치아에 관한 小考
음력 정월 대보름날 풍속의 하나로 부럼이 있다. 부럼은 음력 정월 대보름날 밤에 까먹는 호두·밤·잣·은행·땅콩 따위를 통틀어 일컫는 말로 ‘동국세시기(東國歲時記)에 의하면 부럼을 이른 새벽에 깨물면서 1년 열두 달 동안 무사태평하고 종기나 부스럼이 나지 않게 해달라고 기원하면 한 해를 건강하게 보낼 수 있다고 한다. 그런데 앞으로 나에게는 부럼깨는 일이 쉽지 않게 됐다. 어금니 하나를 뽑아냈기 때문이다. 한 달 전쯤부터 왼쪽 어금니가 아팠지만 ‘시험이다’, ‘외국출장이다’ 하면서 차일피일 미루다가 해를 넘기면 안되겠다 싶어 연말을 앞둔 며칠 전 큰 마음먹고 치과에 갔다.
의사선생님은 보시더니 처음엔 “뼈(치조골)가 많이 없어져서 오래 쓰지 못할 것 같다”고 했다. 그런데 치료를 하다가 “빼는 게 나을 거 같다”고 했다. 처음엔 살려보려고 했는데 뼈가 워낙이 없어서 살리기가 어렵다는 것이다. 순간 나는 눈 앞이 하얗게 변했다. 선뜻 대답할 수가 없었다. 이제 우리나라는 고령화 사회로 접어들어 평균수명이 85세를 넘어서고 있다는데 30년을 의치로 살아야 한다니…. 아내가 틈만 나면 자꾸 치과검사를 받아보라고 재촉하던 모습도 떠올랐다. 지금 팔순이신 어머니가 오래 전에 치아 때문에 힘들어 했던 모습도 주마등처럼 스쳐갔다. 의사선생님이 나에게 어떻게 할거냐고 무언의 압력을 가하는 짧은 순간 갖가지 생각이 머리를 스쳐갔다.
며칠 좀 생각해봐야겠다고 했다. 아내하고 좀 상의해봐야겠다는 요량이었다. 의사선생님은 선선히 그렇게 하라고 하면서도 생각하는 동안 상태는 더 나빠질 수 있다고 덧붙였다. 그 말에 나는 다시 생각했다. 사실 아내하고 상의해봐도 별 뾰족한 수는 없다. 어차피 빼야 할 것이라면 다시 치과에 오느니 차라리 지금 빼는 게 낫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쩔 수 없이 나는 빼달라고 말하면서 이 선택이 후회되지 않게 해달라고 빌었다. 마취를 하고 어금니를 빼기 시작했다. 의사선생님은 “아프면 이야기 하라”고 했다. 그러나 신기하게도 뭔가 쑤욱 빠지는 듯한 느낌이 들었지만 전혀 통증이 없었다. 치아의 신경까지 망가져 아주 못쓰게 됐다는 반증이어서 이 지경까지 놔둔 내 자신이 좀 한심하다고 생각했다.
