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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머니와 운전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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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자청비 2011. 3. 9. 10: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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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학 중 기숙사의 경비아저씨 토니는 나이가 한 예순 쯤 됐는데 전직이 콜택시 기사였다. 그가 언젠가 자신이 기사 시절 크리스마스 이브 새벽에 겪은 일화를 얘기해 준 적이 있다. 그날 밤 당번이었던 그는 시내 어떤 주소로 가라는 연락을 받았다. 도어벨을 누르니 한참 있다가 문이 열렸고, 거기에는 마치 40년대 영화에서 막 걸어나온 듯한 복장에 모자까지 단정히 쓴 아주 나이 든 할머니가 서 있었다. 그 뒤로 보이는 방에는 가구가 다 흰색 천으로 덮여 있었다. 차에 타자 할머니는 주소를 주면서 시내를 가로질러 가 달라고 부탁했다.

 

"그러면 돌아가는 건데요, 할머니."

"괜찮아요. 난 시간이 아주 많아. 호스피스 병원으로 가고 있는 중이거든. 식구도 없고, 의사선생님 말씀이 이젠 갈 때가 얼마 안 남았대."

 

어둠 속에서 할머니 눈에 이슬이 반짝였다. 토니는 미터기를 껐다. 그로부터 두 시간 동안 토니와 할머니는 함께 조용한 크리스마스 새벽 거리를 드라이브했다. 그녀가 젊은 시절 엘리베이터 걸로 일하던 빌딩, 처음으로 댄스파티를 갔던 무도회장, 신혼 때 살던 동네 등을 천천히 지났다. 때로는 어떤 건물 앞에 차를 세우고  그냥 오랫동안 어둠 속을 쳐다보기도 했다.

 

어숨푸레 날이 밝아오자 할머니는 "이젠 피곤해. 그만 갑시다."라고 말했다. 병원에 도착해서 토니는 몸을 굽혀 할머니를 안아 작별 인사를 했다. "자네는 늙은이에게 마지막 행복을 줬어. 아주 행복했다우." 할머니가 말했다.

 

"난 그날 밤 할머니를 생각하며 돌아다녔지. 그때 내가 그냥 경적만 몇 번 울리고 떠났다면? 그래서 크리스마스 날 당번이 걸려 심술 난 다른 기사가 가서 할머니에게 불친절하게 대했더라면. 돌이켜보건대 나는 내 인생에 그렇게 위대한 일을 해본 적이 없어. 내가 대통령이었다 해도 그렇게 중요한 일은 못했을지 몰라."

 

우리는 보통 우리의 삶이 아주 위대한 순간들로 이뤄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 위대한 순간, 내가 나의 모든 재능을 발휘해 위대한 일을 성취할 날을 기다린다. 내게는 왜 그런 기회가 오지 않느냐고 안타까워하고 슬퍼한다. 그렇지만, 그 위대한 순간은 우리가 모르는 채 왔다 가는지도 모른다. 남들이, 아니면 우리 스스로가 하찮게 생각하는 순간들 속에 숨어 있는지도 모른다. 무심히 건넨 한 마디 말, 별 생각 없이 내민 손, 스치듯 지은 작은 미소 속에 보석처럼 숨겨져 있는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런 순간은 대통령에게도, 신부님에게도, 선생님 에게도, 자동차 정비공에게도, 모두에게 골고루 온다.

 

<이 아침에 축복처럼 꽃비가> 장영희 지음, 샘터, p.37-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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