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지막 오프라 윈프리 쇼… 마지막 게스트는 자신
방청 신청한 140만명 중 404명 뽑아 자리 함께 해… 깜짝 이벤트는 없어
무대엔 의자 하나만 놓여 그녀 홀로 앉아 25년 회고
"시청자는 내 사랑" 남기고 애완견 사디와 무대 떠나
오프라 윈프리쇼 마지막 무대의 초대 손님은 바로 '그녀 자신'이었다. 25일(현지시각) 오프라 윈프리(57)의 고별 방송이 CBS를 통해 전파를 탔다. '25년 토크쇼 대장정'의 마침표를 찍는 마지막 60분이었다. 방송 앞뒤에 붙는 30초 광고비만 100만달러에 달한 최종회 녹화는 24일 평소와 같이 시카고 하포스튜디오에서 진행됐다.
▲ 1986년 첫 방송 이후 숱한 화제를 뿌리며 미국 시청자들의 사랑을 받은 ‘오프라 윈프리 쇼’가 25일 마지막 전파를 탔다. 원피스를 단정하게 차려입고 마지막 무대에 오른 진행자 오프라 윈프리는 미소를 머금은 채 조용히 손을 흔들며 시청자들에게 작별을 고했다. /로이터 연합뉴스
분홍색 원피스를 입은 윈프리가 스튜디오에 들어서는 순간, 404명의 방청객이 기립 박수와 환호로 맞았다. '절친'인 영화배우 게일 킹과 최근 아널드 슈워제네거 전 캘리포니아 주지사와 별거에 들어간 마이라 슈라이버 등 유명인사는 물론 윈프리의 초등학교 4학년 시절 담임 선생님, 열성팬 등 그를 사랑하는 사람들이 모두 모여 있었다. 최종회 방청객으로 오겠다고 신청한 140만명 중 선택된 404명이었다. 방청객 숫자에 대해 제작진은 특별한 설명을 내놓지 않았지만 '404'가 사이버 공간에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 웹페이지를 의미한다는 점에서 토크쇼 종영을 상징하는 것으로 해석된다.
윈프리가 올라선 무대엔 의자가 하나만 놓여 있었다. 4561회 동안 1만여명의 이야기 손님이 그와 마주앉아 울고 웃다간 무대였다. 이곳에서 그는 홀로 60분 동안 담담하게 자신의 이야기를 풀어놨다. 평소처럼 화려한 음악도, 영상도, 조명도, 게스트도 없었다. 가수·작곡가 폴 사이먼이 그를 위해 만든 노래가 배경에 잔잔히 흐를 뿐이었다. 화면엔 1986년 오프라 윈프리쇼 '1회 방송' 장면이 떴다. '80년대식' 구불구불한 머리 모양에 두터운 황색 모피 코트를 입고 쇼를 진행하는 그의 모습이 나오자 방청객은 폭소를 터뜨렸다. 윈프리도 따라 웃었다. "저때 나에게는 경험도, 스타일리스트도, 분장사도 없었어요. 내가 가진 거라곤 오직 아줌마 파마컬과 촌스러운 모피 코트였죠."
그랬던 그가 145개국, 1일 시청자 700만명을 울고 웃기는 억만장자 토크쇼 여왕으로 우뚝 서게 된 '발자취'들이 화면에 지나갔다. 화면 안에서 톰 크루즈는 "사랑에 빠졌다"며 소파에서 방방 뛰었고, 마이클 잭슨은 "나는 피부가 하얘지는 병에 걸렸다"며 정색을 했으며 윈프리는 "나도 성폭행당했었다"며 눈물을 쏟았다. 쇼가 마지막으로 향해 갈수록 청중과 그녀의 눈시울은 점점 붉어졌다.
윈프리는 시청자들을 향한 '사랑 고백'으로 쇼를 마무리했다. "지금 이 장면을 보고 있을 당신. 비록 당신의 이름은 모르지만, 나는 당신에게 사랑을 배웠습니다. 시청자와 이 쇼는 나의 영원한 사랑입니다." 무대에서 내려온 그는 방청객 한명 한명을 부둥켜안으며 눈물을 쏟았고 방송국 스태프들과는 "우리가 해냈다"며 손바닥을 맞부딪쳤다. 그리고는 그의 애완견 '사디'와 함께 모두를 뒤로하고 스튜디오를 걸어나갔다. 그게 윈프리쇼 최종회의 마지막 장면이었다.
오프라는 마지막 녹화를 앞두고 뉴욕타임스와의 인터뷰에서 "나는 떠나는 게 아니라, 단지 변할 뿐"이라며 "나는 내가 지금 가진 것보다 더 넓고 광범위하게 다른 형태로 내 자신을 창조해나갈 것"이라고 말했다.
