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회찬이 살아온 길
한겨레 2018.07.23.
23일 숨진 노회찬(62) 정의당 의원은 30년간 우리나라 진보정당 운동을 직접 일궈온 산증인이자 상징적 인물이다. 날카로운 한마디로 복잡한 정국을 정리하며 촌철살인 어록을 남긴 그는 대중에게 오랜 시간 사랑받아온 ‘스타’ 정치인이기도 했다. 학생운동에서 노동운동, 진보정당 운동으로 이어지는 이력의 시작은 17살로 거슬러 올라간다. 박정희 정권이 1972년 10월 유신을 선포한 이듬해 경기고에 입학한 그는 비판 유인물을 제작해 학교에 배포했다. 고2 때인 1974년 4월 전국민주청년학생총연맹(민청학련) 시위 때는 교실 문을 잠그고 수업 거부를 주도했다. 경기고 동기동창으로 이 시절을 함께 보낸 이종걸 더불어민주당 의원은 이날 노 의원의 부고를 접한 뒤 “노 의원과 <창작과비평>도 읽고 함석헌, 백기완 선생의 강연도 다녔다. 그러면서 형성된 가치관과 사회관이 우리의 평생을 지배하고 있는지 모르겠다”고 회상하며 슬퍼했다.
경기고 시절 유신 반대 앞장
대학 때 용접 배워 노동운동
민노당 창당으로 정치 전면에
진보신당·통진당·정의당 등
부침 있었지만 진보정치 한길
삼성 ‘떡검’ 공개로 고초 겪기도 “50년된 삼겹살 불판 갈아야”
“정의는 지지 않았다” 어록 남겨
고등학교 졸업 뒤 곧바로 군대에 다녀온 그는 1979년 고려대 정치외교학과에 ‘늦깎이’로 입학했다. 재학 내내 유신독재 반대 시위를 하던 노 의원은 4학년이던 1982년 용접 기술을 배워 인천의 한 공장에서 일하며 노동운동을 시작했다. 이때 만난 노동운동가 김지선씨와 1988년 결혼했으나 1년 만인 1989년 인천지역민주노동자연맹(인민노련) 사건으로 구속돼 3년간 옥살이를 해야 했다. 노 의원과 김씨 사이에는 자녀가 없는데, 오랜 수배 생활과 감옥살이로 때를 놓쳤기 때문이라고 그는 회고한 바 있다.
그가 ‘운동’을 넘어 ‘정치’로 무게중심을 이동한 것은 1992년 대선이다. 당시 백기완 민중당 후보 선거대책본부에서 활동하던 그는 1997년 진보정당 ‘국민승리21’의 정책기획위원장을 맡으며 본격적으로 정치에 발을 담갔다. 2000년 창당한 민주노동당에서 초대 부대표, 사무총장을 역임하며 기반을 다졌다.
2004년은 노 의원의 정치 인생에서 기점으로 꼽힌다. 48살이던 노 의원은 17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비례대표에 당선되며 원내에 처음 진출했다. 민주노동당은 당시 지역구 2석과 비례대표 8석을 얻어 두 자릿수 의석을 확보했다. 한국 정치사에 남을 일대 ‘파란’이었다. 노 의원은 선거 당시 방송 토론회에서 “50년 동안 썩은 판을 이제 갈아야 한다. 50년 동안 똑같은 판에다 삼겹살을 구우면 고기가 시커메진다”는 ‘판갈이론’으로 일약 스타 정치인으로 발돋움하는 한편 당의 성공을 견인했다. ‘노회찬표’ 촌철살인 어록의 시작이기도 했다.
원내 진출 뒤 노 의원은 <중앙일보>와의 인터뷰에서 “살아생전 이런 날이 올 거라고는 꿈에도 생각 못했다”면서도 “지금까지 보여준 건 예고편이었다”며 칼을 벼렸다. ‘초선’ 노회찬의 활약은 실제 유권자들의 주목을 받기에 충분했다. 특히 2005년 8월 그는 ‘삼성 엑스(X)파일’ 사건과 관련해 이른바 ‘떡값’을 받은 검사 명단을 앞장서 공개하며 ‘두려움이 없는 정치인’으로 강하게 각인됐다.
이후 민주노동당 내부 노선 갈등을 겪던 노 의원은 2008년 탈당한 뒤 진보신당 창당에 참여했다. 2010년엔 서울시장에 도전했고 3위로 낙선의 쓴맛을 봤다. 2011년엔 진보신당을 탈당해 ‘통합진보당’을 창당했고 2012년 19대 국회의원 선거에선 야권연대 대표 후보로 서울 노원병에서 ‘재선’에 성공했다. 하지만 당내 폭력 사태 등을 계기로 통합진보당을 또다시 탈당했고, 이후 지금의 정의당을 만들었다. 탈당과 창당이 반복되며 당적엔 부침이 있었지만 노 의원은 ‘진보정당’의 외길에서 한 번도 벗어나지 않았다.
평생 운동권을 지킨 그의 삶이 팍팍하기만 했던 것은 아니다. 가난한 살림 속에서도 부모님의 뜻에 따라 중학생 때부터 첼로를 배웠던 그는 낭만과 위트가 있는 정치인으로 평가된다. 노 의원은 2010년 발행된 책 <진보의 재탄생: 노회찬과의 대화>에서 “모든 국민이 악기 하나쯤은 연주할 수 있는 나라를 꿈꾼다”고 밝혔다. 그는 당직자들 사이에서 “예의를 지키는 정치인”으로 통했고, 매년 3월8일 세계 여성의 날엔 여성 기자들에게 응원의 편지와 장미꽃을 돌렸다.
2013년 2월 그에겐 또다른 위기가 찾아왔다. ‘엑스파일’ 발언으로 기소된 사건이 의원직 상실형 선고라는 결과로 돌아온 것이다. 하지만 대법원 선고 뒤 그는 “정의는 지지 않았다. 싸움은 끝나지 않았다”고 강조하며 굽히지 않았다. 선고 직후 그가 “폐암 환자를 수술한다더니 폐는 그냥 두고 멀쩡한 위를 들어낸 의료사고와 무엇이 다르냐”고 지적한 것은 여전히 대중의 뇌리에 남아 있다.
노 의원은 2016년 4월 치러진 20대 국회의원 선거에선 노동운동의 교두보인 창원 성산으로 내려가 더불어민주당-정의당 통합 후보로 당선되며 3선에 성공했다. 이후 정의당 원내대표를 맡으며 당을 안정적으로 이끌어왔다. 지난해 대선에서 심상정 정의당 후보가 여성, 청년들의 지지를 받으며 의미있는 성과를 거뒀고, 최근 정의당의 지지율이 10%를 돌파하며 자유한국당을 위협하는 수준까지 된 배경엔 노 의원의 30년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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