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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한라의메아리-----/주저리주저리

by 자청비 2006. 5. 15. 1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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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정말 아까운 兄을 보냈습니다. 개인적으로는 술 한 잔 제대로 못해본 사이지만 가슴이 정말 따뜻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를 아는 사람들은 모두 그의 재능을 아까워 했습니다. 그야말로 한 컷의 만평에 혹은 4단 만화에서 보여주는 그의 재능은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그에게는 항상 병마가 따라다녔습니다. 그가 언제부터 어떻게 해서 그런 병에 걸렸는지는 제대로 아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그는 최근엔 몸이 악화될 대로 악화돼 술을 하지 않았지만 예전에는 술을 아주 많이 했습니다. 한번은 몸도 안좋은데 술을 좀 적게 하는게 어떠냐는 말을 건넨 적이 있습니다. 별로 받아들일 거라는 기대는 하지 않으면서 말이죠. 그런데 그는 육체적 고통을 참기위해 술을 한다는 말을 했습니다. 정확한 병명도 잘 몰랐지만 그 병으로 인한 고통이 엄청 크다는 것을 비로소 알았습니다.

평소 兄와 대화를 많이 하는 편은 아니었지만 兄은 이따금 나에게 밑도 끝도 없는 말을 건네기도 했습니다. 나는 미소로 받아주거나 단답형의 대답을 건네곤 했습니다. 오랜 투병생활에서도 회사를 계속 다니던 그는 지난달 말로 결국 사직서를 제출했습니다. 그리고 사직서를 제출한 일주일뒤쯤인 일요일 회사를 찾아왔습니다. 그리고 한사람 한사람에게 말을 건네며 악수를 청했습니다. 저에게도 열심히 살아달라는 말을 하며 악수를 청했습니다. 저는 진심으로 형의 건강해져서 다시 함께 일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는 말을 건넸습니다. 웃었습니다. 언제나 그렇듯이 형의 천진난만한 웃음은 많은 사람들을 편하게 했습니다. 그러나 그 웃음뒤에 감춰진 고통을 저는 알 것 같았습니다.

어제 오전에 회사에서 당직을 서는데 한 직원이 형의 비보를 저에게 전해주더군요. 의외로 담담해지더군요. 마침내 올 것이 오고야 말았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그리고 주위 직원들에게 들어보니 몇몇 사람이 통화를 했다고 하더군요. 아마 형도 자신의 죽음을 예감하고 인사를 못했던 주위 사람들에게 마지막 인사를 고했던가 봅니다. 그리고 오늘 아침 형이 17년간 다녔던 회사 앞에서 마지막 이별식을 했습니다. 모두들 눈물을 머금었습니다. 이제 형의 천진난만한 웃음은 더 이상 볼 수 없다는 아쉬움에 더욱 안타까웠습니다. 兄, 이제 고통이 없는 저 세상에서 이승의 모든 인연을 잊고 편히 쉬시기 바랍니다. 

▶‘돌킹이’ 김윤식 화백 별세◀

지난 17년간 ‘돌킹이‘로 세상을 풍자해온 김윤식 전 한라일보 화백(사진)이 지난 13일 자택에서 숙환으로 별세했다. 향년 51세.  고(故) 김윤식 화백은 지난 1989년4월22일 한라일보 창간과 함께 지금까지 17년동안 세상사를 풍자하며 독자들에게 통쾌함을 선사했던 시사만화 ‘돌킹이’를 지난 달 4일까지 총 4천4백77회에 걸쳐 연재해 왔다. 그러나 김 화백은 ‘돌킹이’ 5천회를 끝내 이루지 못한 아쉬움을 남기며 건강상의 이유로 지난달 28일 한라일보를 사직했다. 김 화백의 사직당시 시사만화가 송현우씨(제주만화작가회 사무국장)는 “민중의 목소리를 대변했던 김 화백의 시사만화는 매일매일 작가의 ‘피땀’과 ’출산’의 고통으로 탄생하는 창조품”이라며 돌킹이에 대한 평가와 이별을 아쉬워하기도 했다. 김 화백은 북제주군 애월읍 출신으로 애월상고를 졸업하고 서라벌예대문예창작과 1년 수료후 코리아극장 선전부장, 기성만화가 문하생 입문, 한국아동만화가협회 회원, 도서출판 제주문화 편집위원, 월간 ‘관광제주’ 창간위원, 한라일보 연재만화 ‘돌킹이’ ‘한라만평’ ‘꼬맹이’ 집필, 사단법인 시사만화가협회 회원 등으로 활동해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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