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아있는 지성의 상징' 김준엽 전 고려대 총장
<연합뉴스>일제 강점기 광복군으로 독립투쟁에 나서고 해방 이후 국내에 중국학의 문을 연 `시대의 스승' 김준엽 전 고려대 총장(사회과학원 이사장)이 7일 서울 고려대 안암병원에서 노환으로 별세했다. 향년 90세. 독립군으로 항일투쟁에 가담했을 뿐 아니라 해방 이후 군사정권 아래에서 교육자와 학자로서 절개를 지킨 김 전 총장은 생전에 `살아있는 지성의 상징'으로 널리 칭송받았다. 사진은 김 전 총장의 고려대 평교수 시절(30대) 모습.
“전두환에게 굽실거릴 수 없다” … 노태우의 총리 제의 거절
중앙일보
일제강점기 학병(學兵) 탈출 1호, 이범석 장군의 부관으로 항일 무장 독립운동을 펼쳤던 투사, 해방 후 1세대 중국학·공산주의 전문가, 역사학자, 대학총장…. 예사롭지 않은 삶이었음을 일러주는 이력인데, 그 모든 화려한 호칭과 수식어보다 '지성의 절개'라는 담백한 표현이 잘 어울렸던 사람-. '영원한 광복군' 김준엽 전 고려대 총장의 만 90세 일기는 파란만장했지만 소박했다.
고인은 "현실에 살지 말고 역사에 살라"는 좌우명처럼 살다 갔다. 후학들에게 이런 말도 남겼다. "'역사의 신'을 믿으라. 정의와 선과 진리는 반드시 승리한다."
1985년 2월 고려대 졸업식 풍경은 아주 예외적이었다. 재학생과 졸업생이 총장 사퇴를 반대하는 시위 속에 식이 진행됐다. 82년 고대 총장이 된 고인은 정권에 고분고분하지 않았다. 80년 광주 민주화운동 이후 대학가 데모가 끊이지 않던 시절이다. 데모 주동자를 징계하라는 압력에 그는 "내가 그만두겠다"고 버텼다. "김준엽 총장 사퇴 반대" 시위가 1개월 넘게 이어졌다. '총장 사퇴하라'는 시위에 익숙한 한국 현대사에서 그는 매우 예외적 존재였다. 그 시절 대학을 다닌 박명림 연세대 교수는 "김준엽 총장이 받은 많은 훈장 중 최고의 영예로운 훈장"이라고 기억했다.
격동의 20세기를 온몸으로 부딪쳐 온 고인의 일생엔 두 차례 결정적 선택의 순간이 있었다. 1944년 일본 게이오(慶應)대 사학과에서 유학하던 21세의 청년 김준엽은 학병으로 강제 징집당했다가 탈출하는 모험을 감행한다. 첫 번째 선택이었다. 회고록 『장정(長征)』(전5권·나남)에서 그는 "목숨을 건 탈출"이었다고 술회했다. 일본군 탈출 후 중국 유격대에 들어가 항일투쟁을 하다가 다시 6000㎞를 걸어 충칭(重慶)의 우리 임시정부에 참여하는 과정은 대하드라마 그 자체다.
일제 강점 말기인 1945년 국내 진입작전을 준비하던 세 사람의 광복군 노능서·김준엽·장준하(왼쪽부터). 김준엽은 해방 이후 '사상계' 발행인으로 유명해진 장준하에 대해 "학병 탈출 이후 중국 유격대 시절부터 가장 가까운 동지로서 함께 지냈다"며 "회고록 『장정』은 장준하와의 연인과 같은 우정의 기록"이라고 말했다,
광복군 마지막 세대인 그는 한·미 합동 군사작전을 위한 특수훈련까지 받은 정예 독립투사였다. 미 전략사무국(OSS·Office of Strategic Service) 특별훈련을 받고 국내 지하공작원으로 진입을 준비하던 중 일본의 항복을 맞이했다. 해방 후 백범 김구는 그에게 함께 나라를 위해 일하자고 했다. 정치를 하자는 제안을 뒤로 하고 그는 학자의 길을 걷는다. 초대 내각 총리를 지낸 이범석 장군의 영입 제의도 거절했다. 두 번째 선택이었다.
고인은 정치에 소질이 없다고 생각했다. 현대 중국과 공산권을 연구한 1세대 학자로서 큰 업적을 남겼다. 고려대 아세아문제연구소를 세계적 연구기관으로 키워냈다. 『한국공산주의운동사』 『중국공산당사』 『중국 최근세사』 등을 펴냈다. 85년 고려대 총장직을 그만뒀지만 그에겐 '영원한 총장'이란 수식어가 따라다녔다. 유혹은 많았으나 다른 길을 걷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를 '지조(志操)의 선비'로 기억하게 하는 이유다.
