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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보는 노무현

한라의메아리-----/주저리주저리

by 자청비 2010. 5. 21. 13: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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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합니다. 편안히 잠드소서

노무현의 ‘균형’vs 이명박의 ‘선택과 집중’


시사IN


 

 

 

현대사의 한가운데를 꿰뚫던 이야기가 마지막 순간에 돌연 한 시골마을로 쪼그라든다. 3당 합당에 분노하고 정권 교체에 열광하며 결국에는 그 자신 대통령이 된 이 정치인은, 자서전의 마지막 장에서 난데없이 하천 청소니 오리농법이니 숲 가꾸기니 하는 소소한 이야기를 한참 늘어놓는다. 기묘한 위화감. 별개의 이야기가 맥락 없이 섞인 듯한 어색함. 그가 몇 달 뒤 검찰의 전방위 압박에 끝내 자살을 택한다는 사실을 아는 독자에게 이 마지막 장은 한가한 느낌마저 준다. 노무현 전 대통령의 기록과 육성을 모아 사후 출간한 자서전 < 운명이다 > 의 마지막 장은 그렇게 묘하게 읽힌다.

 

'최후의 노무현'은 두 가지 모습으로 기억된다. 하나는 진보 사상가 노무현이다. 국가의 구실이 무엇인지를, 진보 진영은 국가를 어떻게 운영해야 하는지를 고민했다. 또 다른 하나는 농촌 운동가 노무현이다. 고향으로 돌아간 그는 마을 하천을 청소하고 특산품 차를 심었으며, 논에 오리와 우렁이를 풀어 무농약 농법을 시도했다. 그가 무슨 생각을 했든, 은퇴한 정치인의 좀 별난 취미생활 정도로 받아들여졌다. 직접 농사를 짓고 일꾼들과 막걸리를 나누는 사진이 돌며 인터넷에서 '노간지'로 칭송을 받기는 했지만, 그게 다였다.

 

ⓒ노무현 재단 제공 '사상가 노무현'은 많은 주목을 받았지만, '농사꾼 노무현'이 무슨 생각을 했는지 관심을 가진 사람은 드물다.

 

정말 그게 다였을까. 그렇게 '두 개의 노무현'이 있었을까. 서거 1주기를 2주 앞둔 5월10일, 1년 만에 다시 경남 김해 봉하마을을 찾았다. 노 전 대통령과 오리 캐릭터가 그려진 방앗간이 새로 생긴 게 먼저 눈에 띈다. 2008년에 처음 출시해 화제가 되었던 봉하 오리쌀과 우렁이쌀 도정을 위해 만들었다. 첫해 2만4000평으로 시작한 친환경 농지는 지난해에는 봉하마을 논 전체가 참여해 24만 평으로 10배 늘었다. 인근 마을에서도 동참 의사가 폭주해 올해는 마을 세 곳에서 시범지구로 8만 평을 더 늘렸다. 봉하마을 친환경 농업은 이제 32만 평 논에서 농민 97명이 함께하는 꽤 큰 덩치가 되었다. 고인에 대한 의리 때문만은 아니다. 공공 비축미 수매가에 견주어 벌이가 1.5배쯤 나은 덕이기도 하다. 이를 총괄 지휘하는 사람이 영농법인 봉하마을 김정호 대표다. 청와대 기록관리비서관 출신인 그는 대학 시절 농촌활동을 가서도 거머리가 무서워서 논에 안 들어가던 '도시 촌놈'이었다. 그런 그가 노 전 대통령의 농업 프로젝트를 덜컥 맡았다가 "이제는 도망갈 수도 없는 처지"가 되었다.

 

김 대표는 농촌 혁신을 꿈꾸던 노무현을 진보 사상가 노무현과 별개로 보지 않는다. 그가 전하는 '노무현의 구상'은 이런 것이었다. "대통령은 생태계 회복을 꿈꿨다. 이건 자연 생태계뿐만 아니라 인문·사회 생태계까지 아우르는 개념이다. 친환경 농업으로 자연 생태계를 복원하고, 그 기반 위에서 농촌도 잘살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러면 도시에 있는 손자·손녀가 생태계가 복원된 농촌으로 놀러오게 되고, 도시에서 은퇴한 이들이 부담 없이 귀농을 택하게 된다. 마을 공동체가 되살아나고 도·농이 한 묶음으로 연결된다. 대통령은 이 선순환 모델을 꼭 만들어 보여주고 싶었다."

