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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준어와 사투리에 대한 생각

한글사랑---------/우리말바루기

by 자청비 2015. 8. 5. 1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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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지면 경상도는 다 불고 전라도는 찔끔…충청도는?

 

[한겨레21]

등록 :2015-08-04 

2010년 9월 논산에서 진행된 황산벌 전투 재현 장면. 세계 대백제전 조직위 제공

 

5공때 운동권 취조했던 사람의 후일담
경상도는 제일 시끄럽고 한번 조지면 단번에 불어
전라도는 잔머리 끝내줘 조진 만큼 조금씩 더 나와

충청도는 “아이구…잘못 아신규…그게 아니란디…”
엉뚱한 놈인줄 알고 풀어줬는데 나중에 알고보니 ‘진짜’
“불라고 하는디 조지고 또 불라는데 패니 원제 불어?”

사투리는 고유 특성…표준어 지정은 입을 통제하려는 발상


먼저 시 한 편


시골 버스 정류장에서/ 할머니와 서양 아저씨가/ 읍내로 가는 버스를 기다리고 있다/ 시간이 제멋대로인 버스가/ 한참 후에 왔다// -왔데이!// 할머니가 말했다/ 할머니 말을 영어인 줄 알고/ 눈이 파란 아저씨가/ 오늘은 월요일이라고 대꾸했다// -먼데이!// 버스를 보고 뭐냐고 묻는 줄 알고/ 할머니가 친절하게 말했다// -버스데이!// 오늘이 할머니의 생일이라고 생각한/ 서양 아저씨가/ 갑자기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해피 버스데이 투 유!


오탁번의 ‘해피 버스데이’라는 시다. 재미있다. 그것만으로도 충분하다. 시가 재미있기 얼마나 어려운데. 이 시의 포인트는 사투리와 외국어의 만남이다. 전혀 섞일 일 없는 두 개의 세상이 우연하게 만나 발음의 오해로 만들어진, 경상도 지역 언어가 아니면 절대 만들어질 수 없는 풍경이다. 또 있다.


장광에 골붉은 감닢 날아오아// 누이는 놀란 듯이 치어다보며// 오-매 단풍 들것네.//

추석이 내일모레 기둘리니// 바람이 잦이어서 걱정이리// 누이의 마음아 나를 보아라// 오-매 단풍 들것네.


아시다시피 김영랑의 시이다. 시인 백석까지 가면 지역 언어의 아름다움과 맛은 최고조에 이른다. 함경도 말이 이렇게 근사하다니, 감탄하게 된다. 이 모든 것을 표준어로 썼다고 쳐보자. 재미있고 없고를 떠나 시 자체가 완성되지 않는다. 시만 그런가. 소설은 더 풍성해서 일일이 인용을 못할 지경이다.


마당에 서성거리는 저 새의 이름


그러니 내 주변에서 내려오는 이야기만 두어 개 해보자. 거문도 인근, 어느 섬에서 있었던 일이다. 대략 1970년대 초 정도 되었을 것이다. 열일곱 살짜리 어린 아가씨가 서울로 식모 생활을 갔다. 왜 그만뒀는지는 모르겠지만 석 달 뒤 그녀는 당시 유행하던 옷을 둘러입고 제법 세련된 화장까지 한 채 고향으로 돌아왔다. 뾰족구두라고 부르던 하이힐도 신었을 것이다. 전보 연락을 받은 어머니가 선착장으로 마중을 나왔다. 소식 듣고 친구들도 모였다. 이 아가씨, 우아한 자태로 배에서 내렸고 10년 만에 돌아온 것처럼 손바닥으로 햇볕 가리며, 마을을 천천히 둘러보면서 입을 열었다.

“아, 고향 산천은 그대로구나.”

그리고 일일이 인사를 했다. 서울 말투로. 길자야 안녕, 양순아 잘 지냈니? 어머, 어머니. 그동안 별고 없으셨어요? 이 애가 왜 이러지? 친구들은 뚱한 표정을 짓다가 돌아서 갔다. 어머니는 연신 고시랑거리는 딸애 뒤를 따라 묵묵히 집으로 돌아왔다. 그 정도에서 그만뒀어야 했다. 당시 서울 한번 가보는 것 자체가 몹시도 어려웠으니 석 달이나 살았다면 그럴 수도 있으니까. 그러나 이 아가씨, 못 참고 더 나가고 말았다. 마당에 서성거리는 닭을 보며 이렇게 말했단다.

“어머니. 저 새는 무슨 새예요?”

