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성을 생각한다]
"이건희 복귀, 삼성 노동자는 왜 침묵하나"
<프레시안>
이건희 경영 복귀, 반성은 없었다
이건희 회장이 삼성그룹의 회장으로 복귀했다. 2008년 4월 22일 퇴진을 선언한 지 23개월 만에 다시 경영진으로 복귀했다. 이것은 단지 한 개인의 경영 복귀가 아니다. 그것은 이 회장의 퇴진과 더불어 해체되었던 전략기획실이 부활한다는 것도 뜻한다. 삼성 사장단협의회가 이건희 회장의 경영 복귀를 건의했다고 하지만 김용철 변호사의 책 <삼성을 생각한다>에 따르면, 사장단협의회란 핫바지요 얼굴마담일 뿐이니, 그건 영화 <왝더독>의 제목처럼 꼬리가 개의 몸통을 흔든다는 얘기다.
23개월이나 쉬었으니 그동안 충분히 반성했을 거라고 생각해야 하나? 하지만 언론 보도에 따르면 이건희 회장은 삼성그룹 공식트위터에 "지금이 진짜 위기다. 글로벌 일류 기업들이 무너지고 있다. 삼성도 언제 어떻게 될지 모른다. 앞으로 10년 내에 삼성을 대표하는 사업과 제품은 대부분 사라질 것이다. 다시 시작해야 된다. 머뭇거릴 시간이 없다. 앞만 보고 가자"라는 글을 남겼다고 한다. 23개월 동안 반성한 사람의 기운보다는 와신상담의 기운이 느껴진다. 비록 지금은 내가 저런 것들에게 밀려서 경영에서 손을 떼지만 언젠가는 반드시 복귀하고 말리라. 그런 기운을 느낀 건 나뿐일까?
'징역 3년형' 받은 범죄자가 당당한 세상
그리고 돌이켜보면 그동안 방송들이 토요타의 위기와 동계올림픽의 경제적 효과를 열심히 떠든 건 이건희 회장의 경영 복귀를 위한 사전포석이었던 것 같다. 이건희 회장의 입장에서 보면 참으로 고마운 토요타, 고마운 김연아, 고마운 금메달의 얼굴들이다. 아마도 이런 수순을 염두에 두고 방송사들은 그토록 열심히 토요타와 동계올림픽을 외쳤을 것이다. 이제 경영복귀 선물로 청년 실업자들에게 일자리만 좀 나눠주면 모두가 '올레'라고 외칠 분위기이다.
하지만 이건희 회장의 복귀는 '유전무죄, 무전유죄'라는 우리 사회의 오래되고 서글픈 코미디를 다시금 재현한다. 말도 안 되는 재판으로 떼어낼 수 있는 죄를 다 떼어내고도 '징역 3년형'을 받은 범죄자가 아무런 합의도 없이 사면되고 이제는 다시 경영일선으로 돌아온다. 그나마 다른 범죄라면 또 모르겠다. 경영 과정에서 회사에 막대한 손해를 입히고 세금을 몰래 빼돌린 죄를 지은 사람이 경제 위기와 경영 리더십을 핑계 삼아 복귀하는 게 상식적으로 말이 되는가? 정상적인 생각을 가진 사람이라면 어떤 반응을 보여야 할까?
정치 민주화에 정신 팔린 사이, 곳간이 털리고 있었다
◀ <나쁜기업>(한스 바이스·클라우스 베르너 지음, 손주희 옮김, 프로메테우스 펴냄). <삼성을 생각한다>와 함께 읽으면 좋은 책이다. ⓒ프레시안
그런 점에서 김상봉 선생의 글은 매우 반가웠다.(☞관련 기사: "지금 당장 '삼성 불매 운동'을 제안합니다!") 한국만이 아니라 전 세계에서 초국적 기업들의 영향력이 강해지고 있을 뿐 아니라 곳곳에서 분쟁과 전쟁을 유도하고 있다.
나오미 클라인의 <쇼크 독트린>이나 한스 바이스의 <나쁜 기업: 그들은 어떻게 돈을 벌고 있는가>를 보면 그들이 나쁘고 끔찍한 일들을 벌이는데 얼마나 많은 노력을 쏟고 있는지를 잘 알 수 있다. 국가의 민주화에만 정신이 팔려 자기 곳간 털리는 줄 모르고 사는 우리에게 김상봉 선생은 그들의 만행을 주목해야 한다고 경고하고 있다. 사실 삼성이라는 거대한 제국에 맞서 소신 있게 자기 얘기를 할 수 있는 대학 교수가 한국에 몇이나 될까?
