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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르푸르사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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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자청비 2007. 4. 22. 20: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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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르푸르 유혈사태 해결 실마리
수단정부, 평화유지군 3000명 파견안 수용

 

 

21세기 최악의 인권유린 사태가 벌어진 수단 다르푸르에 유엔 평화유지군이 파견된다. 이에 따라 내전과 학살이 이어져온 다르푸르 사태 해결의 돌파구가 마련될 것으로 보인다.

 

AP통신에 따르면 유엔 평화유지군의 다르푸르 배치를 거부해온 수단 정부는 공격용 헬리콥터 등을 포함한 3000명 규모의 유엔군 파견안을 16일 전격 수용했다.

 

람 아콜 수단 외무장관은 존 네그로폰테 미 국무부 부장관이 “수단 정부가 유엔 평화유지군의 다르푸르 배치안을 계속 받아들이지 않을 경우 국제무대에서 더욱 고립될 것”이라고 경고한 직후 평화유지군 수용안을 발표했다.

 

압달마무드 압달할림 유엔주재 수단 대사도 반기문 유엔 사무총장에게 보낸 서한에서 유엔이 공격용 헬기를 포함한 지원군을 다르푸르 아프리카연합(AU) 평화군에 파견하는 것을 수단 정부가 승인했다고 밝혔다.

 

유엔은 이에 따라 공격용 헬리콥터를 포함해 3000명의 유엔군과 경찰 요원 등을 기존의 AU 평화유지군에 보강 배치하는 방식으로 유엔 평화유지군을 파견하게 된다.

 

코피 아난 전 유엔 사무총장은 지난해 11월 3단계 중재안을 제시했었다. 이 중재안은 1단계에서 유엔 경찰 자문관과 민간 지원인력 등을 보내 AU 평화유지군을 돕고, 2단계에서 유엔 파견 병력 등을 3000명으로 늘리며, 마지막 3단계에서 2만명 규모의 유엔·아프리카연합 혼성군을 가동토록 하고 있다.

 

반 총장은 이와 관련해 “수단 정부가 다르푸르 지역에 3000명 규모의 유엔 평화유지군 파견 방안을 수용한 것을 환영하며 병력 배치 준비에 신속히 나서겠다”고 밝혔다.

 

한편 네그로폰테 부장관은 수단 정부와의 휴전을 거부하고 있는 다르푸르 반군 조직에 평화협상에 임할 것을 촉구하면서, 수단 정부에는 반군 소탕 작전에 투입해 온 민병조직 잔자위드를 해체하라고 요구했다.

 

수단의 비극


다르푸르의 재앙

 


수단 서부의 다르푸르(Darfur)에서 수천 명의 아동이 굶어죽고 있다. 그들의 참극은 수단이 겪고 있는 고통의 또다른 참혹한 모습이다. 작년에만 다르푸르에서 기아와 질병과 전쟁으로 수만 명이 죽었다.


100만 명가량이 집을 잃었다. 연말쯤이면 약 25만 명이 죽어나가 있을지도 모른다.


이 참극을 보도하는 신문과 텔레비전은 “아랍인과 아프리카인 사이의 오래된 숙적 관계”라든가 “인종 청소”라는 비난 등 판에 박힌 상투적 문구만을 동원했다.


그러나 다르푸르는 민족간 충돌이 아니다. 국경없는 의사회의 비상위원회 부위원장 메르세드 타티(Mercedes Taty)는 수단을 둘러본 뒤 그곳의 비극을 가슴 절절하게 전했다. 그러나 그녀는 이렇게 말을 보탰다. “이 충돌을 묘사하기 위해 우리가 ‘인종 청소’라는 말을 사용해서는 안 된다고 나는 생각한다. …… 체계적인 표적은 전혀 없다. 하나의 민족 집단이나 또다른 민족 집단을 표적으로 삼는 행위는 분명히 없다. 물론 이것이 수단이 상황이 그 자체로 별로 심각하지 않다는 말은 아니다.”


다르(Dar)는 집 또는 가정을 뜻하는 아랍어이다. 다르푸르(Darfur)는 푸르 민족(Fur people)의 집이라는 뜻이다. 이들은 프랑스 크기만 한 지역에서 살고 있는 600만 명 가운데 400만을 차지한다. 그러나 다르푸르에는 다른 집단도 많다. 아프리카 흑인과 아랍에 민족적 기원을 둔 사람들이 수 세기 동안 그곳에서 함께 살아왔다. 그들 전부가 무슬림이다.