사실은 내 치아가 그리 좋은 편은 아니다. 그래도 내 딴엔 양치질도 하루 3번씩 하면서 치아관리를 열심히 한다고 했다. 다만 병원에 가는 걸 싫어했던 것이 결국 일을 낸 것이다. 어금니를 뽑고 나자 오복(五福)중에 하나를 벌써 잃어버렸다는 생각에 3~4일 동안 허전하고 멍한 듯한 느낌이었고 일손이 제대로 잡히지도 않았다. 사실 치아와 오복은 직접적인 관계가 없다. 중국 유교경전중의 하나인 <書經> 洪範편에 의하면 오복은 壽(장수하는 것), 富(재물이 넉넉한 것), 康寧(건강하고 편안한 것), 攸好德(덕을 닦고 베푸는 것), 考終命(제 명대로 살다가 편안하게 죽는 것)이라고 했다. 따라서 오복은 재물이 넉넉하고 심신이 건강하고 편안한데다 주변에 덕을 많이 쌓고 장수하다가 편안하게 돌아가시면 오복을 누린 셈이다. 그러나 예로부터 흔히 치아가 오복중의 하나라는 말이 널리 퍼져 있다. 이것은 建齒 즉 건강한 치아가 오복중 하나인 수(壽)에 큰 영향을 미치기 때문에 오복에 버금갈 만큼 중요하다는 뜻으로 풀이된다. 즉 평소 치아가 튼튼해야 잘 먹고 잘 씹어서 소화를 잘 함으로써 건강한 체력을 유지할 수 있고 그것이 장수할 수 있는 기본이자 핵심이 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예로부터 치아와 관련해서 전해 내려오는 속담이나 격언도 많다. 우선 언뜻 떠오르는게 ‘앓던 이가 빠진 것 같이 시원하다’라는 말이다. 세상 살면서 생기는 근심 걱정이 시원하게 해결되었을 때 쓰는 말이다. 그런데 난 이와는 정반대 상황이다. 앓던 이가 빠져 근심이 더 커졌다. ‘이가 자식보다 낫다’는 말도 있다. 이가 없으면 음식을 제대로 먹을 수 없기 때문에 그만큼 이가 중요하다는 말이다. ‘여든에 이가 나나’라는 말도 있다.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일이라는 것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이다. ‘이빨 빠진 호랑이’라는 말이 있다. 한 때 권력을 누렸으나 모두 잃어버려 힘이 없는 사람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이다. 그런데 십이간지로 따지만 나는 호랑이띠다. 그러고 보면 내가 딱 이빨 빠진 호랑이 꼴이다.
또 ‘꼴 같지 않은 말은 이도 들춰보지 않는다’는 말이 있다 말(馬)은 이를 보고 나이를 판단한다는 데에서, 언뜻 보기에 시원치 않은 것은 아예 거들떠보지도 않는다는 말이다. ‘아직 이도 나기 전에 갈비를 뜯는다’는 말도 있다. 아직 능력이 부족한 사람이 분에 겨운 일을 하고자 할 때 빗대는 말이다. 이밖에도 ‘이를 악문다’ ‘이를 갈다’라는 말이 있는데 이는 어떤 일에 대한 집념이나 분노의 의미로 쓰인다. 대표적인 고사성어로 순망치한(脣亡齒寒)이 있다. 중국의 <좌전(左傳)>에서 유래된 이 말은 직역하면 입술이 없어지면 이(齒)가 시리다는 뜻으로 서로 밀접한 관계에 있는 것을 비유하는 말이다.
‘이’는 또 새로운 존재의 드러남을 의미하기도 한다. 어린아이가 이갈이를 한다는 것은, 유아기를 벗어나 청소년기로 접어드는 것을 의미한다. 요즘은 어린이가 이갈이를 할 때 치과에 가서 뽑는 경우가 태반이지만 예전엔 대부분 집에서 어른들이 뽑아줬다. 이 때 뽑은 이를 지붕위로 던지며 “까치야 까치야, 헌 이 줄게, 새 이를 다오”하고 노래했다, 이를 지붕 위에 던져 놓으면 까치가 물고 가서 고운 새 이를 가져다 줄 것이라는 주술적인 의미가 있었다.
한자어 치(齒)는 본래 입안에 이빨이 나있는 모양을 형상화한 글자이나 이후 발음요소 지(止)를 추가해 음식을 씹는 '이'의 뜻을 나타냈다고 한다. 蟲齒(충치)는 "벌래 먹은 이"를 말한다. 치아라고 할 때 아(牙)는 아래 위가 맞물려 있는 짐승의 이빨을 형상화한 글자로 본 뜻은 ‘짐승 이빨’이었으나 이후 어금니를 뜻하게 됐다. 상아(象牙)는 '코끼리의 어금니'를 가리킨다. 따라서 일반적으로 치아(齒牙)는 ‘이와 어금니’로 사람의 모든 이를 총칭하는 말이다. 그리고 흔히 사용하는 ‘이빨’이라는 말은 동물에게만 사용하고 사람에게는 사용하지 않는다. 어금니를 한 개 뽑고 나니 ‘이제는 정말로 늙어가는구나’라는 생각이 들어 허망해졌다. 어금니 하나 뽑힌 것에 이같은 충격이라니…. 속으로 고소(苦笑)를 머금었지만 치아를 뽑고 나서 일주일이 다 돼가지만 여전히 입안 한 구석이 허전한 것은 어쩔 수 없다.<2014.12.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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