이제 대중들은 비록 오프라쇼와는 이별하지만 적어도 내년부터는 OWN에서 더 자주 오프라를 볼 수 있게 된다. OWN(Oprah Winfrey Network)은 오프라가 5년 전 설립한 케이블채널이다. OWN 실적이 예상보다 부진해 오프라가 직접 시청률을 끌어올릴 계획이기 때문이다. 오프라는 일주일에 3개 이상 프로그램을 맡지 않겠다고 밝혔지만 내년 1월에 OWN에서 새로운 쇼를 시작할 예정이다.
25년 만에 막내린 ‘오프라 윈프리쇼’
토크쇼의 지존… “다시 만나요”
◀ 뉴욕타임스 5월 26일자 C1면.
《It’s easier to look around and try to determine who in popular culture is poised to take her place, and the answer is no one. 대중문화에서 누가 그녀의 자리를 대신할 준비를 갖췄는지 찾아보고 정하는 게 쉬울 것이다. 답은 아무도 없다는 것이다.》
뉴욕타임스 5월 26일자 C1면은 25일 방영된 마지막 쇼 소식을 전합니다.
(자기 자신을 초대 손님으로 세운 마지막 쇼에 대해 기사는 첫 방송을 떠올립니다) Ms. Winfrey’s last show was a lot more like the first nationally syndicated episode of “The Oprah Winfrey Show” in 1986, when the young woman who overcame an abusive, deprived childhood was only beginning to be known. 윈프리 씨의 마지막 쇼는 1986년의 전국방송 ‘오프라 윈프리 쇼’의 첫 에피소드 같았다. 그때는 학대받고 불우한 어린 시절을 극복한 젊은 여성이 막 알려지기 시작한 때였다.
(기자는 윈프리 씨에게 무작정 찬사를 보내기보다는 성공 전략을 분석합니다.) She built schools, rescued abused children and hawked beauty treatments, sometimes all in the same show. 그녀는 학교를 짓고 학대받는 아이들을 구했으며 미용술을 홍보했다. 때로 이 모두를 같은 쇼에서 했다.
(윈프리 씨는 이런 말로 쇼를 마쳤다고 합니다) I won’t say goodbye. I’ll just say ‘until we meet again.’ To God be the glory.”굿바이라고 하진 않겠습니다. 그저 ‘다시 만날 때까지’라고 할게요. 신께 영광을.
'전설'로 25년 만에 막 내리는 '오프라 윈프리쇼'… 왜 그녀인가
마이클 잭슨 아버지에 대한 증오·휘트니 휴스턴 마약중독 고백… 그녀 앞에선 모두가 무장해제됐다
‘당신과 나는 똑같은 약자라는 자세로 격려하며 상대방의 얘기를 듣는다. 상대방과 공감하고 함께 호흡하는 감정이입 능력이 뛰어나다. 에둘러 가지 않고 직구를 던진다. 그러고는 고해성사를 이끌어 낸다.’ 오프라 윈프리, 그녀가 사람들의 마음을 훔칠 수 있었던 비결이다. 그녀 앞에만 앉으면 전 세계 유명인사들은 무장해제됐다.
2008년 대선에서 버락 오바마를 공개 지지, 흑인 미국 대통령을 탄생시킨 ‘킹메이커’이기도 했다. 1993년 팝의 전설 마이클 잭슨은 14년 만에 처음 출연하는 프로그램으로 오프라 윈프리쇼를 선택했다. 그는 그녀 앞에서 자신을 학대한 아버지에 대한 증오, 백반증으로 무너지는 피부의 고통, 뼈저린 외로움을 호소하며 울음을 터뜨렸다. 코미디언 엘런 드제너러스는 레즈비언이라는 사실을 그녀에게 처음 고백했다.
세계인의 디바 휘트니 휴스턴은 자신을 망가뜨렸던 마약·섹스 중독과 지옥 같은 결혼생활을 담담하게 털어놨다. 열등감에 시달리던 동네 아줌마에서 ‘브리튼스 갓 탤런트’를 통해 일약 스타가 된 수전 보일이 영국 방송의 러브콜을 무시하고 가장 먼저 선택한 프로그램도 그녀의 쇼였다.
●불행 나누며 고해성사 이끌어
윈프리는 방송 데뷔 초기부터 ‘나와 당신은 똑같은 약자’라는 동질감을 안기며 시청자들을 위로했다. 오프라 윈프리쇼를 시작한 첫해인 1986년, 그녀는 자신이 9살에 강간당해 14살에 임신, 가출한 뒤 아이를 잃은 가난한 흑인 여자였음을 고백했다. 아메리칸 드림의 상징이자 21세기 가장 영향력 있는 인물로 선정된 그녀의 삶도 고통의 연속이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 시청자와 인터뷰이들은 그녀 앞에서 마음놓고 고해성사를 하게 된다.
