는 것은 ‘저승사자’와 동거하는 일이나 비슷하지 않을까? 나는 미국을 몇 차례 방문하면서 한국 교민들 중 건강보험에 들지 못한 채, 아니 들지 않는 채 생활하는 이들을 많이 보았다. 예를 들면, 새벽부터 밤늦게까지 부부가 세탁소를 하면서 한 달에 5,000달러를 벌기 어려운 형편에 건강보험료를 낸다는 것은 너무나 버거운 일이기 때문이다. 그런 형편이 못 돼서 일용직 노동자로 일하는 사람들은 더 말할 나위도 없다. 그리고 어디 그것뿐인가? 서브프라임 모기지론까지는 아니라 하더라도 다달이 주택대출 원리금과 자동차 할부금을 부어야 하고, 자녀 교육비도 대야 한다면 건강보험은 ‘사치’가 될 수도 있다. 물론 그 나라에서 넉넉하게 삶을 즐기는 교민도 있지만 그 수는 아주 적다. 어렵게 사는 이들은 한 달 수입에서 50달러를 여투어 내서 가족이 외식 한 번 하기도 쉽지 않을 것이다. 미국 경제가 침체의 바닥에 이른 듯한 요즈음은 형편이 더 어려울 것이다.

미국의 공공 의료 프로그램들은 대다수의 노인들, 그리고 일정한 요건을 갖춘 저소득층 어린이들과 가족들에게 의료 혜택을 베푸는 주된 원천이다. 이 부문에서 주요한 공공 프로그램들을 메디케어(Medicare)라고 부르는데, 노인들과 특정의 장애인들을 위한 연방 사회보험이다. 연방 정부와 각 주들이 합자해서 주 차원에서 시행하는 건강보험 제도는 메디케이드(Medicaid)로서, 아주 낮은 소득층의 어린이들과 가족들이 대상이 된다. 그리고 연방과 주가 합동으로, 메디케이드 가입 자격은 없지만 민간 건강보험에 들 수 없는 특정 어린이들과 가족들을 대상으로 하는 것이 쉽(SCHIP)이다. 이런 공적 의료 혜택도 받지 못하고, 민간 의료보험에도 들지 못한 국민이 2006년에 4,700만여 명이나 되었다니 정부가 손을 쓰기에는 너무나 심각한 현실이다.

얼마 전에 미국에 오래 산 교민한테 들은 진반 농반의 이야기가 있다. 그는 “세계에서 스포츠 경기장이 가장 뜨거운 나라가 미국인데, 그 나라에는 왜 영국의 축구장에서 난동을 부리는 훌리건(hooligan) 같은 패거리들이  없는지 이해가 가느냐”는 것이었다. 미국에서 야구나 농구, 미식축구나 아이스하키 경기장에서 자기가 응원하는 팀이 뒤지는 데 ‘열을 받아서’ 상대팀 응원단에 시비를 걸다가 주먹을 휘둘러서 이라도 한두 대 부러뜨리면 적게는 수천 달러부터 많게는 1만 달러도 넘게 들여 치료를 해주어야 하기 때문이라고 그는 설명했다. 상대적으로 건강보험제도가 잘 되어 있는 영국에서는 그런 부담이 적어서 훌리건들이 설친다는 뜻일 것이다.

너무 영리적인 의료제도 때문에

2008년에 우리나라에서 ‘건강보험 민영화’가 뜨거운 쟁점이 되던 때 상영된 마이클 무어의 다큐멘터리 <식코(Sicko)>가 상당한 관객을 동원한 바 있다. 그 영화는 미국의 건강보험 제도와 제약산업에 초점을 맞추면서, 미국의 영리적이고 비보편적인 의료제도와 캐나다, 영국, 프랑스, 쿠바의 비영리적이고 보편적인 제도를 비교했다. 무어는 미국에서 민간건강보험에 든 사람들 중에 보험회사의 사기와 교묘한 절차상의 속임수에 걸려 희생된 이들을 소개했다. 미국과 달리 캐나다는 제도가 합리적이고 보편적이며, 영국은 국민건강보험제도가 공적 자금을 바탕으로 운영되고 있다.

놀라운 사실은 미국에서 120 달러나 받는 약이 쿠바에서는 단돈 5센트(미국의 240분의 1)라는 것이었다. 미국에서 가운데손가락을 다쳐서 민간보험으로 접합하려면 6만 달러가 드는데, 영국과 프랑스에서는 무료이다. 그리고  미국에서는 보험회사의 허락을 받아야 병원에 가서 치료를 받을 수 있다.

미국의 무보험자들이 중병에 걸리거나 큰 사고를 당하면 어떻게 해야 할까? 대답은 ‘아무런 대책도 없다’이다. 저절로 낫지 않으면 누워서 죽을 수밖에 없다. 자유민주주의를 내세우고 ‘세계 평화의 파수꾼’을 자처하는 나라에서 이런 일들이 비일비재하다면 그 나라의 살림을 책임진 대통령은 가능한 범위 안에서 신속히 대책을 세워야 한다. 그러나 레이건과 부시 부자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오바마의 전임자들 중에서는 오직 빌 클린턴만이 ‘병든’ 의료제도를 개혁하려고 노력했을 뿐이다.