 

권력을 잡고 예산만 쏟아붓는다고 되는 일이 아니었다고 그는 덧붙였다. "농촌 문제를 두고 '와 안 되노'라고 답답해했던 대통령은 권력으로 해결되는 일에 한계가 있다고 또 한 번 느낀 것 같다. 문제는 지역사회에 시민적 리더십이 없어 '시동'이 안 걸린다는 거였다. 대통령은 '그럼 내가 직접 해보지' 하고 생각한 거다." 노 전 대통령의 농촌 운동은 별난 취미생활이 아니라, 청와대에서 완성해내지 못했던 구상을 밑바닥에서 구현해 보이려는 '또 다른 진보의 기획'이었다는 얘기다.

 

ⓒ노무현 재단 제공 오리농법을 살펴보는 노무현 전 대통령.

 
'둠벙'은 노 전 대통령이 구상한 생태계의 복원을 상징하는 키워드다. 논에 물을 대기 위해 만드는, 연못보다 작은 물웅덩이를 일컫는 사투리다. 자서전에서 노 전 대통령은 이 둠벙을 농촌 생태계의 핵심 고리로 묘사했다. 수생 곤충과 어류가 봄이 되어 하천을 타고 논까지 들어오고, 논물을 뺄 때나 월동할 때는 둠벙에 숨는다. 하지만 관개시설이 좋아지면서 필요가 없어진 둠벙이 점차 사라졌고, 그에 따라 논과 수생태계의 연결도 끊어져버렸다. 노 전 대통령은 자서전에서 "반드시 둠벙이 있어야 한다. 낙동강 잉어가 저습지와 논으로 들어와 산란하던 옛날의 수생태계를 다시 보고 싶었다"라고 썼다. 생전에 다섯 개의 둠벙을 팠고, 그의 사후에 남은 이들이 지금까지 네 개를 더 만들었다.

 

"균형이란 아무래도 진보적 개념입니다"

둠벙이 사라지면 잉어가 논으로 올라오지 못하듯, 순환 고리가 깨지면 균형이 무너진다. 자연 생태계든 인문 생태계든, 혹은 정치 생태계든 원리는 같다. 균형이 깨지면 특정 부문이 웃자라기 마련이고, 이는 나머지 부문의 희생을 전제로 한다. 장기적으로 이는 전체 시스템의 기능을 떨어뜨리므로 더 비효율적이기도 하다. '균형'이라는 발상은 이렇듯 '생태적'이다. 퇴임 후 가장 가까이에서 노 전 대통령을 지켜본 김경수 전 비서관(현 봉하재단 사무국장)은 "균형은 노 전 대통령의 통치철학 근저에 깔린 핵심 원리다"라고 말했다. "노 전 대통령은 항상 아이들이 시골에 자주 와야 한다고 했다. 자연의 순환을 보고 자란 아이는 콘크리트 숲에서 자란 아이와 세계관이 다를 수밖에 없다고 늘 강조했다." 이를 엿볼 수 있는 대표적 정책이 국토 균형 발전이다. 대통령 노무현의 진단은 '국토개발 생태계'가 균형이 무너졌다는 것이었고, 세종시와 혁신도시라는 둠벙을 파서 국토의 균형을 복원하고자 했다.

 

 

ⓒ시사IN 조남진 봉하마을에서는 노 전 대통령의 묘역 막바지 공사가 한창이다(위). 서거 1주기에 맞춰 완공될 예정이다.

 
정치인 노무현에게 필생의 과제는 '정치 생태계'의 복원이었다. 노 전 대통령의 자서전을 보면, 광주항쟁을 정치적 원체험으로 삼는 대부분의 민주화 세대와 달리 그의 정치적 출발점은 1990년 3당 합당인 것처럼 보인다. 자서전에서 노 전 대통령은 3당 합당을 두고 "호남이 정치적으로 고립되었고 영남은 보수 정치 세력의 손아귀에 완전히 들어가고 말았다. 지역 구도가 돌이킬 수 없이 고착화되었다. 이때부터 20년 동안 나는 쉼 없이 싸웠다"라고 적었다. 정치인 노무현의 눈에 비친 한국 정치 20년의 모습은 균형이 깨져버린 '불량 생태계'였다. 지역주의 극복, 전국 정당 건설, 영남 개혁 세력 복원과 같은 그의 정치적 표어들은 이런 인식에 뿌리를 두었다.