서울대 ‘말하기’ 강사인 유정아 전 아나운서는 “오프라의 인생 자체가 고통이었기 때문에 인터뷰이는 이 사람한테라면 어떤 아픈 얘기도 할 수 있다는 느낌을 가지게 된다.”면서 “도덕적인 충고로 비판하거나 정보를 얻으려고도 하지 않고 문제를 풀어주려는 격려적 듣기로 인터뷰에 임하기 때문에 설득력이 큰 것”이라고 말했다.
●공감의 힘은 세다
여성들에게는 ‘옆집 아줌마’처럼 사생활에 대한 수다를 가감없이 늘어놓았다. 1988년 고깃덩어리 30.4㎏을 들고 나와 “‘10’ 사이즈짜리 청바지를 입으려고 이만큼의 살을 뺐다.”고 말해 돈과 명예 모두 거머쥔 그녀 역시 다이어트와 사투를 벌이고 있음을 알렸다. 아이를 갖지 않는 이유에 대해 ‘좋은 엄마가 될 수 없을 것 같아서예요.”라고 솔직하게 털어놓아 슈퍼맘이 되어야 한다는 강박에 시달리는 현대 여성들의 지지를 받았다.
커뮤니케이션 전문가인 전미옥 CMI연구소 대표는 “윈프리의 가장 큰 능력은 공감할 줄 안다는 것”이라면서 “그는 인터뷰 중 주의 깊게 들어주고 계속 추임새를 넣으며 스스럼 없이 상대를 포옹하는데 이는 그의 뛰어난 공감력을 상징한다.”고 말했다.
●직구로 승부한다
편안한 분위기에서도 어려운 질문, 민감한 주제도 비켜가지 않고 ‘직구’를 던지는 그녀의 화법은 세상의 편견을 바꾸는 동력이 됐다. 에이즈에 대한 반감과 공포가 여전히 극심했던 1987년 윈프리는 처음으로 ‘에이즈’에 대해 공개적으로 토론하는 타운홀 미팅을 열었다. 윈프리는 이 방송을 통해 에이즈에 대한 세인들의 오해를 걷어냈다. 1991년 로스앤젤레스(LA) 폭동 때는 직접 LA로 날아가 미국인들에게 미국 내 인종차별을 직시하게 했다.
1996년 광우병 문제를 다룬 에피소드에서는 “무서워서 더 이상 햄버거를 못 먹겠네요.”라고 말했다가 텍사스주 목장 주인들로부터 1100만 달러의 손실을 입었다며 고소를 당하기도 했다. 재판부는 결국 윈프리의 말이 사실에 근거했다며 그녀의 손을 들어줬다.
윈프리의 솔직한 심성은 덫이 되기도 했다. 자신과 친한 유명인사나 정치인이 나오면 강하게 맞서는 질문을 던지지 못한다는 비판을 듣기도 했다.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을 자신의 쇼에 두번이나 출연시킨 그녀는 2008년 오바마에 대한 과도한 충성과 친분 때문에 그의 정적인 세라 페일린 전 알래스카 주지사의 출연을 거부했다는 구설수에 올랐다. 2009년에는 여배우 수전 소머스가 쇼에 출연, 의학계에서 승인받지 않은 호르몬 요법을 설명하는데도 이를 방치했다는 비난을 받았다. 저널리스트의 냉철함은 갖추지 못했다는 지적이 나오는 이유다.
오프라 윈프리를 만든 10가지 장면들
미국 역사상 큰 인기를 끌었던 오프라 윈프리 쇼가 25년 만에 막을 내렸다. 오프라 윈프리(Winfrey)는 그의 토크쇼에서 수많은 화제를 낳았으며 마돈나, 비욘세, 톰 행크스 등 당대의 스타와 인물들이 윈프리의 쇼에서 충격적인 고백을 하기도 했다. 최근에는 미국의 버락 오바마 대통령이 쇼에 나와 자신의 출신지 논란에 대한 심경을 밝혔다. 마지막 녹화의 주인공은 윈프리 자신이었다. 그는 그렇게 당당함과 친화력·대중 호소력을 무기로 25년간 숱한 화제를 남겼다. 영국의 BBC 방송은 당대 최고의 토크쇼였던 오프라 윈프리 쇼의 명장면 10선을 꼽았다. 이 중에는 한 시대의 트렌드를 이끈 이정표가 된 방송도 있다.
◆ “나는 어렸을 적 강간당했습니다” 고백
윈프리는 자신의 쇼가 시작된 1986년, 쇼를 찾은 관객들에게 “나는 어릴 적 강간당한 적이 있다”고 말했다. 윈프리는 10대 흑인 미혼모에게서 태어나고 나서 친척집을 전전하며 살았으며 9살 때부터 친척과 이웃으로부터 지속적인 강간을 당했다. 그의 고백은 한 강간 피해자의 선언으로 그치지 않았다. 윈프리는 쇼를 찾은 사람들을 자신 옆에 마련된 소파에 앉히고 숨겨왔던 이야기를 꺼내놓게 만들었다. “나는 강간당했다”라 말할 수 있는 ‘진솔함’과 ‘감정이입’에 수많은 스타도 자신의 마음을 열었다.