불매 운동의 한계 : '자본주의 너머'도 보자
그렇지만 불매 운동을 벌이자는 얘기에 공감하면서도 조금 걱정스럽기도 했다. 자본주의사회에서 소비자 운동이 가진 힘은 크다. 국가가 통제할 수 없는 자본도 소비자들의 힘이 모이면 자본을 무너뜨리지는 못할 지라도 그것을 통제할 힘이 생길 수 있다.
하지만 회장님의 권력을 박탈해 권좌에서 끌어내리고 삼성을 해체하는 작업이 불매 운동으로 가능할지는 의문이다. 왜냐하면 경제와 소비에 대한 새로운 철학과 윤리를 마련하는 것과 불매 운동은 다른 과정을 요구하기 때문이다. 불매 운동은 그 회사의 제품을 구매하지 않거나 다른 회사의 제품을 대신 구매하는 자본주의 속의 운동이고, 삼성을 해체하고 경제에 대한 새로운 철학과 윤리를 마련하는 일은 자본주의 너머를 봐야 하기 때문이다.
자본주의와 정의로운 국가, 양립가능한가?
◀ <쇼크 독트린>(나오미 클라인 지음, 김소희 옮김, 살림Biz 펴냄). <삼성을 생각한다>와 함께 읽으면 좋은 책이다.
이런 점이 뒤섞이니 토지정의시민연대 이태경 사무처장처럼 불매 운동을 '구좌파적 상상력'으로 이해하는 경우도 생긴다.(☞관련 기사: "삼성 해체가 답인가?", "삼성 임직원 전체를 적으로 돌리지 말라") 그런데 자본주의 속에서 "공정하고 건강한 시장경제를 운용할 수 있는 강하고 유능하고 정의로운 국가의 구성에서 실마리를 찾을 수 있을 것"이라는 주장 역시 '낡고 순진한 상상력'이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시장경제를 운용하는 강하고 정의로운 국가를 찾는 건 논리적인 모순이고 자본주의가 발전해온 역사적인 과정을 잘못 이해하고 있다. 국가의 도움 없이 지금의 자본주의가 어떻게 만들어질 수 있었단 말인가?
이건희 가신들이 불법 일삼을 때, 삼성 직원들은 무엇 했나?
그리고 삼성그룹을 이건희 일가나 그들의 가신 그룹과 구분할 수 있을까? 이건희 일가와 가신 그룹이 각종 탈법과 불법을 일삼을 때, "국가의 지원과 국민들의 성원, 소속 임직원들의 노력"을 통해 만들어진 삼성이 그런 길을 걸을 때, 삼성그룹에서 일하는 수많은 사람들은 도대체 무엇을 하고 있었을까?
아주 사악한 소수의 사람들과 그들에 의해 지배당하는 착한 다수의 사람들이라는 구도가 그대로 삼성에 적용될 수 있을지 모르겠다. 물론 그 피라미드의 가장 위에는 이건희 일가가 있겠지만 그 중간에는 무수한 사람들이 '그 일가를 위해' 일을 하고 있고 스스로 그런 질서를 받아들이고 있다. 그것을 받아들이는 사람들이 없었다면 23개월의 공백 동안 삼성그룹 내에서 어떤 변화가 일어났어야 하는 게 아닐까? 그리고 정상적이라면 삼성전자의 노동자들이 부패한 경영자의 복귀를 반대해야 옳은데, 그런 일이 실제로 벌어질까?
돌아가신 함석헌 선생은 '씨알'이라는 말을 통해 스스로를 부정하며 참된 나로 거듭나는 과정을 강조했다.
"씨알아, 네가 스스로 눈을 감지 않는데 네 눈을 가릴 자가 누구란 말이냐? 네가 스스로 입을 다물지 않는데 누가 네 입을 틀어막는단 말이냐? 네가 참을 참대로 보는 것과 그것을 그대로 말하는 것 밖에 또 무엇을 아낄 것이 있는 듯해 너는 눈을 감고 입을 다물었느냐? 그러나 속고 나면 속았구나 하는 것이 민중이요, 속았구나 하면 분하다 분하다 못해 내가 잘못이지 하는 것이 민중이다. 그러나 스스로 속였구나 할 때 속움직임이 있다. 거기서 새 역사의 걸음이 시작된다."
