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 상반기, '독서 권력'이 이겼다"
[우석훈 칼럼] <정의란 무엇인가>와 함께 읽을 책 3권
프레시안
출판계 현황만을 놓고 보면, 2010년 상반기가 최악의 해가 될 것이라고 연초에 많은 사람들이 예상했었다. 무엇보다도 단기에 노출되고 사라지는 인터넷 서점과는 달리, 보다 많은 사람들에게 노출시킬 수 있는 기회를 주는 교보문고 광화문점(광화문 교보)의 리노베이션이 큰 변수라고 보았던 것 같다. 인문과학이나 사회과학의 서적들 중 비인기 서적은, 많은 경우 절반 가까운 매출액이 광화문 교보에서 발생한다. 강남교보도 있고, 또 각 지역별 교보도 있고, 인터넷 서점들도 있지만, 중요하지만 별 인기 없어 보이는 책은 광화문 교보가 그 명맥을 유지하게 해준다. 왜 그런 일이 벌어지는지, 아직까지 분석은 확실하지 않지만, 어쨌든 사회과학 분야에서 광화문 교보의 역할은 절대적이고, 그 서점이 올 상반기에는 리노베이션이었다.
그 외에도 지방선거와 월드컵이 올해에 있기 때문에, 역시 출판계에서는 최악의 시기라고 보았다. 책은 대체적으로 신문이 재미없을 때에 많이 팔리고, 선거나 월드컵 같이, 신문이 재미있고, TV가 재미있는 시기에는 잘 팔리지 않는 경향이 있다. 어쨌든 많은 한국인은 자신의 용돈계획을 구축하면서 '서적 구입비'를 별도로 설정하지는 않고, 오락비 중의 한 항목으로 처리하는 것 같다. 그래서 놀이에 일정한 돈을 지불하고 나면, 당연히 도서 구입이 줄어들게 된다.
도서계를 그냥 시장이라는 눈으로만 본다면, 최악의 계절은 가을이다. 가을은 '독서의 계절'이라고 하지만, 그건 워낙 책을 안 읽으니까 그런 말이라도 좀 붙여서 독서를 권면한 것 아니냐는 생각이 들 정도이다. 사회과학이라는 눈으로만 본다면, 일년에 가장 나쁜 시장은 가을 시장이고, 가장 좋은 시간은 3월과 8월, 두 번이라고 할 수 있다. 3월에는 고등학생들이 학교에 입학하고, 또한 대학생들도 입학하는 시기이다. 요즘은 대학생들이 거의 독서를 하지 않지만, 고등학생들은 20대 중반에서 30대 중반의 여성을 제외한다면, 한국에서 가장 왕성하게 독서하는 집단으로 분석된다. 물론 엄마들이 막 고등학생이 된 자녀에게 사주는 통계가 2중으로 잡히기 때문에, 분석은 좀 애매하기는 하지만, 아마도 단일 집단으로만 본다면 고등학교 1학년 학생이 가장 큰 독서집단이라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그래서 3월 시장이 가장 큰 시장으로 최근 자리를 잡은 것 같다.
그 다음 큰 시장이 7, 8월의 여름 휴가 시장이다. 여기에 대해서는 해석이 아직 좀 어렵다. 지난 2~3년 전부터 이 시장은 일반인들이 선뜻 선택하기 어려운 책들에게는 가장 우호적인 시장이 된 셈인데, 휴가철에 책을 가지고 가는 직장인이 많아서 그렇다는 해석과 양극화와 함께 소득의 하락으로 휴가는 냈지만 휴가를 갈 수 없는 사람들이 책을 더 많이 읽게 된다는 해석이 팽팽하다. 나는 후자 쪽이 좀 더 그럴 듯한 설명이 아닐까라고 생각하는데, 여름 휴가에 책을 가지고 가서 독서를 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될까, 그런 의심이 좀 있어서 그렇다.
이런 연간 변화량과 함께 지난 몇 년 사이의 서적 특히 사회과학의 판매량 추이가 또 한 가지 있다. 대체적으로 지난 년 동안 사회과학은 어려운 중에서도 특히 고전을 하고 있었는데, 그중에서도 가장 어려웠던 것은 지난 가을에서 겨울 사이라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이제 한국에서 사실상 사회과학 시장은 종료하고, 2010년에는 출판계가 더욱 어려워질 것이므로, 사회과학 출판사는 '살아남는 것'이 최고의 미덕이라는 게 연초까지 한국 출판계 특히 인문과학과 사회과학을 둘러싸고 출판계에서 왔다갔다 하는 괴담이었다.