◆지방 덩어리를 손수레에 끌고 나오다
1988년 윈프리는 옵티패스트 다이어트(단식하며 다이어트 보조식품을 먹는 방식) 선언 4개월 만에 30㎏을 감량했다. 그는 감량 직후, 10사이즈 청바지를 입고 손수레에 30㎏의 지방 덩어리를 실은 채 등장했다. 얼마 후 “4개월간 단식했으나 방송 직후 축하 음식을 마구 먹었더니 이틀 만에 청바지가 맞지 않았다”고 털어놨다.
◆마이클 잭슨의 입을 열다
1993년 윈프리는 좀처럼 방송에 출연하지 않는 마이클 잭슨을 섭외하는 데 성공, 그의 저택 ‘네버랜드’에서 생방송 독점 인터뷰를 진행했다. 이 방송은 무려 3650만명이 시청해 미국 토크쇼 역사상 가장 높은 시청률을 기록했다. 미국 방송 전체에서도 역대 네 번째로 높은 시청률이었다. 90분 동안의 인터뷰에서 마이클 잭슨은 그가 ‘백반증’이라는 피부색 변이에 시달리고 있음을 털어놨다. 당시 윈프리는 마이클 잭슨에게 더 이상 수술하지 말라고 권유하기도 했다.
◆오프라 윈프리 ‘통 큰 선물’
2004년 9월, 쇼의 19번째 시즌을 시작하면서 오프라 윈프리는 방청객 276명 모두에게 제너럴모터스(GM)의 스포츠 세단인 폰티액 G6을 한 대씩 선물했다. 이날 방청객이 받은 자동차의 가격은 모두 합해 7백만 달러(약 76억원)에 이른다. 선물을 받은 방청객들은 ‘내 가족과 친구들이 차를 받아야 하는 이유’를 편지로 써 보낸 사람들. 쇼는 윈프리가 방청객 11명을 무대로 불러내면서 시작됐다. 그는 이들에게 차를 한 대씩 선물했으며, 이어 남은 방청객들에게 선물 상자를 하나씩 나눠줬다. 윈프리는 방청객들에게 나눠 준 상자들 중 하나에 12번째 차 열쇠가 들어 있다고 말했지만, 방청객들이 상자를 열자 모든 상자에 자동차 열쇠가 들어 있었다.
◆소파위에서 뛰면서 케이티 홈스에 대한 사랑을 표현한 톰 크루즈, 엘렌 드제너러스 “나는 레즈비언”
2005년 오프라 윈프리 쇼를 찾은 톰 크루즈는 인터뷰 중 소파 위에 올라가 깡충깡충 뛰며 케이티 홈스에 대한 사랑을 표현했다. 당시 톰 크루즈의 행동은 전 세계적으로 회자됐고, 그는 케이티 홈스와 결혼하게 된다. 시트콤 ‘엘렌’의 주인공으로 유명했던 엘렌 드제너러스는 1997년 오프라 윈프리 쇼에 나와 자신이 레즈비언임을 밝혔다. 윈프리는 보수적인 미국 방송의 관례를 깨고 자신의 쇼에 성적 소수자를 출연시키기도 했다.
◆저자 제임스 프레이에게 이용당하다
2006년 오프라 윈프리는 쇼에서 범죄와 마약 중독 등으로 얼룩진 과거와 이를 극복하는 과정을 감동적으로 그린 제임스 프레이의 자전적 도서 ‘100만개의 작은 조각들’을 추천했다. 이후 책은 200만부 이상 팔렸고 그 해 미국에서 ‘해리포터와 혼혈 왕자’에 이어 두 번째로 많이 팔린 책이 됐다. 문제는 다음해 이 책의 내용 상당 부분이 거짓으로 드러났다는 것이다. 오프라 윈프리는 희대의 베스트셀러 사기극에 일조한 셈이 됐고 자신이 프레이를 초대한 것을 후회한다고 최근 밝혔다.
◆남아프리카 여학교 개교
오프라 윈프리는 2007년 남아프리카공화국 요하네스버그 근처에 40만 달러(약 4억4000만원)를 들여 여학교를 설립했다. 그는 “내 생애 가장 자랑스러운 순간”이라고 감격했고 학생 선발 과정에도 직접 참여하는 등 학교에 대한 깊은 애정을 보였다. 하지만 그 후 두 차례 교사 섹스 스캔들과 성희롱 사건이 발생했으며, 지역주민들과도 각종 문제가 발생해 운영에 어려움을 겪었다.
