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세 컨텐츠

본문 제목

1987~2017 광장의 노래

세상보기---------/현대사회 흐름

by 자청비 2016. 12. 29. 13:41

본문

"정치 바뀌어야 살기 좋아져" "아빠, 개인의 삶이 먼저죠"

한겨레 2016.12.29


[1987~2017 광장의 노래 ③ 광장, 그후] 50대 아빠와 20대 딸의 '광장 썰전'

민주화세대 아빠 "요즘 세대 참정권의 힘 몰라"
엔(N)포세대 딸 "20대 투표 안한다는 생각은 편견"


23일 오후 경기 수원 권선구에서 아빠 최윤(왼쪽)씨와 20대 딸 최지현씨가 육교 계단을 내려오고 있다.

이것은 마치 부녀간의 ‘썰전’ 같았다. 아버지 최윤(56)씨와 딸 최지현(23)씨는 목소리를 높이며 맞서기도 했고, 의외라는 듯 놀란 표정을 짓기도 했다. 가깝고도 먼 부녀 사이는 ‘민주화 세대’와 ‘엔(N)포 세대’의 갈등과 공존을 고스란히 압축시켜 놓은 듯한 모습이었다.

23일 경기 수원시 한 커피숍에서 진행한 아빠와 딸의 ‘광장 대담’은 탐색전으로 시작했다. 기자를 사이에 두고 각자의 학창 생활을 이야기하는데, 처음 듣는다는 이야기가 많았다. “그 이야기 왜 안 했었니?” “아빠 저 이야기는 정말 처음 들어보는 이야기네요.” 다소 민망한 삼자간 대화는 한참을 이어졌다. 공부를 잘했던 아빠는 지역 명문고로 진학하고 나서 ‘논두렁 깡패’가 됐다고 한다. “경찰 출신이셨던 엄한 아버님한테 벗어나면서 놀기 좋아하는 성미가 나왔던 것 같아요.” 지역에서 힘깨나 쓴다는 건달들이 스포츠와 공부에 능한 학생들을 아우로 데리고 다니며 폼 잡던 시절이었다. 최씨는 명문고에 다니면서도 “풍류를 즐길 줄” 아는 케이스로 섭외된 상황이었다. 딸이 보는 앞이라 자세히 설명하지는 않았지만, 꽤나 ‘놀았던’ 눈치다.

그렇게 놀고도 지역 국립대 화공과에 입학한 최씨는 2학년 때 ‘광주 민주화 항쟁’을 경험했다. 운동권에 낄 자신이 없어, “대학에 와서도 시골 친구들하고 놀기 좋아했다”고 한다. 그래도 그 시절의 기억은 압도적이었다. “대학 친구들이 상무대에 끌려갔어요. 학생운동을 조금이라도 했던 친구들은 최전방으로 강제징집됐어요. 저는 광주에 있던 누님 댁에 숨어 있다가 공수부대가 들어온다는 소문을 듣고 화순 쪽으로 도망쳤어요. 화순 넘어 순천까지 도망쳤는데도, 특전사 개구리복을 닮은 예비군복을 보면 심장부터 뛰었습니다. 사태가 다 진정되고 나서야 광주로 돌아갔는데 콜레라가 돌았어요. 시체가 쌓여서 전염병이 도는 거라고….” 최씨는 학교생활을 이어갈 자신이 없었고, 군대에 다녀온 뒤 무작정 상경해 생업 전선에 뛰어들었다.