"지금이 삼성 불매 운동의 적기다"
불매 운동은 바로 이런 새 역사를 쓰는 첫걸음이어야 한다. 그래서 불매 운동은 다른 운동들처럼 운동의 목표를 분명하게 잡아야 성공할 수 있다. 삼성그룹 해체라는 목표는 사실 허깨비처럼 잘 잡히지 않는 목표이다. 오히려 삼성에 대한 불매 운동은 그룹의 해체보다 삼성그룹의 지배 구조를 바로잡는 것을 목표로 삼는 것이 가능한 목표이다. 그러니 지금이 딱 좋은 시점이다. 이건희 회장과 그의 가신들이 경영에서 손을 떼고 삼성에서 일하는 노동자들이 노동조합을 만들고 제 목소리를 낼 수 있을 때까지 불매 운동을 벌여야 한다. 삼성의 해체 또는 삼성의 전환은 또 다른 과제이다.
불매 운동이 자본주의를 넘어서는 대안의 경제를 만들지는 못한다. 삼성에 대한 불매가 그와 비슷한 처지인 다른 재벌가의 상품을 구매하는 것으로 이어진다면 운동이 거둔 성과는 제한되기 때문이다. 그동안 재벌가들이 저질러온 범죄들을 보면 하나같이 경영자가 하지 말아야 할 범죄들이기 때문에 삼성만 해체한다고 한국경제가 바뀌지는 않는다.
"삼성이 견제받고, 다른 재벌도 눈치 좀 보게 하자"
한국 경제를 바꾸는 것은 구좌파적 상상력이 아니라 진정한 좌파적 상상력을 요구한다. 아니, 좌우를 넘어선 상상력을 요구한다. 인간이나 생명을 도구가 아니라 목적으로 간주하는 경제는 지금과 같은 정치경제 구조로 실현될 수 없다. 요즘 많이 얘기되는 사회적 경제나 기본소득들을 우리 사회와 접목할 수 있는 구체적인 방법들을 찾을 때에만 대안적인 경제의 가능성이 보일 것이다.
그런데 이것은 김상봉 선생의 말처럼 많은 논의를 필요로 하는 부분이기에 길게 보며 함께 논의하고 결정할 과제이다. 지금 당장 할 수 있는 행동은 삼성 제품을 사지 않고 주변 사람들에게도 삼성 제품을 사지 말아야 할 이유를 얘기하고 나누는 것이다. 그런 논의가 우리 사회에 널리 퍼져 삼성이 견제를 받고 다른 재벌들도 덩달아 눈치를 좀 보게 해야 한다. 자신들의 실패를 소비자에게 고스란히 떠넘기고 단합하고 독점하며 소비자를 착취하는 재벌들을 우리 손으로 통제해야 한다.
삼성맨 아닌 삼성맨들…오만한 삼성, 우리가 키웠다
그동안 아무런 행동을 취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들이 우리를 이토록 깔보고 무시하는 것이다. 우리가 그들을 그렇게 키운 것이다. 삼성은 그 사람을 눈곱만큼도 생각하지 않는데, 스스로 나서서 삼성을 생각하고 챙기는 이상한 오지랖들(알바인지 모르지만)이 제법 많다. 삼성에게 10원짜리 한 장 받아본 적 없을 것 같고 앞으로도 받을 일이 없는 사람들이 마치 삼성맨처럼 얘기하며 삼성을 옹호한다.
그만큼 우리 삶이 불안하고 위태롭다는 이야기이다. 불안하고 위태로우니 무작정 강자가 잘 되어서 떡고물이라도 떨어지길 기대하지만 인류 역사를 돌이켜보면 그런 일은 아주 드물다. 오히려 지금 있는 곳에서 내쫓기지나 않으면 다행이다.
복고풍이 유행인 세상이지만 과거가 우리의 답이 될 수는 없다. 엉뚱한 사건들이 맞물리며 하나씩 과거로 돌아가고 있다. 이건희 회장의 복귀 역시 복고풍의 흐름을 타고 있다. 우리 뒷 세대에게 부끄러운 모습을 더 이상 보이고 싶지 않다면, 그리고 삼성그룹의 노동자들이 진정 노동자로 살고 싶다면, 한국의 시민이 시민으로 살고 싶다면 지금 바로 불매 운동을 시작해야 한다. /하승우 지행네트워크 연구활동가
[삼성을 생각한다]
답은 '정치의 회복'이다
"광고에 마취된 정신을 일깨울 때"
<프레시안>
<삼성을 생각한다>라는 책이 장안의 화제다. 첫 문장이 나오는 3쪽 '추천의 글'은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 대표 전종훈 신부의 "삼성 이건희 일가와 가신들의 비자금, 로비, 경영권 불법 승계 등…"으로 시작한다.