◆힐러리가 아닌 오바마를 지지
역대 미국 대통령 선거에서 정치권의 구애를 거부해왔던 오프라 윈프리는 2007년 5월 일천한 경력의 당시 버락 오바마 민주당 대통령 후보에 대한 지지를 선언했다. 이후 그는 민주당 경선과정에서 오바마 지원 연설에 나서기도 했다. 윈프리는 당시 여성인 힐러리 대신에, 피부색이 같은 오바마를 지지했다는 이유로 백인 여성 지지자들로부터 많은 비난을 받기도 했다.
◆2011년, 마지막 오프라 윈프리 쇼
시카고 유나이티드 센터의 오프라 윈프리 쇼 마지막 녹화장은 눈물로 가득 찼다. 톰 크루즈, 윌 스미스, 마돈나 등이 참석한 이 자리에서 그는 “교회에 다니지 않는 정신적 지도자, 아이가 없으면서도 미국 모성과 가족의 가치를 대변한 사람”으로 불렸다.
솔직한 오프라 윈프리 마지막 멘트 "오늘이 끝이 아니에요"
■ 25년 4561회 이어온 토크쇼 마침표
“난 시청자 대리인” 집요한 질문 특기
24일 미국 시카고 하포스튜디오. 여느 때와 달리 무대 위에는 의자가 한 개만 준비돼 있었다. 이날 ‘오프라 윈프리 쇼’의 진행자이자 마지막 초대 손님은 오프라 윈프리(57)였다. 방송 내내 본인의 이야기를 풀어가던 그녀는 “오늘 방송은 ‘안녕’이 아니에요. ‘다시 만날 때까지’입니다”라는 말을 끝으로 최종회(현지 시간 25일 방영) 녹화를 마쳤다. 25년간 4561회 방송된 ‘오프라 윈프리 쇼’는 이렇게 마침표를 찍었다.
윈프리가 1986년 자신의 이름을 건 토크쇼를 시작했을 때 그녀의 성공을 점치는 사람은 없었다. 윈프리의 이미지는 당시 이상적이라고 여겨졌던 토크쇼 진행자의 모습이 전혀 아니었다. 뚱뚱했다. 게다가 흑인이었다. 그러나 이제 지구촌에 ‘윈프리가 누구냐’고 묻는 사람은 없다. 대신 ‘윈프리의 성공요인은 무엇인가’를 연구한다. 그만큼 윈프리는 이 시대 대중문화의 아이콘이자 상징이다.
① “솔직함으로 무장하라”
윈프리는 1978년 요리사를 인터뷰하던 도중 고기의 상태를 재는 온도계를 들고 이렇게 물었다. “이게 뭔가요?” 제작진은 당황했다. 하지만 그녀는 방청객을 향해 집요하게 질문공세를 이어갔다. “이거 본 적 있어요? 모든 주방에 하나씩 갖다 놔야겠군요.”
한 인터뷰에서 윈프리는 무명 때부터 지켜온 자신만의 방송 원칙이 있다며 △모르는 게 있다면 인정하자 △나는 집에서 TV를 시청하는 이웃들의 대리인이다 △우습게 들려도 당황스러운 질문을 하자(시청자도 같은 질문을 할 테니 기회는 그곳에 있다) 등을 언급했다.
월스트리트저널은 어릴 적 성적 학대를 당한 경험부터 다이어트 고민까지 가감 없이 자신의 치부를 털어놓는 공개 참회를 일컬어 ‘오프라피케이션(Oprahfication·오프라되기)’이라 명명했다. 시사주간지 타임도 있는 일에 대해 얘기하는 ‘리포트 토크(report talk)’와 구별되는 ‘래포 토크(rapport talk·공감대화)’를 윈프리가 만들어낸 새로운 대중문화 현상으로 평가했다. 이런 솔직함은 초대 손님까지 무장해제시켰다. 배우 톰 크루즈는 연인이 있다는 사실을 고백하며 소파에서 방방 뛰었고 영국 닉 클레그 부총리는 “때때로 나도 운다”고 털어놓았다.
② “너 자신을 대접해라”
하버드대 비즈니스스쿨 낸시 코엘 교수는 “윈프리보다 더 강력한 브랜드를 생각해내려 지난 200년간의 브랜드 역사를 뒤지고 있다”고 말했다. 스스로 ‘윈프리 리스트’를 만들어 추천한 상품은 금세 히트를 쳤고 추천하는 책은 다음 날 베스트셀러가 됐다. 마케터로서 그녀의 역량은 탁월했다. ‘오프라 윈프리 브랜드는 빵부터 냉장고까지 모든 걸 팔 수 있다’는 우스갯소리도 들린다. 마케팅 전문가인 리사 아서 씨는 △진실성 △단순화 △일관성 △통합채널전략 등을 ‘마케터 윈프리’에게서 배울 점으로 꼽았다.
