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정여행의 실천①]4박5일 자전거 타고 제주일주
비행기 대신 배, 차 대신 자전거, 현지 음식점과 숙소 이용하기
노컷뉴스 2009-07-07
공정여행(fair travel)이란?
우리가 여행에서 쓰는 돈이 그 지역과 공동체의 사람들에게 직접 전달되는 여행, 우리의 여행을 통해 숲이 지켜지고, 사라져가는 동물들이 살아나는 여행, 서로의 문화를 존중하고 경험하는 여행, 여행하는 이와 여행자를 맞이하는 이가 서로를 성장하게 하는 여행, 쓰고 버리는 소비가 아닌 관계의 여행이다. - 이매진피스 임영신·이혜영의 <희망을 여행하라>
언어와 생김새, 문화가 다른 타인과 동식물까지도 배려하는 여행. 그래서 즐거움도 가치도 배가 되는 '공정여행'. 이 매혹적인 여정을 직접 경험하고자 지난 6월29일 제주도로 떠났다. 그곳의 눈부신 하늘과 바다 곁에서 누린 6일간의 값진 행복. 페어플레이를 지킨 '희망여행 보고서'를 지금 시작한다.
◈6월29일 PM 7:00 출발 '13시간 바다를 건너다'
공정여행을 위한 실천 하나! 이번 여행은 '탄소 배출 0%'를 지향하며 대륙간 이동은 배로, 제주도 현지에서는 오로지 자전거만을 사용하기로 했다. 첫 번째 난관은 집에서 인천여객터미널까지 자전거와 함께 이동하는 것. 정부가 앞장서 온국민의 자전거 이용을 독려하고 있지만, 자전거 이용객들을 위한 편의시설은 아직 미흡한 것이 현실이다. 군데군데 끊어진 자전거도로뿐 아니라 지하철, 버스 등 공공시설에 자전거를 싣는 것이 허용되지 않는 것도 그 한 예다. 역무원들의 배려로 휠체어 비상문과 엘리베이터 등을 이용할 수 있었지만, 의외의 복병은 환승을 위해 통과해야 하는 가파르고 긴 계단과 일반승객들의 불편한 시선이었다. 평일 이른 오후 지하철 이용객들이 많지 않아 다행이었지만 출퇴근 시각이라면 아마도 엄두를 낼 수 없었을 것이다.
우려했던 것보단 손쉽게 동인천역에 도착. 그러나 여객터미널까지 버스를 타는 것은 포기해야 했다. 부두로 가는 12번, 24번 버스가 있었지만 승객이 거의 없는 저상버스임에도 자전거를 실을 수 없다는 기사 분들의 단호함 때문이었다. 하지만 자전거의 최대장점은 두 다리를 동력 삼는 자연바람과 체증으로부터의 자유로움! 그 결과 버스를 이용한 일행들보다 15분 일찍 도착할 수 있었다.
수속을 끝내고, 다음 날 아침이면 우리를 제주도에 내려줄 '오하마나호'에 탑승했다. 인천에서 제주로 가는 배편은 매주 월·수·금 3회, 출발시각은 저녁 7시다. 자전거 수송은 무료. 운임료는 평일 할인율 20%를 적용해 2등 침대실은 7만 700원, 3등실은 5만 2300원이다. 저가항공사와 맞먹는 비용에다, 시간은 13배 이상 걸리므로 심각한 고소공포증을 앓고 있지 않다면 이것 역시 쉽지 않은 선택일 것이다. 그러나 공정여행을 결심했다면, 비행기가 배출하는 이산화탄소가 전세계 이산화탄소 발생량의 약 3%를 차지하며, 높은 고도에서 뿜어져나온 그것이 지상에서보다 지구온난화에 3배 이상 영향을 미친다는 것을 기억하자. 게다가 여행자를 오래도록 배웅해주는 갈매기떼와, 노을로 물든 바다 위에서 즐기는 캔맥주 한잔의 여유, 한밤의 칠흙 같은 어둠과 마주하는 고요, 다시 선상 위에서 만나는 세상의 아침은 배를 이용함으로써 얻는 특별한 선물임을 미리 알려주겠다.