"물질과 평판에 대한 욕심이 가라앉자, 앞으로 내가 할 일이 또렷하게 보였다. 소박하게 살아가는 이들을 끝없이 타락시키면서 '악의 축'으로 군림하는 재벌의 실체를 고발하는 것, 양심고백을 결심했다"는 게 저자 김용철 변호사의 말이다. 마지막 쪽을 열어 보니 474페이지란다. 이명박 대통령의 공약인 '747'이 떠오르면서 입가에 웃음이 밴다.
'삼성'하면 우선 떠오르는 것이 이병철의 '사카린 밀수 사건'이다. 사카린이 뭐지? '화학식 C7H5NO3S. 분자량 183.19, 녹는점 229도' 라는데 전공 아니면 알 수 없다. 인공 감미료라는 것 정도를 넘어 특별히 많이 알아야 할 필요도 없다. 그러나 눈에 번쩍 띄는 낱말은 '밀수'다. 범죄란 말이다. 돈을 벌겠다고 일명 '돈'병철이라는 이건희 아버지가 죄를 지었다는 말이다. 그 아버지에 그 아들인가? 죄 지은 자는 그에 합당한 처벌을 받아야 하는데 한국은 미개인들의 나라야 뭐야. "이거 아니잖아" ('개그콘서트'에 나오는 '동혁이 형'의 말)
기업의 이익과 국가의 이익은 아무런 상관관계가 없다. 기업이 돈 벌어 국민이 잘 살게 되었다는 말은 돈 벌은 그들만이 할 수 있는 거짓말이다. 삼성이 돈 벌었으면 국민인 내가 잘 살아야 그들의 말이 맞는데 전혀 그렇지가 않으니 당연한 논리다. 노숙자들이 넘쳐나는 판국에 자본의 연결고리인 기업 이익이 늘어난들 서민대중의 평등, 평화를 좀 먹는 신자유주의의 병폐만 더없이 난무할 따름이다.
김용철 변호사는 "노무현 정부 고위 당국자도 나서서 나를 회유하고 협박했다"고 했다. 참여정부 시절, 어느 사회 원로는 김 변호사에게 "삼성의 비리를 밝혀내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너만 바보 되고 비참한 생활을 하게 될 것이다"라고 했다. 노무현 정권의 결과는 다들 아시다시피 처참했다. 이명박 정권의 실정이 참여정부의 면죄부가 될 것이란 착각은 더 이상 통하지 않는다.
김 변호사의 양심고백이 있기 직전, 삼성구조본 홍보팀장이었던 윤순봉은 김 변호사에게 "언론은 모두 장악되어 있다"라고 했다. 과연 장악되어 있는 것인지, 장악이 가능한 것인지, 장악한다고 결과가 항상 좋은 것인지는 좀 더 두고 볼 필요가 있다. 재벌들이 고개 처박고 슬슬기던 전두환 정권은 언론을 장악하지 못했기에, 미흡하나마 단죄되었던가? 그렇지 않다. 그렇다면 이제, 삼성의 언론장악은 어떻게 이루어졌고 어떻게 소멸하게 될 지를 이명박 정부와 관련하여 살펴볼 때다.
인간의 가치 있는 삶은 자신의 '육체'라는 '황무지'로부터 끊임없이 '깨어나려는 영혼'의 투쟁이다. 탐욕의 미망을 버리고 저 '산꼭대기'에까지 이르는 길고도 고통스러운 행로 속에서, 자신을 가이드해 줄 '진리'를 끊임없이 찾아 나서는 나그네 길이 인생이다. 항상, 부지런하고 경건한 진실 탐구자에게만이, '발견'이라는 결과가 주어지게 된다. 이러한 인생노정에서 대대적인 상업 광고는 어둠이 내리 깔린, 저 아래에 남겨둔, 황무지로 되돌아가게 만드는 시지프스의 신화와 닮았다.
기업의 언론 장악은 광고라는 형태의 자본 분배로 시작한다. 광고는 인종차별과 서구 우월주의도 조장한다. 모델은 국내의 유명연예인이 아니면 백인이며, 광고의 배경도 대개는 유럽과 미국이다. 광고는 세계화의 지름길이다. 광고 찍으러 비행기타고 세계 어디든지 간다. 결국은 다 소비자 돈이다. 모델료와 제작비는 광고주가 지불하는 게 아니라 소비자가 후불제로 내는 것이다. 이렇게 소비자를 담보로 한 자본여력이 있는 거대기업이 결국은 약육강식에 의해 작은 기업을 먹어치울 수밖에 없는 게 신자유주의 기업환경이다.