특히 메시지를 통해 소비를 이끌어내는 능력은 윈프리만의 강점이다. ‘너 자신을 대접해라’ ‘당신은 그럴 자격이 있어’라는 그녀의 외침에 시청자들은 지갑을 열었고 씀씀이도 커졌다. 윈프리 또한 통 큰 선물로 보답했다. 방청객 276명에게 GM 자동차를 선물했고 2009년 전 스태프와 방청객을 이끌고 호주 시드니로 여행을 간 적도 있다. 경제 주간지 비즈니스위크는 “통 큰 마케팅으로 영향력을 기하급수적으로 키워갔다”고 분석했다.
③ “시청자의 마음, 생각, 생활을 움직여라”
마돈나에게 윈프리는 ‘살아있는 유일한 여성 역할모델’이다. 배우 윌 스미스의 아내 제이다도 윈프리를 ‘신’이라 표현한다. 일반인에게도 윈프리는 ‘동기 부여자’를 비롯해 선생님 지도자 후원자 멘터 어머니 이상의 의미를 지닌다.
“내 쇼의 목적은 단순히 시청자를 즐겁게 하는 게 아니다. 그들을 개조하는 것이다”라는 윈프리의 철학은 시청자들에게 고난을 극복할 수 있는 힘을 불어넣었고 마음과 생각, 생활을 움직였다. “너에겐 항상 힘이 있다.” ‘오즈의 마법사’에서 착한 마녀 글린다가 도로시에게 하는 말을 윈프리는 금과옥조로 여기며 수차례 시청자들에게 전달했다.
1990년대 중반부터 토크쇼의 방향을 조금씩 수정하던 그녀는 2007년 자기 치유 프로그램인 ‘더 시크릿’을 시작했다. “신은 느끼는 것이지 믿는 게 아니다”라는 발언에 종교계의 비난을 받기도 했지만 ‘영적 지도자’로서 그녀의 영향력은 점점 커졌다. 2002년 미 개신교 잡지인 크리스채너티 투데이는 ‘O(오프라)의 교회’라는 기사를 통해 윈프리가 영향력 있는 영적 지도자가 됐다고 분석했다. 교회도 없이 2000만 명의 여성 시청자들을 신도로 끌어들인 ‘포스트모던한 목사’라는 수식도 따라붙는다.
1986년 9월 8일 처음 방송된 ‘오프라 윈프리쇼’는 25개 시즌에 3만 여 명의 초대 손님이 다녀갔고 전 세계 105개국에서 방영됐다. 포브스에 따르면 그녀의 개인 순자산만 27억 달러에 달한다. 현재 그녀는 여성 흑인 미국인 중에서 유일한 억만 장자다.
오프라 윈프리미시시피 변방 빈민가에서 태어나 9살 때 성폭행 당한 흑인 소녀의 앞날은 암담했다. 가출소녀 쉼터를 전전하던 중 마약에도 손을 댔다. 14살 땐 임신한 채 이혼한 아버지를 찾아갔다 저주에 가까운 말만 들었다. "못된 행동이나 임신 같은 걸로 가족에 치욕을 안기느니 차라리 죽어서 강물에 떠내려가는 게 낫겠다. " 아이를 낳았으나 2주 만에 죽었다. 기구한 세월을 견뎌내기 어려워 자살도 생각했다. '토크쇼의 여왕' 오프라 윈프리 얘기다.
윈프리는 죽음 대신 진학을 택했고,많은 책을 읽으며 좌절을 극복해갔다. 틈틈이 지역 방송에서도 일했다. 인생역전이 시작된 건 1980년대 중반 30분짜리 TV프로 'AM시카고' 진행자가 되면서다. 경쟁 프로는 최고의 시청률을 올리던 필 도너휴의 토크쇼였다. 'AM시카고'는 한 달 만에 같은 시간대 시청률 1위로 올라섰고,1년도 안돼 이름까지 '오프라 윈프리 쇼'로 바뀌었다. 이후 25년 동안 토크쇼를 진행하면서 미국 시청자만 수천만명에 세계 140여개국에서 방송되는 신화를 일궈냈다. 에미상도 47번이나 받았다. 미국에서 가장 부유한 흑인(포브스),가장 영향력 있는 여성(텔레그래프)으로도 꼽힌다.