아프리카인과 아랍인은 다르푸르에서 융합되었다. “수 세기에 걸친 상호 결혼으로 두 집단을 물리적으로 구분한다는 게 불가능한 일이 되었다”고 최근의 《옵서버》 기사는 전한다.


다르푸르의 전 역사를 통해 토지와 물과 방목권(grazing right)을 둘러싸고 충돌이 있어왔다. 그러나 이곳 주민이 호의적이지 않은 반사막(semi-desert) 기후에 맞서, 그리고 하르툼(Khartoum)에 있는 수단 중앙 정부에 대항해 서로 협력해 왔다는 게 더 전형적인 역사였다.


정상적인 상황이라면 사람들은 서로 함께 우호적으로 지낼 수 있다. 그러나 빈곤이 악화될 때마다 긴장과 경쟁이 발생한다. 자녀들이 굶어죽는 것을 지켜보는 부모들은 이웃이 이득을 챙기고 있다고 충동질 당해 비극의 희생양을 찾게 된다. 그리하여 충분한 국제 원조가 없는 상황에서 1980년대 중반 수단을 강타한 치명적인 가뭄으로 투쟁이 발생했다. 부족 집단은 살아남기 위해 상대방의 가축을 약탈했다.


1986년에 정부가 살육 행위를 단계적으로 끌어올렸다. 다르푸르의 몇 개 집단을 무장시켜 수단 남부의 반란군과 대적토록 한 것이다. 정부의 목표는 “수단의 통일”을 유지하고 다르푸르의 귀중한 석유와 광물 자원에 대한 통제권을 강화하는 것이었다.


1989년경에는 다르푸르 자체에서 갈등과 충돌이 일상화되었다. 그리고 지난 18개월 동안 살육이 새로운 단계에 이르렀다. 정부가 지원하는 민병대와 정규군이 지역 전체에서 약탈하고, 강간하고, 살인을 자행하고 있다.


수단의 분열은 영국의 식민통치 기간에 설계되고 가속화되었다. 독립 후 수단 정부와 그 기업 후원자들은 국민적 통합을 와해했다. 이라크 전쟁 비용의 단 1%만이라도 지원된다면 다르푸르의 모든 인명을 구할 수 있다. 아프리카 전역의 수백만 민중도 말이다. 이라크에 폭탄을 퍼붓는 대신 수단에 식량과 의약품을 지원할 수는 왜 없는 걸까?


석유와 탐욕이 빚은 갈등


다르푸르의 고통은 영국의 식민 통치, 석유, 그리고 미국의 흉악한 개입에 그 원인이 있다. 세계의 열강들에게 다르푸르의 사태는 지엽적인 문제일 뿐이다. 부시는 다르푸르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는 안중에 없다. 그는 수단의 다른 갈등이 끝나기만을 바랄 뿐이다.


그것은 북쪽에 기반한 수단 정부와 남부의 반란군 세력 사이의 전쟁이다. 남북 갈등은 수십 년간 계속되고 있다. 지난 15년 동안 200만 명이 죽었고, 400만 명이 고향을 등지고 떠나야 했다.


평화 협정이 체결되면(곧 그렇게 될 가능성이 높은데) 미국은 세 가지 주요 목표를 달성하려고 할 것이다. 미국과 유럽의 석유 기업들이 수단의 원유를 더 많이 장악할 수 있는 길이 닦일 것이다. 수단에는 20억 배럴의 석유가 있고, 현재도 하루에 25만 배럴을 생산한다.


미국은 사우디아라비아 반대쪽의 홍해 해변에 친미 정부도 세울 것이다. 이렇게 되면 수단과 국경을 마주하고 있는 에리트레아, 에티오피아, 케냐, 우간다 등 일련의 친미 정권들의 블록이 형성될 것이다.


마지막 세번째이자 이것이 특히 중요한데, 미국은 자신이 전략적으로 중요한 지역의 정부들을 조종할 수 있음을 입증하려고 할 것이다. 수단이 이라크의 재앙을 지워주지는 못할 것이다. 그러나 부시 도당은 수단이 조금쯤은 보상이 되어주기를 바라고 있다.


