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총기와 마약의 ‘왕국’
이민으로 미국에 첫 발을 디딘 사람들이 미리 거기 자리잡고 사는 친척이나 지인들에게서 많이 듣는 말이 있다. “이 나라에서 열심히 일해서 돈을 벌어 빨리 안정을 찾는 일도 중요하지만 제일 신경을 써야 할 것은 안전이다. 특히 교통법규를 어겼거나 어떤 단속에 걸렸을 때 먼저 안주머니나 호주머니에 손을 넣지 마라. 머리에 두 손을 얹고 기다려라. 괜히 수상한 동작을 하다가는 경찰관이 총을 쏘아 목숨을 잃어도 법에 호소할 수가 없다.”
“경찰관에 걸렸을 때, 주머니에 손을 넣지 마라!”
모든 경우에 그렇지는 않겠지만, 이 말을 귀담아 듣지 않았거나, 설령 그대로 하려고 했어도 영어를 잘 알아듣지 못해서 무심결에 주머니에 손을 넣었다가 변을 당한 사람도 있다고 한다. 우리나라 사람들이 들으면 ‘뭐 그런 일이 다 있을까’하고 생각하겠지만 총기 소유가 보편화한 미국에서는 얼마든지 일어날 수 있는 일이다.
세계 대다수 나라들에서는 남자들이 군대에 들어가야 총기를 만질 수 있다. 한국의 경우 군에서 총기류를 다룰 때 기율은 아주 엄격하다. 신병교육대에 들어가면 처음부터 총 쏘는 훈련을 하지 않는다. 아주 까다롭게 장시간 ‘사격술 예비훈련’을 받고 나서야 비로소 실탄 사격을 할 수 있다. 그리고 군생활을 마치고 나면 가끔 가는 예비군 교육장에서나 빈 총을 들어 볼 수 있을 뿐이다. 일반 국민들은 사냥총 사용 허가를 받은 뒤에야 까다로운 법을 지키면서 사격을 할 수 있는데, 그것도 소수인들만이 하고 있다. 그런데 미국에서는 청소년들이 어떻게 구했는지 총기를 들고 불특정 다수를 무참하게 사살하거나 교실에 대고 총알을 난사하는 일이 잊어버릴 만하면 벌어지곤 한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차마 다시 생각하고 싶지 않은 일이겠지만, 그런 총기사건 중 최악의 불상사가 2007년 4월 16일 버지니아공대에서 일어났다. 그 대학 영문학과에 다니던 조승희라는 학생이 두 차례에 걸쳐 강의실에 대고 권총으로 무차별 사격을 가해서 32명이 숨지고 다수가 다친 악몽 같은 일이 바로 그것이다. 그 자신은 바로 자살했으나, 이 사건은 ‘미국 역사상 단 한 명의 총잡이가 학교 캠퍼스 안이나 밖에서 저지른 것으로는 가장 치명적’이라는 불명예스런 기록을 남겼다.
잊을 만하면 벌어지는 총기난사사건
당연히, 미국에 사는 교민들과 한국 정부는 그 학생이 한국인이라는 사실 때문에 전전긍긍하지 않을 수 없었다. 교포 학생들에게 미국인들이 보복을 하지나 않을지, 미국에서 한국 상품 불매운동이 벌어지지나 않을지 걱정한 사람들이 주한 미국대사관 앞에서 촛불기도회를 열어 희생자들의 명복을 빌고, 주미 한국대사와 한인 기독교 지도자 몇 사람은 32일 간의 ‘참회 단식’에 참여하라고 교민들에게 호소했다. 다행히도 사건을 일으킨 학생이 ‘정신적으로 문제 있는 상태’였음이 드러나고 미국인들과 희생자들의 유족이 범인의 국적을 문제 삼지 않음으로써 한국쪽 관계자들과 국민들은 가슴을 쓸어내릴 수 있었다.
이 사건은 미국사회에서 충격이 컸던 만큼이나 뜨거운 논란을 일으켰다. 정신상태가 온전치 않은 학생이 어떻게 반자동권총 두 정을 살 수 있었는지, 첫 번째 권총을 산 지 한 달만에 어떻게 두 번째 것을 또 살 수 있었는지를 두고 언론이 떠들썩했다.
