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등학교 시절, 집으로 배달되는 신문에는 이따금 대문짝만하게 검은 바탕에 흰글씨로 커다랗게 '국가변란 기도 / 간첩조직 일망타진 / 대학가 침투 암약' 등등 이라고 쓰여 있었다. 신문에 실린 얼굴사진도 말끔한 사진이 아니라 수염이 텁수룩하거나 초췌한 모습이 태반이었다. 그와 같은 사건들은 잊을만 하면 신문을 시커멓게 장식했다. 그같은 사건들의 상당수가 절대국가권력을 유지하기 위한 희생양으로 빚어졌다는 사실을 깨닫는데는 한참 걸렸다. 대학시절 한국현대사에서 빚어졌던 사건들에 대한 진실을 깨달으면서 국가권력이 잘못 쓰일 때는 얼마나 잔인해질 수 있는지 깨닫고 아연실색했다.
그렇게 빨간색으로 덧칠해졌던 사건 가운데 하나였던 인혁당 재건위 사건이 32년만에 무죄선고를 받았다. 이 블로그 주인장은 무슨 운동권도 아니고 정치권도 아니고 정치를 꿈꾸는 사람도 아니다. 그저 평범한 소시민이고 무지랭이에 불과한 사람이다. 인혁당 재건위 사건이 재심판결에서 무죄선고를 받았다는 소식을 듣고 그저 내 블로그에 기록을 남길 요량으로 일간지의 기사와 사진들을 짜깁기해 올려 놓았다. 그런데 그 다음날 갑자기 블로그 방문자 수가 평소보다 4배 이상 늘어났다. 확인결과 인혁당 사건에 관한 조회수가 폭주했던 것이다. 포털사이트에서도 인혁당 관련 용어들의 조회수가 상위에 랭크됐다. 이는 인혁당에 관한 진실이 지금껏 제대로 알려져 있지 않았다는 것을 반증한다.
인혁당 사건은 왜 일어났을까. 그리고 그들은 왜 그렇게 빨리 사형당할 수 밖에 없었을까. 당시 시대상황과 배경, 사건 전개과정 등을 여기저기서 자료를 수합해 간략히 정리해봤다.
1975년 인혁당 재건위 사건 상고가 기각된지 하루도 채 지나지 않은 4월 9일 새벽 관련자 전원에 대한 사형이 집행됐다. 이날 희생자는 서도원(전 대구매일 기자), 도예종(삼화토건 회장), 하재완(양조장 경영), 이수병(일어학원 강사), 김용원(경기여고 교사), 우홍선(한국골든스탬프사 상무), 송산진(양봉업), 여정남(전 경북대 학생회장) 등 8명. 이들은 왜 형 확정 하루만에 형장의 이슬로 사라져야 했을까.
"내가 죽는 이유는 오직 하나, 조국을 위하여 민족민주운동을 한 것 뿐이다. 가족들이 보고 싶다" 고 유언장에 글을 남긴 그들은 마지막으로 "독재타도, 조국통일 만세"를 절규했다고 전해진다.
서도원 도예종 하재완 송상진은 4.19직후 대구지역을 중심으로 활동했던 민족민주청년동맹의 중심 인물이고, '만적론'을 쓴 이수병은 4.19당시 경희대 민통련 위원장을 지내고 민족일보 기자시험에 수석합격한 인재로 알려지고 있다. 그리고 서울대 물리학과 출신의 김용원과 육군대위 출신의 우홍선, 1964년 굴육적인 한일회담에 반대하는 6.3시위를 주도한 학생운동 리더인 여정남 등으로 중앙에서는 크게 알려지지 않은 인물들이었다.
여정남을 제외한 7인의 공통점은 1차 인혁당사건에 연루되었다는 것이다. 1차 인혁당 사건은 1964년 8월 14일 발표됐다. 한일회담과 대일 굴욕외교를 반대하는 시위가 거셌던 시국에서 터졌다. 당시 김형욱 중앙정보부장은 북한의 지령을 받고 국가변란을 기도한 대규모 지하조직인 인민혁명당을 적발해 관련자 57명 가운데 41명을 구속하고 나머지 16명을 수배중이라고 발표했다.
