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들 못믿겠어"…밤잠 설친 노무현, 스스로 전략가 되다
[화제의 책] 김종대의 <노무현, 시대의 문턱을 넘다>
<프레시안>
2006년 2월 초 <프레시안>은 청와대 국정상황실이 2005년 4월 경 작성한 대여섯 개의 문건을 입수했다. 국가안전보장회의(NSC)와 외교통상부가 2003~04년 경 미국과 주한미군의 전략적 유연성 문제를 협의하는 과정에서 드러났던 각종 문제점을 지적하는 내용이었다.
<프레시안>은 이를 곧바로 기사화했다. 주한미군에 전략적 유연성이 무제한 주어진다면 한국도 의지와 상관없이 동북아시아 분쟁에 연루될 수 있다는 지적을 해온 터에, 청와대 국정상황실이 그 가능성을 인정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더구나 문건에는 그 과정에서 정부 부처들이 대통령의 눈과 귀를 가리는 행위를 저질렀다는 놀라운 사실이 담겨 있었다.
그런데 당시 <프레시안>은 중요한 한 가지를 보도하지 않았다. 노무현 대통령의 비공개 발언을 옮겨 적은 것으로 추정되는 한 장짜리 페이퍼였는데, 언제 어디서 작성됐는지 불분명했고 대통령의 실제 발언인지 확인도 불가능했기 때문에 쓸 수 없었다.
"정부나 청와대 내 참모들로부터, 소위 전문가라는 사람들로부터 시대의 변화에 상응하는 진취적 비전이나 전술에 대해 도움을 거의 받지 못했다. 정부 밖 전문가라는 사람들은 대통령이 마치 초보 운전사로 사고나 친 것은 아닌가 하는 우려를 하며 시비나 걸고…"
"외교부 공무원들은 상황 전체에 대한 전략적 비전 없이 대통령과 따로 가려고 한다. 상황 전체에 대한 전략적 이해가 있어야 한다."
"대통령이 어디로 갈까 조마조마하지요? 전망을 나에게 제시하기보다는 모두 대통령만 쳐다보고 있는 상황, 내가 성질이 급해서 다소 앞질러 갔는지는 모르겠지만, 솔직히 나도 위축되어 있다. 혹시 사고를 친 것은 아닌가 하고…"
"대통령이 누구의 엄호를 받고 있습니까? NSC가 여러 자료를 만들어 주고 있지만 한 번도 제대로 된 전략적 보고를 받은 적이 없다."
"우물쭈물 끌고 가려고 하지 마라. 못하겠으면 못하겠다고 해라. 그때그때 상황에 임기응변식으로 대응해서는 안 된다. 전체 흐름을 보아야지. 시대가 바뀌면 대미관계도 바뀌고 외교정책도 바뀌어야 한다."
"일본의 (유엔) 안보리 상임이사국 진출과 관련해 NSC, 외교부 모두 단호한 반대를 표명할 때가 아니라고 언급한 것에 대해 화가 난다."
▲ <노무현, 시대의 문턱을 넘다>(김종대 지음. 나무와숲 펴냄) ⓒ프레시안
노무현 대통령이 실제 이런 말을 했는지는 지금도 확인하기 쉽지 않다. 그러나 당시 청와대 국방보좌관실에서 근무하며 이 과정을 지켜 본 김종대 씨의 최근 책 <노무현, 시대의 문턱을 넘다>(김종대 지음. 나무와숲 펴냄)를 보면 노 대통령은 그런 말을 하고도 남았을 것으로 보인다.
이 책에는 노무현 대통령이 2004년 5월 20일 안보관계장관회의에서 심지어 이렇게까지 말한 것으로 되어 있다. "나는 여기에 있는 사람 아무도 믿지 못하겠습니다. 여러분들이 말하는 것 전부가 나에게는 진실로 들리지 않아요. 이게 대책회의 맞습니까?"
노 대통령의 발언 스타일을 보고 어떤 이들은 혀를 찰 것이고, 또 어떤 이들은 그를 그리워할 것이다. 그러나 여기서 중요한 것은 스타일이 아니라 내용이다. 전략적 유연성, 주한미군 감축, 이라크 파병, 용산기지 이전, 전시작전통제권 환수 등 수많은 외교·안보 사안이 쏟아졌던 시절 노무현 대통령이 호소했던 답답증.
노 대통령 주변에 포진하고 있던 기라성 같은 고위 공직자들과 전문가들은 대통령의 답답한 마음을 풀어 줄 해법을 내놓지 못했음은 물론, 대통령 뒤에서 허락도 없이 중대 사안을 처리해 놓고 문제가 불거지면 적당히 둘러대거나 책임을 회피하기 일쑤였다. 정부를 비방하고 대통령을 궁지에 빠지게 하는 말을 언론에 흘린 공무원들도 있었다.
<노무현, 시대의 문턱을 넘다>는 '노무현 청와대'의 그러한 모습들을 샅샅이 보여주고 있다. 거기엔 자주파와 동맹파, 국정상황실과 NSC의 다툼은 있었지만, 정작 중요한 대통령 보좌는 없었다. 노무현이 사실상 혼자서 비전과 전략을 만들고, 변화를 거부하는 이들과 앞장서 싸우는 역할까지 할 수밖에 없었던 것은 그 때문이었다.