◈6월30일 AM 9시 비오는 제주에서 아침을
한껏 숙면을 취하고 눈을 뜬 아침, 밤새 비가 내려 해는 보이지 않았지만 사위는 벌써 밝아 있었다. 갑판 위로 나가니 물안개 자욱한 바다 저 너머로 제주도의 옅은 실루엣이 보이기 시작했다. 약 30분이 지연돼 제주도에 도착한 것은 출발 14시간 만인 오전 9시. 원래 지난 금요일 출발하려다 사흘간 비가 내릴 것이라는 현지 분의 조언으로 미뤘는데, 마음 만큼 변덕스러운 것이 제주 날씨라 비를 피하는 데는 결국 실패했다. 하지만 3년 전 제주 전역에 태풍경보가 내린 가운데서도 필자가 비를 만난 건 섬에 머문 보름 중 단 하루. 게다가 다소 날씨가 흐릴 때 제주의 천연절경이 빛을 발한다는 것을 알고 있다면 맞아도 무방할 정도의 비는 여행자에게 보내는 제주의 인사쯤으로 여기면 그만이다.
그러나 방심은 금물. 제주일주를 앞두고 최상의 컨디션을 유지하기 위해 첫날은 일단 숙소부터 잡고, 가까운 곳으로 '맛배기 라이딩'을 즐기기로 했다. 공정여행 실천 두울! 음식점과 숙소 등은 현지인이 운영하는 곳을 선택한다. 이를 통해 여행자들이 소비하는 돈이 현지인에 직접 전달되고, 지역발전에 한층 도움이 될 수 있음을 명심하자.
숙소는 제주연안여객터미널에서 걸어서 3분 거리에 있는 '친절민박' 이름처럼 친절한 이기평(71) 할아버지 내외가 운영하는 작고 소박한 건물로, 하루 숙박비는 1만 8천 원. 혼자 온 여행자에겐 더 싸게도 준다.
여장을 풀고 내려오자, 이 할아버지는 제주 토박이답게 꼭 가봐야 할 현지 명소들과 인근 맛집들을 전문 가이드 못지 않게 설명해주셨다. 그 사이 떠날 채비를 마친 또다른 젊은 여행객들이 할아버지께 인사를 건넸고, 방금 전까지 명랑하시던 할아버지는 갑작스레 밀려드는 서운함에 그들의 등을 몇 번이나 쓰러주시며 "잘 가라"고 화답했다. "40년 넘게 이걸(민박) 해도 4-5일씩 머물다 가면 내가 마음이 찡해" 하시는 할아버지 때문에 코끝이 시큰해졌지만, 곧이어 "눈물이 핑도네요 정말로~" 를 손박자까지 넣어 구성지게 불러 제치시는 바람에 따라서 웃고 말았다.
◈용두암에서 중엄리 전망대까지 '맛배기 라이딩'
청양고추 팍팍 썰어넣고, 고추장 양념에 맛갈스럽게 버무려낸 매콤한 제육볶음에 구수한 청국장까지, 푸짐한 아침식사를 마치고 터미널에서 서쪽 방향으로 가볍게 자전거 라이딩을 시작했다. 하체까지 가려주는 2천 원짜리 우비 한 장은 필수, 속도는 평소의 1/2 정도. 젖은 도로에서 미끄러짐은 자칫 큰 사고로 이어질 수 있으니 각별한 주의가 필요하다. 숙소에서 나와 곧장 해안도로로 들어서면 아찔한 높이의 용연 구름다리를 만나고, 다시 알록달록한 화분 테마거리를 지나면 여의주를 훔친 죄로 몸통은 땅 속에 갇히고 머리만이 나와 있다는 용두암에 다다른다.
