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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에 비춰지는 4.19는?

세상보기---------/조리혹은부조리

by 자청비 2010. 4. 19. 10: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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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9 혁명 50돌

현대 한국사의 시대정신 발로 지금은 명정신 훼손

[한겨레]

 

"투표함에 미리 자유당표…3·15선거 역대 가장 추잡"

"학생 시위에 시민 동참…경찰이 연행된 사람 격려도"

1959년 봄 대구 경북여고에 다니던 신구자(68)씨는 교무실에서 선생님과 긴 말싸움을 벌였다. 교사는 신씨에게 "원고는 선생님이 써주고, 대학 갈 때 장학금도 나올 테니 이승만 대통령의 생일을 축하하는 웅변을 하라"고 다그쳤다. 신씨는 끝내 고집을 꺾지 않았다. "당시는 학생들에 대한 억압이 대단하던 땐데…, 그런 상황을 만든 대통령을 위해 축하 웅변 따윈 하기 싫었거든요."

 

1년 뒤인 1960년 2월28일. 학생회장이 된 신씨는 "학생들을 정치 도구화하지 말라"며 거리시위에 나섰다. 3월15일로 다가온 제4대 정·부통령 선거를 앞두고 정국은 한치 앞을 내다볼 수 없는 혼돈으로 빠져들고 있었다. 28일은 일요일이었지만, 대구에서는 이날 오후 2시로 잡힌 민주당 유세에 학생들이 참가하지 못하도록 등교한 학생들을 무작정 붙들어 놓고 있었다. 신씨는 "집에 보내주면 친구들과 곧바로 집으로 가겠다"고 교사와 약속한 뒤 학교를 빠져나와 유세장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대구 시내는 학교의 부당한 조처에 분노한 경북고·대구고·경북사대부고 학생들의 함성에 점령된 뒤였다. 이들은 대구 반월당을 거쳐 도청 근처로 행진하며 "민주주의를 살리고, 학원에 정치세력을 배제하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신씨는 민주당 유세가 열리기로 했던 방천 방향으로 가다 경찰에 잡혔다.

 

임헌영(69) 민족문제연구소장은 "3·15 부정선거의 기억은 지금도 생생하다"고 말했다. 당시 그는 안동사범학교를 졸업한 뒤 경북 의성에 있는 모교 조문국민학교에서 교사로 일하고 있었다. 그가 근무하던 학교가 투표소였다. 3인조장, 5인조장, 9인조장이라는 사람들이 있어 자기 조원이 어디에 찍었는지를 확인한 뒤 용지를 투표함에 넣게 했다. 9인조장에게는 완장도 있었다. 그는 "그런 추잡한 선거는 이전에도 이후에도 본 적도 들은 적도 없다"고 말했다.

 

이전 선거에서 꾸준히 야당 성향을 보여온 경남 마산의 부정선거는 다른 지역보다 더 심했다. 민주당 마산시당 간부들은 투표 당일인 3월15일 아침 7시 경찰 포위를 뚫고 투표소에 들어가 투표함의 4할이 이미 자유당 표로 채워진 이른바 '4할 사전투표'가 이뤄졌음을 확인했다. 1만여명의 시위대는 저녁 8시께 자산동 무학국민학교에서 시청으로 행진하며 "부정선거 다시 하라"는 구호를 외쳤다. 그 속에 마산상고 2학년생 박종학(71)씨가 있었다. 그는 "잘못된 것은 바로잡아야 한다는 생각에 여러 사람이 모였지만 그렇게 많은 이들이 죽고 다칠 거라곤 생각하지 못했다"고 말했다.

 

해가 지자 마산시청 개표장 앞에 모인 1만여명의 군중을 향해 경찰의 최루탄과 실탄 사격이 시작됐다. 박씨는 "차 위에서 총을 쏘는 경찰과 픽픽 쓰러지는 사람들이 눈에 들어왔다"고 말했다. 박씨는 그 소용돌이 속에서 살아남았지만, 이후 경찰에 끌려가 '시위의 배후가 누구인지 대라'며 모진 고문을 받아야 했다.

