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지금 다시 '자유'를 말하는가?
[철학자의 서재] 존 스튜어트 밀의 <자유론>
<프레시안>
자유주의의 시대이기를 바란다
우리 시대의 넘을 수 없는 지평은 자유주의다. 프란시스 후쿠야마(Francis Fukuyama)는 20세기 말에 자유주의에 대한 어떤 대자(對自)도 남지 않았다고 선언했다. 실제로 동구권의 넘을 수 없는 지평이었던 공산주의―그것이 진정한 것이었든 혹은 공산주의를 표방했을 뿐 거기에 미치지 못했던 것이든 간에―가 몰락함으로써 그가 고한 '역사의 종언'은 이루어지는 듯했다.
자유주의란 지평 위에 살고 있는 모든 자유주의자들의 시선. 거기에는 자유주의를 바라보는 여러 인식의 차이가 꿈틀댄다. 자유주의에 대해서 말하는 사람의 숫자만큼이나 자유주의에 대한 정의가 존재한다. 자유주의를 수호하기 위해 '가스통'이란 수단을 선택한 어르신들에게 자유주의는 반공이다. 불같은 열정을 표출하는 어르신들의 실천에는 미치지 못하지만 미래보다 현실을 더 사랑한다는 점에서 그들과 비슷한 이들에게 자유주의는 유일하게 가능한 정치의 형태로 여겨진다.
진보 진영에 자기를 두는 이들에게 그것은 평등의 타자이고 극복의 대상으로 평가된다. 이런 대립 외에도 자유주의를 말하는 자들이 있다. 이들은 기업가의 영업 자유를 제1의 가치로 여기며, 그것을 수호하기 위해서 다른 자유를 희생시켜야 한다고 말한다. 시장에 대한 그 어떤 규제도 남지 않아야 한다는 이들은 자신들이 새로운 자유주의를 열고 있다고 말한다. 그들의 자유주의는 경제적 방임주의이다.
관념에 대한 많은 단어가 모호함을 지닌다. 그러나 자유주의에 동의하든 그렇지 않든 간에, 그것은 우리 시대 정치를 규정짓는 단어이다. 따라서 우리 정치에 대한 논의는 자유주의의 모호함을 견디지 못하는 것에서 출발해야 한다. 그 출발은 자유주의를 판명하게 드러내는 작업으로 이어진다.
대체 자유주의는 무엇이며, 그것은 우리에게 어떤 의미를 가지는가. 불행히도 이 작은 서평(또한 서평 분량만큼의 필자 역량)으로 그 큰 사상 모두를 정의내리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그렇지만 여럿으로 흩뿌려진 자유주의의 방향을 처음으로 규정한, 자유주의 이전에 자유주의를 근거해준 이론을 살펴보는 일은 가능할 것이다. 여러 의미로 통용되지만 그럼에도 하나의 이름으로 묶인다는 것은 거기에 어떤 공통점이 있기 때문이다. 숱한 자유주의가 모두 내포하는 특징들을 보여주는 것이 바로 존 스튜어트 밀(John Stuart Mill)의 <자유론>(서병훈 옮김, 책세상 펴냄)이다. (밀의 사상과 그 이후 자유주의의 공통점과 차이점에 대해서까지 말할 공간은 허락되지 않았다. 다만, 자유주의는 밀을 조상으로 한다는 것을 밝히고 논의를 시작한다.)
자유주의의 시작-존 스튜어트 밀
▲ 존 스튜어트 밀(1806~1873). ⓒwfu.edu
밀에게 자유란 "자기가 원하는 바를 하는 것"이다. 자유는 절대적으로 보장되어야 하는데, 그 이유는 두 가지이다. 첫째, 개별성의 발전을 위해서 자유가 필요하다. 밀은 인간을 "내면의 힘에 따라 온 사방으로 스스로 자라고 발전하려 하는 나무와 같은 존재"로 규정했다. 스스로 자란다는 것은 각 인간이 태어남과 동시에 갖게 되는 자신만의 '개별성(individuality)'이라는 내면의 힘을 현실로 드러내는 과정을 뜻한다. 이 과정은 개인이 자신을 온전히 드러낼 수 있는 자유를 필요로 하기에 자유는 보장되어야만 한다.
둘째, 효용이 증대된다. 밀은 효용을 "진보하는 존재인 인간의 항구적인 이익에 기반을 둔 가장 넓은 개념"이라 정의한다. 각 개인이 행복할 방법을 가장 잘 아는 존재는 바로 자기 자신이다. 자유롭게 개인을 놓아둔다면 각자는 자신의 효용이 증대되는 방향으로 나아갈 것이고, 각각의 효용 증대는 사회의 공리 증가로 이어질 것이다.