견디다 못한 엄마가 폭발했다.

“니 에미 씹새다, 이년아.”

그러니까 서울말 때문에 생긴 해프닝이다. 하나 더 해볼까? 이건 손홍규 소설가에게 들은 것으로 고향인 전북 정읍의 어느 동네 이야기란다. 공장 생활 하러 서울로 떠난 딸이 1년 만에 돌아왔다. 안색이 좋지 않았다. 선물 꾸러미를 내려놓고 절을 마친 딸은 주저주저하다가 눈물을 흘리며 이렇게 실토했다.

“아부지, 나 임신해부렀어라우.”

그때까지 가만히 딸만 바라보던 아버지는 저 섬마을 엄마처럼 폭발했다.

“이년 봐라요. 서울 간 지가 언젠디 아직도 사투리를 쓰고 자빠졌네.”

 

경상·충청·전라, 제일 무서운 놈은


내친김에 하나 더.

5공 때 운동권 학생들 잡아들여 취조하고 고문하던 사람이 있었다. DJ 정권 시절 퇴임했는데 그가 사석에서 한 말이란다. 정리해보면 이렇다. 애들을 잡아 조지다보면 경상·충청·전라, 이 삼남(三南)의 특색이 모두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우선 경상도 애들은 잡아올 때 제일 시끄럽다. 그런데 한번 조지면 단번에 다 분다. 다음날 또 조져봐도 어제 분 것이 전부이다. 반면 전라도 애들은 조진 만큼만 분다. 요만큼 조지면 요만큼 나오고, 조만큼 더 조지면 쪼금 더 나온다. 잔머리 끝내준다. 가장 무서운 애들이 충청도다. 젤 세다. 우선 잘 잡히질 않는다. 석 달 동안 공작해서 무슨 위원장급 하나를 간신히 잡아들인 적이 있다. 그런데 이 애가 끝까지 뻗댔다. 아무리 조져봐도 ‘아이구 죽겄네. 그게 아니란디 왜 이러신디우’ ‘아 글쎄, 잘못 아신규. 그러지 말구 내 말 점 들어보유’ 했다. 보름간 그랬다. 아무래도 엉뚱한 놈을 잡아온 것 같다, 결론을 내리고 풀어주었다. 나중에 알고 보니 그 애는 진짜였다. 그래서 제일 무서운 놈들이다… 뭐 이런 내용이었다.

 

각 지역의 사투리를 재치있게 표현해냈던 영화 ‘황산벌’의 한 장면.

 

내가 술좌석에서 종종 이 이야기를 했는데 입에서 입을 거쳐 시인 김사인 선배까지 전해졌다. 그 말을 들은 김사인씨는 이렇게 대꾸했단다(그는 충북 출신이며 말투가 아주 느리다).

“거, 창훈이가 잘 모르는 것이 있어. 아마 걔도 불라고 했을 겨. 불라고 하는디 안 분다고 조지고, 또 불라고 하는디 뚜드려패고, 그러니 원제 불어?”

충청도 언어는 느리다고 소문나 있다. 김사인씨는 내가 잘 모르고 있다고 했지만 사실 잘 아는 편이다. 나는 충남에서 10여 년을 살았다. 말 안 하고 가만히 쳐다보는 사람들, 정말 많았다.

충청도 언어가 느린 것은 정보를 모으는 중이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이런 풍경. 삼국시대 때 백제는 곡창지대였다. 평야지역인 것이다. 저 멀리서 한 무리의 군사가 달려오면 생각에 잠기게 된다. 고구려일까, 신라일까. 아니믄 우리 백제 군대일까… 수시로 침입을 당하고 잡혀갔으니 정보를 최대한 빨리, 많이 모아야 하는 상황이 백제 유민의 말버릇으로 굳어진 것이다, 고 나는 짐작한다. 그러기에 자신이 무언가를 책임지는 발언도 잘 하지 않는다. 그 동네 살 때 시국 관련으로 여러 사람이 모이는 경우가 있었다. 토론이 끝나고 나면 해야 할 일들이 희한하게도 전부 나에게 할당되곤 했다. 당신이 제안했으니 이 정도 일은 맡아줘야 하는 것 아닌가, 맨 처음 발의한 이에게 내가 채근하면 그는 뜸을 들이다가 이렇게 대답했다.

“다 잘될 겨.”