빌 클린턴, ‘병든’ 의료제도를 개혁하려 나섰지만

클린턴 행정부는 대통령 부인 힐러리를 비공식 위원장으로 ‘국가 의료제도 개혁을 위한 태스크포스’를 꾸렸다. 선진국이라고 불리는 나라 중 전 국민 의료보장 제도를 갖추지 못한 유일한 국가라는 오명을 떨쳐 버리려는 노력인 동시에 병들어도 속수무책으로 죽어야 하는 국민들을 더 이상 방치할 수 없다는 판단 때문이었을 것이다. 부자 위주의 의료제도를 개혁하려고 뜻있는 사람들이 한 세기 넘게 애를 썼는데도 돈벌이만을 목적으로 하는 민간자본은 요지부동이었다. 1992년 민주당 예비선거에서 대통령후보로 뽑힌 때부터 민간 건강보험제도의 폐해를 날카롭게 비판한 클린턴이 그런 개혁을 추진하려고 나선 것은 당연한 일로 보였다. 

하지만 섯부르게 나선 ‘개혁’은 공화당 보수파의 조직적인 반발을 불러 왔다. 정부 각 부처의 역할이 얽히고 설켜 법 조문만 1,000여 쪽에 이를 정도로 복잡한 문제를 충분한 조율작업 없이 밀어붙인 것이 화근이었다. 클린턴 행정부의 의료개혁법안이 통과되면, 기업이 떠맡아야 할 노동자들의 의료보험료 부담이 지나치게 커지면서 경제에 악영향을 끼칠 것이라는 논리가 횡행했다. (···) 여기에 ‘선출되지 않은 권력’인 대통령 부인이   국가 중요 정책에 개입하고 있다는 비판이 법정다툼으로 이어지면서, 소모적인 논쟁이 들끓었다. (<한겨레 21> 2008년 11월 21일자, 정인환 기자의 ‘오바마 2제, 의료와 아프간’에서)

결국 그 법안은 ‘비빔밥’처럼 변질되어 의회에 상정되었지만 1994년 여름 부결되었다. 그 여파로 1994년 11월 총선에서 민주당은 참패하고 공화당이 상하원을 석권하면서 집권의 발판을 마련했다.

만약 그때 클린턴의 원안대로 건강보험법이 확정되었다면 미국 국민들의 삶의 질은 놀랍게 향상되었을 것이다. 클린턴이 두 번째 임기 중에 ‘모니카 르윈스키 스캔들’로 탄핵소추를 당하고 부동산 투기 추문으로 거센 비난을 받았는데도 흑인들을 비롯한 빈민들 사이에서 인기가 높았던 데는 국민의 건강을 국가가 책임지려고 한 노력이 크게 작용했을 것이다.

오바마, “전 국민을 위한 의료보장제도 갖춰야”

이런 역사를 잘 알고 있을 버락 오바마는 전 국민을 위한 건강보험제도를 만들려고 노력할 때 클린턴의 성급함과 ‘작전의 무모함’을 되풀이 하지 말아야 할 것이다. 2007년 1월 24일 오바마는 의료보장 자문모임인 ‘미국의 가족들’(Families USA)에서 이 문제에 관해 아래와 같이 견해를 밝혔다.

미국에서 전 국민을 위한 의료보장을 시행할 때가 왔습니다.(···) 다음 대통령의 첫 임기 말까지는 우리가 이 나라에서 전 국민 의료보장 제도를 세워야 한다고 나는 확고히 결심했습니다.

오바마는 이어서 납세자들이 무보험자들을 위해 해마다 150억 달러를 이미 내고 있는데, 4,700만이 넘는 미국인이 보험 없이 살고 있는 것은 잘못이라고 지적했다. 그는 또 다른 장소에서 대책 없이 방치된 의료보장에 대한 견해를 밝혔다. 

많은 미국인들이 의료보장 체계의 사각지대에 놓여 있는데 오바마는 이것을 국가 전체를 위태롭게 하는 문제로 보았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오늘날 건강한 미국을 가장 심각하게 위협하는 것은 천재가 충분치 않다든가 새로운 발견을 못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수년 동안 실천 없이 토론만 함으로써 감당키 어려운 의료보장 비용에 대해 현실적인 대책을 내놓지 못하고 있는 우리의 무능력이 문제다.” 흑인으로서 오바마는 인종에 따른 건강 불평등 문제에 특별한 관심을 두었다. 오바마는 사람들이 ‘현실적으로 존재하는 건강 불평등의 간극을 어떻게 좁힐 것이며 어떻게 흑인들이 기대수명을 다른 사람들과 비슷하게 연장시킬 것인지에 대해’ 논의해야 한다고 주장했다.(<오바마론>, 마틴 더퓌· 케이스 보클먼 지음, 최지영 옮김. 늘봄, 2008년 3월, 185~6쪽)

오바마는 ‘환자가 어느 곳에서 치료를 받든 현재의 의료진이 쉽게 환자의 기록에 접근할 수’ 있도록 의료보장 기록을 데이터베이스화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의료사고로 미국에서 한 해 9만8,000여 명이 목숨을 잃고 있으므로 그렇게 하면 수많은 생명을 살리면서 연간 1,400억 달러를 절감해서 의료보장 비용을 낮출 수 있다는 것이다. 오바마의 구상은 클린턴의 최초 법안에는 못 미치지만, 그의 임기 말까지 단계적인 개혁을 꾸준히 해야 보험 없이 살아가는 사람들이 혜택을 받을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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