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민일보 2018.04.18
세상에 널리 기억돼야 마땅한데 소홀하게 취급된 사람들이 있다. 오랫동안 남자 중심의 사회였기에 남성보다 여성 중에 그런 이들이 특히 많다. 뉴욕타임스(NYT)는 지난달부터 ‘간과된 이들(Overlooked)’이란 특집 코너를 만들어 과거에 지나쳐 버린 비범했던 여성들의 부음을 뒤늦게 전하고 있다. 1851년 창간 이후 주로 ‘백인 남성’ 명사들의 부고만 실어온 것에 대한 반성을 담은 기획이다. NYT는 지난 16일까지 모두 20명의 여성을 소개했다. 그중에는 항일 독립운동가 유관순(1902∼1920) 열사도 있었다. 유 열사 이외 한국에는 덜 알려진 다른 여성들의 삶을 들여다보는 것도 의미가 있을 것이다. NYT 특집에 실린 여성 가운데 5명을 추려 별세한 시기 순으로 소개한다.
▒ 에이다 러브레이스(1815∼1852, 영국)
英 시인 바이런의 딸… 수학에 큰 관심
프로그래밍 언어 고안한 첫 프로그래머
컴퓨터 시대가 시작되기 무려 1세기 전에 현대의 다용도 컴퓨터를 상상해낸 천재 수학자다. 컴퓨터가 존재하지 않던 시절에 프로그래밍 언어를 고안했기 때문에 최초의 컴퓨터 프로그래머로 불린다. 러브레이스가 구상한 해석기관(컴퓨터)은 문직기가 꽃과 잎을 직조하듯 대수 패턴을 짜는 것이며, 계산기에 그치지 않고 명령어를 입력하면 음악을 작곡하거나 그림을 그릴 수도 있는 기계였다. 컴퓨터의 무한한 가능성을 예견했던 것이다. 미국 언론인 월터 아이잭슨은 “그의 통찰은 디지털 시대의 핵심 개념이 됐다”고 평가했다. 러브레이스는 영국 낭만파 시인 조지 고든 바이런의 딸이다. 바이런은 부인과 일찍 이혼하고 객사한 탓에 딸에게 큰 영향을 주지는 못했다. 대신 수학에 관심이 많던 엄마 애나벨라 밀뱅크가 당대의 뛰어난 학자들을 가정교사로 들이면서 딸을 수학의 길로 이끌었다. 러브레이스는 19살에 결혼해 백작부인이 됐지만 “결혼생활이 수학에 대한 나의 열정을 위축시키지 못한다”고 썼다. 그는 27세 때 스승 찰스 배비지의 해석기관에 대한 프랑스어 논문을 번역하면서 방대한 주석을 붙여 출간했다. 여기에 그가 생각한 컴퓨터 구성 원리와 최초의 프로그래밍 언어가 담겼다. 하지만 그는 실제 컴퓨터를 완성하지 못하고 36세에 자궁암으로 숨을 거뒀다.
▒ 치우진(秋瑾 1875∼1907, 중국)
中 청나라末 체제 전복 노린 혁명가
日서 비밀결사 가담… 여성잡지 창간
중국 청나라 말기 여성 해방을 부르짖고 체제 전복을 노렸던 혁명가다. 검술과 폭탄 제조법을 익히고 동지들과 무장봉기를 도모하다 실패하고 참수로 막을 내린, 흔치 않은 삶을 살았다. ‘중국의 잔다르크’라는 비유가 잘 어울린다. 푸젠성의 상류층 집안에서 태어난 치우진은 어릴적부터 화무란(디즈니 애니메이션 ‘뮬란’의 실제 주인공) 같은 여전사를 동경했다. 아버지의 뜻대로 부유한 상인의 아들과 정략결혼하고 베이징에 온 뒤 새로운 세상에 눈을 떴다. 정치에 관심을 갖게 됐고 뜻이 맞는 여성들과 교분을 쌓았다. 스스로 전족을 풀었으며 남장을 하고 칼을 차고 다녔다. 정치적 혁명과 여성 해방이 함께 가는 것으로 본 그는 28세 때 남편과 두 아이를 두고 집을 나왔다. 일본으로 유학 가 그곳에서 유학생 중심의 반청(反淸) 비밀결사에 가담했다. 귀국 후 여성을 위한 잡지를 창간했고, 혁명 전사를 양성할 목적으로 학교도 운영했다. 그러다 학교를 함께 세운 남자 동지가 지방 고관을 암살한 뒤 붙잡혀 처형됐다. 공모자로 지목된 치우진은 도망칠 수도 있었으나 “혁명은 피를 흘려야 성공한다”며 저항하다 체포됐다. 그는 참형으로 31세의 짧은 생을 마감했다. 일본 유학 시절 치우진을 알게 됐던 문학가 루쉰(1881∼1936)은 치우진이 유학생 사회에서 과도한 칭찬을 받은 것이 귀국 후 무모한 행동으로 이어졌다고 냉정하게 평가했다.