법과 규정이 어떠하든 간에 미국에서 총기를 구하는 일이 그렇게 어렵지 않다는 것은 여러 통계가 보여준다. 2008년 후반기에 나온 자료들을 보면, 수치에는 차이가 있지만 미국의 개인들이 지니고 있는 총기를 2억에서 2억5,000만 정으로 잡고 있다. 평균치를 내면, 3억을 조금 넘는 인구 중 70~80%가 권총이나 장총 또는 사냥총을 갖고 있는 셈이다. 그 통계들을 내리잡아 1억5,000만 정이라고 해도 어린이와 노인을 포함한 전체 인구의 절반이 총을 한 자루씩 지니고 있다는 계산이 나온다.
‘미국은 총으로 세워진 나라’라고 하면 그 나라 사람들은 언짢게 여기겠지만, 이 글의 앞머리에서 자세히 보았듯이 그것은 엄연한 사실이다. 초기에 아메리카합중국의 터를 닦은 기독교도들은 총으로 원주민들의 땅을 빼앗으려고 하지는 않은 듯하다. 그러나 그 뒤 영국을 비롯한 유럽 여러 나라들에서 이주해온 거칠고 탐욕스런 자들은 원주민의 무기보다 압도적으로 우세한 총기로 그 땅을 야금야금 차지해 들어갔다. 그러나 총잡이들이 앞장서서 이룬 이른바 ‘개척’이 마무리되면서 백인들 사이에서 치안이 심각한 문제가 되었다. 언제 누가 총을 들고 집이나 가게에 들어와서 인명을 해치거나 물건을 강탈해 갈는지 모른다는 불안이 넓게 퍼져갔을 것이다. 그러니 너도 나도 총 한 자루씩은 지니고 있어야 안심이 되지 않았을까?
미국의 헌법은 특이하게도 ‘총기 보유’에 관한 조항을 두고 있다. ‘수정헌법 제2조’가 바로 그것이다.
규율이 잘 잡힌 민병대는 자유로운 주(state)의 안전에 필요하므로 무기를 보유할 국민의 권리는 침해받지 아니한다.
이 조항은 미국에서 ‘총기 보유의 자유’에 관한 논쟁이 벌어질 때마다 거론되는 ‘동네북’이다. 이 조항이 채택되던 시기의 주요한 논거는 이러했다는 학설이 있다. “어떤 사람들에게 무기 보유를 거부하면서 다른 사람들에게 허용하는 것은 용납할 수 없는 자유의 부정이다.” 요컨대 ‘무기 보유는 만인의 자유권’이 되어야 한다는 뜻이다.
미국총기협회(NRA), 미국 굴지의 로비스트 집단
미국의 정치인들, 그중에서도 대통령이 되려는 사람들이 가장 조심스러워하는 것은 총기 보유의 자유와 제한에 관한 발언이다. ‘자유파’나 ‘제한파’ 중 한쪽을 공격하는 발언을 했다가는 극렬한 공격을 받아 표가 우수수 떨어져 나갈 수 있기 때문이다.
자유파의 맨 앞장에 서 있는 단체는 미국총기협회(National Rifle Association, 약칭 NRA)이다. 1871년 뉴욕에서 창설된 이 조직은 ‘미합중국 권리장전’의 수정 제2조항을 지키고, 총기소유권, 사격술, 총기 안전을 촉진하며, 사냥과 자위권을 보호함을 목적으로 하고 있다. 그런데 이런 ‘이념’을 내세운 단체가 실제로는 미국에서 첫째 아니면 둘째 가는 로비스트 집단이라는 점이 문제이다. 이 협회의 웹사이트에 따르면, 회원은 400만 명이 넘는다고 한다. 최근 여러 해 동안 미국 의회 의원들은 NRA를 가장 강력한 로비단체로 꼽았다. 2008년 대통령선거 운동 기간에 이 단체가 정치자금으로 1,000만 달러를 쓴 것을 보면 그 위력을 여실히 알 수 있다.
