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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군부 '5공 전사'는 증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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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자청비 2018. 10. 14. 03: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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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군부 '5공 전사'는 증언한다, 전두환의 말은 거짓이라고 [정리뉴스]


경향신문 / 2018.10.13 

1984년 9월7일 전두환 전 대통령 내외가 일본 도쿄를 방문해 영접 나온 교포들을향해 밝은 웃음을 지으며 손을 흔들어보이고 있다. 경향신문 자료사진

<5공 전사(前史)>는 전두환 정권의 제5공화국 출범 이전까지의 정치적 상황을 기록한 책이다. 조선 태조 이성계가 조선을 건국하게 된 과정을 찬양한 <용비어천가>처럼, 전두환을 비롯한 신군부가 10·26 사태 이후 어떻게 ‘불가피’하게 등장할 수 밖에 없었는지를 설명하는 내용이다.

누가 이 책을 썼는지는 불분명하다. <5공 전사>는 “평소 한국현대사에 관심이 있는 국내 역사학, 정치학, 사회학 분야의 중견학자 8명”이 집필에 참여했다고만 밝힌다. 다만 당시 군 실세가 아니면 알 수 없는 내용과, 관련자 수백명의 증언을 청취했다는 점에서 전두환을 비롯한 5공화국 주도 세력의 전폭적인 지지를 얻어 편찬됐으리라 짐작된다.

그동안 <5공 전사>는 ‘비밀 아닌 비밀’이나 마찬가지였다. ‘비밀’ 등급이 매겨진 문서는 아니었지만, 한번도 전문이 외부에 공개된 적이 없기 때문이다.

경향신문은 1년5개월여에 걸친 국방부에 대한 정보공개청구와 소송을 통해 3800쪽 분량의 책 9권 전권을 확보했다. 10회까지 이어지는 기획 보도의 핵심 내용을 연이어 전한다.


■20년전 역사에 등장한 <5공 전사>… 시작부터 ‘신군부 찬양’

5공화국 전사.

“<5공 전사>는 그동안 전체 내용이 외부에 공개된 적이 한 번도 없었다. 책의 존재는 1996년 전두환·노태우 두 전직 대통령에 대한 검찰 수사과정에서 처음 알려졌다. 2007년 5·18민주화운동 등에 관한 진상규명 활동을 벌인 국방부 과거사진상규명위원회도 <5공 전사>를 주요 근거로 사용했다.”

<5공 전사>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10·26 사태 이후 국가 지도력의 공백과 급진적인 자유화 물결에 편승한 각종 소요로 사회가 혼란하여 국가 자체가 위태로워지자 계엄 상황하에서 12·12 사건을 슬기롭게 극복한 주역들이 자연히 사회 안정과 혁신의 중심 세력으로 나타나게 되었다.”

‘12·12 사건을 슬기롭게 극복한 주역’이란, 즉 전두환을 비롯한 신군부다.


■“계엄군 회의에 참석한 적 없다”던 전두환의 ‘거짓말’

경향신문 자료사진

전두환 전 대통령은 그동안 5·18과 자신의 연관성을 모두 부인해왔다. 그는 지난해 펴낸 <전두환 회고록>에서 “나는 계엄군의 작전계획을 수립하고 지시하거나 실행하기 위한 그 어떤 회의에도 참석할 수 없었고 참석한 일이 없다”고 주장했다.

<5공 전사>는 어떻게 기록했을까. 당시 군 지휘부의 움직임을 담고 있는 ‘계엄당국의 적극 대처’ 부분을 보겠다.

“(5월)19일부터 전례없이 매 격일마다 국방장관을 비롯한 합참의장, 연합사 부사령관, 육·해·공군참모총장, 보안사령관, 수경사령관, 특전사령관 등 군 수뇌부가 국방부 회의실에 모여 2군사령부와 광주의 전투교육사령부로부터 올라오는 매일의 상황보고에 따라 사태에 대한 대책을 논의·결정하였다… 이들의 논의는 신중하면서도 진지한 것이었다.”

당시 보안사령관은 전두환 전 대통령이다. 5·18 이튿날부터 전두환 전 대통령이 광주 현지 상황을 보고받으며 주요 결정을 논의하는 회의에 계속 참석한 사실이 드러난 것이다. 전두환 전 대통령은 5월21일 군 수뇌부 회의에도 참석한 것으로 기록돼 있다. 시민들에 대한 발포 명령인 ‘자위권 발동’을 결정한 날이다. 그날 계엄군은 도청 앞에서 집단발포를 자행했으며 최소 55명이 사망했다.