성공 요인은 많다. 부끄러운 과거를 고백하는 솔직함과 가슴을 열게 하는 따뜻함,재치와 파격까지 갖췄다. 1988년 방송에선 다이어트 선언 4개월 만에 30㎏이나 감량한 뒤 꼭 맞는 청바지를 입고 손수레에 30㎏의 지방덩어리를 싣고 등장했다. 얼마 후 "4개월간 단식했으나 방송 직후 축하 음식을 마구 먹었더니 이틀 만에 청바지가 맞지 않았다"고 털어놨다. 그녀와 마주앉으면 대부분 허울을 벗어 던지고 진솔한 인간으로 돌아간다. 대통령부터 마약중독자까지 3만여명을 출연시켰다.
일부에서 너무 감정적이란 비판도 받는다. 인생 성공이 전적으로 개인의 노력에 달려 있다는 '오프라이즘(Oprahism)'이 사회 모순을 은폐한다는 지적도 있다. 그러나 '불량소녀'에서 토크쇼의 여왕으로 떠오른 윈프리는 아메리칸 드림의 상징으로 손색이 없다.
'오프라 윈프리 쇼'는 25일 막을 내렸지만 끝은 아니다. 새로운 토크쇼 '오프라의 넥스트 챕터'를 준비중이다. 혹 좌절했거나 시련을 겪는 이들은 그녀의 다음 말을 되새겨 볼 일이다. "당신 인생을 책임지는 사람은 당신 자신입니다. " "도전하지 않으려는 것이 인생에서 가장 위험한 일입니다. "
막 내리는 오프라 윈프리쇼
1986년부터 25년간 5000회 방영…마이클 잭슨 출연땐 3650만명 시청
스타 충격 고백·통큰 이벤트 화제…흑인 미혼모 딸서 ‘방송계 신화’로
‘하루 평균 700만명 시청, 전 세계 145국 방영, 5000회 방송.’
1986년 첫 전파를 탄 미국의 대표 토크쇼 ‘오프라 윈프리 쇼’가 지난 25년간 남긴 기록이다. 주부를 대상으로 하는 낮 프로그램임에도 불구하고 토크쇼 부문 시청률 부동의 1위를 지켜온 이 프로그램은 오는 25일 방송을 끝으로 막을 내린다. 윈프리 쇼는 방청객 전원에게 자동차·해외여행을 선물하는 등 ‘통큰 이벤트’와 유명 인사들의 충격적인 고백, 외모에 자신 없는 이들을 완벽하게 변신시키는 등의 기발한 프로젝트로 화제를 불러일으켰다.
◆화려한 출연진, 충격고백, 기발한 프로젝트
'오프라 윈프리 쇼'는 1986년 9월8일 ABC방송을 통해 처음 방영됐다. 오프라쇼의 첫 회 제목은 '당신이 원하는 남자/여자와 결혼하는 방법'이었다. '오프라 윈프리 쇼'는 원래 시카고 지역 토크쇼였던 'AM 시카고'의 확장판이었다. 말솜씨가 뛰어나 고교시절부터 아르바이트로 방송출연을 했던 윈프리는 1984년 1월 시카고 WLS-TV의 아침 토크쇼 ‘AM 시카고’를 통해 진행자로 첫발을 내디뎠다. 불과 몇달 만에 시카고 최고 토크쇼로 성장했고, 40배의 출연료를 받고 프로덕션과 계약을 했다. 이후 '오프라 윈프리 쇼'로 프로그램 타이틀을 바꿨고 1시간짜리 전국 방송이 된 것이다.
첫 방송 후 25년 동안 오프라쇼는 5000회도 넘게 방영되었고, 미국 내 시청자만 2200만명으로 전 세계 105개국에서 전파를 탔다. 백인 중심의 방송계에서 흑인 진행자로서, 또 '예쁘고 날씬하지 않은' 여성으로서 성공하기가 쉽지는 않았지만 그는 특유의 유쾌함과 호기심으로 미 방송역사에 수많은 기록을 남기며 승승장구했다. 지난해 미국 경제지 포브스는 11월10일(현지시간) 2009년 6월부터 1년간 할리우드 여자 스타 가운데 오프라가 3억1500만달러(약 3300억원)를 벌어들여 조사기간 중 가장 높은 수입을 올렸다고 보도했다. 또한 포브스가 이번 달 18일(현지시각) 발표한 엔터테인먼트 사업부문 '올해 가장 영향력 있는 유명인사 100인'에서는 오프라가 2위로 밀려났지만, 2억9000만달러(한화 약 3200억원)를 벌어들여 영향력을 과시했다.
윈프리 쇼는 유명 연예인과 정치 거물 등 화려한 출연진을 자랑한다. 1993년 윈프리는 좀처럼 방송에 출연하지 않는 마이클 잭슨을 섭외하는 데 성공, 그의 저택 ‘네버랜드’에서 생방송으로 독점 인터뷰를 진행했다. 이 방송은 무려 3650만명이 시청해 미국 토크쇼 역사상 가장 높은 시청률을 기록했다. 미 방송 전체에서도 역대 네 번째로 높은 시청률이었다. 마이클 잭슨이 사망한 2009년에는 그의 부모가 출연해 스튜디오가 눈물바다가 됐다. 영화배우 톰 크루즈는 2005년 출연해 케이티 홈즈와의 열애를 밝히며 소파 위에서 뛰고 바닥에 무릎을 꿇기까지 해 그해 ‘가장 놀라운 방송장면’으로 꼽혔다.