제40대 대통령 선거일인 1980년 11월 4일을 사흘 앞두고 NRA는 단체 역사상 처음으로 대통령선거에서 로널드 레이건이 지미 카터를 눌러야 한다고 선언했다. 그 이래 이 협회가 공화당 후보들을 계속 지지했음은 물론이다. 1992년 대통령 선거에서 공화당의 조지 부시 1세가 빌 클린턴에게 패배하자 위기를 느꼈던지, NRA는 그 뒤 총선에서 하원의원 435명 중 공화당과 민주당을 가리지 않고 ‘총기 자유 소지’를 지지하는 후보들을 지원했다. 전적으로 그 단체의 영향 때문은 아니었겠지만 그 협회가 지원한 후보 276명 중 211명이 당선되었다.
미국에서 대형 총기사건이 터질 때마다 NRA는 초긴장 상태로 들어간다. 총기 보유를 규제하는 법을 만들라는 여론이 들끓기 때문이다. 바로 그런 사건을 소재로 영화감독 마이클 무어가 <보울링 포 콜럼바인>을 2002년에 제작했다. 이 영화는 1999년 4월 2일 콜로라도주의 콜럼바인고등학교에서 두 고교생이 교실에 산탄총을 난사해서 13명의 사망자와 24명의 부상자를 낸 뒤 자살한 사건을 소재로 미국의 ‘총기 현황’과 총기를 팔아 부와 권력을 누리는 세력의 실체를 적나라하게 보여주었다.
마이클 무어 마이크 들이대자, 찰턴 헤스턴 당황
그 영화의 마지막 부분이 인상적이었다. 다큐멘터리의 감독과 주연을 겸한 마이클 무어가 미국총기협회 회장인 유명한 영화배우 찰턴 헤스턴의 집 앞에서 ‘깜짝 인터뷰’를 한 것이다. ‘콜럼바인’처럼 미국민의 안전을 위협하는 사건이 터졌는데도 협회가 총기 보유 자유권만을 계속 주장하고 제한에는 반대할 것이냐고 무어가 끈질기게 추궁하자 헤스턴은 당황하다가 끝내 집으로 들어가 버렸다. 나중에 이 영화의 비판자들은 “치매에 걸린 데다 전립선암 증세를 보이던 그를 그렇게까지 괴롭혀야 했느냐”고 비난했지만, 어쨌든 NRA의 현직 회장이던 헤스턴의 대답은 설득력이 거의 없었다. 우리나라 사람들이 <벤허>와 <십계> 같은 영화를 보고 그렇게 좋아하던 찰턴 헤스턴이 왜 총기협회 회장으로 ‘미국에서 손꼽는 로비스트 집단’의 대표 노릇을 했는지, 궁금하게 여기는 이들이 적지 않을 것이다.
1923년생인 그는 1950년에 <암흑의 도시>라는 영화에서 주연을 맡아 명성을 얻기 시작한 뒤 9년 뒤에 <벤허>의 주다 벤허 역으로 아카데미 남우 주연상을 받는다. 그는 1965년부터 1971년까지 영화배우조합 회장을 맡는데, 그 직책은 로널드 레이건이 오래 전에 거쳐 간 자리였다.
헤스턴은 정치적으로는 애초에 민주당 지지자였다. 그는 1956년 대통령선거에서는 애들라이 스티븐슨을, 1960년에는 존 F. 케네디를 위해 운동을 한다. 그는 1960년대와 70년대에 베트남전쟁에 반대하지만, 1980년대에 들어서면서 ‘소수민족 우대정책’을 거부하고 총기 보유권을 지지하면서 민주당에서 공화당으로 당적을 옮긴다. 그러고는 로널드 레이건, 조지 부시 1세, 2세를 위해 선거 유세를 한다. 그는 1998년부터 2003년까지 NRA 회장 겸 대변인으로 일하면서, 조지 부시 2세와 앨 고어가 치열한 접전을 벌이던 2000년 대통령 선거 기간에 열린 총기협회 총회에서 너무나 섬뜩한 장면을 연출한다.
찰턴 헤스턴은 연설 도중 오른손으로 잡은 소총을 머리 위로 치켜 올리더니 이렇게 외친다. “앨 고어 행정부가 들어선다면 ‘싸늘하게 죽은 나의 두 손’에서 수정헌법 제2조를 빼앗아 갈 것이다.” 이 장면은 지금도 유명한 기록사진으로 인터넷에 올라 있다. 그런 역사를 가진 단체가 2008년 대선에서 버락 오바마의 당선을 원했을 리가 없다.