마르크스의 <자본론> 1권 '상품물신주의' 라는 장에서 "노동의 산물", "생산자들의 관계", "사회적 관계" 등의 용어들이 나온다. 따라가기는 쉽지 않다. 하지만 하나의 기본 개념을 이해하면 따라가기가 쉬워진다. 마르크스는 차, 컴퓨터, 소프트웨어, 구두, 가구, 책 등 세상의 모든 상품들이 존재하는 것은 누군가 자신의 개별 '노동력'을 그것을 생산하는 데 투입했기 때문이라고 본다. 심지어 우리가 어떤 상품을 사기 위해 사용하는 화폐도 누군가의 노동에 의한 생산품이다. 그러나 신자유주의에서 노동은 철저하게 무시된다. 약육강식의 논리에 따른 자본의 횡포만이 살벌하다.
광고는 소수 대기업의 막강한 권력을 유지시켜 주는 핵심적 요소이다. 기업들은 단지 상품을 팔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들의 정치적 영향력을 유지하기 위해 신문, 잡지, 방송, 인터넷을 필요로 한다. 대기업은 자신들에게 호의적인 매체를 필요로 할 뿐 아니라 그것을 소유한다. 기업의 권위는 광고 물량에 비례해 높아진다. 엄청난 광고 물량은 기업을 모르는 사람이 없게 만들고 그런 사실은 기업에 대한 공신력을 높인다.
광고를 통해 획득된 높은 판매고는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잘못을 저지를 수는 없다"는 가정 속에서 다시 기업의 권위를 증명해주는 근거로 쓰인다. 기업의 광고 이미지가 법률심판의 본질을 가리는 대표적 경우가 삼성이다. 광고는 경영권 불법 승계와 조세포탈 혐의 등으로 기소된 전 삼성그룹 회장 이건희의 사법부 재판진행 관심도마저 떨어뜨린다. 최종심 결과가 한국 미래경제에 미칠 파장 등에 국민들은 관심을 덜 갖게 된다. 국민들은 인지부조화의 미궁 속을 헤매게 된다.
억만장자들은 원래 인간 불평등에서 이득을 얻기 때문에 거의 대부분 가난한 사람의 이익 증진에 격렬히 반대한다. 노골적인 정치적 견해를 밝히지 않는 방송조차 광고주의 요구 때문에 자본의 이익을 증대하라는 부추김을 받게 된다. 삼성이라는 광고주는 각 매체에 다량의 광고를 한 후 삼성 이건희의 부정적인 내용을 포함한 기사를 보고 싶어 하지 않는다. 심지어 특정 매체에는 광고를 아애 주지 않음으로써 압박하기도 한다. 미디어의 절대 다수는 우리의 정치·경제적 선택을 왜곡해 전달함으로써 진실보도를 제한하는 일에 한몫을 한다. 부정한 자본의 미디어 통제는 바로 진실을 보지 못하도록 시민의 눈을 가려온 거대한 벽이다.
우리나라 헌법 119조 2항은 "국가는 균형 있는 국민경제의 성장 및 안정과 적정한 소득의 분배를 유지하고, 시장의 지배와 경제력의 남용을 방지하며, 경제주체간의 조화를 통한 경제의 민주화를 위하여 경제에 관한 규제와 조정을 할 수 있다"고 명시하여 권력이 시장의 우위에서 서민대중의 보다 나은 삶을 위한 정책을 펼칠 수 있음을 밝히고 있다. 이에 우리 시민들은 자본권력의 횡포를 올바로 인식하는 지혜가 필요하다.
"권력은 이미 시장으로 넘어갔다." 이 말은 2005년 5월 16일 고(故) 노무현 전 대통령이 기업인들과의 토론회에서 한 말이다. 이 발언에 담긴 의미는 다양하다. 헌법 제 1조에 의해 국민으로부터 나온 권력을 올바로 행사할 생각은 못했다는 것이다. 스스로 시장으로 권력을 넘겼다는 의미라면 이는 국민을 슬프게 하는 것이다. 이명박 정부는 더 심하다. 서민대중의 보다 안락한 삶에 대한 기본적인 철학이 없다. 정치를 시장 세계화, 신자유주의 경제의 예속물로 만들어 버린 1등 공신이다. 부익부빈익빈의 양극화 현상을 심층 극대화시키는 장본인이다.