 

그해 건국대 정치학과 4학년이던 복진풍(72·전 환경관리공단 이사장)씨는 "부정선거 반대, 민주주의 회복은 3·15 선거를 앞둔 당시 한국 사회의 시대정신이었다"고 말했다. "많은 사람들이 올바른 선거가 치러진다면 반드시 민주당이 이길 거라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유세가 시작되기도 전에 민주당 대통령후보인 조병옥 박사가 갑자기 숨을 거둔 거예요. 여기에다 (이승만 대통령이) 이기붕씨를 부통령으로 억지로 만들려다 그 사단이 난 거죠." 그는 "서울의 대학생들은 대부분 시골 출신이었는데, 고향에 내려가면 어른들로부터 '왜놈들 때도 학생들이 먼저 독립운동을 했는데 지금이라고 못할까' 하는 소리를 자주 들었다"고 말했다. 그는 동료 학생들과 함께 '공명선거 추진 전국학생위원회'를 만들어 3·1절 41주년 기념식이 열린 서울운동장 야구장에서 '부정선거 감행하면 백만학도 궐기한다'는 등의 내용이 담긴 삐라(전단)를 뿌렸다. 부정선거에 반대한 서울의 최초 움직임인 이른바 '3·1 삐라사건'이다.

 

마산에서 실종돼 많은 이들의 애를 태우던 김주열의 주검은 4월11일 떠올랐다. 고려대 법대생이던 홍영유(71)씨는 "당시 지방 학생들의 시위 소식을 접하면서 서울의 대학생들도 뭔가를 해야 하지 않느냐라는 혁명적 분위기가 팽배해 있었다"고 말했다. 마침내 4월18일 낮 12시50분. '인촌 동상 앞으로'라는 구호와 함께 3000여명의 고려대생이 집결했다. 이들은 '기성세대는 자성하라'는 내용의 선언문을 발표한 뒤 경찰 저지선을 뚫고 서울 태평로 국회의사당(지금의 서울시의회) 앞까지 진출했다. 홍씨는 "시민들은 행렬에 결합하거나, '저녁에 막걸리나 사 마시라'며 돈이 담긴 봉투를 건넸다. 종로서에 연행된 학생들에게는 경찰이 '고생한다'며 보리차를 주기도 했다"고 말했다.

 

"승리는 짧았지만 5·18-6월항쟁 뿌리 돼"

4·19뒤 정권 국민뜻 외면…허무주의 쉽게 빠지고 그 때 일 잊어버려 혁명정신 훼손되는 지경

오후 6시, 집회를 마치고 학교로 돌아가던 고대생들과 시민들에게 종로4가 천일극장 부근에서 쇠갈고리·곡괭이·쇠사슬 등으로 무장한 깡패들이 달려들었다. 임화수·이정재 등 정치깡패들이 이끌던 반공청년단 폭력배들이었다. 수십명이 피를 흘리며 거리에 쓰러졌다. 당시 현장에 있었던 복진풍씨는 "나는 광장시장 골목으로 도망쳐 습격을 피했지만, 참 처참한 광경이었다"고 말했다. 학생 1명이 깡패들에게 맞아 죽었다는 소문(나중에 오보로 밝혀짐)이 밤새 서울 곳곳으로 퍼져나갔다.

 