아빠 최윤씨
광주 민주화운동이 전환기
그때는 놀아도 취직은 편해
광장 이후 ‘제도 민주주의’로


딸 최지현씨
박근혜 하야 촛불 경험
막상 취직할 때 되니 막막해
‘광장 민주주의’ 순수한 힘 믿어


아버지의 경험담에 딸이 적잖이 놀란 눈치였다. 아버지는 “남들처럼 광주항쟁이라도 참여하고 중퇴했다면 부끄럽지는 않았을 텐데, 그저 놀다가 중도 포기한 셈이라서 집에서는 이야기를 별로 안 했어요”라고 말했다. 대학을 졸업했다면 아버지의 삶도 많이 달라졌을 것이다. “화공과를 졸업하면 여천 석유화학단지로, 기계과를 졸업하면 광주 아시아자동차(기아차) 공장으로 곧장 취업하던 시절이었거든요.” “그래도 그때는 취직은 편했네요.” 이번엔 딸 차례다. 대학 졸업을 내년 1학기 뒤로 늦췄다는 딸은 갈피를 잡을 수 없는 막막함에 힘겨워하고 있다. “고전을 읽고 인문학적 가치에 대해 토론하고, 자유전공학부에 입학하고 나서 배운 공부 자체는 정말 좋았거든요. 그런데 막상 취업할 때가 되니까 뭘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어요. 선배들 봐도 공무원 시험에 통과한 사람 말고는 취직한 사람이 손에 꼽을 정도예요.” 2학기 기말고사를 마친 딸은 겨울방학부터 본격적인 취업 준비에 나설 예정이다. 일찌감치 취업전선에 뛰어든 공대 친구들한테 사전 조사도 했다. 자격증, 한국사(공기업용), 토익, 오픽(국제공인외국어회화시험)…. 대전·충남권 중소기업을 포함해 여러 취업정보를 알아보던 지현씨는 어떡해야 할지 엄두가 안 나, 오랜 꿈을 향해 제대로 뛰어보기로 결심했다. “‘언론고시라고 하죠. 기자 되는 시험을 준비해보려고요. 아무래도 (학교가 있는) 대전에서 준비하기는 어려워서, 서울에서 스터디도 하고 언론고시 관련 학원도 다녀보려고요. 아, 근데 이건 아직 아빠한테는 이야기 안 했던 건데.” 잠시 아버지의 표정이 꿈틀한다. 정치 이야기로 화제를 돌려보니 둘 사이 생각의 차이가 좀더 극적으로 노출됐다. 이번에도 아버지가 먼저 포문을 열었다. “바쁘고 힘들다고 자기 권리를 행사 못 하면 그건 바보가 되는 거 아닌가요? 젊은이들은 투표권이나 참정권이라는 것 자체가 얼마나 엄청난 힘인지 모르는 것 같아요. 그게 어떻게 따낸 건데.” 딸이 바로 반격에 나섰다. “왜 젊은이들한테만 책임을 돌리는지 모르겠어요. 그리고 젊은이들이 투표에 참여하지 않는다는 생각도 편견 아닌가? 아빠는 다양성을 인정한다면서 꼭 그렇게 말하더라.”


이제 기자는 안중에도 없다. “야, 이명박·박근혜가 당선되는 거 봐봐. 말도 안 되게 후퇴하고 있는데, 그 원인이 뭐냐는 거지. 국민들 가운데 상당수는 제대로 교육도 못 받고, 언론에 이용될 수밖에 없는 사람들이야. 대학 교육도 받고 똑똑한 젊은이들이 나서야지.” “아빠, 저는 우리나라 사람들이 우매하다고 생각 안 해요. 87년 6월 항쟁도 그렇고, 광주 민주화 운동도 그래요. 이번 촛불집회도 봐봐. 얼마나 위대해요.”


예상치 못한 딸의 대거리에 당황했던 아버지는 다시 한번 고삐를 죈다. “결국은 정치의 문제로 간다는 거야. 지금 새누리당 욕하는 사람들 많지만 선거 때 새누리당 찍은 사람이 절반이 넘잖아. 군중 속에 섞여 있을 땐 군중심리에 뭐든지 바꿀 수 있을 것 같지만, 결국은 투표로 결정되는 거야.” 딸도 만만찮다. “청년 세대도 그들 나름대로 정치적 의사 표시를 하겠죠. 다만 매번 적극적으로 의사 표시 하기엔 너무 바쁘고, 힘들고 현실도 팍팍한 거예요. 그럼 386세대들은 다 그렇게 정치적이었어요? 그때도 운동권들이 대표했던 거 아니에요?”