이미 시장으로 넘어간 권력이라면 그 힘을 되찾아, 국민에게 도로 돌려주어야 한다. 그러한 노력을 포기해버렸기에 마침내 국민은 이명박 정권에 등을 돌리고 말았다. 정권은 유한하고 국민은 무한하다. 그 결과로 빚어지는 것은 결국 이명박 세력의 운명을 달리 하는 계기가 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이 또한 국민의 착하고 여린 심성에 상처를 주는 무례함이요 우둔함이라 아니할 수 없다.
정치인의 영원성은 국민 절대다수인 서민대중의 생활건강과 복지향상을 최우선한 정치에 있다. 경제주권의 헌납이라는 한미FTA의 예에서 보듯 세계화 신자유주의 '경제'에 끌려 다니는 예속의 '정치'가 아니라 적절한 보호무역의 병행으로 자국의 번영을 더 높이는 협상력의 '정치'가 회복 되어야 한다. 두루 국민이 잘 사는 평등 경제에 대한 정치의 배신을 국민이 배척함은 만고불변의 진리다.
<삼성을 생각한다>는 가격의 다소를 차치하고 신자유주의가 미칠 부정적 파장을 예고하는 가치를 행간 가득히 담고 있는 멋진 책이다. 서민대중의 보다 편안한 삶을 위한 어더한 노력도 배제한 독단의 정치는 곧 몰락이다. 이러한 패망의 정치사를 거듭한 대한민국 역사에 대한 무지는 재벌가나 권력자나 국민 모두에게 있어 전부 피해자일 수밖에 없다. 이명박 정권은 국민에게 희망을 심어주어야만 한다. 그러나 시장과 국민의 힘 사이의 권력 향방에 대한 오판이 스스로의 화를 자초하는 참담한 결과라는 것을 모른다는 것이 이명박 정권에 대한 말할 수 없는 안타까움이다. 아! 대한민국….! /김학찬 독자
[삼성을 생각한다]
"악마는 사라졌다. 과연?"
"삼성왕국, 포스트민주화 시대의 우울한 초상"
<프레시안>
나는, 악한 사람들이 죽어서 무덤에 묻히는 것을 보았다. 그런데 사람들은 장지에서 돌아오는 길에 그 악한 사람들을 칭찬한다. 그것도 다른 곳이 아닌, 바로 그 악한 사람들이 평소에 악한 일을 하던 바로 그 성읍에서, 사람들은 그들을 칭찬한다. 이런 것을 보고 듣노라면 허탈한 마음 가눌 수 없다.
―'전도서' 8장 10절
프톨레마이오스 제국 치하(기원전 301~198년)의 유다는 오랜만에 누리는 평화를 만끽합니다. 그런데 바로 이 시기에 '코헬렛'(Qohelet, 전도자)이라고 자칭하는 한 노학자는 '헛되다'는 말을 무려 30여 회나 내뱉으며 독한 냉소주의문학을 저술합니다. 그의 글은 "전도자가 말한다. 헛되고 헛되다. 헛되고 헛되다. 모든 것이 헛되다."(1,2)로 시작하고, 이 글이 저작된 후에 첨가된 12장 9~14절을 제외하면, "전도자가 말한다. 헛되고 헛되다. 모든 것이 헛되다(12,8)"로 끝을 맺습니다. 왜 그는 이 평화의 시대에 그토록 독한 냉소주의에 빠져야 했던 것일까요.
기원전 332년 알렉산드로스 대왕이 이끄는 무적의 군대가 팔레스티나로 진군하자 사마리아와 예루살렘의 지도자들은 저항 없이 곧바로 항복을 합니다. 그리고 323년 이 새 제국의 군주가 요절한 뒤, 그의 휘하 장군들 사이의 치열한 전쟁이 벌어집니다. 기원전 301년 이집트에 터잡은 프톨레마이오스 장군의 제국에 병합될 때까지 팔레스티나는 혹독한 전쟁의 참화를 겪어야 했습니다. 하지만 그 이후 백 년 남짓의 기간 동안 이곳에는 거의 전쟁이 없었습니다. 식민지이긴 하지만 오랜만에 누리는 평화였습니다.
알렉산드로스의 다른 장군들이 세운 나라들에 비해 프톨레마이오스 제국은 정치적으로 매우 안정되었고 경제적으로 크게 번성했습니다. 전례 없이 안정된 중앙집권적 체제 아래 제국은 각 지방의 농민들에게 개량된 농법, 농기구, 새로 개발된 태양력에 기초한 과학화된 농경주기를 보급했고, 국제무역에서 유리한 작물 경작을 유도했습니다. 그리고 화폐제도를 확산시켜 무역의 효율성을 크게 진작시켰습니다. 그래서 헬레니즘 제국들 여기저기 건설된 폴리스 간 국제무역이 대단히 활발해졌습니다.