88년 1월 대통령 당선자 노태우는 궁정동 안가로 김준엽을 초빙해 국무총리직을 제안한다. 그날의 대화를 일기장에 이렇게 적어놓았다(『장정』 4권 참조). "첫째, 노태우 당선자를 두 번 만난 일은 있지만 잘 모른다. 덮어놓고 중책을 맡는 풍토는 고쳐져야 한다. 둘째, 국정자문회의 의장을 맡게 되는 전두환씨에게 총리로서 내 머리가 100개 있어도 고개를 숙일 수 없다. 이건 내 개인의 문제만이 아니다. 내가 전씨 앞에서 굽실거리는 모양을 TV를 통해 보는 국민들, 특히 젊은층들은 실망할 것이다. 셋째, 나는 지난 대선 때 야당 후보자를 찍었다. 넷째, 나는 교육자다. 이 나라 민주주의를 외치다 투옥된 많은 학생이 아직도 감옥에 있다. 제자가 감옥에 있는데, 스승이라는 자가 어떻게 그 정부의 총리가 될 수 있겠는가. 다섯째, 지식인들이 벼슬이라면 굽실굽실하는 풍토를 고쳐야 한다. 좀 건방진 말이긴 하나, 나 하나만이라도 그렇지 않다는 증명을 보여줘야겠다."
그는 평생 고위 공직을 제의받았다. 초대 총리 이범석 장군의 영입 제의→4·19 혁명 후 장면 내각의 주일대사 제의→5·16 후 김종필의 공화당 사무총장 제의→1974년 대통령 박정희의 통일원 장관 제의→노태우 대통령의 총리직 제의→김영삼·김대중 대통령의 총리직 제의 등이다. 모두 거절했다. 총장 퇴임 후 가장 먼저 한 일은 회고록 집필이었다. 44∼45년 풍찬노숙(風餐露宿)했던 독립운동가들의 마지막 광경을 지켜본 그는 그 시절에 대한 기록(『장정』의 1, 2권 '나의 광복군 시절')을 남기는 일을 자신의 임무로 여겼다.
88년 이후엔 사회과학원을 설립해 한·중 우호를 높이는 데 기여했다. 베이징(北京)대를 비롯해 중국의 11개 대학에 한국학연구소를 세웠다. 중국 교육부로부터 문화훈장에 해당하는 '중국어언문화우의장(中國語言文化友誼奬)'을 받았다. 92년 한·중 수교 이후 한국인이 중국 정부로부터 훈장을 받기는 그가 처음이었다.
투데이-실천하는 지성, 시대의 스승 故 김준엽 전 총장
헤럴드경제
누군가에게 본이 되는 스승이 되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하물며 한 시대의 스승으로 불리며 존경받기란 더욱 어렵다. ‘시대’라는 수식어는 아무에게나 허용되지 않는다. 허나 7일 별세한 김준엽 전 고려대 총장(사회과학원이사장)의 이름 석자 앞에는 늘 ‘시대의 스승’ ‘시대의 지성’이라는 수식어가 놓였다. 올곧은 지식인, 불의에 굴하지 않는 지도자, 또한 나라를 사랑했던 애국자였던 김 전 총장은 우리 시대의 원로이자 참 스승이었다.
독립군으로 항일투쟁에 가담했을 뿐 아니라 해방 이후 군사정권 아래에서 교육자와 학자로서 절개를 지킨 김 전 총장은 생전에 ‘살아있는 지성의 상징’으로 많은 이들의 존경을 받았다. 특히 1982년 제 9대 고려대 총장에 취임한 후 군사정권의 압력에 맞서 학교와 학생들을 지켰다. 1985년에는 군사정권의 학생회 간부 제적 요구에 맞서다 결국 총장직에서 쫓겨났다.
당시 김 전 총장의 사임을 앞두고 고려대 학생들은 3개월여 동안 총장 퇴진 반대 시위를 벌였다. 군사정권의 하수인이라며 학교와 대립각을 세우던 당대 학생사회의 분위기에선 흔치 않은 일이었다. 그만큼 김 전 총장은 학생들로 하여금 신망이 두터웠다. “현실에 살지 말고 역사에 살아라. 긴 역사를 볼 때 진리ㆍ 정의ㆍ 선은 반드시 승리한다”는 그의 신념은 그렇게 젊은이들의 가슴을 울렸다.