“아니, 아빠 이야기는 박근혜 대통령이 51% 지지율을 받았는데 도대체 누가 찍었을까 궁금하다는 거야. 정치가 바뀌어야 살기 좋아질 것 아니냐. 왜 젊은이들은 그걸 모르냐고.” “내 생활이 좋아지기 위해서는 정치가 바뀌어야 한다는 점은 100% 동의해요. 그런데 개인의 삶을 먼저 생각하자는 거예요. 아빠는 늘 히어로만 찾는 거 같아. 아빠가 그렇게 좋아하는 유시민 작가 봐봐요. 개인의 행복을 먼저 이야기하잖아요.” “그 사람도 우리 세대의 영웅이었단다.”


다툼이 이어졌지만 사실 아버지와 딸의 정치 성향은 비슷했다. 지난 4·13 총선 때 지역구 후보로 더불어민주당을, 비례대표로는 정의당을 뽑았다. 결국 이들의 차이는 광장 이후 ‘제도 민주주의’에 시선을 두느냐, ‘광장 민주주의’ 자체의 순수한 에너지를 믿느냐로 갈라지는 듯했다. 말싸움으로 번지기 전에 마무리 멘트를 요청할 수밖에 없었다.


“아버지로서 제일 원하는 게 가족들한테 존경받는 것이겠죠. 나쁜 아버지라고 생각은 않는데 존경받는 것까지는 안 된 것 같기도 하고요. 우리 세대가 다 그런 것 같기도 하고.”


“저는 우리 아빠 존경해요. 아빠는 젊은 사람들 생각을 많이 궁금해하세요. 요즘 애들은 어떻게 생각하는지 많이 물어보시기도 하고. 그런데 지금처럼 터놓고 말씀하신 적이 많진 않으셨던 것 같아요. 그게 오히려 답답했던 것 같아요.”


기자를 사이에 둔 아빠와 딸의 ‘고해성사’는 두시간여 만에 마무리됐다. 서로의 공통점을 확인하고, 다른 점은 더 많이 찾아낸 드물었던 기회. 딸은 겨울방학을 맞아 당분간 수원 집에 머물 예정이다. 민주화 세대와 엔포 세대를 대리한 이들의 ‘썰전’은 당분간 계속될 듯하다.



광장 무서워하던 친구들..이제 모여서 정치 얘기해요

한겨레 2016.12.29


[1987~2017 광장의 노래] ③ 광장, 그 후 - '세대별 광장' 집단 인터뷰
1987, 2008, 2016 광장 경험한 6명
세대별로 말하는 '얻은 것과 잃은 것'

87세대 "촛불, 이제 일상 속으로"
08세대 "민주주의 감도 일깨워"
16세대 "내 한 표의 힘 알고싶어"

우리는 광장에서 무엇을 얻고, 무엇을 잃었을까. 1987년, 2008년, 2016년의 광장을 경험한 10대에서 50대 6명에게 물었다. 광장 집단 인터뷰에 참석한 이들의 나이와 경험은 다양하지만 광장에서 민주주의를 외쳤던 ‘청춘’이었다는 공통분모를 갖고 있다. 김응교(54·숙명여대 교수), 김정한(48·출판사 어마마마 대표)씨가 1987년 6월항쟁을, 이연우(24·서울대 국악과), 김기한(32·창업)씨가 2008년 광우병 촛불집회를, 안영(25·농업), 강지은(18·고교 3학년)씨가 2016년 박근혜 퇴진 촛불집회를 증언했다. 1987년과 2008년 광장의 공통점과 차이점을 되짚다 보니 2016년 광장 그 후, 무엇을 해야 할지 가늠해볼 수 있었다.


2008년 촛불때 쓰레기만 줍다 돌아온 기억

-87년 광장과 2008년 광장을 비교하면?

김정한 87년 6월 이전엔 광장이 원천적으로 금지돼 있었다. 학내에서 집회해도 전경들이 덮치러 들어왔다. 최순실 국정농단 사건이 터지면서 국민 대통합이 이뤄졌듯이, 그해 1월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이 일어나고 시민들 반응이 완전히 달라졌다.

김응교 80년대 초반엔 모이면 잡혀가, 한마디 구호를 외치고 유인물을 뿌리기 위해 학교 도서관에서 밧줄을 타고 내려와야 했다. 운동은 소수의 전유물이었다. 박종철 사건 이후 시민들이 자동차 경적을 빵빵 울리고, 건물에서 두루마리 휴지를 던져주며 시위하는 학생을 응원했다.