일촉즉발의 긴장감 속에 4월19일이 밝았다. 서울 동숭동 서울대 문리대 게시판에 학생들의 궐기를 촉구하는 격문이 나붙었다. 오전 8시30분 신설동의 대광고생들을 시작으로 서울의 주요 대학과 고등학생들이 거리로 쏟아져 나왔다. 성난 시위대는 국회의사당이 있던 세종로·태평로, 경무대 방향으로 몰려들었다. 당시 동국대 정치학과 4학년이던 이우대(73)씨는 경무대로 향하는 효자동 골목에 있었다. 효자동 골목에는 이미 경무대를 사수하기 위한 경찰의 바리케이드가 설치돼 있었다. "주변에 공사에 쓰려고 놓아둔 커다란 파이프가 있더군요. 그걸 굴려가며 경무대 쪽으로 나아갔습니다." 경찰과 시위대의 거리가 50m 정도로 좁혀졌을 때 경찰의 실탄 발포가 시작됐다. 동료들이 피를 흘리며 무너져내렸다. 경찰에 쫓긴 이씨는 주변 민가의 담을 넘어 목숨을 부지할 수 있었다. 이날 효자동 골목에서만 21명이 죽고 172명이 다쳤다. 서울 곳곳이 시위대에 점령된 채 시위가 이어지자 서울 일대에 게엄령이 선포됐다.

 

그로부터 엿새 뒤인 4월25일 △이승만 대통령 하야 △3·15 부정선거 재실시 등의 내용을 담은 전국 교수 258명의 교수 시국선언이 발표됐다. 매카너기 주한 미국대사는 그날 밤, 서명에 참여한 교수들의 서명과 사진을 들고 이 대통령을 찾아가 하야를 설득했다. 결국 이 대통령은 이튿날인 4월26일 오전 10시30분 전격 하야를 선언했다. 4·19혁명이 승리하는 순간이었다. 혁명의 과정에서 시민·학생 185명이 숨졌고, 348명이 다쳤다.

 

4·19의 짧은 승리는 머잖아 짓밟혔고, 상처 받은 사람들의 긴 인생이 남았다. 광주고 3학년으로 시위에 참여했던 박상욱(68)씨는 "4·19 이후 국민들의 뜻을 반영하지 않는 민주당 정권에 크게 실망하고 허무주의에 빠진 이들이 많았다"고 말했다. 4·19 직후 그는 대입도 포기한 채 낙향해 농사를 지었다. 5·16 쿠데타가 터졌을 때는 군부를 지지했다. 1962년 다시 시험을 봐 고려대에 입학한 뒤에는 한번도 데모에 참여하지 않았다. 그는 "4·19는 위대했다고 생각하지만, 세상을 바꾸는 건 데모가 아니라 말없는 착실한 사람들이 아닌가 한다"고 말했다.

 

대구의 신구자씨에게 2·28은 거추장스런 '꼬리표'가 됐다. 그는 시위를 주도했던 전력 때문에 취직할 수 없었고, 아이를 낳은 뒤에야 담당 형사로부터 "이제 곧 관리명단에서 빠질 것 같다"는 얘기를 들었다. 자식들은 자유로운 나라에서 살게 해주고 싶어, 신씨는 1980년 오스트레일리아로 이민을 떠났다.

 

고려대생이던 홍영유씨는 2학기부터 다시 사법고시 준비에 매진했지만 뜻을 이루진 못했다. 1966년부터 < 사상계 > 에서 활동하다가 1968년부터는 신민당 기관지인 <민주전선> 편집장을 맡았다. 그러나 1970년대 박정희 정권의 탄압을 이기지 못하고 펜을 꺾었다. 이후 평범한 생활인의 길을 걸었다. 홍씨는 "66살이 되어 인생을 돌아보니 허무하다는 생각이 들어, 내가 아는 4·19를 기록해야겠다는 결심을 했다"고 말했다. 그는 지난 5년 동안 자료를 모아 최근 < 4·19혁명 통사 > (전 10권)를 펴냈다. 여기서 통은 '통할 통(通)'이 아닌 '아플 통(痛)'이다. 그는 "4·19는 박정희 정권의 등장으로 완전히 파괴됐기에 아픔"이라고 말했다.

 

마산의 박종학씨도 유신 독재를 견디지 못하고 미국으로 이민을 떠났다가 최근 귀국했다. 돌아온 조국에서 3·15는 어느새 국가기념일로 지정됐고 희생자들의 묘는 국립묘지가 됐다. 그는 "너무 쉽게 잊고 용서해버려서 가해자들조차 민주화를 위해 흘린 피를 팔아먹는 지경까지 온 게 아닌가 싶은 생각이 든다"고 말했다. 그는 지난해부터 3월이 되면 좋은 쌀을 골라 술을 빚어, 그날 희생된 동지들의 제단 앞에 올리고 있다.