용두암에서 다시 서해안로를 따라 5km여를 달려가면 제주 시내에서 가장 가까운 이호해수욕장이 나오는데, 여기서 갑작스레 빗방울이 거세졌다. 비를 피해 야영장 천막 아래로 몸을 피하고, 정막한 해변을 바라보니 오른쪽 멀리 '트로이 목마' 모양의 하얗고 빨간 등대 두 기가 인상적이다. 오디세우스의 영혼이 비 내리는 바다를 응시하며 3천2백여 년 전의 '짜릿한 승리'를 회상하고 있을까. 밤이 되어 사람마을이 모두 잠들면, 두 마리의 목마는 고향인 지중해로 잠시 날아갔다 다시 오는 것일까. 거칠 것 없는 상상을 즐기며 아무도 없는 백사장을 달려가 바닷물에 두 발을 적시고 다시 자전거 위에 올랐다.
이어서 만나는 도두동의 옛 사수마을과 중엄리에서는 제주의 오랜 생활상을 엿볼 수 있었다. 옛부터 물이 귀한 제주에서는 땅속으로 흘러내려와 바닷가에서 샘솟는 용천수가 나는 곳에 자연히 취락이 형성되었는데, 주민들은 힘을 합쳐 용천수가 나는 곳에 돌벽을 쌓고 식수원과 빨래터, 목욕탕 등으로 이용했다. 이러한 흔적들은 제주 전역에서 볼 수 있는데, 최소 300년 전에 형성된 것으로 알려진 사수마을의 경우 1979년 제주국제공항 확장공사로 사라졌고, 현재는 뿔뿔이 흩어져 살던 주민들이 용담-도두 해안도로 엉물언덕에 1999년에 설치한 몰래물향우회기념비와 바로 옆 빨래터가 이를 증명해주고 있다. 용암이 흘러 만들어낸 특유의 지형과 바다가 어우러져 만든 제주 풍광은 봐도봐도 지치지 않는다. 비에 바지가 흠뻑 젖고, 땀에 젖은 우비가 양팔에 찰싹 들러붙었지만 여정은 달콤하기만 했다. 돌아오는 길, 맨몸으로 비를 홀딱 맞은 일행 한 명이 체력 고갈을 호소해 할 수 없이 히치하이킹을 했다(여행에서 오기는 금물!).
여기서 잠깐, 자전거 여행을 계획하는 이들을 위한 조언 하나. 자전거 여행시 숙소는 미리 잡지 않는 것이 현명하다. 하루 이동거리를 잘 계획해서 되도록 완주하고, 어둠이 내리기 전 적당한 곳에서 여장을 풀면 된다. 해수욕장 등 유명 관광지에선 불과 4-5미터 차이로 물가 차이가 있으니 조금만 발품을 팔면 비교적 저렴한 숙소와 음식점 등을 구할 수 있다. 저녁식사를 겸해 푸짐한 치킨과 시원한 맥주로 4박5일간의 제주 무사완주를 기원하는 것으로 이날의 여정은 끝이 났다.
◈오늘의 공정여행 일지
1. 이산화탄소로 인한 지구온난화를 막기 위해 비행기 대신 배를 이용했습니다.
2. 역시 같은 이유로 자동차 대신 자전거를 이용했습니다. 이 친환경적인 교통수단의 장점은 운반하는 과정에서 겪은 약간의 수고로움과는 비교할 바가 아님을 앞으로의 여정이 증명해줄 것입니다.
3. 여행 중 쓰는 돈이 현지 거주민에 직접적인 이득으로 돌아갈 수 있도록, 현지인이 운영하는 숙박집과 음식점 등을 적극 이용하였습니다.
4. 일회용 쓰레기를 줄이기 위해 출발 전 4천100원 짜리 물통을 준비했습니다. 하루 평균 7-8통 물 섭취. 여행기간을 총 합하면 상당한 경비와 쓰레기 절감효과가 있습니다.
[공정여행의 실천②]바다와 하늘과 내가 하나로구나!
1차 완주코스 : 제주여객터미널-표선해수욕장까지 총 10시간 소요
날이 밝았다. 막연한 확신은 현실이 되어 전날 온종일 내린 비가 흔적조차 없다. 제주에서 맞는 7월의 첫날, '공정여행'을 기치로 본격적인 제주일주에 돌입하는 날이다.