2008년 미 대선 당시 윈프리의 지지를 받았던 버락 오바마 대통령도 지난달 부인 미셸 오바마와 동반 출연해 대통령으로서의 생활, 출생증명서를 공개한 이유 등에 대해 털어놨다. 조지 W 부시 전 대통령과 앨 고어 전 부통령, 공화당 부통령 후보였던 세라 페일린 등도 그의 쇼를 거쳐 갔다. 2011년 4월27일 종영을 앞두고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가운데)과 부인 미셸 오바마가 출연했다.
각종 충격 고백으로도 화제가 됐다. 윈프리가 마약 복용 경험을 털어 놓은 것을 비롯해 가수 휘트니 휴스턴도 순탄치 않았던 결혼생활과 마약중독 등 힘들었던 과거사를 고백했다. 미국 최고의 아이돌 스타였던 '백 스트리트 보이즈'의 멤버 AJ 맥린은 어머니와 함께 출연해 약물중독 치료과정을 공개했다.
사연이 있는 일반인들의 출연도 많았다. 2003년 한 남성의 음주운전 사고 피해로 전신 화상을 입은 여성이 출연했는데, 윈프리는 “그녀는 내면이 아름답다”며 가장 인상에 남는 출연자로 꼽았다. 이 자리에는 사고를 일으킨 남성의 어머니가 출연해 피해자에게 진심 어린 사과를 전하기도 했다. 2003년 크리스마스에 맞춰 남아프리카의 고아원을 방문해 5만명의 어린이들에게 축제를 열었다.
기발한 프로젝트와 과감한 선물 공세로도 인기를 끌었다. 윈프리는 1988년에는 ‘다이어트의 꿈은 이뤄진다(Diet Dreams come true)’를 통해 공개적으로 다이어트를 선언, 몸무게를 67파운드(약30㎏)나 줄인 뒤 날씬한 몸매로 등장했다. 윈프리는 책 읽는 사회를 만들기 위해 1995년에는 한 달에 한 권씩 직접 선택한 책의 저자와 독자를 초대해 책에 대해 토론하는 ‘북클럽’이라는 새로운 코너를 시작했다. 그가 선택한 책은 소개 즉시 베스트셀러가 될 정도로 인기를 끌었다.
때때로 방청객들은 뜻밖의 선물을 손에 넣기도 했다. 2004년에는 19번째 시즌 시작을 기념해 방청객 276명에게 GM의 ‘폰티악 G6’를 선물했고 2010년에도 폭스바겐의 ‘뉴비틀’을 선물했다. 2009년에는 전 스태프, 방청객과 함께 호주 시드니로 여행을 가기도 했으며 현금, 애플 아이패드 등 다양한 선물을 제공했다. 2005년 배우 톰 크루즈가 당시 연인이었던 케이티 홈즈에 대한 사랑을 고백하며 소파에서 껑충껑충 뛰고 있다. 이 장면은 그해 ‘가장 놀라운 장면’으로 뽑혔다.
◆솔직하고 진심 어린 진행이 ‘장수 비결’
가난한 흑인 미혼모의 딸로 태어난 윈프리는 친척집을 전전하며 자랐고 가난과 인종 차별에 시달렸다. 어려운 환경 속에서 겪은 다양한 경험은 타인의 아픔을 진심으로 공감하고 위로를 할 수 있는 능력을 키웠다. 이는 방송 진행자로서 가장 강력한 무기였다. 프로그램 시작 초기 근친상간으로 학대받은 한 여성이 등장해 성폭행 경험을 털어놓자 윈프리는 진심에서 우러난 눈물을 펑펑 쏟았다. 9살 때 사촌에게 처음 성폭행을 당하고 삼촌에게 유린당한 사춘기 등 자신의 과거가 떠올랐기 때문이다. 그는 가정폭력, 인종차별 등으로 고통받은 초대손님이 등장할 때마다 자신의 상처를 드러내면서 그들에게 용기를 불어넣었다.
윈프리는 정치에도 상당한 영향력을 발휘했다. 2008년 미국 대선을 앞두고 민주당 대선후보 경선에서 그는 버락 오바마 후보에 대한 지지를 선언했고 수백만 유권자를 오바마의 편으로 만들었다. 오바마가 대통령에 당선되자 일리노이주지사는 공석이 된 상원의원 자리를 윈프리에게 제안하려 했지만 윈프리는 “정치에 뛰어들고 싶지 않다”며 사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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