덧붙여보자면. 경상도는 말을 내뱉은 다음 정보를 모으는 편이다. 이를테면 왜적 침입이 잦았던데다 산이 높아서 누군가 나타나면 재빠른 반응을 할 수밖에 없었을 것으로 나는 본다. ‘누꼬’ ‘뭐꼬’ 같은 말. 전라도는 모아지는 만큼씩 뱉는, 그 중간 형태 정도. 어째, 전직 안기부 직원의 분석이 맞아떨어지는 것 같다.


서울에서 잘난 척은 봤어도 교양은…


지역 차이는 먼저 언어다. 삼남을 포함한 강원·제주·경기의 언어는 그 지역의 역사와 함께 흘러온 것이다. 자연환경과 생활패턴, 동네 사람들이 공유하는 생각과 버릇, 모둠살이의 체계가 그 속에 다 들어 있다. 그러니 자연스럽게 산맥 이쪽저쪽이, 강 이편저편이 다를 수밖에 없다. 당장 내가 살고 있는 전남만 해도 광주, 목포, 보성, 순천, 여수, 광양, 그리고 섬 지역 언어가 조금씩 다르다. 반대로 보면 다르지 않은 적 없었다. 저절로 그렇게 되는 것인데 다른 게 잘못인가. 발음의 장단고저에 무슨 죄가 있겠는가. 표준어 정책을 시행한 지 오래되었지만 지금도 계속 각 지역 언어를 쓰고 있는 것만 봐도 그렇다. 이거 안 없어진다.

 

그런데 표준어라는 개념 때문에 이게 잘못된 것이고 틀린 게 되어버린다. 표준어는 ‘교양 있는 사람들이 두루 쓰는 현대 서울말로 정함을 원칙으로 한다’고 정의되어 있다. 교양과 서울. 좀 웃기지 않은가. 이 기준은 어디서 온 걸까. 나도 서울서 산 적 있지만 잘난 척하는 사람은 많이 봤어도 교양 있어 보이는 사람 수는 다른 지역과 별반 차이 없었다. 길이나 무게, 부피 관련한 도량형과 달리 입에서 튀어나오는 말에 어떻게 ‘표준’이 가능할까? 그래서 나는 표준어라는 걸 통제의 한 방식으로 이해하고 있다. 이런 통제는 내 컴퓨터까지 점령했다. 좌판에 ‘가시내’나 ‘지지배’라는 단어를 두드리면 컴퓨터가 ‘계집아이‘로 고쳐버린다. 나한테 물어보지도 않고.

 

그나마 수시로 바꾸어서 공부하기만 성가시다. 지난해에는 느닷없이 ‘딴지’라는 단어가 표준어가 되었다. ‘짜장면’처럼. 많은 사람들이 써서 그렇다지만 내 짐작의 두 번째는 국립국어원 연구원과 학자들 먹고사는 방편이라는 것이다. 자꾸 바꾸어야 자신의 역할이 생기고 월급이 나오니까.

 

듣자니 전세계에서 표준어를 지정한 나라는 단 두 군데라고 한다. 하나가 우리고 또 하나가 북한이다. 나머지는 어쩌고 있는지 자료를 찾아보니 영국에서는 왕립 표준영어원 설립을 추진했으나 국민의 자유로운 성향 때문에 무산되었단다. 미국은 공용어나 표준어를 못박지 않고 뉴스나 쇼 프로에서 쓰이는 TV 억양을 표준어와 비슷한 개념으로 취급하는 정도이고(억양을 가지고 놀리곤 하는데 그건 우리도 마찬가지이다), 일본 또한 표준어를 정하려는 시도는 있었으나 그 개념 자체가 국가권력의 개입과 통제를 포함하고 있다고 보고 거부했다고 한다. 대신 ‘많은 사람들이 알아들을 수 있는 현실의 일본어’라는 뜻에서 ‘공통어’(共通語)라는 개념이 생겼다는 것. 한마디로, 프랑스를 예로 들면 파리 언어가 있고 리옹 언어가 있는 것뿐이다.


국어학자는 PC방에 가보시라


표준어란 국가가 나서서 입을 통제하겠다는 발상 외엔 그 무엇도 아니다. 표준어가 꼭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국어학자가 있다면 지금 당장 PC방에 가서 중딩들 대화하는 거나 한번 들어보길 바란다. 저 도도하고 광폭한 분노의 욕설들 말이다. 그게 아이들이 처한 상황을 그대로 드러내는 징표이다. 애들이 왜 이렇게 됐는지 따져보는 게 언어의 포장보다 더 중요하고 급한 일 아닌가. 내가 표준어 거부운동을 제안하는 이유이다.

 

<한창훈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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