아침식사는 계란 하나 톡 깨넣은 라면에 민박집서 준 김치로 간단히 떼우고, 떠날 채비를 서둘렀다. 섬 일주는 여객터미널을 기점으로 최대 4일을 목표, 동쪽으로 이동한다. 오늘의 목적지는 표선해수욕장. 지도에서 보면 전체 일주도로 1/3 정도에 해당한다. 자자, 머뭇거릴 시간이 없다. 이제 출발!
'방향 잘못 잡은 거 아냐?' 제주시내를 빠져나가려면 반드시 통과해야 하는 장거리 업힐 앞에서 일행은 잠시 주춤한다. 오전 9시가 조금 넘은 시각에 기온은 심상치 않고, 전날과 달리 자전거에 배낭까지 실은 터라 행여 첫 단추부터 잘못 끼운 게 아닌가 불안이 엄습한다. 그러나 한번 정한 규칙을 어찌 손바닥 뒤집듯 바꿀 수 있으랴. 세상의 많은 비극이 쉬이 저버리는 마음에서 비롯되나니…!
두 발 끝에 힘을 주고 양 페달을 힘껏 밟는다. 내려서 끌고 갈 수도 있지만 포기하고 싶지 않다. 숨이 턱까지 차오르고 이마와 팔등에 송글송글 맺힌 땀이 흘러내릴 때쯤 드디어 복잡한 시내 중심을 지나 한산한 내리막길이 나타났다. 다소 거창한 표현이지만 이것이 자전거가 매번 일깨워주는 인생의 당연 진리다. 힘겨운 업힐 다음에 반드시 짜릿한 다운힐이 있고, 내리막과 평지가 길 수록 그 길 만큼 가파른 오르막길이 나타나는 것.
달리지 얼마지 않아 '검은돌해변' 이정표가 눈에 띄었다. 여기서 잠깐, 제주전도에서 검은돌해변이란 지명은 눈을 씻고 봐야 찾을 수 없다. 이 곳의 원래 이름은 삼양해수욕장으로, 제주도가 지역 해수욕장의 특성을 고려한 새 이름짓기를 추진, 올해 5월부터 명칭이 바뀌었기 때문이다.
방문객들의 혼란이 야기될 수 있다는 우려가 제기되고 있지만, 이름만 놓고 봤을 때 백사장이 아닌 철분이 함유된 검은 모래로 유명한 지형적 특성이 잘 반영된 새 이름이 더욱 친근하게 와닿는다. 이 곳 검은 모래로 찜질을 하면 신경통·관절염·비만증·피부염·감기예방·무좀 등에 효과가 있다 하니 지병을 앓고 있다면 올여름 방문 추천. 해변을 보고 돌아나오는 길에선 전날 옛 사수마을과 중엄리에서 본 용수천터를 다시 만났다. 이 곳은 현재도 마을 주민들이 빨래터로 사용하고 있었으며, 더욱 인상적인 것은 바로 옆 '목욕탕'이었다. 나름 여탕과 남탕이 나뉘어져, 하늘을 보며 목욕을 즐길 수 있는 완벽한 친환경 욕실이었다. 별이 빛나는 여름밤에 홀로(꼭 혼자일 필요는 없다) '알몸 목욕'을 즐기는 므흣한 상상에 잠시 빠져들었다. 그야말로 환상적일 것 같다.
일주도로와 해안도로를 오가며 일도동에서 삼양동을 거쳐 조천리에 들어섰을 때 하얀 모래운동장이 어여쁜 조천중학교가 또 발길을 붙든다. 수업이 한창인 오전, 교실의 열린 창틈 사이로 선생님의 열띤 목소리가 들려오고, 행여 봐줄새라 그 앞을 서성거려 보지만 아이들은 노숙한 여행자들에게 눈길 한번 주지 않는다. 유년의 기억에 젖어 자전거 바퀴로 운동장 위에 원 하나를 남겨놓고 흐뭇해진 마음으로 학교를 빠져나왔다. 곧이어 채 속력을 내기도 전에 발견한 곳이 대암 철새도래지. 이곳은 하마터면 그냥 지나칠 뻔 했지만 운 좋게도 집들 사이로 언뜻 보이는 예사롭지 않은 풍광에 발길을 멈췄다.
