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레인맨' 실제 모델 킴 픽 사망
'서번트증후군'개념 세상에 알려
영화 '레인맨'의 실제 모델인 킴 픽(58)이 심장마비로 사망했다. AP통신 등 외신에 따르면 킴 픽은 19일(현지시간) 오전 심장 발작을 일으켜 인근의 솔트레이크시티 머리카운티 한 병원으로 옮겨졌으나 이내 숨졌다고 그의 부친 프랜 픽이 전했다.
더스틴 호프만과 톰 크루즈가 주연한 영화 '레인맨'은 일상생활이나 상식적인 태도를 유지하는 데에는 어려움을 겪지만 숫자나 언어 등의 암기에서는 천부적 재능을 가진 자폐증 환자를 주인공으로 서번트증후군을 일반인들에게 알린 영화다.
'서번트 증후군(savant syndrome)'이란 발달장애, 정신지체, 자폐증 등 정신 장애를 가진 사람이 특정 분야에 경이적인 능력을 발휘하는 것을 의미한다. '레인맨' 속 자폐증 환자는 숫자와 언어에서 일반인보다 훨씬 뛰어난 재능을 보이는 서번트 증후군이라는 개념을 보통 사람들의 뇌리에 깊이 심어놓았다.
실제 주인공 킴 픽은 운전이나 식사 등 일상생활을 하는 것 조차 어려움을 겪었으나 역사, 문학 등 15개 부문에서 '메가 서번트'라는 찬사를 들을 정도로 천재성을 보인 서번트증후군 환자였다.
서번트 증후군은 정식 진단명으로 기록하는 의학 용어는 아니다. 의학계에서는 서번트 증후군 환자를 의미하는 영어 명칭인 이디오트 서번트(idiot savant: 천재 백치)로 흔히 쓰인다. 자폐증 환자 중 극히 일부에게만 나타나고 자폐증이 아닌 다른 정신 장애 환자에게서도 찾아볼 수 있으므로 자폐증의 고유 증상으로 보지는 않는다.
두개골에 물주머니가 차서 태어난 킴 픽은 언어를 담당하는 뇌의 좌반구가 손상됐지만 16개월 만에 글을 읽었고 미국의 지역 및 우편번호, 전화번호를 거의 다 외우고 역사적 사건은 발생 일시와 위치까지 정확하게 기억했다. 여기다 서기 1세기 이후의 모든 날짜와 요일을 즉석에서 말할 수 있다. 그러나 더욱 놀라운 것은 킴 픽의 아이큐는 불과 70에 그친다는 사실이다. 또한 언어와 수리, 사회화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도 기억력에 있어서는 인간의 한계를 초월하고 있다.
자폐증의 주요 증상은 언어능력 장애와 사회성 발달 장애로 나눌 수 있다. 장애인 복지법에 따른 장애 분류에 의하면 1급 및 2급 환자는 지능지수가 70 이하이며 타인의 도움 없이 일상생활이 힘들다. 3급 환자는 지능지수가 71 이상이며 타인의 도움이 간헐적으로 필요하다.
자폐증 환자의 70% 이상은 언어 발달에 문제를 드러내며 사회성 문제는 대부분이 겪고 있다. 자폐아 10명 중 1명 꼴로 서번트증후군이 나타난다는 보고도 있지만 이는 전철 노선도를 한 번 보고 역 이름을 기억하는 등 지엽적인 재주를 포함했을 때이며 진짜 천재적인 경우는 전 세계에 100명 정도라는 보고가 있을 정도로 매우 드물다.
영화 '레인맨'의 한 장면.
일반적인 자폐증 환자는 지능 지수가 낮다. 반면 정상적인 지능을 갖고 있지만 사회적 상호작용에 결함이 있으며 특정 분야에 뛰어난 재주를 가진 사람은 '아스퍼거 증후군(Asperger Syndrome)' 환자로 보기도 한다. 아인슈타인, 뉴턴, 베토벤 등이 이에 속한다.
정신과 전문의들에 의하면 자폐증 자체가 10만명 중 한 두명 꼴로 나타나는 데다 이 중 서번트 증후군이 있는 환자를 찾기 힘들기 때문에 샘플 자체가 적고 이들의 증상을 일반화하기 어렵다고 말한다.
그렇다면 서번트증후군 환자들의 천재적인 능력은 어떻게 발현되는 것일까. 우선 신체 기능 중 한 부분이 제 역할을 못하면 다른 부분에서 보완하는 인체의 보상능력에 의해 이러한 현상이 가능하다는 추측이 있다.
아인슈타인 등 유명인사도 사회성을 담당하는 뇌 부위 기능이 떨어지는 반면 천재적인 수학능력이 이를 보완한다는 설명이다. 즉 소아마비 환자가 목발을 많이 짚다보니 팔 힘이 강화되는 등 한 기능이 부족하면 다른 기능이 발달되는 인체의 신비한 사례들에 의해 자폐증으로 뇌기능 일부에 장애가 나타나면 예능이나 기억력 등 다른 측면에서 뛰어난 능력이 나타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디오트서번트를 연구하는 호주의 엔젤 스나이더 박사는 "그들은 세계를 지각하고 해석 없이 그대로 모방한다"고 말했다. 가령 일반인들의 뇌는 소리와 영상, 숫자를 받아들일 때 대부분을 걸러내 단순화된 형태로 체계화하고 분류한다. 이는 지각의 과부하를 막고 복잡한 정보의 포화에서 벗어날 수 있게 한다는 것이다. 이에 반해 그들은 "감각과 정보를 차단하는 뇌의 부분이 고장 난 경우"라고 스나이더 박사는 주장하고 있다. 그런 여과과정이 없기 때문에 혼란을 겪지만 걸러내지 않은 정보를 무궁하게 활용할 수 있는 것이다. 다만 뇌의 어떤 부분에 이상이 있는지 정확하게 밝혀내지는 못했다. 이 부분만 밝혀낸다면 일반인들 또한 뇌의 전달 부분을 차단해 이디오트서번트가 될 수 있다"고 스나이더 박사는 확신한다.