 

효자동에서 경찰의 총탄을 피하던 이우대씨는 "4·19 이후 정치활동을 하다가 5·16 이후 모든 활동을 접고 평범한 생활인이 됐다"고 말했다. 그는 90년대 초 잠시 정치에 욕심을 냈다가 꿈을 접었다. 그는 "4·19 주역 가운데도 군사정권에 편승한 사람들은 출세했지만 우리는 그러지 못했다"고 말했다. "제 인생요? 저 스스로는 굉장히 보람있게 살았다고 생각하지만, 결과적으로 가장 성공하지 못한 인생이 된 거죠. 그래도 4·19의 토대 위에서 이 나라가 선 거죠. 그 정신이 5·18과 6월항쟁의 뿌리가 됐잖아요. 그럼 된 거죠. 암, 암요."

 

 

50년 전 오늘, 민주화 함성이 울려퍼졌다
'4.19혁명' 도화선 된 마산 3.15의거 50주년…"한국 민주주의 씨앗" 

<노컷뉴스>

 

우리나라 해방 이후 최초의 민주화 운동인 경남 마산 3.15의거가 올해로 50주년을 맞았다. 자유당 정권의 부정 선거에 맞서 항거한 마산 3.15의거는 전국적인 시위로 번져 4.19혁명의 도화선이 돼 이승만 독재정권을 무너뜨리게 된 계기를 마련했다.

 

◈ 독재 정권에 맞서 항거한 마산 3.15의거

 

1960년 3월 15일. 이승만 자유당 정권이 장기집권 유지를 위해 대리투표, 무더기투표 등 대규모 부정선거를 저지르자 당시 야당이었던 민주당 마산시당이 선거포기와 함께 규탄하는 거리 방송을 시작하면서 시위는 시작됐다. 학생과 시민 등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시위가 확산되자 경찰은 실탄을 발포했고, 최소 8명이 사망하고 수십명이 총상을 입는 유혈사태에 이르렀다.

 

4월 11일. 시위 당시 행방불명됐던 마산상고 1학년 생인 김주열(당시 17세) 열사가 27일 만에 오른쪽 눈에 최루탄이 박힌 참혹한 주검으로 마산중앙부두에서 발견되면서 마산 시민의 분노는 극에 달았다. 이날 2차 시위는 전국으로 번져 나갔고, 4월 19일 혁명으로까지 이어져 결국 25일 이승만 대통령이 하야를 선언하면서 자유당 정권은 무너졌다.

 

3.15의거 당시 시위에 참여했던 백한기 3.15의거 기념사업회장은 "정권의 무력에도 굴하지 않고 민주주의 회복을 위해 시위에 참여했던 수많은 마산 시민들이 있었기에 오늘의 민주주의가 있었다"며 "3.15의거를 후대에도 계속 발전, 계승시켜 나가야 한다"고 말했다.

 

◈ 4.19에 가려진 마산 3.15 '국가기념일'로

3.15의거는 이승만 자유당 정권의 부정선거에 맞서 마산 시민과 학생들이 항거한 사건으로, 이후 전 국민적 분노와 함께 4.19혁명의 도화선이 돼 이승만 정권을 무너뜨리게 된 계기를 마련했다. 3.15의거는 지난 2001년 제정된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법을 통해 우리나라 최초의 민주화 운동으로 규정됐으나, 4.19혁명의 연장선상에 있다는 모진 평가를 받으면서 독자적인 위상을 갖지 못했다.