미국 총기 시장, 거래 액수가 천문학적
미국의 총기 시장은 거래 액수가 천문학적이다. 한국에서 수입한 K-I 소총이 1,500 달러가 넘는다고 하는데, 암시장에 가면 값이 훌쩍 뛰어 오를 것이다. ‘총기 경제’에는 제조업자, 도매상, 중개인, 소매상, 암시장의 거간꾼과 상인 등 다양한 이해당사자들이 관련되어 있다. 이 거대한 시장에 섣불리 손을 댔다가는 총기협회와 ‘악어새들’의 노골적인 반대와 은밀한 공격을 받게 될 것이다.
오바마는 총기 정책에 관해 일리노이주 상원의원 시절부터 여러 번 견해를 밝혔다. 그의 대표적인 발언은 대통령 선거 기간인 2008년 2월 15일 기자회견에서 있었다. “나는 개인은 총기를 가지고 다닐 권리가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상식적인 규제를 받아야 한다.” 오바마는 대통령에 당선된 뒤 “수정헌법 제2조의 총기보유권을 존중하는 조치들에 찬성한다”고 말했다. 매우 신중하면서도, 어떻게 보면 소극적인 자세 같기도 하다.
총기는 미국의 살인사건과 자살에서 압도적인 비율을 차지하는 수단이다. 그 나라는 네 명의 대통령, 곧 링컨, 가필드, 매킨리, 케네디가 총기로 암살당한 비극적 역사를 갖고 있다. 해마다 1만여 명이 총탄에 맞아 사망한다는 통계도 있다. 실제로 2004년에는 총기 살인이 1만654 건이었다. 게다가 질병통제예방센터(CDC)의 통계를 보면 2000년에 5만2,000여 명이 고의적인 총기사건으로, 2만3,000여 명이 우발적인 사고로 다쳤으니, 어른들은 물론이고 자녀를 키우는 부모들의 불안이 얼마나 심하겠는가. ‘국민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해야 하는 최고책임자’인 오바마 대통령이 풀어나가야 할 과제 중 아주 머리 아픈 것이 총기이다.
‘소리 없는 총기’, 마약
마약은 총탄이나 폭약처럼 사람의 목숨을 단숨에 빼앗지는 않지만, 일단 중독되어 벗어나지 못하면 끝내 죽음의 길로 가거나 폐인이 된다는 점에서 ‘소리 없는 총기’라고 할 수 있다. 마약에 중독되면, 초기에는 졸림, 가려움, 불면증 같은 증세가 나타나는데, 그것을 그만두면 금단증세가 일어나서 정상적인 생활을 하기 어려워진다. 다시 마약에 손을 대면 중독이 더욱 심해져서 환각상태에 빠지려고 복용을 더 자주 하게 되어 끝내는 말기에 이르고 만다. 대부분의 중독자들은 마약이 끊어지면 무슨 수를 써서라도 구하려고 도둑질은 물론이고 살인까지 저지르기도 한다. 더 심각한 것은 후천성면역결핍증(AIDS) 환자들이 마약을 복용하고 성관계를 가짐으로써 그 병을 전파시키는 일이다.
마약이 선사시대에도 있었는지는 모르지만 영어로 ‘나코틱’(narcotic)이라고 하는 말이 그리스어의 ‘나르코시스’에서 유래되었다는 학설을 보면 적어도 3,000년 이상의 역사를 가진 것으로 보인다. 미국에서 법률적인 의미의 마약은 아편, 코카인, 코카 잎과 그 부산물들을 가리킨다. 흔히 생각하듯이 마리화나는 나코틱이 아니고, LSD와 다른 향정신성약품들도 마찬가지이다. 그리고 스테로이드도 나코틱이 아니다.
미국인들은 법적인 의미의 나코틱이라는 말보다는 드러그(drug)라는 어휘로 마약을 표현한다. 우리나라에서 필로폰(속칭 히로뽕)이라고 부르는 것도 미국에서는 드러그에 속한다.
재미있는 것은 미국에 처음 간 외국인들이 ‘드러그 스토어’라는 간판을 보고 약을 사러 들어가 보니 우리나라의 편의점 같은 곳이어서 고개를 흔들면서 나온다는 이야기이다. 어쨌든 미국에서는 정부부터가 마약 일반을 드러그라고 부르고 있으니 여기서는 그 말을 마약의 뜻으로 사용하기로 한다.