그는 관직에 연연하지 않고 올곧이 학자의 길을 걸었다. 노태우 전 대통령이 집권한 1988년 국무총리직을 제안받았으나 “국정자문회의 의장을 맡게 되는 전두환에게 고개를 숙일 수 없다. 국민들, 특히 젊은 층이 실망할것이다. 게다가 민주주의를 외치다 투옥된 제자들이 많은데 스승이라는 자가 그 정부의 총리가 될 수 없다”며 고사한 일화는 유명하다. 김 전 총장은 이전에도 1961년 5ㆍ16 쿠데타 이후 김종필로부터 공화당 사무총장으로, 1974년에는 박정희 전 대통령한테서 통일원 장관으로 영입 제의를 받았으나 모두 물리치며 학자와 교육자의 길을 고집했다.
회고록 ‘장정’에서 그는 “사회적으로 조금만 자리를 잡으면 다들 관직 한 자리를 해서 족보에 번듯한 관직명이라도 올려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은 관존민비의 폐습”이라며 관직을 한사코 고사한 이유를 설명했다. 선거철만 되면 교단은 뒤로 한 채 정치권에 줄을 대기 바쁜 ‘폴리페서’가 적지 않은 지금의 교수 사회가 새겨들어야 할 뼈아픈 충고다.
김 전 총장은 1988년 사회과학원을 창립해 이후 중국과의 학술교류에 여생을 바쳤다. 한ㆍ중 수교 이듬해인 1993년 베이징대를 시작으로 2002년까지 산둥, 난징, 옌볜대 등 중국 내 9개 대학의 객원교수직을 맡았고, 한국공산권연구협의회장과 중국학회장 등을 지낸 그는 ‘중국공산당사’ㆍ‘중국 최근세사’ㆍ ‘한국공산주의운동연구사’ㆍ‘나와 중국’ㆍ‘회고록 장정(長征)’등의 저서를 남기는 등 중국 연구에서 명실상부 국내 최고 석학으로 자리매김했다. 2009년에는 중국 주요 대학에 한국학연구소를 세우는 등 한국학 진흥에도 이바지했다.
속세의 풍랑에 아랑곳 하지 않고 하늘을 향해 뻗은 대나무처럼 김 전 총장의 삶에는 의연함과 기개가 녹아있었다. 김 전 총장은 이미 세상을 떠났지만 그의 생애 한순간 한순간은 후인들이 허투루 흘려보내선 안될 소중한 가르침으로 남았다.
[故 김준엽 추도사]불의와 타협을 거부한 현대의 선비
조광 | 고려대 명예교수
경향신문
김준엽 선생은 91세의 나이로 자신이 아끼고 사랑하던 조국과 제자들의 곁을 떠났다. 사실 오늘날 우리 사회에는 올바른 깨우침을 줄 수 있는 큰어른이 그렇게 많지 않다. 그러나 그는 우리 사회를 일깨우는 스승이었고, 스스로의 모범을 통해서 후진들에게 바른 행동을 촉구해 준 분이었다. 그러기에 그의 서거는 우리 사회의 슬픔이며 큰 손실이다. 이제 그를 떠나보내며 공인으로서 그가 남긴 자취들을 되짚어 보고자 한다.
그는 자신이 살아있다는 존재감만으로도 많은 이들에게 용기와 희망을 줄 수 있었던 사람이다. 그는 분명 많은 사람들의 사표였으며, 젊은 제자들에게 역할모델을 제공해 주던 우람한 나무였다. 그의 그늘 아래에서 많은 사람들은 자신의 삶을 추스르고, 학문의 길을 걸으며 빗나가려는 자신의 욕망을 누를 수 있었다. 그래서 그를 인생의 스승이며 사표로 삼고자하는 이들이 그치지 않았다.
우선 그는 우리나라 전통시대 이래로 계속되어 오던 선비의 정신을 지켜준 분이었다. 학문의 중요함을 알고 실천했으며, 지난날 선비정신의 핵심이었던 ‘의리’를 현대사회의 정의감으로 계승해 준 분이었다. 그는 이미 청년시절 일제의 불의한 식민지 지배에 저항하여 독립운동에 투신함으로써 정의를 실천하고자 했다. 그는 불의와의 타협을 거부하고 정의를 지켜나간 현대의 선비였다.