영화 '노킹 온 헤븐스 도어'가 연상되는 좁은 풀길을 걸어 들어가니 양쪽에 자연 저수지가 나왔다. 바다와의 경계가 모호한, 바다 속의 바다 같은, 묘한 느낌의 대형어장 같았다. 물속을 들여다보니 가히 철새들의 '뷔페'라 할 만하다. 약이 바짝 오른 게 한 마리가 금방이라도 물듯 보랏빛 집게를 들고 기세를 부리다 뻔히 보이는 곳에 몸을 감춘다. 넋 놓고 바다를 보고 있자니 갑자기 어른 팔뚝만 한 물고기 한 마리가 거의 날듯 물 위를 연속 점프했다. '조금만 더 연습하면 날겠군!'
인근 주민이 오후가 되면 여름 철새들이 한 가득 몰려온다며 머물렀다 가라 했지만 아쉽게도 발길을 돌려야 했다. 다음 제주 방문 때 꼭 한번 다시 들러볼 참이다. 참고로 이곳 조천은 거문오름을 비롯해 꾀꼬리, 부소, 밖돌, 안돌, 샘이 등 수많은 오름들이 모여 있는 곳으로, 오름을 테마로 여정을 계획하는 여행자들에게 적극 추천한다(나중에 알게 됐지만 이틀 후 만나게 될 '머털도사'도 이 곳에 살고 있었다).
조천리에서 다시 해안도로로 방향을 틀었다. 제주 일주도로는 곳곳에서 해안도로와 자연스럽게 이어져 있어 내륙 풍경이 지겨워지면 금세 바다와 하늘이 활짝 열린 해안도로로 나가 해방감을 느낄 수 있는 것이 큰 매력이다. 얼마나 달렸을까. 작렬하는 태양 아래, 눈앞에 펼쳐진 모든 풍경이 푸른 빛을 발했다. 하늘은 하늘대로 바다는 바다대로.
그것은 제각각 다른 빛을 가진 푸르름이었으며, 말그대로 아름다워서 눈이 부셨다. "와아... 우와... 이런 곳이 있네... 이거 다 어쩔 거야..." 연거푸 감탄사를 쏟아내던 중 누구 하나 말하지 않았는데 일행 모두가 자전거를 멈춰 세웠다. 한 해변 앞에서. 순간, 갓 그려낸 수채화 그림 속에 있는 듯도 하고 HD 대형TV 스크린 속으로 빨려들어온 것 같기도 했다.
'하나, 둘, 셋.... 열, 열하나' 가늠키 어려운 푸르름의 향연 속으로 천천히 걸어 들어갔다. 발목 아래로 바닷물이 찰랑거리고, 손을 뻗으면 잡힐 것 같은 물고기들이 놀라지도 않고 유영을 한다. "여기서 하루만 있다 갈까?" 일행 중 한 명이 운을 뗀다. 다들 한참을 망설이다 맘을 굽게 먹고 자전거 위에 올랐지만, 제주일주를 포기할 수도 있었던 가장 '유혹적인' 곳이었다. 이 곳의 정확한 위치는 상세히 설명하지 않기로 한다. 착한 방법으로 길 하나하나에 애정을 가지고 천천히 걷는 여행자라면 반드시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어느덧 출발 4시간여를 넘어서면서 가까운 함덕해수욕장 앞에서 따뜻한 고기국수와 시원한 물냉면으로 배를 채우고 조금 떨어진 북촌리의 목지코지 정자에서 잠시 휴식을 취했다. 바다 한 가운데를 달리는 작은 어선에서 들려오는 해녀들의 왁자지껄한 수다소리에 귀기울이다, 개구리 모양으로 쌓은 돌탑이 눈에 띈다. 제주 해안 곳곳에서 자주 볼 수 있는 갖가지 모양의 돌탑은 바다에 나가 일하는 어민들의 안녕을 기원하는 바람들이 깃들어 있다.