자유는 이 두 측면에서 보장되어야만 한다. 그러나 개인들이 같이 사는 사회에서는 개별성의 충돌이 일어날 수밖에 없다. 따라서 그는 자유의 한계를 다음과 같이 설정한다. 타인과 관련되지 않으며 해를 끼치지 않는 일, 온전히 자기에게만 책임이 돌아오는 것에 대해 개인은 완벽한 주권을 행사할 수 있다.
밀의 철학은 여러 불협화음을 내포하고 있다. 공리주의와 자유 간에 일어나는 우선성을 향한 다툼이 대표적이다. 대중 사회의 몰개성의 대안으로 밀이 강조한 개체성에 방점을 찍으면 <자유론>은 자유지상주의 이론으로 읽히기도 하고, 자유가 보장되어야 하는 이유인 효용에 중심을 둔다면 독자는 그에게서 공리주의자의 모습을 볼 수 있다. 다소 애매하게 쓰인 그의 서술은 이렇게도 저렇게도 해석을 할 여지가 있다. 그러나 이 글의 목적은 밀을 통해서 여러 의미로 통용되는 자유주의가 갖는 공통의 특징을 살펴보는 것에 있다. 또한 그렇게 노출된 자유주의가 지금 우리 사회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에 대해서 말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
자유주의적 자아-원자
밀의 영향을 받은 자유주의는 원자로서의 인간관을 설정한다. 밀이 말한 "내면의 힘에 따라 온 사방으로 스스로 자라고 발전하려 하는 나무"와 같은 인간은 자신 안에 자신이 나아가야 할 방향을 이미 선취하고 있으며 자신에게 다가올 실현을 모두 잠재하고 있는 존재이다. 관습, 전통은 개인에게 개체성을 드러나게 하기보다는 다른 것에 기대는 타성에 젖게 하기 때문에, 각각의 개인들은 그것에 영향을 받기보다는 비판해야 한다. 어떠한 것에도 영향을 받지 않은 채 세계를 판단할 수 있는 원자들은 태초부터 완전해야 한다. 완전하다는 것은 다른 것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는 의미이다. 그러므로 자유주의의 개인은 세계에 홀로 있는 관찰자이며 단수의 원자이다.
이러한 원자에는 결핍이 없다. 원자는 기존의 관습과 전통, 타자와 만남에 대한 갈구가 없다. 모든 관심은 자신의 결핍으로부터 나온다. 목적은 언제나 목적을 추구하는 대상에게 없는 것을 충족시키려는 과정에서 시작한다. 자신 안에 부족함이 없는 존재에게는 목적이 없다. 그런 의미에서 원자로서의 주체는 다른 것에 대해 관심을 두지 않는다. 자유주의적 주체는 타인에 대해 관심을 두지 않는다. 더 이상 쪼개질 수 없는(in+divide) 하나의 원자, 개인(individual)은 탄생과 동시에 완전하다.
원자 이론은 그 자체로 타당하지 못하다. 그 이유는 첫째, 원자가 필요로 하는 완전이란 개념이 성립할 수 없는 것이기에 그렇다. 완전하다는 것은 다른 것과 구별되는 것으로서의 하나를 의미하지 않는다. 완전하다는 것은 비교할 다른 대상이 없는 한에서만 그럴 수 있다. 완전하다는 것은 유일하게 하나인 존재에게만 허용되는 수식이다. 원자 이론은 개인이 여러 개인들 중에 하나로 있는 것을 지칭하지 않는다. 그것은 개별자가 다른 모든 것을 포함하거나 혹은 다른 모든 것을 없앤 이후에만 성립할 수 있는 이론이다. 하지만 나 이외의 것을 없애는 투쟁이든, 나와 다른 모든 것을 내 안에 포함시키는 과정이든 간에 이미 그 활동들은 주체가 유일한 원자가 아님을 말해주고 있다.
둘째, 나는 이미 나를 앞질러 세계에 속해 있다. 나 이전에 나는 세계를 구성하는 의미들과 다른 존재들과 함께 한다. 개인은 그 자체로 완전한 것이 아니라 주변의 것들에 영향을 받는다. 그 어떤 원자도 기존 사회의 침전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 심지어 모든 것을 전복시키는 혁명조차도 여태 있어왔던 것의 영향으로부터 자유롭지 않기 때문이다(혁명의 시작은 분명 기존의 부조리한 것에 대한 분노에서 출발한다).
또, 세계 내에 내가 있다고 말하는 것은 이미 내가 누군가의 곁에 있음을 고백하는 것이다. 내가 완전히 고립될 수 없다는 것에 대한 자각이다. 이것이 존재의 진리이다. 서로에게 관심을 가지지 않는다는 것은 존재하지 않겠다는 것과 다름없다. 자유주의적 자아는 있지만 있지 않기를 선언한다.