김기한 2008년에 경험한 광장은 분노와 좌절이었다. 기성세대가 왜 제대로 못 해서 이 지경을 만들었나 원망스럽고 열 받아서 광장으로 뛰쳐나왔다. 그러나 더 큰 좌절만 맛봤다. 어른들은 “대학생인데 왜 공부 안 하고 저런 데 나가냐”며 손가락질밖에 안 했다. 집회 참여자들이 쓰레기 버린다고 하도 (언론이) 욕해서 나는 구호 한번 외치지 않고 계속 쓰레기만 줍다 돌아왔다. 욕먹는 게 너무 싫었다.

이연우 2008년 학교에서 배운 민주주의를 광장에서 실제로 경험했다. 고등학생 때였다. 집회에서 자유발언하고 언론 인터뷰도 했다. 그 후 선생님께서 한마디 하셨다. “학생이 그런 얘기 하는 게 맞는지 생각 좀 해봐라.” “그런 데 왜 나가냐, 우리 엄마 아빠가 안 좋게 얘기했다”는 또래 친구도 있었다. ‘아, 내가 앞으로 살면서 자신 있게 내 의견을 말할 땐 트러블이 생기는 걸 감수해야 하는 거구나’라는 걸 깨달았다. 대학에 들어와선 정치 얘기를 안 하게 됐다.


-집회에 나가면 주위 반응이 어떤가?

이연우 (중고등) 학생이 집회에 나가면 학생이 공부해야지, 대학생이 집회를 나가면 대학생이 취업해야지, 네가 운동권도 아니고 시민단체에 있는 것도 아닌데 왜 그런 발언을 하느냐는 식으로 말한다. 사회구조에 대해 비판하려면 어떤 조건이나 자격이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 운동권 동아리나 사회대 출신이 아니면 정치적 발언을 하는 게 자연스럽지 않다. 왜 나대냐, 잘 모르고 얘기한다는 분위기가 있다.

안영 너드(nerd·멍청하고 따분한 사람) 같다거나, 한량 같다고 본다.

김기한 2008년 촛불집회 때 <한겨레>에 나왔다. ‘왜곡보도, 발로 뛴 대학생에게 딱 걸려’라는 보도였다. 촛불집회로 문정동 로데오 거리 매출액이 떨어졌다고 <동아일보>가 보도했는데 내가 직접 확인해봤다. 원래 비수기이고 광화문이랑 1시간이나 떨어진 곳이라 촛불집회와 전혀 상관없다는 걸 밝혀냈다. 그런데 대학에선 칭찬은커녕 손가락질했다. ‘서울대도 아니고 웬 유별이냐, 너무 튄다’는 거였다.

강지은 세월호 참사 1주기 때 광화문 집회에 갔는데 엄청 탄압했다. 너무 말이 안 된다고 생각해 신문기사를 짜깁기해서 친구들에게 나눠주며 알려달라고 뿌렸다. 그때 친구들이 “이거 너무 위험한 거 아니냐” “너 이러다 잡혀가면 어떡하냐”고 걱정했다. 집회에 같이 가자고 했을 때 좀 무섭다는 반응이 많았다. (집회) 갔다가 잡혀가면 어떡하냐고 반대하는 부모님도 엄청 많았다.

`87년 6월 항쟁', `2008년 광우병 촛불', `박근혜-최순실 게이트 촛불' 세대들이 10일 오후 서울 마포구 <한겨레>에 모여 `광장 민주주의'를 주제로 토론를 하기에 앞서 각 세대의 구호를 외치고 있다. 맨왼쪽부터 시계방향으로 `박근혜-최순실 촛불' 안영(햐얀옷), 강지은씨 `2008년 광우병 촛불'세대인 이연우, 김기한씨 `1987년 6월 항쟁'세대인 김정한, 김응교씨. 강창광 기자 chang@hani.co.kr


빚 때문에 졸업 앞두고 자살하는 학생들

-광장이 왜 위험한 곳이 됐나?

김정한 97년 외환위기가 계기였다. 80년대엔 4년 내내 운동하고 학점이 2점대여도 대기업에 갔다. 그러나 98학번부턴 아버지가 회사에서 잘리거나 망한 상태에서 대학에 들어왔다. 현실적인 목표가 뚜렷했고 대학 내내 거기에 매달릴 수밖에 없었다. 90년대 넘어서면서 상황이 더 나빠졌고.

