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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라톤의 추억

건강생활---------/맘대로달리기

by 자청비 2006. 1. 6. 22: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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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원정의 스포츠광장

 

<경향신문>

 

중학교 시절, 우리 모교에서는 해마다 개교기념일이면 10㎞ 단축마라톤 대회를 열곤 했다. 개별 입상자에게 시상을 하는 것은 물론이고 학급별로도 점수를 매겨 종합우승을 가리는 대회였기에 전교생이 의무적으로 참가해야만 했다.


고산동산이라는 숨 가쁜 고갯길을 올라 아라국민학교 앞 5㎞ 반환점에 가면 손바닥에 스탬프를 찍어주는데, 입상을 하지 못하더라도 그 손바닥을 내보이며 교문 앞 결승점에 들어오는 일 자체가 대단한 자랑거리로 여겨졌다.


전교생 1,000명 중에 대략 200명 정도가 완주를 해내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부끄럽게도 나는 손바닥에 스탬프를 한번도 찍어보지 못했다. 숨이 턱에 차오르는 고산동산 중턱이 3년 내내 극복하지 못한 나의 ‘벽’이었다.


반면에 스타도 있었다. 이덕봉이라는 내 친구는 1학년 때 대뜸 우승을 하면서 우리 학교의 마라톤 영웅으로 떠올랐다. 얼굴까지 가무잡잡한 그 친구에게 우리는 ‘아베베’라는 별명을 붙여주었는데 녀석은 정작 3학년이 되어서는 우승을 하지 못했다. 전학을 온 현경만이라는 친구가 아베베를 2등으로 떨어뜨려버린 것이다. 새로 탄생한 마라톤 영웅은 고3때까지 제주도의 모든 마라톤대회를 석권하는 위세를 떨쳤지만 주위의 기대를 한 몸에 모으며 출전한 전국체전에서 쓴맛을 보고 만다. 20㎞ 단축마라톤에 출전한 녀석은 입상은커녕 결승점을 밟아보지도 못했다. 아니 메인스타디움에 들어오지도 못했다. 제한시간을 넘기자 다른 종목의 진행을 위해 운동장 출입문을 닫아버린 것이다.


참으로 어처구니없는 에피소드이지만 당시에는 이런 일이 상식으로 통했다. 아테네올림픽 여자마라톤에서 ‘영광스런 꼴찌’를 한 몽골 여자마라토너 오트곤바야르의 기사를 읽으면서 자꾸만 그 30년 전의 일이 겹쳐지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자신이 꼴찌라는 것을 알면서도, 자신의 최고기록에 한참 뒤처지고 있다는 점을 알면서도 끝까지 달린 오트곤바야르의 자세는 분명히 감동적이다. 우승한 일본의 노구치나 중도에 포기한 세계1인자 래드클리프의 지명도도 이날만은 오트곤바야르의 역주에 빛이 바랜 듯한 느낌이다.


하지만 나는 그보다도 그 감동의 달리기를 가능하게 한 사람들에게 더 뜨거운 박수를 보내고 싶다. 단 한선수를 위해 교통통제를 풀지 않은 진행자들, 연도에서 그녀를 격려한 사람들, 기립박수를 아끼지 않은 관중들…. 뒤처져도 한참 뒤처진 꼴찌를 기다려서 그들은 문을 닫지 않았다. 격려와 찬사에 인색하지 않았다. 그들이 있었기에 오트곤바야르는 감동의 역주를 끝낼 수 있었고, 1위 못지않은 66위의 가치를 전 세계인이 다시 한번 새겨볼 수 있었다.


스포츠란 그런 것이고 올림픽이란 또 그런 것이다. 그 감동에 비추어보자면 ‘아무도 2등을 기억하지 않는다’는 우리의 1등주의가 치졸하게 느껴지지 않는가?


그렇다. 어디 마라톤뿐이겠는가. 우리는 지금도 제한시간이 있는 사회에 살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 기준에 들지 못하면 냉정하게 철문을 닫아버리는 세상에 살고 있는지도 모른다.


각 분야마다 우리의 수많은 오트곤바야르들은 감동의 역주를 계속하지 못하고 그저 비참하게 좌절할 뿐이다. 66위의 역주는 우리에게 이렇게 말한다. 결코 문을 닫지 말라. 끝까지 지켜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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