 

대통령이 된 후 그는 초대형 둠벙 공사를 시도한다. 독일식 비례대표제나 중대선거구제로 선거제도를 바꾸는 것을 전제로 한나라당에 대연정을 제안했다. 제도 변화를 통해 지역 구도를 완화해보자는 기대를 건 것이다. "이렇게만 된다면 권력을 한 번 잡는 것보다 훨씬 큰 정치적 진보를 이룰 수 있다"라고 기대했다. 하지만 그가 권력을 던지면서까지 이루려 했던 '정치 생태계의 복원'은 실패로 돌아갔고, 이후 정국 운영에 두고두고 부담으로 남았다.

 

2006년 신년 연설에서 노무현 대통령은 '양극화'를 화두로 제시한다. "대기업과 중소기업 간, 정규직과 비정규직 간, 소득 계층 간 격차가 갈수록 벌어지고 있다"라고 우려했다. 한쪽의 희생을 딛고 거둔 다른 한쪽의 웃자람. '경제 생태계'의 균형 역시 무너지고 있다는 신호였다. 역시 사후에 출간된 그의 진보 구상을 담은 책 < 진보의 미래 > 에서 노 전 대통령은 집요할 정도로 "트리클 다운(낙수 효과·감세와 대기업 호황 등으로 고소득층의 소득이 증가하면 그 파급이 저소득층에까지 미친다는 이론) 효과가 실체가 있는가? 어떤 경우에 작동하고 어떤 경우에 작동하지 않는가?"라고 묻는다. 고소득층과 저소득층 사이에 '생태계 순환'이 일어나고 있는가 하는 물음인 셈인데, 그의 결론은 부정적이다.

 

양극화의 책임 논란에서는 부동산 정책 실패 등의 과오가 있는 참여정부 역시 자유롭지 않다. 노 전 대통령은 < 진보의 미래 > 에서 "분배 정책은 꺼내보지도 못했다. 나중에 선순환, 동반 성장, 비전 2030 등의 정책을 내놓았으나 흐지부지되거나 세금 폭탄이라는 말에 묻혀버렸다"라고 자평했다. 이 분야에서 둠벙 공사는 제대로 시도도 못했다는 회한으로 읽힌다.

 

ⓒ시사IN 조남진 봉하마을 입구 노사모 회관에 걸린 노무현 전 대통령에게 보내는 편지 글들.

 
성공했든 그렇지 않든, 다른 정책 영역에서도 노 전 대통령의 '균형 복원' 시도는 흔히 발견된다. 김종민 전 청와대 대변인은 "대통령이 견제와 균형이 가장 무너진 영역으로 검찰과 언론을 꼽았다"라고 말했다. 하지만 언론은 대통령이 나설 주제가 아니라고 봐서 정정·반론 보도 청구와 소송 등 '시민의 권리'만으로 대응했고, 검찰 개혁은 공직자비리수사처를 신설하려 했다가 실패로 돌아간 걸 두고두고 아쉬워했다는 것이다. 김경수 전 비서관은 외교·국방 분야에서도 균형에 대한 감수성은 깔려 있었다고 말했다. 동북아 균형자론도 그랬고, 국방 정책 역시 그에 연동하는 것이었다. 노 전 대통령은 손이 닿는 영역마다 둠벙을 팠고, 대체로 실패하거나 후임자에 의해 부정당했다.

 

"균형이란 아무래도 진보적 개념입니다." 2007년 과학기술인 오찬 간담회에서 노 전 대통령은 이런 말을 했다. 균형 잡혀 선순환에 들어선 생태계는, '선택과 집중'을 신조로 하는 개발주의와 대척점에 있다. 벼의 증산을 유일한 목적으로 해 생태계의 고리로부터 벼를 떼어내는 기존 농법에 맞서, 농사꾼 노무현은 균형과 생태계 복원을 통한 대안 농업이 농촌을 더 잘살게 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었다. 마치 대통령 시절 하려 했던 것이 이것이었다고 증명이라도 하려는 듯 보였다.

 

정치인 노무현은 균형을 거부하고 '선택과 집중'을 요구하는 거대한 조류에 밀려 정치 인생을 마감했다. 핵심 가치가 부정당한 것이다. 2007년 대선에서 그는 500만 표 차 참패를 지켜봐야 했다. 그렇게 들어선 이명박 정부는 세종시 수정안을 들고 나와 균형 발전론을 전면 거부했고, 4대강 사업을 벌여 강 생태계의 균형을 희생시키며 개발주의적 미감을 과시했다. 경제 관료들은 입만 열면 '낙수 효과'를 읊었다. 동북아 균형자론은 '한·미 혈맹'으로 대체되었다. 어느 영역에서나, '균형'은 '선택과 집중'에 자리를 내주었다.