'자주파'의 내분…휘파람 불던 '동맹파'
자주파와 동맹파간 싸움의 모든 것이 압축된 사례는 뭐니 뭐니 해도 전략적 유연성이었다. 전략적 유연성이란 주한미군을 한반도 이외 지역의 분쟁에 원하는 대로 투입한다는 개념인데, 미국은 2003년 협의 과정에서 한국이 이를 합의했다고 여기게 됐다. 국방부가 동의하는 듯한 말을 했고, 외교부 역시 그해 10월 비밀 외교 각서를 보내 사실상 합의해 줬기 때문이다.
하지만 노무현 대통령은 이 사실을 1년 반 가까이 까맣게 모르고 있었다. 2005년 3월 공사 졸업식에서 "우리의 의지와 관계없이 동북아 분쟁에 휘말리지 않을 것"이라고 말한 걸 보면 알 수 있다. 이 책에 따르면, 노 대통령은 2004년 11월 원자바오 중국 총리를 만나서도 "주한미군이 전략적 유연성을 가진 군대로 전환하는 것에 동의한 적이 없고, 앞으로도 이를 용납하지 않을 것"이라고 분명히 말했다.
대통령의 뜻과 미국과의 합의가 다르다는 사실을 포착한 국정상황실은 이 문제를 면밀히 조사한 후 2005년 5월 보고서를 제출한다. 국정상황실은 외교부와 국방부는 물론 그들의 협상을 컨트롤해야 할 NSC마저 일을 안일하게 처리했다고 결론 내렸다. 나아가 국가의 안보주권이 달린 중요한 정보를 대통령에게 보고하지 않는 기망(欺罔)을 저질렀다고 규정했다.
이는 표면적으로는 자주파와 동맹파의 싸움이었지만, 내용적으로는 자주파의 내분이었다. 외교부와 국방부의 동맹파들은 일을 저질러 놓고 뒤로 빠져 버렸다. 그걸 부적절하게 수습했던 NSC와 그런 NSC를 '무늬만 자주파'라고 봤던 국정상황실만 피를 흘리며 싸웠다. 그 싸움은 노 대통령이 국정상황실의 주장에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으면서 겨우 끝났다.
저자는 이에 대해 "대통령은 NSC와 국정상황실 모두 자신에게 필요한 조직이라는 점에서 어느 한쪽 편을 들기 어려웠다는 점도 고려한 것 같다"고 분석했다. 그러나 노무현의 비전을 성심껏 구현하려 했던 귀중한 인재들은 환멸을 느끼고 청와대를 떠났다. 휘파람을 불며 자주파의 내분을 즐기던 동맹파 인사들은 흠집 하나 나지 않았다.
▲ 대통령 임기 말이 가까워 질수록 노무현 정부에서 최고의 외교안보 전문가가 된 사람은 바로 노 대통령 자신이었다. 2006년 12월 민주평통 상임위원회에서 열변을 토하던 당시의 모습 ⓒ연합뉴스
괴물이 된 주한미군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전략적 유연성은 2006년 1월 한미 외교장관 전략대화에서 공식 합의되기에 이른다. 외교부가 유도했던 모든 것이 관철된 상태로. 그러나 전략적 유연성은 '노무현 때 이러저러한 논란이 있었다'고 그냥 넘어가 버릴 사안이 결코 아니다. 바로 현재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당시 전략적 유연성을 비판했던 핵심 논리, 즉 한반도가 동북아 분쟁기지가 된다는 우려가 2010년 오늘 엄연한 현실이 돼가고 있다.
이 책의 에필로그에 나오는 문재인의 탄식을 보자. 2006년 초 국정상황실의 문서가 보도되는 등 시끄러울 때의 일화다. 문재인 청와대 당시 청와대 비서실장은 외교부 출신으로 이 문제에 밝은 이종헌 행정관을 불러 주한미군의 평택 이전과 전략적 유연성의 본질을 물었다.
이 행정관은 "평택 기지는 미군의 동북아 전략을 구현하는 새로운 기지"라며 "전략적 유연성을 확보한 미군이 해외로 발진하기 위한 전초기지"라고 답했다. 이 소리를 들은 문재인 실장. "정말 큰일이다. 이제껏 대통령께서는 평택 기지가 단순히 용산이나 동두천의 미군 시설을 이전하는 기지로만 생각하고 이 문제를 관리해 왔다. 대통령은 미군의 대중국 전략이 반영된 기지라고는 전혀 생각하지 않는다."
그로부터 4년의 시간이 흘렀다. 미 국방부는 올 1월 발표한 '4개년 국방태세 검토'(QDR)에서 "한국의 미군기지가 해외 분쟁 지역으로 발진하는 기지"임을 공개적으로 명기하기에 이르렀다.
