벨기에의 식민통치를 거쳐 소수 투치족(14%)에 의한 다수 후투족(85%)의 지배는 굳어졌다. 1962년까지 르완다를 위임통치한 벨기에는 소수부족인 투치족을 우대하여 지배계급의 위치를 공고히 하면서 다수 부족인 후투족을 통치했다. 1962년 7월 독립후(초대 대통령 G. Kayibanda)에도 투치족은 후투족을 강압 통치해 오면서 1963년 12월 후투족에 의해 약 2만명의 투치족이 희생당한 학살사건을 계기로 양대 부족간 갈등이 심화됐다.
1973년 후투족의 하비아리마나(J. Habyarimana) 소장이 쿠데타를 일으켜 정권을 잡은 뒤, '75년 <국가발전혁명운동당, MRND>를 설립하여 일당독재 정부를 구축하였다. 하비아리마나는 '78, '83, '88년에 일당독재 체제하에서 대통령으로 선임되어 소수 투치족을 억압해 왔다. '90.6월 하비아리마나 대통령은 다당제 민주주의 실천의도를 선언하였으나, 10월부터 난민화된 투치족은 르완다애국전선(RPF)을 조직하고, 주변국인 우간다, 탄자니아를 거점으로 정부군에 대한 공격을 개시함에 따라 내전이 본격적으로 발발하기 시작하였다.
르완다 내전의 결정적인 계기는 1994년 4월 6일 후투족 출신의 하비아리마나 당시 대통령이 암살당하면서부터였다. 이에 대해 투치족이 개입한 것으로 간주한 대통령 경호원들을 중심으로 한 후투족들(Interahamwe극우 후투군 조직)이 4월 7일 투치족 출신의 총리와 3명의 각료 및 벨기에 평화유지군 11명을 살해하고 투치족을 무차별 학살했다. 그러자 투치족 반군인 RPF가 후투족 중심의 정부를 공격함으로써 순식간에 부족항쟁이 일어나고, 민간인에 대한 보복 행위로 이어졌다. 1994년 4월 9일부터 11일까지 3일간의 교전으로 약 2만명이 살해됐다.
북부에 주둔하고 있던 2만명의 투치족 반군(RPF)은 4월 12일 수도 키갈리에 진입하였고, 정부군은 남쪽으로 이동하면서 남동부의 주요 도시 및 국경지역의 투치족 주민들을 무차별 학살하여 약 20만명이 희생됐다. 투치족 난민 60만명은 정부군의 학살을 피해 부룬디, 우간다, 탄자니아로 탈출했다. 양 부족간의 보복이 지속되면서 사망자가 50만명, 난민 300만명이 발생했다.
1994년 7월 23일 정권을 잡은 투치족 반군은 르완다 신 정부를 출범시키는 한편 후투족 온건파인 비지뭉구와 트와기라뭉구를 각각 대통령 및 총리에 임명하는 등 부족융화정책을 실시하였다. 투치족 신 정부는 카가메 중장이 부통령과 국방장관으로서 실권을 쥐고 정치적 안정의 유지를 꾀하는 한편, 이웃 자이르 등과 난민문제 협상, 후투족 구정부군의 무장해제 및 난민귀환 등을 협의하였다.
그러나 투치족이 정권을 잡자 후투족 주민 250만명과 구정부군 3만명이 보복을 우려하여 인근 자이르 동부 및 르완다 남서부의 안전지대로 도피했다. 후투족 난민들은 자이르, 탄자니아, 부룬디, 르완다 등으로 분산돼, 1995년 1월 현재 자이르 125만명, 탄자니아 59만 1천명, 부룬디 27만 5천명, 우간다 4천명, 르완다 남서부 안전지대 3만명 등으로 흩어졌다. 이들 난민들은 2만5천명 단위로 난민 수용소에 수용돼, 기아와 콜레라 등 질병에 시달리고 있다. 자이르 고마 난민촌에서는 1994년 7월 1개월 동안 기아 및 질병으로 120만명 중 4만3천명이 사망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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