▲ <정의란 무엇인가>
그렇게 2010년이 왔고, 봄과 함께 상반기를 맞았다. 많은 사람들이 두려워하던 그 시점이 왔는데, 다행히도 파국은 오지 않았다. 광화문 교보의 리노베이션, 지방선거, 월드컵의 악재를 딛고, 마이클 샌델의 <정의란 무엇인가>가 2000년 1월, 김용옥의 <노자와 21세기> 이후 10년만에 처음으로 종합 베스트셀러 1위에 올랐다.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마케팅이나 하버드의 이름이라고만 설명하기에는 쉽지 않은, 그야말로 '바닥 민심'이 뭔가 움직인 것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기본적으로 롤스에서 샌델까지 이어지는 '정의 이론'은 전형적인 미국 우파의 담론이기는 하지만, 한국에서는 중도우파 혹은 중도좌파 정도에서 오랫동안 애용해왔던 개념이기도 하다. 여전히 부동산 분야에서 좋은 성과를 올리고 있는 경실련의 '경제정의'가 그렇고, 환경단체 메이저 3 가운데 한 축을 담당하는 '환경정의'가 또 그렇다. 시민운동 진영에서는 종종 사용했던 개념이지만, 진보정당에서는 거의 사용하지 않았던 용어이다. 미국 민주당의 '정치적으로 올바름'이라는 생각의 근간을 형성하는 '정의', 이것의 돌풍은 한국은 미국 민주당 수준의 보수주의 정치도 제대로 실현되고 있지 않다는 집단 불만의 한 발현현상이 아닐까 싶다.
<정의란 무엇인가>가 지금과 같은 좋은 성과를 올리기 전에, 지난 봄을 버텼던 국내 저자들의 좋은 책들이 몇 권 있었다. 그 어렵던 시절에, 사회적으로 작지 않은 논란을 일으켰던 책들을 2010년 상반기의 성과라고 생각한다. 그 가운데 3권 정도를 이 기회를 빌어 다시 한 번 소개하고 싶다.
▲ <삼성을 생각한다>
가장 논란이 많았던 것은 김용철 변호사의 <삼성을 생각한다>가 아닐까 싶다. 삼성에서는 이 책에 대해서 아마 불만이 많을텐데, "그것은 소설이다"라는 입장을 가지고 있다고 건네 들었다. 혹은 김용철은 '사이코패스'라는 좀 민망한 단어까지 사용하면서 이 책이 가지고 있는 시사점을 깎아내리는 입장에 관한 얘기도 들었다. 그러나 두 가지의 측면에서, 나는 이 책이 여전히 중요한 책이라고 생각한다.
첫 번째는, 이것이 한국에서 매우 드문 인사이더의 자기 고백이라는 점이다. 양심선언을 비롯해서 한국에서도 '인사이더'들이 종종 등장한 적이 있는데, 그들의 삶은 대체적으로 불행해졌던 것이 사실인 것 같다. 삼성이라는 거대한 권력의 힘에 맞선 인사이더가 불행해지지 않고, 최소한 인간적 행복을 누릴 수 있다는 것, 그게 가능할까? 그 질문이 이 책에 대해서 우선적으로 내가 생각하는 의미이다.
두 번째는, 한국에서 '재벌'이라는 문제에 대해서 실종되어 버린 지난 10년간의 담론을 다시 출발할 수 있는 계기를 제공한다는 점이다. 삼성이라는 아주 독특한 기업의 문제가 하나 있지만, 한국 경제가 대기업과 어떠한 관계를 가질 것인가라는 질문은 2010년, 특히 더 중요하게 된다. 지금 우리가 가지고 있는 재벌에 대한 담론은 1998년 IMF 경제위기를 즈음해서 생겨난 '재벌해체'와 '순환출자 금지'라는 두 가지 정도에 머물러 있다. 그 다음 담론이 여전히 제시되고 있지 못하다. 현대자동차의 3세 승계 문제가 여전히 뜨거운 이슈이고, 그에 따라 현대건설에 대한 인수 논란, 쌍용차 논란, 지역경제에서의 기업형 슈퍼의 허용 문제, 복잡한 문제들에 대해서 과연 이러한 대기업들과 어떠한 관계를 설정할 것인가, 그리고 문제를 어떻게 풀어낼 것인가, 여기에 대한 담론이 근 10년째 실종되어 있다. 그 빈 공간을 채울 수 있는 계기가 바로 이 책에서 형성되지 않을까 하는 희망을 가지고 있다.