미국은 남북간의 더 광범위한 협상에 걸림돌이 될 것을 염려하여 다르푸르의 비상사태에 침묵을 지켜왔다. 부시는 현재 수단 정부와의 우호 관계를 목표로 하고 있다. 이런 정책 목표는, 수단이 여전히 미국의 “테러 지원국” 목록에 올라 있는 현실과 충돌을 일으키고 있다.


부시는 수단과 관련해 위험한 줄타기를 하고 있다. 그러나 그는 전직 대통령 빌 클린턴(Bill Clinton)의 정책 운용을 따르고 있다. 클린턴 역시 수단을 “테러” 국가로 비난하면서도 그 나라의 석유 자원을 강탈할 기회를 호시탐탐 노렸었다.


1996년 4월에 클린턴은 반테러법(Anti-Terrorism Act)에 서명했다. 이 법이 발효되면서 미국 기업과 테러 행위를 지원하는 것으로 비난받는 국가들 사이의 모든 금융 거래가 금지되었다. 그 목록에는 수단도 올라 있었다.


4개월 후에 클린턴 행정부는 그 목록에서 조용히 수단을 제외했다. 이를 발판으로 미국의 석유 기업 한 곳이 수단에서 대규모 탐사 계약을 맺기 위해 협상에 나설 수 있었다.


1998년에 미국은 태도를 바꾸어 수단을 테러 국가라며 비난했다. 그 해 8월 7일 케냐와 탄자니아의 미국 대사관이 대규모 폭탄 공격을 받았다.


클린턴은 대사관 폭탄 공격의 범인을 찾아내야만 했다. 그는 아프가니스탄과 수단에 크루즈 미사일 79기를 발사했다. 하르툼 소재의 엘-쉬파(El-Shifa) 제약 공장도 그 표적 가운데 하나였다.


당시 미 국무장관이었던 매들린 올브라이트(Madeleine Albright)는 그 공장에서 VX 신경가스를 생산할 수도 있다고 주장했다. 그녀의 주장은 더욱더 기괴한 수준으로 발전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이라크를 상대로 동원된 거짓말을 불가사의하게 예시했던 것 같다.


엘-쉬파 공장에는 밀봉된 출입구는 물론이고, 제대로 된 보안 장치, 심지어는 창문 잠금 장치도 없었다는 게 곧 명백하게 드러났다.


미국 관리들은 이것이야말로 공장의 진짜 목적을 은폐하기 위해 고안된 사악한 기만 행위의 증거라고 응수했다. 미국의 엄청난 선전 공세에도 불구하고 곧 진실이 밝혀졌다.


엘-쉬파는 수단의 필수 의약품 생산 공장이자 중요한 동물 백신도 제조했다. 그 공장이 수단 전체 의약품 생산의 50%를 담당했다. 미국의 경제 제재로 인해 수단이 해외에서 의약품을 수입할 수 없었기 때문에 그 공장은 아주 중요했다.


공장이 파괴되면서 어린이 수천 명이 말라리아·결핵 및 다른 치료 가능한 질병으로 죽어갔다. 폭격이 자행되고 난 지 1년 만에 미국은 마지못해 그 공장이 테러와 아무 상관이 없었음을 인정했다.


석유와 총


석유 회사에서 흘러들어 간 자금이 수단의 살육전을 부추기는 데서 중요한 역할을 했다. 이 회사들이 수단의 억압적 정부와 긴밀히 협력하며 공생해 온 것이다.


북남 전쟁 기간 동안 석유 다국적기업들은 정부에 직접적인 원조를 제공했다. 항공기와 군대가 사적 목적으로 지어진 민간 활주로를 사용할 수 있도록 배려해 준 것이다.


정부는 석유 자금을 가지고 가장 현대적인 살인 기술과 무기를 도입했다.


지난 5년 동안 이런 일련의 활동에서 가장 중요했던 회사는 그레이터 나일 오일 컨소시엄(Greater Nile Oil Consortium)이다. 이 프로젝트에서 가장 큰 몫을 차지하고 있는 회사가 BP 아모코(BP Amoco)이다.


1999년 8월 남부의 유전 지대와, 이 나라 유일의 항구인 포트 수단(Port Sudan)을 연결하는 1600마일의 파이프라인이 개통되었다.


