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세 컨텐츠

본문 제목

법률용어 한글화 미룰일인가

한글사랑---------/우리말바루기

by 자청비 2007. 3. 11. 18:26

본문

'법률용어 한글화' 미룰 일인가 
 
어느날 한 청년이 백범을 찾아왔다. 이봉창이라고 하는 이 청년은 독립운동에 참여하고 싶다고 했다. 그러나 백범은 이 청년이 우리말과 일본말을 섞어 쓰고 임시정부를 가정부(假政府)라고 왜식으로 부르는 미심쩍은 부분이 있어, 오늘은 이미 날이 저물었으니 내일 다시 만나자고 했다. 다음날 이봉창은 상하이에 온 뜻을 이렇게 말했다. "제 나이가 이제 서른 한 살입니다

 

. 앞으로 서른 한 해를 더 산다 하여도 지금까지보다 더 나은 재미는 없을 것입니다. 인생의 목적이 쾌락이라면 지난 31년 동안에 인생의 쾌락이란 것을 대강 맛을 보았습니다. 이제부터는 영원한 쾌락을 위해서 독립 사업에 몸을 바칠 목적으로 상하이에 왔습니다." 이봉창의 이 말에 백범의 눈에는 눈물이 찼다.

이봉창의사의 의거로부터 70년이 지났고, '가정부'가 아닌 '임시정부'의 법통을 이어받은 대한민국이 탄생한 지 60년이 다되었다. 그러나 '가처분' '가압류' '가집행' 등의 일본식 법률용어는 여전히 노익장을 자랑하고 있다.

 

이들을 원래의 의미에 맞는 '임시처분' '임시압류' '임시집행'이라고 바꾸면 큰일이라도 나는 것인가. 어디 그뿐인가. 각하, 간주, 구술, 궁박, 기속, 내역, 명세, 변제, 병합, 원본, 차압, 최고, 하자, 해태, 흠결….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은 일본식 용어를 그대로 사용하고 있다. 사법고시 자체도 일본식 교과와 제도의 모방이니 무슨 말이 더 필요하겠는가.

 

우리 법조문을 일반 사람이 이해하기 어려운 까닭은 법 제정 당시 일제의 법조문을 토대로 만들어졌기 때문이다. 60년 전에 쓰던 일본식 용어를 거의 그대로 우리 법조문에 차용하여 정착시켜 왔기 때문이다. 외국에서는 한국의 법제를 대륙법계가 아닌, 일본법계의 아류로 구분하고 있는 실정이다.

 

그런데 지난 24일 서울중앙지법이 법률전문가의 도움 없이도 익숙한 일상용어로 손쉽게 작성할 수 있는 '생활 속의 계약서 양식'을 만들었다 한다. '참 좋은 소식'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이러한 계약서 양식은 법원이 공식 인정한 계약서는 아니고, 민원인의 편의를 위해 마련한 예시에 불과하다는 점이 마음에 걸린다. "일본식 용어 정비는 충분한 시간을 필요로 하기 때문에 이를 '중장기 과제로 추진'하고 있다"는 식의 수십년 동안 되풀이 해온 당국자들의 상투어가 귓전에 맴도는 것 같다.

 

왜 중장기 과제로 추진해야만 하는가. 이봉창 의사가 그때 영원한 쾌락을 위해 거사하지 않고, 그냥 말초적인 쾌락을 위하여 31년을 더 살고 또 다시 31년을 더 살았을 세월보다 긴 세월이 어찌 단기인가 말인가. 의지만 있으면 단숨에 할 수 있다. 생활과 밀접한 우리 법률용어에 일본식 용어가 21세기 오늘날까지도 남아 있는 현실은 치욕적인 것이 아닐 수 없다.

 

백범과 이봉창을 비롯한 수많은 순국선열의 영령들에 부끄럽지 않은 후예로서 반만년 한민족, 역사 앞에 바로 서기 위해서는 일제의 잔재를 훌훌 털어버려야 한다. 법률 용어, 하루빨리 우리말다운 모습으로 새롭게 태어나야만 한다.<강효백>

<경향신문> 

관련글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