 

그런 시대를 맞은 사상가이자 농사꾼인 노무현은, 그거 말고 다른 길도 있다고 김해의 한 시골마을에서 펜과 삽을 동시에 들었다. 따로따로 들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정권은 결국 시민의 생각만큼 간다. 시민만 충분히 성장해 있으면 정권은 문제가 아니다"라고 했던 시민 노무현의 마지막 프로젝트, 그 동전의 양면이었다.

 

 


노무현의 철학에는 일관성이 있다

ㆍ조기숙 전 청와대 홍보수석, < 운명이다 > 를 읽고

 

위클리경향

 

 

'노무현' 이름 석 자를 떠올리면 눈물부터 흐른다. 그분 인생에는 영광의 순간도 오욕의 순간도 있었겠지만 그분이 감당해야 했던 가혹한 운명이 너무 아프다. 아니, 그분을 잃고 그리움에 애타는 우리 운명이 더 아프다. 노무현 전 대통령은 퇴임 후 하루하루가 행복했다. 참모들이 봉하에 내려가면 당신이 직접 길을 내고 가꾼 동네 숲으로 우릴 안내했다. 도시에서 자라 꽃 이름도 제대로 모르는 참모들에게 새와 억새, 갈대를 구분하는 법을 알려 주었다.

 

대중과 소통할 〈진보의 미래〉 계획

외래 품종인 리기다소나무가 우리 소나무를 위협한다며 직접 베어 길을 내기도 했다. 노 전 대통령은 다친다며 우리를 뒤로 물러서게 하고 손수 톱과 낫을 들었다. 사진을 찍기 위해 일하는 법이 없었다. 나무와 풀을 베느라 산책이 몇 시간씩 걸리기도 했다. 노 전 대통령은 마을 해설사 역할도 했다. 중간 중간 끼어드는 당신의 유머에 우리는 배꼽을 잡았다. 내려오는 길에 관광객을 만나면 어김없이 허리를 숙여 인사를 했다. 나는 노 전 대통령의 허리통증이 겸손한 90도 인사 때문일 거라고 확신했다. 그분은 함께 사진 찍는 서비스도 마다하지 않았다.

 

노 전 대통령은 퇴임 후 하고 싶은 일이 참 많았다. 유시민 전 보건복지부 장관이 〈운명이다〉에서 밝혔듯이 그분은 여전히 "꿈 많은 청년"이었다. 노 전 대통령의 오래된 참모 가운데에는 지친 사람도 있었다. 1980년대의 치열했던 민주화 운동, 오랜 야당생활, 격무와 비난에 치었던 청와대 5년을 거친 뒤에도 에너지가 남았다면 거짓말일 것이다. 충전의 시간이 필요했던 참모들은 이제는 당신이 좀 편히 쉬셨으면 하고 바라기도 했다.

 

노 전 대통령이 스스로 실패를 말하니까 수구언론이 좋아라고 이를 이용하는데 치졸한 말장난이다. 그분은 대통령으로서의 성과나 업적에 대해서는 누구와 논쟁해도 설득할 수 있다는 자부심이 있었다. 당신이 말하는 실패는 지역주의를 극복하지 못하고 대화와 타협의 정치를 정착시키지 못했다는 것이다. 목표 자체가 한 세대에 이루기 불가능한 것이었다. 이런 판단 때문에 노 전 대통령은 정치와 거리를 두었다. 그러나 시민으로 성공하고 싶어 했다. 시민이 진짜 권력을 가졌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그분은 시민사회의 발전 없이 대화와 타협의 정치는 요원하다고 생각했다.

 

시민사회가 강해야 진보 정권이 성공할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달은 것은 대통령직 취임 후 한 달이 채 지나지도 않았을 때였다. 법을 존중하는 민주 국가에서는 대통령 혼자 힘으로 할 수 있는 일이 별로 많지 않다는 것을 깨달은 것이다. 진보의 뿌리가 없는 나무 꼭대기에 앉은 대통령은 보수언론이 일으키는 여론이라는 바람에 흔들리는 신세가 됐다.