김응교 등록금이 엄청나게 비싸져서 대학생들이 4년 내내 아르바이트와 숙제의 노예가 됐다. 대학 다니면 빚이 1000만, 2000만원이 생기는데 갚을 길이 없으니까 대학 졸업할 때 자살하는 친구도 있다. 기성세대가 술자리에서 20대들을 자기중심적이라고, 기회주의자라고 흉보는데, 모르고 하는 소리다.

안영 아버지 세대의 민주화운동 얘기를 들어보면 어딘가 모르게 벽이 있다고 느꼈다. 로망이 있다고 할까. 지금은 생계와 불확실성 때문에 어쩔 수 없이 그렇게(정치에 무관심하게) 되는구나 싶다. 그러나 2016년 광장에선 완전히 깨졌다. 중고등학생, 대학생 너나 할 것 없이 (최순실 국정농단으로) 인식이 바뀌었다. 넓은 스펙트럼의 사람들이 같은 문제를 제기하는 분위기가 생겼다. 정치 이야기를 전혀 하지 않는 친구들 단체 카카오톡 방이 있는데, 지금은 완전히 달라졌다. 하나의 큰 변화가 시작된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


“정치 얘기하면 친구들이 몰려들어요”

-2016년엔 달라졌나?

강지은 우리 반에서도 이제 정치 얘기를 시작하면 친구들이 몰려서 얘기 많이 한다. 세월호 때는 엄청 시끄러울 줄 알았는데 조용해 당황스러웠는데 이번엔 다들 엄청 관심을 갖고 있더라.

김기한 지금은 다 같이 박근혜 대통령을 비판하지 않나. 반면 2008년엔 이명박 대통령을 비판하는 사람들이랑 이명박을 비판하는 사람을 손가락질하는 사람들이 갈라져 있었다. 내 또래도 그랬다.

이연우 이제 소극적인 자세에서 벗어나 고등학교 때 가졌던 문제의식을 되찾을 수 있게 됐다. 어떤 계기로든 한 번이라도 사회 문제에 대해 의견을 낼 기회가 생기면 그걸 잃지 않는 것 같다.

김응교 (광장에서) 전경의 태도가 바뀌었다. 지난주 토요일에 청와대 앞에서 세월호 어머니들과 같이 서 있는데 밤 10시30분이 되니까 전경이 그러더라. “뒤에서 밀라고 해요. 어머니 다쳐요, 조금만 빠져주세요.” 뒤에선 계속 “밀어” “밀어” 하는 지시가 들리는데 전경들이 그냥 그 자리에 앉아버렸다. 병장(수경) 같았다. 그렇게 충돌 없이 마무리됐다.


“나만의 민주주의를 계속 해야죠”

-앞으로는 무엇을 해야 할까?

강지은 촛불 이후에 교육감을 내 손으로 뽑고 싶다. 교육감 선거를 하면서 내 한 표가 실제로 어디에 어떻게 영향을 미칠지 알고 싶다.

안영 언론이 바뀌어야 한다. 지금껏 언론이 진실을 왜곡하거나 진실을 보도하지 않았다. 권력과 힘에 흔들리지 않는, 공신력이 있는 언론이 많아지는 게 중요하다. 그러려면 국민이 지금처럼 표현해 (언론에) 국민 무서운 걸 알려야 한다. 나부터 계속 (광장에) 나갈 것이다.

이연우 (시민적) 감도라고 해야 하나. 2016년 광장은 무뎌져 가던 나의 감도를 일깨우는 좋은 집회였다. 지금 일어난 일들을 잊지 않았으면 좋겠다. 앞으로 국악 전공자로 일하면서 나만의 민주주의를 계속 생각할 것이다.

김기한 직접민주주의를 더 활성화해야 한다. 광장 촛불도 중요했지만, 국회의원에게 휴대전화 메시지를 보내고 18원 후원금을 내는 것도 국회의 탄핵 가결에 한몫했다. 인터넷을 활용한 국민투표도 이제 가능하다고 본다.