■요약하면, 몸통은 ‘전 장군’이다

김용민의 그림마당 2018년 10월5일자

전두환 전 대통령은 회고록에서 이렇게 말했다.

“나는 (5·18) 치유와 위무를 위한 씻김굿에 내놓을 제물이다. 나의 유죄를 전제로 만들어진 5·18특별법과 그에 근거한 수사와 재판에서조차도 광주사태 때 계엄군의 투입과 현지에서의 작전지휘에 내가 관여했다는 증거를 찾으려는 집요한 추궁이 전개됐지만 모두 실패했다.”

5·18에 전두환 전 대통령이 개입했다는 증거는 <5공 전사>에 나온다. ‘전 장군’은 <5공 전사> 5·18 부분에서 모두 3번 직접 언급된다. 그는 2개 공수여단의 광주 추가 투입이 결정된 5월19일부터 군 수뇌부 회의에 참석했다. 5월19일 계엄사령부는 전북에 위치한 35사단에 전북과 전남의 도로를 통제할 것을 지시해 광주 소식이 ‘북상’하는 것을 막았다. 5월21일에는 발포명령과 다름없는 계엄군의 자위권 발동을 결정하는 회의에도 참석했다. 전남도청 무력진압작전을 이틀 앞둔 5월25일 최규하 대통령의 광주행을 결정한 것도 그였다.

신군부 세력이 직접 기록한 책이 전두환 전 대통령의 유죄를 입증하는 셈이다.


■‘문재인·김부겸·유시민·백남기…’ 신군부 ‘학원사찰 계보도’ 첫 공개

<5공 전사> 부록 2편 665쪽 ‘경희대 학원사태 주동자 계보도’. 맨 위 법대 4학년 ‘文○○’이 문재인 대통령이다.         

“(대학가 민주화 운동은) 불순분자의 배후 조종이다… 계엄당국에서는 경찰로는 더 이상 학원소요의 저지가 불가능하므로 군의 투입이 불가피해질 것으로 판단(했다).”

전두환 신군부는 1980년 5월 전국 26개 대학 교수·학생 458명을 담은 학원사태 주동자 계보도를 작성해 대대적인 체포·사찰에 나섰다. 학생들의 민주화운동을 무력화하기 위해서였다.

‘경희대 계보도’ 가장 위에는 ‘除籍復學生(제적복학생)’ 바로 아래에 “文在寅(문재인)·法(법)4”라고 쓰여 있다. 서울대 계보도에는 김부겸 행정안전부 장관·유시민 전 보건복지부 장관·심재철 자유한국당 국회의원 등이 포함됐다. 설훈 더불어민주당 최고위원(고려대), 전여옥 전 국회의원(이화여대), 고 백남기 농민(중앙대) 등도 대학별 계보도에 들어있다.


■전두환 주도로 내린 결론, ‘비상계엄 전국 확대’

1998년 9월23일 전두환 전 대통령이 부산을 방문해 대한불교 총지종 부산정각사에서 열린 ‘국난극복을 위한 참회 대법회’에 참석하여 합장하고 있다.         

전두환 장군은 (학원소요) 사태가 이렇게 발전하다가는 국가가 존망의 기로에 놓이게 되리라고 판단했다… 계엄을 전국 비상계엄으로 확대 선포하고 소요의 근원은 물론 사회불안요소의 제거조치가 불가피하다.”

학생운동권 지도부를 대거 체포한 계엄 확대의 시발점에는 역시나 전두환 전 대통령이 있었다. <5공 전사>에는 전두환 전 대통령이 합수본부 중정부국장에게 정세분석팀을 구성토록 지시한 과정이 나와 있다. 이 팀에서 내린 결론이 ‘비상계엄 전국 확대’다.

학생들의 시위 대상은 전두환 전 대통령이었지만, <5공 전사>는 부정적 맥락에서 전 전 대통령을 언급하길 꺼렸다. ‘전두환’ 이름 석자는 ‘○○○’으로 표현됐다.


■‘학생들’ 배후로 DJ 지목… 사건 조작까지

<5공 전사>에 남겨진 학원 사찰 문건의 절반 이상이 학원사태의 배후로 김대중 전 대통령(DJ)을 지목했다. 가령 ‘5·6 연대계엄해제요구 등 사태 배후 체계도’는 ‘배후(김대중)/ KT 지지 교수’들이 총학생회장에게, 복직교수들이 복학생들에게 영향력을 행사해 학생운동의 배후가 된 것처럼 체계도를 그렸다.