 

때문에 국회의원 전원인 293명의 동의서명을 받은 '3.15의거 국가기념일 제정촉구 결의안'이 지난해 12월말 국회 본회의에서 통과됐는데도 국가보훈처가 국가기념일 제정 불가 입장을 밝히면서 폐기될 위기에 처하기도 했다. 이후 부정적 입장을 밝혀온 국가보훈처가 3.15의거 국가기념일 제정에 최종 동의를 하면서 행정안전부는 지난달 23일부터 2일까지 입법예고했으며, 9일 국무회의 의결을 통해 사실상 국가기념일로 확정됐다.

 

기념일에 머물렀던 3.15의거가 국가기념일로 승격돼 그 위상이 새롭게 정립되면서 3.15를 재조명하자는 움직임이 일기 시작했다. 특히 3.15의거가 올해로 50주년을 맞고 있지만, 의거에 참여했던 희생자들이나 부상자들에 대한 명예회복 사업이 더디게 진행되면서 이들의 희생정신마저 잊혀지는 것이 아니냐는 우려 섞인 목소리가 흘러 나오고 있기 때문이다. 실제 지난 1960년 원호처(현 국가보훈처)의 심사결과 당시 희생자 및 부상자로 4.19혁명 유공자로 선정된 사람은 고작 28명에 불과했다. 이후 3.15의거 기념사업회를 통해 2005년 7명, 2007년 5명에 이어 최근에는 24명이 국가유공자로 선정됐다.

 

◈ 야권 세력, 3.15의거 정신을 한나라당 맞선 필승 의지로 다져

오는 6.2 지방선거를 앞두고 정치인들의 발걸음도 3.15 국립묘지로 향하고 있다. 출마선언 후 첫 방문지로 3.15 국립묘지를 찾는게 공식화되고 있다. 특히 야권은, 부정부패에 항거했던 3.15의거 정신을 야권연대 세력의 기치로 내세우고 있다. 야권 연대 세력과 지역 시민단체들은 지난 12일 오후 3.15국립묘지를 찾아 합동 참배했다. 이들은 3.15국립묘역에서 헌화 분향하면서 "6.2 지방선거에서 3.15의거 정신을 되새겨 한나라당에 맞서 반드시 승리하자"며 한 목소리를 냈다. 김두관 경남도지사 예비후보(무소속)은 "범민주개혁진보세력들이 연대와 단결을 통해서 반 MB전선을 명확히 하고 지방선거 승리를 통해 한나라당 독점권력을 교체해 달라는 도민들의 요구에 부응하기 위해서 합동참배를 하게 됐다"며 "도민들을 위해 희망과 꿈의 정치를 펼쳐나가자"고 말했다. 
 


'50주년' 4.19…2010년 한국사회에 던지는 교훈은?

<노컷뉴스>

 

1960년 3월 15일 우리나라 대통령을 뽑는 선거에서 기괴한 일이 벌어졌다. 사람들이 3인조 또는 5인조로 나눠 공개투표를 하는가하면 대리투표를 일삼았다. 부정선거 의혹이 일면서 이날 마산에서는 시민과 학생들의 격렬한 시위가 벌어졌다. 하지만 경찰이 총을 꺼내들면서 시위는 유혈사태로까지 번지고 말았다. 같은 해 4월 11일 실종됐던 故 김주열 학생의 시신이 마산 중앙부두 앞바다에서 발견되면서 학생과 시민들이 일제히 거리로 뛰쳐나왔다. 18일에는 교문을 박차고 나온 고대생들이 국회의사당 앞에서 연좌시위를 벌였다. 일주일여 후인 26일 드디어 이승만 전 대통령은 마침내 권좌에서 물러나겠다는 하야 성명을 발표했다.

 

우리나라 민주화 운동의 시발점이라고 할 수 있는 4.19 혁명이 일어난지 19일로 50주년을 맞았다. 4.19 50주년을 기념해 우리나라에서는 4.19 혁명에 재조명 열기가 뜨겁다. 민주주의의 현주소를 되돌아보자는 것이다. 건국대 이상호 교수는 "4.19 혁명을 민중의 기억 속에서만 간직할 것이 아니라 현실에서도 실천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 교수는 "4.19 민주화 운동이 제도적으로 정착됐다고는 하지만 여전히 계파정치 및 계급질서와 함께 비민주주의적인 요소가 상존하고 있다"면서 "경제 양극화와 인종 차별 등 아직도 우리나라 곳곳에는 파시즘적 요소가 드리워져 있다"고 지적했다.