거기서 그치지만 않는다. 저자 김종대가 편집장으로 있는 외교·국방 전문지 <D&D 포커스> 2월호에 이미 보도됐고, 이 책의 프롤로그에도 상세히 소개되는 바와 같이, 주한미군은 이제 누구도 정체를 알 수 없는 '괴물'이 돼가고 있다. 정부 관계자들은 "정부는 지금 주한미군이 뭘 하고 있는지, 어떤 장비를 운용하는지, 병력은 얼마나 되는지 등에 대해 아는 것이 거의 없다"고 말한다. (☞관련 기사 : "주한미군, 정체 알 수 없는 괴물이 됐다")
심지어 미군 전투기가 암암리에 북한에 대한 '위험한 행동'을 하기 시작했지만, 한국 정부는 그 사실마저 파악하지 못하고 있다는 얘기까지 돌고 있다. 전략적 유연성이 아니라 그 '할아버지'를 합의했다고 해도 용인돼선 안 되는 사태 전개에 대해 당시 국정상황실 문건에 이름이 올랐던 인사들은 어떤 말을 할 수 있을까?
"전작권 환수 찬성 안 했다고 써줘!"
<노무현, 시대의 문턱을 넘다>의 저자 김종대 <D&D 포커스> 편집장은 20여 년 국방 문제를 연구한 전문가다. 2003~05년 청와대 국방보좌관실에서 유일한 민간인 행정관으로 일했다. 이후 국무총리실 산하 비상기획위원회에서 한국의 전쟁지도와 전시대비 계획 등을 숙달했고, 김장수 국방부 장관 시절에는 장관 정책보좌관을 하기도 했다.
◀ 김종대 편집장 ⓒ프레시안
이런 경력을 통해 군사 문제의 모든 분야를 섭렵한 김 편집장은 이번 책을 통해 노무현 정부의 외교·안보 정책의 전 과정을 샅샅이 되짚어 봤다. 장막 뒤에서 벌어지는 수많은 에피소드와 충격적인 사실들이 담겨 있다. 외교부와 국방부, 군은 과연 어떻게 노무현의 발목을 잡았으며, 노무현과 함께 했던 이들에게는 어떤 문제가 있었는지를 세밀화로 그려냈다. 노무현 정부에 몸담았던 이들이 앞 다퉈 '지방선거용' 책을 펴내는 요즘의 세태에서, 노무현 정부의 공과를 진지하게 탐구한 보기드문 책이다.
○…2005년 초 반기문 외교부 장관은 미국이 동북아에서 다자간 안보체제 구상을 가지고 잇다는 사실을 알고도 대통령에게 보고하지 않았다. 이런 사실은 그해 3월 콘돌리자 라이스 미 국무장관이 노 대통령에게 직접 그 구상을 말하는 과정에서 밝혀졌다. 이후 외교부는 부시 행정부가 한반도 평화체제 논의에 관심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이를 저지하기 위해 노력한다.
나중에 이 사실을 알게 된 청와대와 통일부는 경악한다. 이 과정에서 반기문 장관과 정동영 통일부 장관은 숙명적으로 대립한다. 외교부는 2005년 6자회담에서 9.19 공동성명이 나왔을 때도, 2007년 남북 정상회담 당시에도, 평화체제에 대한 논의를 반대했다. 최근 북한이 평화협정 협상을 제의하자 외교부가 '비핵화를 미루기 위한 술수'라고 규정한 데에는 평화체제에 대한 뿌리 깊은 거부감이 작용하는 것이다.
○…김대중 정부 당시 국방부는 북한과 철도·도로를 연결하는 것에 대해 "정전협정 사항이므로 유엔사령부의 동의를 받아야 한다"고 버텼다. 그러나 국방부의 그러한 보고는 사실상 허위였다. 유엔사는 일찌감치 한국 정부에 이 문제에 대해서는 관여하지 않겠다는 입장을 밝혔기 때문이다. 저자는 나아가 이 문제에 관여할 유엔사령부의 실체가 과연 존재하느냐에 대해 근본적인 물음을 던진다.
○…노무현 대통령은 2004년 국방연구원(KIDA)에 남북한 군사력을 비교하는 연구를 지시했다. KIDA는 '육군은 북한 대비 열세, 해군과 공군은 대등하거나 우세'라는 결과를 보고했다. 그러나 청와대 민정수석실은 이 연구 결과는 국방부의 압력에 따라 조작된 데이터를 사용한 것이라는 사실을 밝혀낸다. 연구 결과에 따라 예산이 삭감될 것을 우려한 각 군이 NSC와 국방연구원에 사람을 보내 '우리가 열세한 걸로 해 달라'고 로비와 압력을 가했다는 사실이 드러난다.
○…저자는 이 책을 쓰는 동안 각종 로비와 압력에 시달렸다고 말한다. 특히 적극적으로 접근해 온 이들은 노무현 정부가 전시작전통제권 환수를 시도할 당시 '환수 찬성' 입장을 밝혔던 군 안팎의 인사들이었다. 찬성 입장을 가졌다는 사실을 밝히지 말거나 반대 입장에 있었던 것으로 바꿔 달라는 요구를 하는 것이다. 전작권 환수를 백지화하려는 이명박 정부에서 진급이나 출세를 하기 위해서는 과거의 경력을 지워야 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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