한편 프톨레마이오스 제국의 수도 알렉산드리아에는 거대한 도서관이 건립되고 있었습니다. 70만 권이라는 어마어마한 장서로 유명한 이 도서관 건립을 위해 제국은 막대한 기금을 쏟아부었습니다. 특히 책을 필사하여 복사본을 만드는 서기관의 수효가 급증하고, 체계적이고 전문적인 서기관 교육시스템이 제도화됩니다. 문자 능력이 출중한 중산층 엘리트가 대량으로 탄생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들 중 적지 않은 이들이 경제적 활황으로 부를 축적한 서민 계층에서 배출되게 됩니다.
그리고 이것은 제국 전역에 지식운동을 활성화시키며, 바로 이런 맥락에서 유다에서 이른바 '지혜'라는 장르의 문학이 태동합니다. 과거 왕실 사제나 서기관들이 저술한 문헌인 율법서나 역사서는 왕과 귀족의 나라, 그 뿌리와 비전을 다루었는데, 이들 신흥학자들인 민간서기관들의 지혜 문서들은 대중의 일상적 삶의 질서를 언어적으로 체계화하는 것, 곧 일상적 경험을 성찰하는 가르침을 다룹니다.
그런데 그런 지혜문헌 학자들이 많은 활약을 하고 있는 시기에, 코헬렛이라는 한 노학자는 그 지혜들에 짙은 냉소의 말을 쏟아내고 있는 것입니다. 지배적인 지혜들이 평화로운 세계를 만끽하면서, 이런 세상에서 하느님의 뜻에 따라 올바르게 사는 법을 말하고, 그것이 풍요와 안정, 건강이라는 신의 축복으로 이어질 것이라는 인과응보의 진리를 설파하고 있는데, 코헬렛은 그 모든 것이 헛될 뿐이라고 말합니다.
제국이 제공해준 안정과 번영의 토대 위에서 많은 야훼의 현자들이 행복한 표정을 지으며 악이 소멸해가는 세상의 가능성에 탐닉하고 있는데, 오늘 읽은 본문처럼, 코헬렛은 악한 자가 죽어도 그 악행이 자행되던 바로 그 곳에서조차 칭송받는 세상을 절망스럽게 냉소합니다. 악마가 사라지고 있다는 바로 그 시대에 악마는 사람들의 공모 속에 칭송받으며 일상과 동거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실 바로 이 시기에 새로 부자가 된 평민들이 많았지만, 막대한 세금을 강탈하는 프톨레마이오스 제국 특유의 조세체제 아래서 더욱 많은 이들이 몰락하고 있었습니다. 많은 이들이 자신의 생각을 글로 남기게 된 시기에 여전히 문맹인 더 많은 이들은 주체의 조건을 더욱 상실해갔던 것입니다.
느헤미야-에스라 이후 유다(예후다)는 명실상부 자치구가 되었습니다. 바야흐로 총독사회가 안착한 것입니다. 하지만 이들이 남겨둔 갈등의 축은 여전히 유다 지방 내부를 휘두르고 있었습니다. 이 싸움은 성전을 장악하기 위한 싸움이었습니다. 그 과정에서 분명해진 것은 유다 지방의 핵심은 성전이라는 점, 그리고 성전의 수장, 곧 대사제는 이 사회의 지배자임을 의미하게 되었다는 점입니다. 그래서 군주제가 총독통치를 경유한 뒤 '사제들의 사회'가 된 것입니다. 물론 사제들의 시대에도 군주 혹은 총독 같은 세속통치자가 있었지만, 대중의 정신을 지배하여, 슬프게도 하고 기쁘게도 하며, 절망하게도 하고 희망에 차게도 하는 것은 바로 사제들이 주도하는 신정체제사회가 된 것입니다.
한편 우리사회가 권위주의적 국부독재체제에서 민주정부들을 거친 뒤 포스트민주화를 향한 길을 찾아 나서고 있는 중이라고 한다면, 그것은 지금 어떤 양상으로 가시화되고 있는 것일까요. 나는 군인들의 합리성이 사회 전체의 합리성이 되어야 한다고 강요받던 시대가 반독재 민주화운동 특유의 문화적 성향이 대안적 합리성으로 수용되었던 시대로 이행했으며, 그것은 다시 최근 기업가들의 합리성을 전 국민에게 강요하는 시대로 나아가고 있다고, 우리사회 현재적 변화를 이야기한 바 있습니다.