석유가 파이프라인을 흐르기 시작하자마자 미국은 남부 반란군에 대한 지원을 중단했다. 이제 부시는 평화 협정을 밀어붙여 그 노다지에서 이득을 챙기려고 애쓰고 있다.


수단 소사


1820년 이집트가 수단을 침략하다. 1876년경에는 이집트 군대가 수단의 전 지역을 장악한다.


1879년 영국과 프랑스가 공동으로 이집트를 접수하다. 이들 역시 수단의 법을 장악하고 세금을 거둔다.


1881년 무함마드 아흐메드(Muhammad Ahmed)의 지도로 외세에 저항하는 봉기가 일어나다. 영국군이 그를 분쇄하려고 한다. 그러나 오히려 영국군이 패퇴당한다.


1885년 무함마드 아흐메드의 세력이 하르툼을 점령하다. 그들은 고든 장군(General Gordon)을 처형하고, 최초의 독립 정부를 수립한다.


1898년 옴두르만 전투(Battle of Omdurman). 키치너 장군(General Kitchener) 휘하의 영국군에게 수단군이 학살당한다. 영국군과 프랑스군이 하르툼에서 남쪽으로 500마일 떨어진 파쇼다(Fashoda)에서 충돌한다. 이로써 유럽이 전쟁 직전의 상황으로 치닫는다. 프랑스가 결국 물러서고, 영국은 아프리카의 다른 식민지를 포기하는 대가로 이집트와 수단에 대한 통제권을 보장받는다.


1914년 영국이 이집트와 수단을 직접 통제한다. 총독부는 수단을 남과 북으로 분리한다. 당시에 한 총독은 이렇게 말했다. “남부 주들은 현대적 세계에 노출될 준비가 안 되었다.”


1920년대 소위 “폐쇄(closed door)” 정책으로 수단 북부인들이 남부로 여행하거나 남부에서 일자리를 구하는 게 금지된다.


1930년 수단 남부인들이 북부의 무슬림과는 확연히 구분되는 민족이라고 선포된다. 수단 남부를 영국령 동아프리카로 통합하기 위한 술책이었다.


1946~7년 영국이 수단 남부를 지방의 재식농장 소유주들인 수단 북부의 엘리트에게 넘겨준다. 남부와 일체 협의가 없었음은 물론이다. 새 입법부에서 수단 남부를 대표하던 사람들은 영국이 지명했다.


1956년 수단, 독립을 쟁취하다. 그러나 영국이 조장해 놓은 분열상이 전쟁의 발단이 된다. 독립 직후에 전쟁이 발발한다.


1980~3년 자파르 니메이리(Ja"far Nimeiry) 정부의 억압에 저항하는 투쟁의 물결이 일어나다. 그가 지지 세력을 규합하기 위해 샤리아 법[sharia law, 이슬람의 성법]을 공포했던 것이다. 아프리카계 반군세력 수단인민해방군(SPLA)은 1983년부터 21년간 아라볘 수단 정부군을 상대로 독립투쟁을 벌이게 된다.


1986년 IMF가 수단의 “파산”을 선언하며 모든 차관을 회수해 버린다. 50만 명이 기아로 사망한다. 3년 후에 군부가 권력을 장악한다.


1991년 수단 정부가 미국의 제1차 이라크 전쟁에 반대한 것을 복수하기 위해 미국이 포트 수단으로의 곡물 선적을 중단해 버린다. 당시는 기근이 닥쳤던 시기였다.


1992년 IMF가 교사한 삭감 정책 및 수단 정부에 항의해 도시에서 파업과 폭동이 계속되다.


1993년 우마르 알-바쉬르(Umar al-Bashir)가 대통령으로 공표되다. 그가 여전히 수단의 대통령이다.

 

2003년 수단 서부 다르푸르에서 수단해방군(SPL)과 정의평등운동(JEM)이 봉기를 일으킨다. 이에 수단정부는 잔자위드(Janjaweed)라는 비정부군(민병조직)을 결성한다. 잔자위드는 사람들을 닥치는대로 죽이고 여자들을 강간하고 마을을 불태웠다. 지금까지 희생자는 20여만명, 난민은 200여만명, 불탄집은 4만여채에 이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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