‘마약과의 전쟁’과 아편전쟁
미국에서는 일찍이 마약이 정치, 경제, 사회, 외교적 문제들을 일으켰다. 상황이 얼마나 심각했는지는 1971년에 리처드 닉슨 대통령이 ‘마약과의 전쟁’(War on Drugs)을 선포한 것을 보면 여실히 알 수 있다. 전임자인 린든 존슨이 공표한 ‘빈곤과의 전쟁’(War on Poverty)에서 따온 듯한 그 이름은 그 이후 역대 행정부로 이어졌고, 마침내는 ‘마약테러리즘과의 전쟁’으로 발전했다. 마약과의 전쟁 결과로 해마다 100만여 명이 투옥되었다는 보도가 1994년에 나왔고, 2005년에는 수감자 수가 200만으로 늘었으니 미국 인구의 7% 가까이가 마약과 관련된 범죄로 옥살이를 했다는 뜻이 된다.
우리는 어릴 적부터 역사책에서 마약 때문에 벌어진 국가 간의 싸움에 관한 글을 읽어 왔다. 중국의 ‘아편전쟁’이 바로 그것이다. 1757년 중국에서 아편 전매권을 받은 영국의 동인도회사가 야금야금 중국에 아편을 팔기 시작해서 마침내는 수많은 가난한 백성들이 중독자가 되어 나라가 망할 지경에 이르자 청국 정부는 강력한 단속을 펼쳤다. 이에 반발한 영국 정부가 1840년에 중국을 상대로 전쟁을 일으켜서 1842년에 ‘승리’했다. 그 이후 청나라가 문호를 열기를 머뭇거리자 1856년에 영국이 프랑스, 아일랜드와 함께 중국을 공격해서 무력으로 개방시킨 것이 제2차 아편전쟁이었다. 남의 나라 백성들이야 죽건 말건 자국의 이익을 위해 무자비한 폭력을 서슴지 않았던 것이다.
현대에 들어서도 마약은 아주 ‘매력적인’ 돈벌이라서 국제적으로 분쟁을 일으키는 촉매가 되는가 하면, 한 나라 안에서도 여러 범죄조직 사이에 사생결단의 암투를 빚어낸다. 유엔은 21세기 초에 국제 마약 밀매에서 나오는 수익을 4,000억 달러로 추산했다.
미국은 세계 최대의 마약 소비국
현재 미국은 명실 공히 세계 최대의 마약 소비국이다. 다음은 국제문제조사연구소 조성권 연구원의 논문 <미국 마약정책의 변화와 실제: 거버넌스의 이중성>(2002년 5월, 서울대학교 미국학연구소 발행) 중 ‘문제 제기’의 앞 부분을 요약한 것이다.
미국의 마약지수(인구 10만 명 당 마약 사용자 수)는 세계에서 가장 높은 256을 기록하고 있다. 마약 판매는 미국의 각종 불법 수익 중 가장 많은 부분을 차지한다. 1998년 미국에서 마약으로 인한 경제비용은 1,434억 달러로 추산되었고, 2000년에는 더욱 증가하여 1,600억 달러가 되었다. 이것은 상원을 통과한 2003회계연도 국방예산 3,551억 달러의 50%에 가까운 액수이다. 유엔 국제마약통제위원회의 보고에 따르면 인터넷 주문을 이용한 마약 밀매가 차츰 늘고 있는 추세를 감안하면 인터넷 사용이 가장 발달한 미국에서 마약으로 인한 경제비용은 갈수록 증가할 전망이다.