 

4.19 혁명의 역사적 의의를 새로운 시각에서 찾으려는 학자들도 적지 않다. 고트프리트-칼 킨더만 독일 뮌헨대 명예교수는 4.19 혁명이 단순히 이승만 대통령과 자유당 정권을 무너뜨린 사건이 아니라 전통적인 유교 개념을 무너뜨린 학생 봉기라는 주장을 내놓았다. 그는 '4.19 민주혁명의 정신과 외국의 인식'이라는 제목의 논문에서 "이승만 체제는 '전통적 권위에 대한 충성이라는 전통적 유교 개념'을 토대로 구축됐던 것"이라며 "당시 학생들은 미국의 영향으로 민주주의 원칙을 배우며 자랐다"고 설명했다. 그는 이후 학생운동이 1980년 광주 민주화운동의 패배를 이겨내고 1987년 6월 혁명으로 이어져 승리를 이끌어냈다고 평가하기도 했다.


영남대 김태일 교수의 경우는 "민주화 세력은 4.19 혁명의 경험을 통해 교훈을 얻어야 한다"며 작금의 민주화 세력을 꾸짖기도 했다. 그는 지난 15일 인천대에서 열린 학술회의에서 "4.19 혁명은 시민사회의 힘 덕분에 일어났고, 혁명이 지금 우리에게 주는 가장 중요한 교훈은 먼저 시민사회를 주목하라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4.19 혁명의 정신을 이어간 것이 촛불시위라는 분석도 나왔다. 고경민 제주대 교수는 '2000년대 인터넷과 시민의 정치참여: 촛불시위 사례'를 통해 지난 2002년과 2004년, 2008년에 있었던 촛불시위를 4.19 혁명의 계승이라고 해석했다.

 

이 밖에도 "4.19 혁명이 21세기를 비살상 세계로 변회시키는 중요한 역할을 할 것"이라는 관측도 나왔다. 글렌 페이지 하와이대 명예교수는 '4월 혁명과 비살상 한국'이라는 글에서 "당시 학생들과 교수들이 보여준 비폭력적인 모습은 내전과 전쟁, 일상적 폭력의 문화 등에서 해방될 가능성을 보여준다"며 이 같이 지적했다.

 

 

 

 

10대 촛불세대, 50년전 민주정신과 ‘절친’
[4·19 혁명 50돌] '4·19와 민주'의식 설문

중앙고 3학년 92.5% "4·19가 사회발전에 기여"

DJ정부·참여정부때 성장…자유·인권에 민감

 

[한겨레]


지난 7일 오전 11시 서울 중앙고 음악실에서는 50년 전 중앙고 학생으로 4·19에 참여했던 남궁진 전 문화관광부 장관과 학생들의 대화가 시작됐다. 남 전 장관은 '시위할 때 경찰이 총을 쏴서 무섭지 않았느냐'는 학생들의 질문에 "그 상황이라면 누구나 무서웠겠지만 내가 이 자리를 지켜야 한다는 책임감으로 견뎌냈다"고 말했다. 또 그는 "당장 시위에 참여할 것인지, 아니면 미래를 위해 공부에 전념할 것인지는 자기 가치관에 따라 선택할 문제지만, 그 판단의 기준은 정의와 자유, 평등 같은 가치에 기초해야 한다"고 당부했다. 학생들도 고개를 끄덕거리는 게, 공감을 표시하는 듯했다.

 

'4·19혁명 잘 모르지만, 4·19정신은 체화한 세대.'

