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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론을 향한 경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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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자청비 2010. 7. 11. 07: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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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론을 향한 경고, "기자, 니 죽고 싶니?" 
하인리히 뵐의 <카타리나 블룸의 잃어버린 명예>를 읽고 

오마이뉴스

 

 

▲ 하인리히 뵐의 <카타리나 블룸의 잃어버린 명예>  ⓒ Yes24  카타리나 블룸의 잃어버린 명예

 

송두율, 촛불소녀, 신정아, 미네르바, 노무현.

이 책을 보며 여러 이름들이 떠오른다. 철학자부터 백수까지 서로 다른 영역의 사람들이지만 하나의 주제 아래 교집합을 이룬다. 어느 날 도시를 배회하는 잿빛 유령이 이들을 궁지로 몰아넣었다. 한 여자는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본인의 누드 사진이 일간지에 게재됐고, 한 남자는 '빨갱이'로 몰려 그동안 쌓아 왔던 철학적 업적마저 위협 당했다. 권력의 정점에 있던 또 한 남자는 자살을 선택했다. 펜은 칼보다 강하다고 했던가. 손에 피 한 방울 묻히지 않고 인격을 살해한 사이코패스. 누구냐 넌?

 

독일 작가 하인리히 뵐의 <카타리나 블룸의 잃어버린 명예>는 국내에 잘 알려진 소설이다. 유시민 전 복지부장관이 <청춘의 독서>에서 딸에게 추천한 책이기도 하다.  주인공 카타리나 블룸은 가사 관리사다. 광부의 딸로 태어나 성실함과 꼼꼼함으로 주위 사람들에게 신망을 받는다. 자존감이 강했으며 남자를 함부로 만나는 법이 없었다. 27살 '꽃청춘' 그녀에게도 매력적인 남자가 나타난다. 이웃집 파티에서 오직 그와만 춤을 췄고 하룻밤을 보냈다. 그녀는 그가 무기를 훔쳐 달아난 탈영병이란 사실을 몰랐다.

 

카타리나가 기자를 죽일 수밖에 없었던 그 이유

 

경찰들이 그녀의 집으로 들이닥쳤다. 카타리나는 그를 사랑했기에 그에게 비밀 통로를 알려줘 도피를 도왔다. 경찰은 그녀가 탈영병 괴텐의 애인라고 생각하고 심문을 시작했다. 사건은 여기서 시작한다. 조사 내용이 유력 일간지에 그대로 흘러들어갔다. 우연히 아닌, 고의로 말이다. 작가 하인리히 뵐은 전체 이야기를 논평하는 식으로 서술하면서 경찰이 언론사에 수사 정보를 흘리는 사실을 우회적으로 묘사했다. 그(경찰 뫼딩)는 매우 어려운 충고를 (카타리나에게) 했다. 그 때문에 그가 비싼 대가를 치를 수도 있으며 그 자신과 동료들의 모가지가 달아날 수도 있을 만큼 위험한 충고였다. "전화에는 아예 손대지 마십시오. 내일 신문도 펼치지 마시고요." 이때 그가 <차이퉁>지를 말한 것인지 아니면 그저 일반적인 신문을 말한 것인지는 분명치 않다.

 

다음날 <차이퉁>은 1면에 굵은 활자로 확정되지도 않은 범죄 사실을 이렇게 보도했다. "강도의 정부 카타리나 블룸이 신사들의 방문에 대한 진술을 거부하고 있다." 이는 두 가지 윤리를 어긴 것이다. 첫 번째는 '무죄추정의 원칙'이다. 피의자는 말 그대로 '혐의가 있는 것으로 의심되는 자'이지 범죄자가 아니다. 두 번째는 전직 대통령을 죽음으로 몰아넣은 '피의 사실 공표'다. 경찰이 수사 내용을 언론에 흘리고 언론은 사실 확인 없이 경찰의 조사 내용을 그대로 받아 적었다.

 

<차이퉁>은 블룸의 주변인들의 진술도 자기 멋대로 해석했다. 조력자인 볼로르나 부부의 '카타리나는 영리하고 이성적이다'라는 표현을 "얼음처럼 차고 계산적이다"라고 바꾸었고, 옛 스승의 '예상 밖의 일이다'라고 한 말을 "전적으로 범죄를 일으킬 수 있다"로 왜곡했다. 또 사건의 본질, 시민의 알 권리와 아무런 상관없이 없는 볼르르나 부부를 뒷조사를 해 그들을 '좌파', '빨갱이'로 몰아세웠다. 심지어 위독한 어머니를 찾아가 사건의 전함으로써 모친을 죽게 했다.

 

결국 블룸은 기자를 총으로 쏴 죽인다. 처음에 죽일 생각은 없었다. 기자가 "나의 귀여운 블룸 양, 우리 일단 섹스나 한탕 하는 게 어떨까"라고 희롱하며 옷을 스칠 정도로 가까이 오기 전까지 말이다. 살인 후 그녀는 오히려 담담했다. 아니, 속시원했을지도 모른다. 몇 시간 뒤, 그녀는 경찰에 자수한다.

 

그녀 자신은 12시 15분(살해 시점)에서 저녁 7시까지 후회의 감정을 느껴 보기 위해 시내를 이리저리 배회했지만, 조금도 후회하는 바를 찾지 못했노라고. 그리고 그녀는 (경찰에게) 자신을 체포해 주길 부탁하며, "사랑하는 루트비히(탈영병)"가 있는 그곳에 자신도 기꺼이 있고 싶다고 말한다.

 

폭력이 낭만이던 시대를 넘어

 

▲ 폴커 슐렌도르프의 1975년 작 영화 <카트리나 블룸의 잃어버린 명예>  ⓒ 비스코프 필름  폴커 슐렌도르프

 

이쯤 되면 신문을 꼼꼼히 읽지 않는 독자라도 머릿속에 떠오르는 신문이 있을 것이다(이름을 거론하는 것조차 이젠 너무 진부하다). 어떻게 1974년의 독일 사회와 현재 우리 사회가 이토록 닮아 있을까. 사실 확인 없이 몰아세우고, 조금만 진보적인 성향을 가지고 있다면 빨간 색깔로 덧칠하는 일들. 인터뷰 내용을 멋대로 조작하고, 필요한 부분만 골라 써 전체 맥락을 왜곡하는 수법들 말이다.

 

현실 비판과 함께 카타리나를 통해 '시민의 힘'을 본 것은 이 책을 읽는 또 다른 수확이다. 비록 카타리나가 기자를 죽이는 파국으로 치닫지만, 우리는 권력을 살해하는 하나의 '사고 실험'으로 받아들이면 좋겠다. 견제 받지 않는 권력 언론을 시민들도 의지에 따라 위력을 행사할 수 있다는 것이다. 또 사실 확인 없이 유령 같이 떠도는 거짓 정보가 장삼이사들에게 어떤 폭력을 가져다주는지도 상기해야 한다.

 

우리 사회 몇몇 기자들은 '낭만적인 시대는 지나갔다'며 아쉬운 소리를 한다. 과연 그들이 말하던 낭만의 시대는 어떤 시대였나? 여전히 유력 일간지 기자들은 특종에 눈이 멀어 급하게 기사를 써대고, 하소연 할 때도 없는 잃어버린 명예'들'은 계속 나오고 있는데 말이다.

 

<카타리나 블룸의 잃어버린 명예>는 언론을 향한 일종의 협박이며 경고다. 모니터 앞에서 상상의 나래를 펴고 있는 기자들에게 문득 영화 한 장면이 떠오른다. <친구>의 대사, "니, 죽고 싶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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