한 통계를 보면, 2000년에 중학생 40.3%와 초등학생 20.3%가 마리화나를, 16.5%와 8.5%가 환각제를, 10.6%와 7.6%가 코카인을 사용했다고 한다. ‘소리 없는 총기’인 마약이 어린이들에게까지 널리 퍼져 있으니 미국 정부가 적극적인 대책을 마련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정부는 국내에서 마약 매매와 사용을 단속하는 일보다는 마약의 공급원을 차단하는 쪽으로 정책을 세웠다. 대표적인 것이 2000년에 빌 클린턴 행정부가 만든 ‘플랜 콜롬비아’(Plan Colombia)였다. 미국에 마약을 가장 많이 공급하는 나라인 남미의 콜롬비아에 경제적 원조를 하고, 게릴라들의 근거지에 군사고문단을 파견해서 정부군을 교육한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공급영역에서 마약 생산량을 줄여 국내 마약 소비를 줄이겠다는 미국의 정책은 오랜 역사에도 불구하고 아직까지 뚜렷한 가시적인 성과를 낳지 못했다. 이 대대적인 마약전쟁이 콜롬비아 국내는 물론, 주변국에 미치는 영향도 심각하다. 이미 콜롬비아의 정치질서는 마약전쟁의 장기화로 인해 심각한 정당성의 위기를 겪고 있고 통치조차 힘든 실정이다.(···)
‘플랜 콜롬비아’를 통한 마약전쟁은 이웃나라들에게 영향을 미쳐 지역 전체의 안보를 위협하고 있다. 인접국인 페루, 볼리비아, 에콰도르, 베네수엘라, 브라질 등이 접경 지역에서 이미 마약전쟁으로 인한 후유증을 경험하고 있다. 유민의 유입, 코카인 밭의 확산, 게릴라와 우익 민병대의 잦은 출현으로 이웃 정부들도 이 마약전쟁을 반갑지 않은 손님으로 생각한다. 더구나 9·11 테러 사태 이후 부시 행정부가 그 방향을 ‘마약 테러리즘’(narcoterrorism)의 박멸로 수정한 결과 ‘마약 전쟁’은 대테러 전쟁의 차원을 띠게 되었다. (이성형[이화여대 정치학과], 논문 <미국의 대콜롬비아 마약전쟁: 현실주의 외교 논리의 문제점> ‘서론’에서)
조폭들에게 매력적인 돈벌이
마약시장은 조직폭력배(조폭)들의 ‘무대’이다. 다른 나라들에서도 그렇듯이, 미국에서도 마약은 이문이 막대한 ‘상품’이다. 카지노를 제대로 차려 놓고 도박판 경영자로 돈을 벌려면 거액의 자본을 들여야 하지만, 마약 밀매는 ‘숙련된’ 조직과 거래망, 소액의 종자돈만 있어도 할 수 있는 일이라서 조폭들에게는 매력적일 것이다. 미국 정부가 1971년부터 ‘마약과의 전쟁’을 벌였는데도 상황이 더 나빠진 원인 중 가장 큰 것은 조직폭력의 확산일 것이다.
2009년 들어 미국 안의 조직폭력배는 100만 명을 넘었다고 한다. 그들은 각종 범죄의 80% 가량에 개입하고 있다. 미국 법무부 산하 ‘국립 갱 정보센터’에 따르면 미국 전역에서 조폭 90만여 명이 움직이고 있고, 14만7,000여 명은 교도소에 갇혀 있다. 조폭들은 대다수가 도시에서 마약 소매 공급망을 장악하고 있다. 그들은 미국 안의 멕시코계 밀매조직과 경쟁을 한다. 그리고 캐나다 접경지역에서 캐나다 조직과 제휴해서 마약을 밀매하거나 불법 입국자들을 태워 나른다고 한다.(<쿠키뉴스>, 2009년 1월31일자)
오바마 대통령 당선자 정권인수위원회의 공식 웹사이트(Change gov: The Obama-Biden Team)를 보면 ‘정책과제’가 민권, 국방, 경제, 교육, 외교 등 23개 항목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마약(narcotic 또는 drugs)은 보이지 않는다. 마지막에 있는 ‘추가 항목’에도 들어 있지 않다. 오바마 행정부가 마약을 중시하지 않아서 그렇게 한 것은 아니겠지만, 아무튼 잘 납득이 가지 않는 일이다.
오바마는 경찰과 검찰, 여러 정보기관들을 통해 전국의 중요한 정보들을 보고받는 미국의 대통령이라서 누구보다도 현실을 정확하게 파악할 수 있을 것이다. 앞으로 그가 테러에 대처하는 방식으로 ‘재래식’ 마약과의 전쟁을 이어받을는지, 아니면 국내에서 마약 사용과 밀매를 획기적으로 줄이는 특단의 대책을 세울는지 미국 안팎의 관심이 크게 쏠릴 문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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