< 한겨레 > 가 4·19혁명 50년을 맞아 당시 주요 참가 학교였던 서울 중앙고 3학년을 대상으로 진행한 '4·19와 민주주의에 대한 인식조사'는, 민주주의적 감수성이 발달하고 정치적 의사 표현에 익숙한 최근 10대들의 특성을 확인해 준다. 4·19가 한국 사회 발전에 기여했다고 보느냐는 질문에 전체의 92.5%가 '매우 또는 어느 정도 기여했다'고 대답했다. 4·19 세대인 임헌영 민족문제연구소장(문학평론가)은 "지난 2008년 촛불의 주역이었던 이들이 독재에 항거해 민주주의를 지킨 4·19 정신에 공감하는 것은 당연한 현상이다. 이 둘 사이의 유사성에 주목해 봐야 한다"고 말했다.

 

4·19와 촛불집회는 모두 학생들의 자연발생적인 참여로 시작됐고, (그 때문에) 명확한 지도부가 없었다. 둘 다 요구 사항은 '민주주의 회복'이었다. 4·19의 구호는 '부정선거 반대'와 '민주주의 회복'이었고, 2008년 촛불집회 때는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라는 외침이었다. 주요 배경도 도심 한가운데인 세종로·태평로 등으로 같다. 최장집 고려대 명예교수(정치학)는 "4·19는 이후 한국 사회를 움직인 모든 민주화 운동의 원형"이라고 말했다.

 

10대 후반인 고등학생들이 성장하게 된 배경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는 지적도 있다. 김호기 연세대 교수(사회학)는 "지금 고등학생들은 1992~94년께 태어나 2000년대 초중반 세상에 눈뜨게 됐다. 이 시기는 지금보다 상대적으로 민주적이고 자유스러웠던 지난 김대중·노무현 정부 집권기와 겹친다"고 말했다. 10대들이 자유와 인권이라는 민주주의적 감수성을 체화하면서 성장했다는 것이다. 실제로 지난 1월 < 조선일보 > 조사 결과를 보면, 올해 만 20~24살이 되는 '지(G)세대'들은 100년간 우리나라에서 가장 훌륭한 인물 1위로 노무현 전 대통령을 꼽았다. 10대들의 진보적 정치성향의 원인으로 △논술교육 △인터넷을 통한 쌍방향 소통 등에 주목하는 연구도 있다.

 

이들이 꿈꾸는 바람직한 미래 한국 사회의 모습은 어떤 것일까? < 한겨레 > 는 이 질문에는 특정한 보기를 주지 않고, '○○한 나라'로 끝나는 한 문장으로 답변을 적어보라고 요청했다. 이후 학생들이 제출한 문장에서 사용한 주요 단어를 중심(중복 허용)으로 답변을 유형별로 묶어 봤다. 이명박 정부가 내세우는 핵심 가치인 '강대국' '선진국' '경제발전' 등의 단어는 100개 답변 가운데 31번 등장했다. 그다음으로는 '민주주의'(17번), '복지' '평등'(14번), '통일'(10번), '국민 존중'(7번) 등의 단어 사용이 많았다. 경제성장과 선진국 진입 등의 가치가 중요하긴 하지만, 절반 이상의 학생들이 민주주의·복지·평등·통일·국민존중 등의 다른 가치들에 주목하고 있는 셈이다. < 매일경제 > 의 지난 3월 조사에서도 19~25살 청년들은 미래 한국의 발전 모델을 묻는 질문에 '민주주의가 성숙한 나라'(56.6%)를 꼽은 사람이 '경제적으로 부유한 나라'(23%)를 꼽은 이보다 두배나 많았다.

 

10대들의 순수한 열정을 기성세대가 더 진지하게 받아들여야 한다는 지적도 있다. 홍성태 상지대 교수(사회학)는 "아직 세상에 때묻지 않은 10대들은 양심에 기초해 여러 사회적 사안들에 정치적 목소리를 내려 하지만, 국가와 사회는 이들을 치열한 경쟁으로 내몰면서 보호와 계도의 대상으로만 취급한다"고 말했다. 그 때문에 20대가 된 이들은 민주주의에 대한 감수성은 대단히 높지만 정치에 관심을 잃고 무기력한 '88만원 세대'가 되어간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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