그런데 요즘 출판가를 강타하고 있는 김용철 변호사의 <삼성을 생각한다>를 읽으면서 나는 이 생각을 계속하면서도 약간 다르게 읽는 것이 필요하다는 상념에 빠져들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우리사회의 민주화가 본격 가동된 것은 정권교체를 이룩한 1997년부터라고 할 수 있는데, 국민의 정부와 참여정부라는 두 번의 민주정부들의 실험은 공히 두 가지 목표를 지향하고 있었습니다. 알다시피 그 하나가 '민주화'이고 다른 하나는 '성장'입니다. 민주화는 권위주의적 군부체제를 청산하고 시민적 주권사회를 향한 제도적 실험을 의미했고, 성장은 과거 발전국가 모델을 신자유주의적으로 재구축하는 정치경제적 제도화 과정을 의미했습니다. 그런데 민주화와 성장은 '그 10년' 내내 잘 조화를 이루지 못한 채 줄곧 갈등을 일으켜왔습니다. 하여 시민사회는 그것을 '386적인 합리성'의 한계로 이해했고 그 결과가 MB정부의 탄생으로 귀결되었습니다.
▲ '이건희 원포인트 사면'이 이뤄진 지난해 12월 30일자 '손문상의 그림세상'.
그런데 <삼성을 생각한다>를 읽다 보면 포스트민주화 체제를 추동하는 제도적 헤게모니 세력은 MB 정부라기보다는 삼성의 이건희 체제가 될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이미 삼성의 연 매출액은 국가 예산을 압도하고 있습니다. 또한 그들은 정보력에서 국정원을 능가하고 기획력에서 청와대를 압도하는 능력을 소유하고 있으며, 정계, 제계, 법조계, 학계, 언론계 등, 사회 각 영역의 여론 주도집단을 지지층으로 둠으로서 막대한 정책형성능력을 갖춘 세력입니다.
게다가 민주화 이후, 특히 MB식 막가파 정치 이후, 사회적 합의 시스템이 교란된 상황에 있는 정부에 비해, 잘 조직된 중앙집권적 전제군주체제 같은 삼성은 훨씬 효과적으로 민주화 이후 체제의 비전을 더 잘 드러내고 있는 듯이 보입니다.
시민사회는 삼성의 부당내부거래, 불법상속, 노조탄압, 정경유착 등의 부조리함에 대해 잘 알고 있음에도, 글로벌사회에서 민족적 자긍심의 핵심을 이루고 있음을 또한 각인하고 있습니다. 삼성이 없다면 국가의 성장과 시민사회의 행복을 향한 여정은 심각하게 좌초되고 말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니 '부조리함 대 자긍심' 사이의 양자택일의 귀로에 서 있는 한, 시민사회는 대체로 후자를 선택하게 됩니다.
그렇다면 내가 음울하게 상상하는 포스트민주화 시대의 모습은 기업의 합리성에 추동되는 정치 세력이 아니라 기업 그 자체다 이끄는 사회일지도 모릅니다. 사회세력간의 협상에 기초하는 정치가 아니라, 시장의 이익을 강조하는 기업이 우리의 미래를 이끌고 있다면, 더구나 그 기업이 군주제 모델에 기초하고 있다면, 그런 상상은 한 편의 치명적인 재앙의 시나리오처럼 들립니다.
그런데 시민사회는 꿈을 꾸고 있습니다. 일류국가, 일류시민이 되는 꿈 말입니다. 그것은 지구화 시대 삼성의 성공 모델에 기초한 꿈입니다. 그 과정에서 탈락자들이 무수히 있고, 그러한 탈락의 위기가 우리 자신의 목을 옥죄고 있는 그 순간에도 우리는 삼성의 꿈을 공유하기를 갈망합니다.
군부권위주의 체제는 '빨갱이'라는 악마가 필요했습니다. 그리고 민주화 시대에는 '반민주 세력'이라는 악마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기업의 시대인 포스트민주화 체제에 악마는 사라졌습니다. 낙오자와 성공한 자만 존재하고, 그 성공의 정점에 한 기업의 신화가 있습니다. 코헬렛의 '헛되다'는 주장이 겨냥하는 과녁은 우리 시대에는 바로 이 신화에 있습니다.(이 글은 김진호 목사가 지난 14일 한백교회에서 발표한 내용입니다.)
/김진호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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