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리 밝히는데 나는 텔레비전을 통해 중계되는 축구 경기를 즐겨 시청하는 편이다. 2002년 월드컵 때 한국팀의 경기를 빼놓지 않고 보았다. 엊그제 우리 대표팀과 보스니아의 평가전도 놓치지 않았다. 집에서 쉬고 있을 때 텔레비전 채널을 돌리며 시간을 보내기도 한다. 뉴스나 영화를 주로 보지만 오락 프로도 본다. 그러니까 나는 축구나 텔레비전에 대해 부정적인 편견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아니다. 뜨겁게 달궈진 우리 사회의 월드컵 축구 열기에 찬물을 끼얹을 생각은 없지만, 그리고 또 찬물이 끼얹어질 거라는 기대가 불가능하다는 것도 알고 있지만, 이건 좀 지나치지 않나 싶어 한마디 하려고 한다.
2002년 4강 신화의 감격은 참으로 대단한 것이었다. 우리는 함께 어우러져 응원을 하며 대한민국 국민인 것을 자랑스러워하고, 차별 없이 하나된 기쁨을 누렸다. 그리고 이제 우리는 다시 그 감격과 자부심과 기쁨을 누리고 싶은 예감과 기대로 설렌다. 정치는 걱정거리고 경제적 환경은 무기력하지 않은가. 집값은 뛰고 양극화의 골은 깊어가고, 선거철이지만 지지하고 싶은 정당도 없고 찍고 싶은 인물도 없지 않은가. 도무지 사는 재미가 없지 않는가. 축구는 그물망을 출렁이게 하는 골에 대한 기대로 90분을 긴장하게 하고 흥분하게 함으로써 이 재미없는 현실을 잊게 한다.
축구정보 챙기느라 다른 정보는 밀려나
축구가 얼마나 대단한 힘을 가지고 있는가는 온 국민을 텔레비전 앞에 앉히고 응원가를 따라부르게 하고 붉은 티셔츠를 맞춰 입게 만드는 것으로 이미 증명되었다. 웬만한 기업들이 축구와 월드컵을 소재로 광고를 만들어 내보내는가 하면 월드컵을 겨냥한 마케팅을 기획한다. 선거 방송차들이 골목을 누비고 다니며 목청 높여 한 표를 호소하고 포부를 밝히는데도 선거운동원들 말고 귀를 기울이는 사람이 거의 없는 사정을 감안하면 축구 경기가 있는 날 선수들을 응원하기 위해 광장으로 자발적으로 모여드는 군중들은 새삼 놀랍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런데 이 놀라운 힘은 정말로 축구의 힘일까. 경기를 중계하는 텔레비전 없이도 월드컵이 지금과 같은 엄청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겠는가를 생각해 보면, 진짜 힘이 어디서 나오는 것인지를 눈치 챌 수 있다. 단순하고 빠르고 폭발적인 축구 경기의 매력이 없지는 않지만, 그런 정도의 재미를 주는 운동 경기가 축구뿐이라고 할 수는 없다. 축구공을 차는 선수들의 근육의 움직임과 표정과 땀과 골대를 향해 날아가는 공의 움직임을 실제보다 오히려 생생하게 전해주는 텔레비전의 영상이 아니라면 축구나 월드컵의 매력은 한참 줄어들 것이다. 사실 월드컵의 열기가 우리에게 상기시켜 주는 것은 축구나 피파의 힘이 아니라 텔레비전의 힘인 것이다. 더 좋은 영상으로 월드컵을 즐기기 위해 고화질 텔레비전을 구입하는 사람들이 많아지고 있다는 최근의 보도는 이 사실에 대한 방증이다.
최근 우리 텔레비전들은 축구와 월드컵에 지나칠 정도로 뜨거운 애정을 과시하고 있다. 어느날은 9시 뉴스의 초반 30분 가량을 월드컵과 축구 소식으로 채우기도 했다. 너무 친절한 텔레비전 덕택에 우리는 우리 선수들에 대해서만 아니라 우리와 16강을 다툴 같은 조 국가의 축구 스타일이나 개개 선수들의 신상에 대해서도 상당한 지식을 갖게 되었다. 텔레비전은 어느 나라의 어떤 선수가 감독과 불화라든지, 어느 나라의 어떤 선수의 사생활이 어떻다든지, 어느 나라의 어떤 선수가 어떤 나라에 대해, 혹은 어떤 선수에 대해 무슨 말을 했다든지 하는 시시콜콜한 것까지 알려 준다. 한마디로 우리 텔레비전들은 너무 호들갑스럽다. 물론 마니아들이야 어디나 어느 분야나 있는 것이고, 그런 사람들이 이러저러한 시시콜콜한 정보들을 습득하는 것까지 이상하다고 할 수는 없겠다. 하지만 일반 국민들 모두가 그런 것까지 다 알 필요가 어디 있겠는가.
다른 나라 선수 신상까지 꿰면서, 지방선거 후보는 몰라
그런 정보들을 알고 알게 하는 일이 쓸데없다는 뜻이 아니라 그런 정보들을 알고 알게 하느라 의미 있는 정보들이 밀려나거나 덮이거나 소홀히 다뤄질 수 있다는 사실을 지적하려는 것이다. 가령 우리들 중 상당수는 다른 나라 축구 선수들의 신상을 환히 꿰면서 지방 선거에 나온 구청장 후보와 시의원 후보는 누구인지, 그들의 공약이 무엇인지는 잘 모른 채 투표장에 가야 한다. FTA나 평택 대추리 사건 등 우리 사회의 중요한 이슈에 대해 관심을 기울이지 못한 측면도 있다.
흥미로운 소식이 월드컵의 개최국 독일에서 들려왔다. 그쪽도 월드컵 열기가 뜨거운 모양인데(왜 그렇지 않겠는가), 과다한 월드컵 방송에서 해방되자는 취지의 ‘축구 자유지대’ 캠페인이 베를린에서부터 시작되었다고 한다. 월드컵 중계방송을 하는 텔레비전이 없는 음식점이나 술집에서 식사를 하거나 술을 마시고 싶은 사람들의 권리를 존중하자는 운동이겠다.
텔레비전을 통해 축구 경기를 실컷 볼 수 있다는 기대를 가지고 6월을 기다리는 사람도 있지만, 텔레비전을 켜도 볼 게 없을 거라며 벌써부터 걱정하는 사람도 있다. 축구 중계를 하는 시간에 드라마를 보는 사람을 나도 몇 명 알고 있다. 문제는 한쪽으로 우루루 쏠리면 다른쪽이 있다는 것조차 망각해 버리는 우리 사회의 획일적이고 비탈지고 지나친 이상 열기이다. 공을 차는 선수들을 보면서 소리를 지르고 싶은 사람도 있지만 드라마를 보고 싶은 사람도 있는 법이다. 누구나 어느 드라마에 나오는 주연 배우의 신상에 대해 알아야 하는 것이 아닌 것처럼 누구나 어느 국가 대표팀의 축구 선수 신상에 대해 빠삭해야 하는 것도 아니다. 텔레비전은 조금 덜 호들갑스러워도 괜찮을 것 같다.
글쓴이 / 이승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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