또한 그는 미래를 내다볼 수 있는 밝은 눈을 가졌다. 그래서 그는 민족의 미래를 생각하면서 통일문제에 남다른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미래를 생각했기 때문에 고려대학교 부설로 아세아문제연구소를 설립하여 한국 사회와 동남아시아에 대한 연구자를 힘들여 양성했다. 그가 세운 아세아문제연구소는 우리나라 대학사에서 최초의 본격적 연구소로 기록되고 있다. 그는 고려대 사학과에서 그리고 아세아문제연구소를 통해서 학문을 일구어 나갔고 후진을 양성했다. 그리고 민족의 미래를 향한 그의 학문적 열정은 금기에 대한 도전으로 나타났다. 그리하여 그는 1960년대 당시 금기시되고 있던 공산주의 문제, 그리고 중립화통일론과 같은 문제들도 과감히 학문의 영역으로 끌어들였다. 한국공산주의운동사나 중국현대사의 연구는 그의 연구업적을 거치지 않고서는 불가능한 일이 되었다.
김준엽 선생은 무엇보다도 인재를 아꼈으며, 젊은이들을 사랑하고 그들에 대한 애정과 희망을 놓지 않았다. 그는 군사독재에 맞서 고려대 총장이라는 직위를 걸고 강제 퇴직된 교수들을 복직시켰으며, 민주화를 주장하던 학생들에 대한 처벌을 거부했다. 이런 사정을 알던 당시의 학생들은 총장실 창 너머 길가에 모여서 광복군가를 불러주었고, 그 주변의 여러 사람들은 그의 안위를 걱정하면서도 선비다운 의연함에 박수를 보냈다.
이제 고인이 된 김준엽 선생은 누구보다도 학문을 사랑했고, 이 때문에 학인(學人)으로서의 의연함을 끝까지 간직하고자 했다. 1980년대 이후 그는 수차례 국무총리를 제의받았고, 자신이 원했다면 그 자리를 차지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는 끝까지 관직에의 취임을 거부하면서 학자로서의 길을 후학들에게 보여주고자 했다. 또 그렇게 하여 그는 현대사회의 선비로 우뚝 섰다. 물론 그는 학자들이 현실정치에 참여하는 일을 부정적으로만 보지는 않았고, 이를 학자들이 할 수 있는 여러 일 가운데 하나로 말하곤 했다. 그러나 그는 ‘역사의 신(神)’을 믿었기 때문에 불의와 담을 쌓고, 부정의한 현실과 타협하기를 끝까지 거부했다. 그래서 그는 자신의 실천을 통해서 자신이 키운 제자들에게 학문과 정치의 관계를 알려주고자 했다.
일반적으로 추모의 글을 쓰면서는 그 떠난 이를 회상하며 슬퍼하는 마음이 앞서게 마련이다. 그러나 김준엽 선생의 죽음 앞에선, 우리는 그의 떠남을 슬퍼하기보다는 우선 그 삶의 완성에 감탄하고 부러움을 느끼면서 자신을 돌아보게 된다. 그는 구십 평생을 참선비이며, 스승으로 살았다. 이 때문에 그를 아는 사람이나 제자들은 그 삶의 크기에 감격하면서 그를 더욱 그리게 된다. 고인의 명복을 빌면서, 내 삶의 완성을 향한 그의 모범들을 결코 잊지 않기를 다짐하고자 한다.
故 김준엽, 12차례 관직 사양한 올곧은 지식인… 진보·보수 모두의 ‘참 스승’
경향신문
ㆍ김준엽 전 고려대 총장 (1920~2011)
1985년 2월, 고려대 졸업식장에서는 “총장님 힘내세요”라는 학생들의 외침이 퍼졌다. 3개월 동안이나 학생들이 총장 퇴진 반대 시위를 벌인 곳은 고려대가 유일했다. 군사정권 시절, 학교마다 학생들이 정권의 하수인을 자처하던 총장들에게 물러나라고 목소리를 높이던 때였다. 당시 고려대 총장이었던 고인은 정권 반대 운동을 벌인 학생들을 제적시키라는 정권의 압력에 맞서다 결국 쫓겨났다.
국민훈장 모란장 등 많은 훈장을 받았던 김 전 총장이지만, 생전에 그는 “이때 학생들의 퇴진 반대 시위가 인생 최대의 ‘훈장’이었다”고 말했다. 그 도덕성과 지조가 김 전 총장을 진보와 보수를 넘어 모두 존경하는 우리 사회의 드문 지식인이자 원로로 만들었다. 그의 일생을 관통하는 것은 “현실에 살지 말고 역사에 살아라”는 것과 “역사의 신을 믿어라. 긴 역사를 볼 때 진리·정의·선은 반드시 승리한다”는 신념이다.