 

노 전 대통령은 광복 후 지난 60여 년 동안 대한민국을 지탱해 온 성장 이데올로기와는 다른 대안적 삶의 비전과 전략을 만들고 싶어 했다. 학자들의 도움을 받아 〈진보의 미래〉라는 책을 집필할 계획이었다. 학자들의 고준담론이 아니라 인터넷에서 집단창작을 통해 대중과 소통할 수 있는 살아 있는 교과서를 만들 생각이었다. 책 이야기를 할 때 그분은 눈빛이 형형한 청년학도의 얼굴이었다. 노 전 대통령과 인연이 짧은 나는 다른 참모와 달리 에너지가 남아 있었다. 노 전 대통령의 미래 꿈을 가장 열렬히 지지했다. 그분이 정치와 거리를 두면서 오래된 동지보다는 우리처럼 공부하는 사람과 함께하는 시간이 많아져서 좋았다.

 

앞으로 나타날 '제2의 노무현' 기대

노 전 대통령을 뺀 나의 남은 인생은 상상할 수조차 없었다. 그분과 함께 책을 쓰고 전국 순회강연을 다니는 꿈을 꾸었다. 당신은 늘 어린아이들과 청년의 미래를 걱정했다. 리더십센터를 만들어 청소년·대학생들과 함께 민주시민의 덕목에 대해 토론하고 싶어 했다. 청와대에 있을 때에는 항상 대통령에게 쓴소리만 하는 나쁜 참모였지만 퇴임 후에는 그럴 일이 없어서 좋았다. 앞으로는 그분에게 듣기 좋은 소리만 할 생각이었다. 인터넷에서 마음껏 댓글을 주고받았다. 노 전 대통령도 우리와 똑같이 실명 석 자를 걸고 토론했다.

 

<진보의 미래〉 집필 준비를 위해 한 달에 한 번 정도 봉하에 내려갔다. 지난 해 초 진영읍에서 기차를 기다리며 이 행복이 오래 지속되지 않으면 어쩌나 하는 걱정이 잠시 스쳐갔다. 불길한 예감이 현실로 나타났을 때에는 믿을 수도 인정할 수도 없었다. 돌이켜 생각해 보면 그분의 운명에서 그 일은 예정된 것이었는지도 모르겠다. 며칠 전 두려운 마음으로 미뤄오던 〈운명이다〉를 읽었다. 그분에 대해 단편적으로 알고 있던 사실이 마치 퍼즐 조각을 맞추듯 하나의 형상으로 완성된 느낌이다. 그러나 그 중 어느 조각을 떼어내도 각 조각에는 어김없이 그분의 전체 모습이 들어 있다.

 

노 전 대통령은 그런 분이다. 그분의 인생에 흐르는 철학에는 언제나 일관성이 있다. 원칙과 신뢰, 분권과 균형발전, 자율과 책임. 그 분의 사상과 철학은 어느 날 갑자기 만들어진 것이 아니다. 한국 현대사와 함께 진화하고 다듬어졌음을 그의 자서전을 통해 다시금 확인했다. 노 전 대통령의 지난 세월을 읽으며 그분과 인연이 오래된 동지들은 나보다 더 많이 아플 것이라 생각하니 위안이 됐다. 우리가 정당한 대가 없이 너무 쉽게 최고의 민주주의를 맛봤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지금 그 대가를 치르고 있는 것이라 스스로를 위로했다.

 

노 전 대통령은 김구 선생이 현실정치에서 승리하지 못한 것을 못내 아쉬워했다. 그러나 김구 선생의 희생과 김대중 전 대통령의 집권이 있었기에 노 전 대통령이 불의와 타협하지 않고도 성공할 수 있었다. 우리의 역량은 거기까지였다. 퇴임 후 그분을 지켜 줄 힘은 없었다. 우리는 곧 제2의 노무현을 만날 수 있을 것이다. 불의와 타협하지 않고도 성공 사례를 만들 수 있다는 자신감을 얻었기 때문이다. 노 전 대통령은 정의로 가는 울퉁불퉁한 진흙탕 길을 말끔히 포장해 놓았다. 이제 우리 목표는 제2의 노무현이 퇴임 후에도 행복한 나날을 보낼 수 있도록 지켜 주는 것이다. 이 목표를 이루기 위해 우리는 희생을 감내할 각오가 되어 있는가? 견고한 시민세력의 창출, 노무현을 그리워하는 시민들에게 남겨진 운명이다.

조기숙 이화여대 교수〈전 청와대 홍보수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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