하지만 그 자신이 '서번트'이기도 한 영국 언어학자 다니엘 타멧은 '레인맨'에서 시작된 사람들의 '상식'이 얼마나 잘못됐는지 비판하면서 서번트들을 신기한 동물 보듯이 바라보는 시선을 거부한다.
'서번트 증후군'을 앓는 주인공이 등장하는 영화 레인맨(왼쪽)과 자폐증과 천재성을 동시에 지닌 다니엘 타멧.(오른쪽)
2007년 국내 출간된 자서전 '브레인 맨, 천국을 만나다'에서도 서번트가 기이한 존재가 아님을 강조했던 그는 두번째 저서 '뇌의 선물'에서 본격적으로 뇌 작동의 원리를 파헤치면서 서번트들이 어째서 특별한 재능을 보이는지를 설명하고 있다.
자폐증의 일종인 아스퍼거 증후군을 앓는 타멧는 2004년 5월 원주율 파이(π)를 암기해 5시간9분 동안 소수점 2만2천514자리를 읊었고, 10여개 국어를 자유자재로 구사해 화제가 됐다. 그는 심지어 처음 접하는 외국어를 1주일 만에 정복하는 과제도 완수했다.
타멧은 어릴 때 간질 발작으로 뇌기능에 장애가 오면서 자폐증과 천재성을 동시에 지니는 '서번트(savant) 증후군'을 갖게 됐다. 이러한 현상은 간질이 생긴 좌뇌의 손상을 보상하기 위해 수리능력과 연관된 우뇌가 발달하면서 생기는 것으로 일부 연구자들은 추정한다.
그러나 타멧은 서번트의 능력은 하늘에서 뚝 떨어진 초능력과는 관계가 없으며 의미와 실재를 연결할 줄 아는 뛰어난 지혜에서 생겨났을 뿐이라고 말한다. '뇌의 크기'가 아니라 '영혼의 깊이'가 해낸 일이라는 뜻이다.
저자는 '레인맨' 속 더스틴 호프만의 실제 모델인 킴 픽을 실제 만난 경험을 소개하면서 이런 주장을 뒷받침한다. 킴은 유명한 역사적 인물의 생년월일 같은 예전에 봤음 직한 정보를 쉽게 기억했지만, 어떤 물질의 정확한 양에 관한 낯선 내용은 잘 기억하지 못했다.
미국의 영화 '레인맨'을 영국의 다큐 '브레인맨'이 만나러 갔다. 2004년 솔트레이크시티 시립도서관. "79년 1월31일에 태어났어요."(타멧) "65살 생일날은 일요일이 되겠군. 난 51년 11월11일이야."(킴 픽) "당신은 태어난 날이 일요일이네요."(타멧)
"서번트들의 뇌가 카메라로 촬영을 하듯 정보를 기억한다는 생각은 전적으로 오해다. 그 대신 킴은 사실적인 정보들로 꽉 차 있는 자신의 '기억 창고'에서 끄집어낸 사실들을 서로 결합하고 접속함으로써 기억해내는 것이다."
저자가 예전에 스치듯 봤던 정보를 보통 사람들보다 잘 기억하는 이유 역시 남들보다 정보를 기억창고인 뇌에서 잘 찾아내고 끄집어내기 때문이다. 핵심은 숫자나 단어에 담긴 '의미'와 '이미지'가 그의 머릿속에 확연히 담겨 있다는 사실이다.
"내가 갖고 있는 수의 형태에 대한 이미지는 그저 무작정 정해진 게 아니라 분명한 의미를 담고 있다. 예컨대 내 머릿속에서 숫자 '1'은 밝고, '11'은 둥글고 밝으며, '111'은 둥글고 밝고 육중하며, '1111'은 둥글고 밝고 육중하면서 동시에 회전하고 있다."
'뇌의 선물'의 저자 다니엘 타멧의 주문은 간단하다. 서번트들에 대한 환상이나 오해를 버리고 음악이나 체육, 과학 등 여러 분야에서 남들보다 뛰어난 천재 정도로만 여겨달라는 것이다.
하지만 영화 레인맨의 주인공처럼 일반인의 10배 속도로 책을 읽는 등의 천재적 능력을 가졌다고 한들 이를 제대로 활용하지 않는 이상 별반 의미가 없고 실제 사회 활동에도 큰 영향을 미치지 못한다는 점은 한계로 남는다. 또 스나이더 박사의 주장대로 누구나 천재를 만드는 일이 인류에게 도움이 될지는 분명치 않다. 그보다 장애를 가지고 있는 이들에게 더 많은 희망을 찾아줘야 할 것이다.
한편 영화 '레인맨'은 1989년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최우수 작품상과 남우주연상(더스틴 호프만) 등을 포함, 4개 부문의 오스카상을 수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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