나라를 잃은 시대를 살아낸 김 전 총장에게는 그런 종교와도 같은 신념이 암울함에 버틸 수 있었던 힘이었다. 신의주고보를 다닐 때 일본에 수학여행을 갔다가 귀로에서 일본말을 쓰는 조선인 학생과 난투극을 벌인 그였다. 1944년 일본 게이오대학 유학 시절 일본군의 학병으로 징집된 김 전 총장은 학병으로서는 1호로 일본군을 탈출해 독립운동에 가담한다. 이때 평생의 친구이자 훗날 사상계 발행인이 되는 고 장준하 선생을 만나게 된다.
광복군 시절 장준하와 함께 1945년 8월20일 중국 산둥성 유현에서 광복군 국내정진대원들과 찍은 사진. 왼쪽부터 노능서, 김준엽, 장준하 순이다. | 나남출판사 제공
장준하와 함께 중국 충칭의 임시정부를 찾아가는 ‘6000리의 장정’을 하는 동안 김 전 총장은 “우리 후손들에게 이런 고생을 시키지 않기 위해 못난 조상이 되지 말자”고 함께 절규했다고 한다. 결국 그는 장준하와 함께 광복군을 찾아가 이청천·이범석 장군의 부관으로 활동했고, 1945년 미군기를 타고 국내 진공 작전에 참가했으나 한국 진입 중지 명령을 받고 회항하는 아픔을 겪기도 한다.
김 전 총장은 회고록 <장정>에서 “과연 나는 못난 조상이라는 후세의 평을 면할 수 있겠는가 되돌아보게 된다”라고 썼다. 장정 때 스스로 다짐했던 그 말이 그의 뇌리에 강하게 자리했음이다. 그는 생전 한 인터뷰에서 “생일상을 따로 차리지 않는다는 것과 벼슬을 안 하겠다는 것이 제 일생의 신조”라고 밝혔다. “생일날마다 일제치하에서의 아픔이 떠오르고, 두 동강 난 조국의 신음소리가 들려와 집에서 밥상을 받을 수 없었다”는 것이다.
총장 사퇴 김준엽 전 고려대 총장이 1985년 3월 총장 사퇴를 맞아 고별사를 하고 있다.
각계에서 두루 신망이 높았던 김 전 총장은 정권이 바뀔 때마다 총리 후보 1순위였다. 그는 회고록에서 박정희 정권에서부터 김대중 정권까지 국무총리를 비롯해 12차례의 관직 제의를 받고도 거절했다고 적었다. “사회적으로 조금만 자리를 잡으면 다들 관직 한 자리를 해서 족보에 번듯한 관직명이라도 올려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은 관존민비의 폐습”이라는 것이다. 권력자들이 그를 두려워한 것은 부당한 압력에 굴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학자로서도 최고의 성과를 가지고 엄정한 지식인의 길을 걸었기 때문이다. 평생 “새벽 4시에 일어나서, 시간을 5·10분 단위로 쪼개 쓰면서” 공부와 집필에 몰두한 그는 ‘20세기의 명저’로 꼽히는 <한국공산주의운동사>(전5권·김창순 공저)를 저술하기도 했다.
칩거하며 집필 1985년 고려대 총장직에서 물러난 직후 자택에 칩거하며 집필에 열중하고 있다.
광복군 참가 이후 바로 귀국하지 않고 중국에서 공부했던 김 전 총장은 고려대 총장직에서 쫓겨난 이후 사회과학원을 설립하고 중국과의 학술교류에 평생을 바쳤다. 1985년 당시 총장 퇴진 반대 시위에 참가했던 박명림 연세대 교수는 2년 전 제자들과 마지막 점심자리에서의 김 전 총장을 회고한다. “총장님을 스승으로 모실 수 있어 행복했다고 말씀드렸더니, 자네들 같은 학생들을 둔 것이 행복했다고 말씀하셨어요. 한 사람 한 사람 다 지켜주지 못해 지금까지 짐이라고, 자네들 덕분에 나라가 민주주의로 화해와 통일로, 선진국가로 바로 가는 걸 보니까 우리가 잘못 가르치지는 않았구나 하면서 오히려 감사하다고요.”
김 전 총장이 우리 시대의 원로이자 참 스승으로 꼽히는 이유다.
2011년 10월 7일 오후 03:51 (0) | 2011.10.0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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