김정한 최근 국정조사에서 재벌들이 쫙 나온 걸 보면서, 박근혜-최순실 게이트를 둘러싼 보수 연합의 중심은 누구인가 생각했다. 자본인 듯하다. 재벌이 돈 주고 정치인을 에이전시로 부리는 거 아닌가. 법인세 인상을 막는 것은 보수 정치인으로 보이지만, 그들의 배후에는 자본이 있는 거 아닌가. 자본의 힘을 줄일 수 있는 시스템을 도입해야 한다.

김응교 2016년엔 정권교체가 아니라 ‘시대교체’가 목적이 돼야 한다. 촛불이 광화문 광장에서 벗어나 일상과 동네로 들어가야 한다. 우리가 변하지 않으면 어떤 정치인이 나와도 세상은 바뀌지 않는다. 민주주의를 꿈꾸는 자유로운 ‘단독자’를 많이 만드는 게 중요하다. 10여년 전 한 집회에서, 남양주에서 막일을 한다는 사람을 만난 적이 있다. 그가 옷 안쪽에 품고 온 양초를 나눠주면서 평생 잊지 못할 한마디를 했다. “프랑스 혁명도 100년이 걸렸대요.” 더듬더듬하던 그 목소리가 마음을 울렸다.



실패한 혁명가 vs 불안한 노무현 키즈 vs 민주주의 눈뜬 견제자

한겨레 2016.12.29


[1987~2017 광장의 노래③ 광장, 그후] 세대별 키워드로 본 '광장 의미망'



성공하지 못한 운동가, 경제적으로 불안한 노무현 키즈, 민주주의에 눈뜬 견제자. ‘소셜네트워크 분석’ 전문기업 아르스프락시아 김도훈 대표가 1987년, 2008년, 2016년 광장을 경험한 10대에서 50대 6명의 발언을 분석한 결과다. 광장별, 세대별로 등장하는 키워드와 그 빈도, 연결 형태 등을 컴퓨터로 계산해 그 의미를 지도로 그렸다. ‘의미망 분석’ 기법이다. 발언자 자신도 모르던 속내가 살짝 드러났다.

87년 세대: 운동, 광주, 혁명

87년 세대의 핵심 키워드는 ‘(학생)운동’이다. ‘대학’에 입학해 ‘운동’을 경험하며 가치관과 인생을 확립한 세대다. ‘운동’의 동력은 80년 ‘광주’ 민주화운동의 경험과 폭압적인 ‘정권’, 그리고 ‘혁명’에 대한 꿈이었다. “고등학생 때까지 아무런 정보가 없다가 대학에 들어와 80년 광주에서 어떤 일이 있었나 알았다. 전두환 정권이 살인으로 세워진 정당성 없는 정권이라는 걸 깨닫게 됐다. 자연스럽게 광장을 뛰쳐나가고 싶어졌다.”(김정한)

‘자기’와 ‘성공’ 대척점에 두고
87년을 실패한 혁명으로 기억
성공한 사람 ‘기회주의’자 표현

87년 그림을 보면, ‘나’(자기)와 ‘성공’이 대척점에 서 있다. 87년을 실패로 기억한다는 의미다. 6월항쟁으로 대통령 직선제를 이뤘지만 야권의 분열로 정권교체에 실패했다. 혁명을 꿈꿨던 운동가들도 90년에 소련이 무너지면서 갈 길을 잃었다. 김도훈 대표는 “87년 세대는 운동을 통한 정치에 모든 것을 걸었던 세대인데, 엘리트 중심의 전위적 혁명을 꿈꾸다 보니 고독만이 결과로 남았다”고 분석했다. 그 시절 ‘성공’한 사람들은 ‘기회주의’자로 표현됐다. “친구들이 희생할 때 나는 기회주의적으로 공부해서 대학원에 들어갔다. 석사 학위를 받고 나서 구속됐지만, 그사이 친구나 선배들이 많이 죽었다. 그 친구들 무덤에 가면 한없이 미안하다.”(김응교)