목표치의 2/3가 남아 있는 시점. 속도에도 신경을 써야할 시점이다. 발이 쉬이 떨어지지 않는 풍광들 속에서 서서히 달궈진 감동의 도가니는, 차 하나 없이 광활하게 펼쳐진 해안도로를 전력질주하며 기분좋게 식힐 수 있었다. 더할 나위 없이 쾌청한 날씨 속에 한달음에 북촌리에서 동촌리로, 이어서 월정리를 거쳐 행원리까지 달려왔다. 행원리에는 1997년 조성된 풍력발전시범단지가 있는데, 바다를 마주보며 천천히 돌아가고 있는 거대 풍력발전기들이 위협적으로 느껴지기도 한다. 사람이 두 팔로 막거나 들 수 없는, 특히 금속으로 만든 물건을 볼 때면(대표적으로 고층건물) 언제나 약간의 두려움과 불안증세를 느끼는 건 일종의 과대망상 같은 걸까 종종 생각해본다.
광어가 지천에 늘린 양식장까지 구경을 마치고, 길 모퉁이에 있는 작은 점빵에 들러 얼음과자 하나씩을 물고 지도를 펼쳐본다. 치매에 걸린 듯 인사를 해도 눈빛을 마주치지 않는 백발의 노인 옆에, 그의 머리색과 닮은 개 한 마리가 심드렁한 표정으로 우리를 바라본다.
주변은 여전히 밝았지만 저녁의 기운이 대기에 퍼지는 것이 느껴졌다. 조금 차가워진 바람이 지친 몸의 기운을 북돋워 주었다. 평대리에서 하도리, 종달리를 거쳐 성산리까지 막힘 없는 해안도로를 달리다보니 몸 구석구석 세포들이 깨어나는 느낌이다. 이 곳의 성산일출봉과 드라마 '올인' 촬영지인 섭지코지, 멀지 않은 삼달리에 위치한 미천굴관광랜드 등은 제주 대표 관광지니 한번쯤은 꼭 가볼만 하다.
우리는 이미 가본 곳들이라 눈도장만 찍고 통과. 한 시간여를 더 달린 끝에 드디어 이날의 종착지인 표선해수욕장에 다다랐다. 막판에 도로를 벗어나 올레길로 들어섰다 거친 바위숲을 헤쳐 나오는 길. 출발한 지 정확히 10시간 만이다.
무거운 베낭을 내려놓고 몸을 씻고 싶은 생각에 숙소부터 찾는다. 해변 바로 앞에 있는 펜션이 생각보다 저렴한 5만 원을 부르며 호객을 했지만 잊지말아야 할 것. 현지인이 운영하는 숙소를 이용할 것! 5백여 미터 안쪽으로 들어가니 정원이 딸린 단독주택에 민박 간판이 붙어 있었다. 안주인은 "무조건 2만 원이니까 해도 되고 안 해도 되요" 한 마디로 우리를 압도했다.
큰 방 두 개와 넓은 마루가 딸린 훌륭한 숙소였다. 정신없이 욕실로 들어가 샤워를 하는데, 그제야 선크림을 바르지 않아 벌겋게 익은 종아리가 온수에 따끔거린다. 다리는 괜찮겠지 한 것이 화근이었다. 그러나 해변 산책로를 따라 일몰을 감상하고 들어와 제주식 갈치구이와 한치물회 안주삼아 소주 한잔 톡 털어넣으니 아픔도 잠시, 그저 세상천지 이런 낙원이 없다! 오늘 하루 내 머릿속엔 '행복하다'는 말이 자꾸만 떠오른다.
오늘의 공정여행 일지
1. 길에서 마주치는 현지 주민들께 "안녕하세요" 인사했습니다. 무더운 날씨에 공공근로하시는 할머니 할아버지, 거멓게 피부가 그을린 해녀분들, 길가에 앉아 무료함을 달래시던 어르신들 모두 낯선 이방인의 수줍은 인사에 따뜻한 미소로 웃어주셨습니다.
2. 오늘도 역시 숙소와 음식점은 현지분들이 운영하는 곳만을 이용했습니다.
3. 물은 사먹지 않고 중간중간 들른 가게에서 리필했습니다. 7-8통을 마셨으니 이날 하루에만 8천 원 가량이 절약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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