▲ <김예슬 선언-오늘 나는 대학을 그만둔다, 아니 거부한다>
김예슬 씨의 고려대 자퇴 사건은 금년 상반기를 강타한 사건 중의 하나이고, 그가 자신의 생각을 정리해서 <김예슬 선언-오늘 나는 대학을 그만둔다, 아니 거부한다>라는 책자로 묶어냈다. 명문으로 찬사를 받았던 '대자보'에는 미처 담아내지 못했던 그의 사유 그리고 그가 한국 사회에 가지고 있는 불만과 나아가야 할 방향은, 자퇴할 것이냐, 그렇게까지 할 필요가 있었느냐는 즉각적인 질문과는 달리 '인문'이라는 종합적인 질문의 형태이다. 대학생이든, 대학생이 아니든, 승자독식 구조로 강화되고 있는 한국 사회에서 과연 인간적이라는 것은 무엇인가 혹은 우리가 "서로 돕는다"는 것은 2010년, 과연 어떠한 의미를 가지고 있는가, 여기에 대해서 우리 모두는 한 번쯤 생각해보아야 할 것 같다. 그런 점에서 김예슬씨의 질문은, 우리 모두 그리고 우리 자체를 향하고 있다. 당신이라면 어떻게 했겠느냐는 행위론적인 질문과 함께, 당신은 '지금 바로 여기'에 대해서 어떻게 진단하고 있는가, 그 질문의 공유가 바로 김예슬 독서가 필요한 이유라고 생각한다.
▲ <PD수첩-진실의 목격자들>
그리고 마지막으로 <PD수첩-진실의 목격자들>을 거론하지 않을 수 없을 것 같다. 늘 논란의 대상이 되었던 PD수첩이 20년을 맞았고, 그를 즈음해서 지승호 작가가 관련된 당사자들의 인터뷰집을 내었다. KBS의 <추척60분>, SBS의 <그것이 알고 싶다> 역시 매우 수준 높은 탐사방송이다. 그러나 <PD수첩>과는 역시 어감과 느낌이 다르다. 한 쪽이 더 선정적이라서 그런 것인가, 아니면 정부의 주장대로 '왜곡'을 일삼는 부도덕한 방송이라서 그런 것일까? 아마 각 방송극의 탐사 방송의 역사 차이만으로 설명되지 않는, 그야말로 사회와 어떻게 관계를 맺었는가, 여기에서 조금씩 누적된 효과들이 있지 않을까 싶다. 아마 황우석 사건은 결정적으로 <PD 수첩>과 다른 방송의 차이를 국민들에게 부각시켰는데, <추적 60분>과 두 프로그램이 했던 진실 전쟁은, 아마도 한국 방송사에 남을 한 페이지를 장식하지 않을까 싶다.
이 싸움에서 승자가 있고, 패자가 있을까? 나는 없다고 생각한다. 그 자체로 한국의 본 모습을 우리가 보았다. 황우석 사태 이후로 과학계 혹은 공학계 내부에서는 더 이상 문제가 없고, 자정이 잘 이루어지고 있을까? 그렇게 큰 스캔들로 드러나지 않아서 그렇지, 여전히 정부의 국책연구사업을 둘러싸고 벌어지고 있는 황당한 사건들은 지금까지 변한 것이 없다는 게 내 관찰이다. 천안함 좌초설과 관련해서는 <추적 60분>이 심도 있는 시각을 보인 적이 있다. 그러나 역시 파장은, <PD 수첩>을 따라가기 어렵다. 그건 생산자의 문제만이 아니라, 이미 '수용자' 즉 <PD 수첩>이 제시하는 문제를 받아들이는 측면에서 차이가 나기 때문이 아닐까? 이렇게 언제나 논란의 앞에 서는 <PD 수첩>의 등장 배경과 제작 원칙 등, <PD 수첩>을 지지하거나 아니면 불만이 있는 사람 모두, 한국에서 살아가기 위해서는 한 번쯤은 보면 좋을 법한 내용이 바로 2010년 상반기의 마지막을 장식한 국내 저자의 저서이다.
시대가 어둡고, 진보/보수 혹은 좌우의 논쟁은 사라진 지 오래다. 그 빈 공간을, 권력 내의 다툼이 채우고 있고, 영포회냐 선진연대냐, 아니면 박근혜파냐, 이런 내용 없는 기표들이 공중파와 신문을 채운다. 그러면 허전해서, 월드컵이나 보자, 그렇게 할 것으로 사람들은 생각했다. 전두환 시절의 섹스, 스크린, 스포츠라는 3S와 비슷한 암흑의 정국이 열리기는 했지만, 많은 사람들은 닫혀버린 공중파, 분석 없는 신문 대신에 책 그것도 골치 아픈 인문서나 사회과학 서적을 집어들은 것이 2010년 상반기의 모습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나는 그게 우리가 가진 가장 큰 희망이라고 생각한다. 책 읽는 국민들을 이길 수 있는 폭압 정치나 일방주의는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 <정의란 무엇인가>와 함께, 우리는 희망을 보았고, 그 희망이 2010년 하반기에는 더욱 큰 파도가 되기를 기대한다. 어둠이 짙으면 새벽이 올 때라고 누군가 하였던가?
/우석훈 2.1 연구소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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