▒ 아이다 웰스(1862∼1931, 미국)
노예로 태어나 기자가 되기로 결심
흑인에게 가해진 린치 부당성 고발
미국의 인종차별이 지독하던 시절 흑인에게 가해지던 린치의 부당성을 열정적으로 고발한 언론인이다. 웰스는 미시시피주에서 노예로 태어났으나 이듬해(1863년) 에이브러햄 링컨 대통령의 노예해방 선언으로 자유인이 됐다. 16살 때 황열병으로 부모와 동생을 잃었다. 남은 동생들을 돌보기 위해 학교를 그만두고 나이를 속여 교사가 됐다. 조금씩 개선되던 흑인 인권이 다시 퇴보하고 흑인에 대한 반감이 커지는 것을 보고 웰스는 기자가 되기로 결심한다. ‘멤피스 프리 스피치’라는 신문사에서 일하던 1892년, 친구가 교도소에서 사소한 일로 동료 수감자들과 다투다 린치를 당해 숨졌다. 웰스는 이때부터 린치라는 주제에 천착해 수개월 동안 남부 지역을 돌아다니며 린치 사례를 취재했다. 당시 백인들 사이에선 백인 여성을 강간한 흑인 남자는 때려죽여도 된다는 인식이 있었다. 그러나 웰스가 취재해보니 집단 린치 살인의 3분의 2는 흑인 남성이 백인 여성과 합의 하에 성관계를 한 것인데도 백인 남자들이 분노해 때려죽인 사건이었다. 평생 인종주의자들로부터 살해 위협을 받았던 웰스는 “이 일이 미국인들의 양심을 일깨울 수 있다면 나는 내 인종에게 이바지했다고 자부할 수 있다”고 말했다. 그는 68세에 신장 질환으로 별세했다.
▒ 마두발라(1933∼1969, 인도)
엄청난 인기 누린 인도 ‘메릴린 먼로’
식민지 과거와 절연… 낙관주의 심어
발리우드(인도 영화계)의 전설적인 배우다. 눈부신 미모와 엄청난 인기, 비극적인 요절이 모두 동시대의 할리우드 스타 메릴린 먼로(1926∼1962)와 꼭 닮았다.
델리의 가난한 파슈툰족 가정에서 태어난 마두발라는 9살 때 영화 제작자의 눈에 들어 배우로 데뷔했다. 16살 때 주연을 맡은 영화 ‘마할’이 대성공을 거두면서 슈퍼스타가 됐다. 그는 다양한 역할을 통해 식민지 과거와 절연하려는 새로운 세대의 낙관주의를 보여줬다는 평가를 받았다. 미국 감독 프랭크 카프라가 1952년 인도를 방문했을 때 마두발라에게 할리우드 진출을 제의했으나 그의 아버지가 허락하지 않았다. 마두발라는 선천성 심장질환인 심실중격결손증을 앓았다. 한창 일하던 때 병이 있다는 걸 알았는데, 별 치료 없이 일에 몰두했다. 가족을 부양하느라 살인적인 일정으로 영화를 찍었다. 출연작이 70편을 넘는다. 마두발라는 인기배우 딜리프 쿠마르와의 로맨스로 인도를 떠들썩하게 했지만 사랑은 오래가지 못했다. 나중에 가수 키쇼어 쿠마르와 결혼했으나 이내 파경을 맞았다. 그는 건강이 급격히 나빠지면서 영화계를 떠났고 36세에 생을 마쳤다.
▒ 앨리슨 하그리브스(1962∼1995, 영국)
에베레스트 무산소 단독 등정한 첫 여성
최초로 한 시즌내 알프스 6대 북벽 올라
1995년 세계 최고봉 에베레스트를 셰르파(등반 안내인)나 산소통 없이 혼자 등정한 최초의 여성이다. 3개월 후 세계에서 두 번째로 높은 K2를 정복하고 내려오다 강풍에 휩쓸려 사망했다. 13살 때부터 암벽 등반을 시작한 하그리브스는 탁월한 등반가였다. 1993년 여름에는 세계 최초로 한 시즌에 알프스 6대 북벽을 단독 등정하는 기록을 세웠다. 두 자녀(톰과 케이트)의 엄마였던 하그리브스는 “아이도 갖고 싶었고 등반도 계속하고 싶었다”고 말했다. 95년 5월 13일 에베레스트 정상에 올랐을 때 “사랑하는 아이들아, 난 지금 세상에서 가장 높은 지점에 있단다. 너희들을 너무나 사랑한다”는 무전통신을 보냈다. 하그리브스는 그해 8월 13일 K2 정상에 올랐다가 주검으로 돌아왔다. 향년 33세였다. 당시에는 아이들을 내버려두고 위험한 길을 택했다며 하그리브스가 이기적이라고 비난하는 보도가 많았다. 그러나 남편 제임스 발라드와 두 자녀는 그렇지 않다고 반박했다. 엄마가 세상을 떠났을 때 6살이던 아들 톰 발라드는 엄마가 여름에 올랐던 알프스 6대 북벽을 2015년 겨울 정복했다. 아들의 겨울 시즌 단독 등정도 세계 최초 기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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