2008년 세대: 노무현, 분위기, 불안

2008년 세대는 광장에서 ‘노무현’을 만났다. 2004년 엄마 손을 잡고 노무현 대통령의 탄핵 반대 집회에 처음 나왔고(이연우), 2009년 5월 노무현 서거 때 대한문에서 그가 이루지 못한 꿈을 이루겠다고 다짐했다(김기한). “기자가 노무현 전 대통령에게 ‘사람 사는 세상’이 어떤 세상이냐고 물으니까 사람들이 자살하지 않는 세상이라고 했다더라. 근데 노 전 대통령이 그렇게 돼버리니까 너무 싫었다. 우리가 바꾸자, 정치인에게 맡길 게 아니라 대한문에 있는 우리 한명 한명이 직접 바꾸자고 소리쳤다.”(김기한) 그러나 냉랭한 주변 ‘분위기’에 ‘눈치’를 보다가 이들은 위축되고 말았다. 각자도생 시대엔 시민권조차 조건과 자격을 갖춘 이들만 누릴 수 있다는 사회 분위기가 팽배했다.

노무현 전대통령 실패가 원인돼
정치적 발언 ‘발전’에 ‘방해’ 인식
불안한 삶의 기반탓 자기검열도

2008년 그림을 보면, 이들은 광장 이후 정치적 ‘입장’을 피력하는 게 ‘자기 발전’에 ‘반대’(방해)된다는 경험을 습득했다. 그 배후에는 ‘노무현’ 전 대통령의 실패가 자리하고 있다. 노 전 대통령의 탄핵 때 정치에 눈을 떴지만, 그가 꿈을 실현하지 못함으로써 깊은 침묵에 빠져들었다. 김 대표는 “2008년 세대는 87년 세대와 일부 공감대를 형성하지만 차이점 또한 분명하다. 불안한 삶의 기반 탓에 정치적 의견을 내놓을 때도 기회비용을 따지고 자기검열을 하고 있다. 고도성장기에 하부구조(사회의 경제적 구조)를 돌볼 필요가 없었던 87년 세대와 확연히 다르다”고 분석했다.

2016년 세대: 민주주의, 사회, 투표

불안이 민주시민 의식을 완전히 잠식하려던 순간, 2016년 세대가 탄생했다. 해도 해도 너무한 최순실 국정농단 사건이 ‘민주주의’와 ‘사회’, ‘투표’에 대한 관심을 흔들어 깨웠다. 김 대표는 “2016년 세대는 시민 참여의 정당성을 확보함으로써 시민권을 각성하고 자신감을 회복하는 실마리를 마련했다. 그러나 불안한 하부구조가 얼마나 자신의 삶을 위협할지는 구체적으로 생각하지 못하고 있다”고 진단했다.

박근혜·최순실 국정농단으로
‘민주주의’ ‘사회’ ‘투표’에 관심
‘승리’해야 ‘권리’ 얻는다 생각

2016년 그림을 보면, 정치적 ‘문제’(국정농단)가 발생하면서 사회 ‘분위기’가 바뀌었고 ‘박근혜’ 대통령 퇴진하라는 ‘평화시위’가 열렸다. ‘집회’와 ‘시위’에 참석한 ‘국민’들은 오랜 침묵을 깨고 ‘정치 얘기’를 ‘시작’했고 참된 ‘민주주의’, ‘사회’를 꿈꾼다. ‘민주주의’, ‘사회’는 ‘촛불’과 ‘광장’에서 ‘승리’함으로써 얻어낼 수 있는 ‘국민’의 ‘권리’라고 생각한다. 해피엔딩을 향해 달려가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현실은 녹록지 않다. 2008년 광장 이후에 그랬듯이, 불공정하고 예측할 수 없는 경제 구조는 민주주의를 집어삼키고 각성한 시민에게 ‘주홍글씨’를 새길 수 있기 때문이다. 김 대표는 이렇게 진단했다. “87년 세대는 정치권력에 의해 억압받았다면, 2008년과 2016년 세대는 경제권력의 굴레에 갇혀 있다. 경제적 안전성을 확보해야 정치적 시민권을 누릴 수 있는 상황이다. 정치 이슈를 경제 이슈로 전환해 시민들이 안정적 하부구조를 획득하는 게 중요하다.” 민주주의 사회를 제대로 구현하려면 기본소득이나 복지를 확충해야 하는 이유다.

관련글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