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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류대학살의역사 6

또다른공간-------/알아두면좋다

by 자청비 2005. 11. 19. 17: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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르완다 대학살
 

르완다 내전은 소수파로서 지배층을 형성해 온 투치족과 다수파 피지배계층인 후투족간의 정권 쟁탈을 둘러싼 갈등에서 시작됐다. 양 부족은 외모 및 문화관습상 뚜렷한 차이점을 보이고 있다. 투치족은 15세기 나일강 유역에서 남하한 호전적인 유목민 출신으로 인구의 대다수를 차지하고 온순한 성향을 보유한 후투족을 지배하여 왔다.

 

벨기에의 식민통치를 거쳐 소수 투치족(14%)에 의한 다수 후투족(85%)의 지배는 굳어졌다. 1962년까지 르완다를 위임통치한 벨기에는 소수부족인 투치족을 우대하여 지배계급의 위치를 공고히 하면서 다수 부족인 후투족을 통치했다. 1962년 7월 독립후(초대 대통령 G. Kayibanda)에도 투치족은 후투족을 강압 통치해 오면서 1963년 12월 후투족에 의해 약 2만명의 투치족이 희생당한 학살사건을 계기로 양대 부족간 갈등이 심화됐다.
 

1973년 후투족의 하비아리마나(J. Habyarimana) 소장이 쿠데타를 일으켜 정권을 잡은 뒤, '75년 <국가발전혁명운동당, MRND>를 설립하여 일당독재 정부를 구축하였다. 하비아리마나는 '78, '83, '88년에 일당독재 체제하에서 대통령으로 선임되어 소수 투치족을 억압해 왔다. '90.6월 하비아리마나 대통령은 다당제 민주주의 실천의도를 선언하였으나, 10월부터 난민화된 투치족은 르완다애국전선(RPF)을 조직하고, 주변국인 우간다, 탄자니아를 거점으로 정부군에 대한 공격을 개시함에 따라 내전이 본격적으로 발발하기 시작하였다.

 

1993년 8월 유엔과 아프리카단결기구(OAU)의 중재로 약 2년에 걸친 내전 종식과 과도연립정부를 구성하는 아루샤 평화협정이 체결되어, 양 부족간에 구성된 잠정정부가 성립되었다. 1993년 10월 유엔은 이 협정의 이행 감시를 위해 평화유지군(UNAMIR) 2,500명을 파견하였다. 1994년 1월 과도정부의 구성과 관련 아루샤 협정상 총리직에 투치족을 임명하도록 약속하였으나, 후투족 출신의 하비야리마나 대통령이 같은 후투족인 트와기라뭉구를 총리에 선임하자 RPF측은 과도내각 참여를 거부하여 정국의 불안은 지속됐다.

 

르완다 내전의 결정적인 계기는 1994년 4월 6일 후투족 출신의 하비아리마나 당시 대통령이 암살당하면서부터였다. 이에 대해 투치족이 개입한 것으로 간주한 대통령 경호원들을 중심으로 한 후투족들(Interahamwe극우 후투군 조직)이 4월 7일 투치족 출신의 총리와 3명의 각료 및 벨기에 평화유지군 11명을 살해하고 투치족을 무차별 학살했다. 그러자 투치족 반군인 RPF가 후투족 중심의 정부를 공격함으로써 순식간에 부족항쟁이 일어나고, 민간인에 대한 보복 행위로 이어졌다. 1994년 4월 9일부터 11일까지 3일간의 교전으로 약 2만명이 살해됐다.

 

북부에 주둔하고 있던 2만명의 투치족 반군(RPF)은 4월 12일 수도 키갈리에 진입하였고, 정부군은 남쪽으로 이동하면서 남동부의 주요 도시 및 국경지역의 투치족 주민들을 무차별 학살하여 약 20만명이 희생됐다. 투치족 난민 60만명은 정부군의 학살을 피해 부룬디, 우간다, 탄자니아로 탈출했다. 양 부족간의 보복이 지속되면서 사망자가 50만명, 난민 300만명이 발생했다.
내전을 통해 투치족 반군이 수도 키가리를 제압하고, 7월 18일 프랑스군이 주둔한 서남부 지역을 제외한 전 지역을 장악하는 등 승리함에 따라 투치족 난민은 귀환하기 시작했다.

 

1994년 7월 23일 정권을 잡은 투치족 반군은 르완다 신 정부를 출범시키는 한편 후투족 온건파인 비지뭉구와 트와기라뭉구를 각각 대통령 및 총리에 임명하는 등 부족융화정책을 실시하였다. 투치족 신 정부는 카가메 중장이 부통령과 국방장관으로서 실권을 쥐고 정치적 안정의 유지를 꾀하는 한편, 이웃 자이르 등과 난민문제 협상, 후투족 구정부군의 무장해제 및 난민귀환 등을 협의하였다.

 

그러나 투치족이 정권을 잡자 후투족 주민 250만명과 구정부군 3만명이 보복을 우려하여 인근 자이르 동부 및 르완다 남서부의 안전지대로 도피했다. 후투족 난민들은 자이르, 탄자니아, 부룬디, 르완다 등으로 분산돼, 1995년 1월 현재 자이르 125만명, 탄자니아 59만 1천명, 부룬디 27만 5천명, 우간다 4천명, 르완다 남서부 안전지대 3만명 등으로 흩어졌다. 이들 난민들은 2만5천명 단위로 난민 수용소에 수용돼, 기아와 콜레라 등 질병에 시달리고 있다. 자이르 고마 난민촌에서는 1994년 7월 1개월 동안 기아 및 질병으로 120만명 중 4만3천명이 사망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투치족 신 정부는 1994년 7월부터 자이르, 탄자니아, 우간다 등 주변국에 자국 난민의 귀환 협력을 요청하는 한편 후투족에 대해서는 국가 재건에 동참하도록 요구하고 있다. 그러나 후투족은 투치족의 보복을 우려 귀국을 회피하고 있어 르완다 난민사태는 장기화되고 있다.

 

르완다 내전은 인류 최대의 재앙이며 상상을 초월한 죽음의 폭거였다. 10년이라는 멀지않은 과거임에도 불구하고 전세계 대중 매체들은 침묵을 지키고 있다. 하지만 100만명의 죽음은 서방 제국주의의 오래된 분리주의 식민정책의 결과임을 인식해야한다. 벨기에는 1916년부터 1962년까지 40년 가까이 르완다를 지배하면서 철저히 종족 분리정책을 폈다. 소수인 투치족(14%)에게 종족적 우월성을 부여하고, 종족의 실체를 엄격히 분리하는 신분증을 발급했다. 그들에게 더 나은 정치, 경제, 교육의 특혜를 베풀고 그 대신 후투족(85%)에 대한 통제권을 대신 행사하도록 했다. 벨기에는 한쪽에만 특혜를 베풀면서, 투치족과 후투족의 반목을 키워갔다.

 

이러한 지배방식은 이미 영국에 의해 정착된 다단계 식민지배 정책으로부터 배운 것이었다. 종족적 불이익을 감수해야 하는 다수 후투족의 반발과 분노가 커가는 것은 너무 당연했지만 서방 제국은 그대로 방치하는 것이 더욱 효율적이었다. 르완다 종족간 내부 반목을 확대 조명함으로써 식민지배의 합리화 명분을 국제사회에서 얻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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