또한 당시 신군부는 학생들이 자금 또는 김 전 대통령의 지시를 받고 시위에 나선 것으로 사건을 조작했다. 이후 1980년 5·17 계엄 확대와 함께 신군부는 정치인과 민주화 인사 및 대학생들을 대거 체포했다. 당시 예비검속에서 체포된 인원은 전국적으로 2699명에 달한다.


■‘상부 명령’ 없이 현장 지휘관이 발포했다고?

신군부는 “전남도청 앞에서의 집단발포는 상부 지시가 아닌 현장 지휘관(대대장)의 판단에 따른 자위권 발동”이라고 주장한다. 전두환 전 대통령은 회고록에서 “광주에 출동한 계엄군은 계엄사령관이나 상급 작전지휘권자의 자위권 발동 지시가 없더라도 당연히 ‘정당방위권’과 ‘자위권’을 행사할 수 있다”고 적었다.

<5공 전사>는 어떻게 기록했을까.

“2군사에서는 참모총장을 뵙고 자위권 발동을 건의하였다. 참모총장 이희성 장군은 ‘대단히 중요한 문제’라고 하면서 장관에게 보고하자고 했다.”

‘자위권’은 계엄군 최고 지휘관도 혼자 결정할 수 없는 문제였다는 취지다.


■강경 진압 주저하면 ‘박탈’, 과격 진압은 ‘정당화’

5·18민주화운동 당시 광주에 투입된 7공수 부대원들이 1980년 5월18일 금남로에서 대검을 착검한 채 광주시민들을 무자비하게 진압하고 있다. 광주에 가장 먼저 투입된 7공수는 5·18진압작전이 종료된 이후에도 열흘 동안 광주에 남아 무등산 등에서 작전을 계속했다.│고 신복진 사진가 가족 제공.

“전교사 사령관으로 전남계엄분소장이었던 윤흥정 장군은 사태 발발 전에 이미 체신부 장관으로 내정되어 있어 자기가 사령관으로 있는 동안만 무사히 넘기면 된다는 안일한 생각을 하고 있었다. (31사단 정웅 사단장에 대해서는) 그 지역 출신으로서 주민들의 여론을 의식, 오히려 데모대를 비호하고 나섰다.”

전두환 등 신군부는 5·18 진압에 비교적 온건한 성향을 보인 일반 부대 지휘관들에 대해서는 ‘우유부단하고 기회주의적인 태도로 일관했다’며 맹비난했다. 그러면서 과격 진압은 정당화했다. <5공 전사> 내용이다.

“공수부대 계엄군들의 데모 진압 방식은 경찰의 그것에 비하여 매우 강력한 것이었다. 그들은 시위학생들의 해산과 그들의 체포에 주력하였다. 계엄군들은 인상착의가 학생처럼 보이면 일단 시위혐의자로 간주하였다. 그러다 보니 자연히 거칠어질 수밖에 없었다. 반항하는 난동자들은 곤봉으로 맞았고 구경하던 부녀자들이 떠밀려 넘어지기도 했다.”

그리고 이같은 강경 진압의 결과는 ‘자랑’했다.

“계엄군의 조직적인 진압 작전으로 오후 5시까지 경찰은 52명을 검거했지만 7공수는 출동 1시간 만에 149명을 검거했다.”


■‘무예 숭상하고 올바르다’던 ‘시민 소탕작전’

1996년 2월26일 열린 전두환 전 대통령 첫 공판.          

“끝까지 발악하다가 지하잠입 또는 산악지로 은신하여 고정간첩으로 전향할 가능성이 있다… 투하는 무장간첩과의 접선이 가능하다.”

계엄군은 시민들을 잠재적 ‘간첩’으로 봤다. <5공 전사> ‘광주사태’ 장은 ‘계엄군의 작전단계’를 65쪽 분량에 걸쳐 다뤘다. 이와 함께 13쪽에 걸친 ‘5월26~27일’ 경과를 참고하면 당시 작전의 전모가 드러난다.

당시 소탕작전명은 ‘상무충정’이었다. ‘무예를 숭상하며 충실하고 올바르다’는 뜻이다. 실상을 들여다보면 시민들을 죄다 없애 버린다는 ‘소탕 작전’이었다. <5공 전사>에는 마치 ‘적군’을 물리친 듯한 서술이 가득하다.

“폭도들은 특공조의 상대가 될 수 없었다… 악몽과 같은 ‘광주사태’가 끝나고 새로운 아침이 시작된 것이다. (계엄군은) 광주시를 무정부 상태의 수렁에서 구제해 냈다.”

대법원은 상무충정작전에 대해 전두환 전 대통령 등의 ‘내란목적살인죄’를 유죄로 인정했다. 그러나 전두환 전 대통령은 38년 동안 이에 대해 사과한 적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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