원자의 생존 전략-관용
밀은 인간마다 가지는 개별성이 드러나면 날수록, 사회의 효용이 높아진다고 말했다. 이 말에서 밀이 사회, 공동체를 상정했음을 볼 수 있다. 그러나 사회 발전과 개체성의 발전이 동일시될 때, 사회는 개인들로 이루어진 합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닌 것이 된다. 여러 사람이 있다는 차원에서 논해져야 할 정치적인 문제가 개인의 자질 문제로 그 층위를 바꾸는 것은 이런 문제의식 아래에서다.
각각의 개인들은 다른 것을 요하지 않는 원자라는 자신에게 충실하기 위해 값을 지불해야한다. 나 이외의 것 모두에 대한 전투에서 승리해야 한다는 대가, '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 상태'가 바로 그것이다. 그러한 투쟁은 자신의 기준으로 모든 것을 규정할 수 있는 것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자신이 타인에 의해 맞춰져야 하는 위험이기도 하다. 그들은 그러한 위험을 '관용'으로 해결한다. 관용은 자유주의 체제에서 고귀한 덕으로 승격된다. (웬디 브라운의 <관용>(이승철 옮김, 갈무리 펴냄)은 이 과정을 자세히 보여준다.)
관용은 '남의 잘못을 너그럽게 받아들이거나 용서함'이다. '남의 잘못을 너그럽게 받아들이'고 '용서함'은 개인적·도덕적 층위에서 일어난다. 다수의 인간들이 일으키는 갈등인 정치적 문제는 당연히 여러 사람이 있다는 전제 조건 아래에서 해결되어야 한다. 그러나 자유주의 체제에서는 복수(plurality)의 인간 사이에 일어나는 문제가, 관용이란 이름으로 단수의 인간 차원으로 개인 내면의 자질로 그 위치를 바꾼다.
문제를 해결하지 않고 견디는 관용을 가진 개인에 의해 자유주의적 정치는 구성된다. 여럿의 인간이 일으키는 갈등에 대한 해결을 개인 내면에 자질로 대체하는 순간, 정치를 관용으로 대체시키는 순간, 자유주의는 문제를 풀지 않고 유보하게 된다. 자유주의는 '정치 없는 정치철학'이 된다. 관용, 개인적 차원에서 정치적 갈등을 참아내는 것에는 화해를 통한 갈등의 해소가 없다. 타자는 언제나 타자로서만 인정된다. 타자에 대한 나의 폭력성은 드러내지만 않는다면 그 자체는 정당한 것으로, 존중받아야 할 것으로 인정된다.
권력을 가진 이가 자유주의를 사랑하는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 여러 사람들 간에 논의는 언제나 세상을 바꿀 정치적 힘을 내포하는데, 개인 내면으로의 침잠은 그것을 담보하지 않기 때문이다. 권력자가 자신을 온전히 보전할 수 있는 수단으로 관용은 작용한다. 법으로부터 배제된 동성애자들을 법 안으로 끌어들이는 것은 허용할 순 없지만 그들을 개인적으로는 인정하겠다는 미국 전 대통령 부시의 말, 지난 5·18 민주화운동 기념식에서 관용을 강조한 대통령의 말과 동시에 일어난 '임을 위한 행진곡'에 대한 저지는 정치가 관용으로 대체되는 상황을 잘 보여준다.
그럼에도 자유주의
▲ <자유론>(존 스튜어트 밀 지음, 서병훈 옮김, 책세상 펴냄)
이런 논리적 부당함을 내포하고 있는 자유주의는 극복의 대상일까? 불행히도 그렇지 않다. 자유주의의 주체는 분명 '상호무관심'한 개인들이다. 자유주의 아래에선 개인들 간의 연대가 생길 수 없다. 연대를 통해서 일으킬 수 있는 정치적 변혁 역시 나타날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유주의는 각 개인에게 침해당할 수 없는 권리를 보장해준다. 현재 대다수의 한국인이 위협받고 있는 자유라는 권리를 불가침의 영역으로 지켜준다.
자유주의는 내가 광장에 나가 의견을 표출할 수 있을 자유를 보장해준다(사실 사람이 들어가지 못하는 광장이란 말 자체가 형용모순인데, 광장의 정의는 '많은 사람이 모일 수 있게 거리에 만들어 놓은, 넓은 빈터'이기 때문이다). 자유주의는 '양심의 자유'뿐 아니라 다른 것을 꿈꾸는 '사상의 자유'까지 담보해준다. 자유주의에 의해 확보되는 '사상의 자유'는 국가 보안 따위에 가로막혀 표출될 수 없는 것이 아니다.
자유주의의 세계에서는 방송인의 정치적 성향으로 그를 방송에서 하차하게 하는 '촌스러운' 짓이 설 자리가 없다. 정부를 비판하는 동영상을 본 사람에 대해 권력이 부당한 처우를 하는 것 역시 일어날 수 없다. 많은 이가 자유를 누리지 못하는 지금 이 시대가 간절하게 자유주의의 시대가 되길 바란다.
/정순준 한국철학사상연구회 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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