그러나 이 사건을 넘겨받은 서울지검 공안부는 수사결과 별다른 혐의점이 없어 기소를 거부했다. 이 사건에 대한 불기소처분을 주장했던 이모 부장검사와 여모 검사는 국가권력이 기소를 강행하자 사표를 내 검찰파동을 불러 일으켰다. 검찰은 당직검사를 통해 26명을 국가보안법 위반혐의로 기소했다. 재판부는 1965년 6월 29일 서울고법 항소심에서 도예종에게 징역 3년을 선고하는 등 전원 유죄판결을 내렸으며, 그 해 9월 21일 대법원은 항소심 형량을 그대로 확정했다.
그리고 유신정부를 수립하기 위한 준비가 한창이던 1973년 서울대 학생들의 시위를 계기로 반(反)유신체제 운동이 전국 대학으로 급속히 확산됐다. 이에 대학간 연계 필요성을 느낀 서울대 문리대생들은 밤낮없이 뛰어다닌 끝에 이듬해인 1974년 2월 준비를 마치고 전국 주요 대학의 대학생들이 4월 3일 일제히 시위에 나서기로 했다.
거사당일인 1974년 4월 3일 서울대에서 '전국민주청년학생총연맹(민청학련)' 명의의 "유신철폐" 유인물이 살포되면서 학생 70여명이 시위에 나섰다. 그러나 시위 주동자들은 이미 사전에 대부분 검거됐거나 수배조치됐고, 사복형사 200여명이 교내에 깔려 있어 시위는 싱겁게 끝나고 말았다. 박정희는 이날 오후 10시 민청학련과 관련된 일체의 활동을 금지하고 관련자들을 법관의 영장없이 체포, 구속하고 비상군법회의에서 심판, 처단하며 그 형량도 사형, 무기, 5년이상의 유기징역에 처한다는 내용의 긴급조치 4호를 선포했다. 이것이 민청학련 사건이다.
인혁당 재건위 사건으로 불리는 2차 인혁당 사건은 1974년 박정희 정권의 긴급조치 4호가 선포된 직후 일어났다. 중앙정보부는 5월 27일 민청학련 사건은 서도원, 도예종 등 인민혁명당 재건세력과 국내 반정부세력 등이 결탁한 국가변란기도 사건이라고 발표했다. 민청학련의 배후로 인혁당 재건위를 지목한 것이다. 민청학련 및 인혁당 사건과 관련 검찰은 모두 1,024명을 수사해 이가운데 253명을 군법회의에 송치됐다. 그리고 인혁당 관계자 8명에 대해서는 사형선고가 내려졌다. 유인태, 이철, 김병곤 등 민청학련 관계자 6명에 대해서도 사형이 선고됐고 나머지도 대부분 무기징역이나 10년 이상의 징역에 처해졌다.
1975년 4월 8일 대법원은 인혁당 관련자 8명에게 사형을 확정했다. 유신정권 비판에 앞장서는데다 아무런 국제적 연대 관계도 갖고 있지 않았고, 주로 지방에서 활동해 중앙정가에 별로 이름이 알려져 있지 않은 이들이야 말로 속죄양으로 본보기 처형을 하기에 안성마춤이었다. 이날 박정희는 점차 가열되는 유신반대운동의 중심에 있던 고려대를 무기한 폐쇄한다는 요지의 긴급조치 7호를 발동했다. 인혁당 사건이 고문에 의한 조작임을 주장하던 조지오글 목사도 추방해버렸다.
인혁당 관련자에 대한 사형이 형 확정 다음날 전격적으로 집행되자 국제법률가협회는 이를 '사법살인'이라 명명하고 '사법사상 암흑의 날'로 기록하고 있다. 게다가 온갖 고문으로 만신창이가 된 채 사형된 이들의 시신은 가족들에게 인계되지도 않았다. 장례라도 고이 치르려던 가족의 절규를 뒤로 한채 이들의 시신은 고문 흔적을 없애기 위해 크레인에 의해 화장장으로 끌려갔다.
인혁당은 존재하지 않았다. 다만 대일 굴욕 외교를 비판하고 유신통치에 반대하며 민족의 자주성을 추구하는 일련의 가느다란 흐름만 있었을 뿐이다. 민주적 정통성을 결여한 부도덕한 국가권력이 얼마만큼 타락할 수 있는지 인혁당 사건은 영화가 아닌 현실로 보여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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