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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케임브리지대는 면접에서 독특한 질문을 해 지원자의 상식, 기초지식, 관찰력, 추리력 등을 종합평가한다. ⓒ프레시안 |
그런 제도들이 잘 정착된 것은 신뢰사회의 전통이 있고, 교수진이 넉넉하게 확보된 덕분이다. 고교 교사들이 양심적으로 학생의 잠재력 등을 내신에 반영할 뿐 아니라, 교수들이 자기 연구실에서 면접을 해도 공정하게 학생을 선발한다. 외국에서 지원한 학생의 경우 인근에 근무하고 있는 그 대학 출신 선배가 면접을 하는 경우도 있는데, 그 면접결과도 상당히 신뢰할 만 하다고 한다. 대학에서 가정교사처럼 학생지도를 전담해 온 '튜터' 교수들은 앞서 예를 든 것처럼 어떤 지원자가 학업을 잘 수행할 수 있는지 가려내는, 상당한 노하우를 가지고 있다.
우리 대학사회와 근본적으로 다른 점은 한 대학이 인재를 독점하겠다는 생각에 사로잡혀 있지 않다는 것이다. 평가하기 힘들어 옥석이 섞여 들어올 수도 있지만, 시험성적 1~2점이 아니라 학습의욕과 발전 가능성에 비중을 둔다. 영국의 경우 학생들이 6개 대학까지 지원할 수 있지만, 케임브리지와 옥스포드는 상호 교차지원을 허용하지 않는다. 우수한 학생들이 분산돼 런던대학 등에는 두 대학보다 더 좋은 평가를 받는 학과도 꽤 있다.
우리나라에서도 우수한 학생들이 어느 정도 분산되는 게 학문의 발전과 교육의 질 향상을 위해 바람직하다. 우수 학생 유치경쟁은 국가 전체로 보면 어차피 '
제로섬 게임'이다. 다른 대학에 진학했더라면 교수들의 관심 속에 쑥쑥 성장했을 인재들이 서울대학에서 재능이 묻혀버린 경우도 많았을 것이다. 내신과 수능 성적이 학생의 잠재력을 평가하는 데는 문제가 많지만, 어쨌든 OECD 국가 중에서 서울대학처럼 고득점자를 독과점하는 경우는 유례가 없다. 고교 학업성취도는 세계 최고 수준인데, 연구실적 등을 고려한 대학 랭킹은 서울대가 세계 100위권을 들락날락한다. 소위 '명문대학' 간판은 국내용이다. 한국사회 각 분야에서 서로 밀어주고 끌어주면서, 그들만의 리그로 입장하는 티켓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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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해 고교졸업 수학시험에서 12살의 최연소로 최상위급 점수를 받은 소년. 영국 대다수 언론은 본고사 없는 현행 입시제도를 지지한다 ⓒ <가디언> 2006.8.18 |
고교등급제는 한국판 카스트제 고교등급제는 원칙적으로 없고, 영국의 옥스포드와 케임브리지, 그리고 미국의 일부 대학이 명문 사립고교 출신을 약간 선호하는 경향이 있을 뿐이다. 그러나 고교등급을 점수화해서 연좌제 식으로 적용하는 일은 없기 때문에 이름없는 고교 출신일지라도 뛰어난 학업 성취도와 의욕을 보이면 입학기회가 주어진다. 서구의 대학들은 기본적으로 성적이 좀 떨어지더라도 잠재력과 의욕이 있는 학생들을 선발해 혹독한 수련과정을 거쳐 1/3 정도를 중도 탈락시키고 나머지를 인재로 키우는 전략을 쓰기 때문에 입학은 큰 의미가 없다. 명문대 입학이 졸업은 물론 인생의 보증수표가 되는 우리와는 다르다.
등급제 시행 자체에도 문제가 있다. 가령 과목별 등급은 어떻게 정하나? 결국 모든 과목에서 서울대처럼 1위를 하는 고등학교가 생겨 줄을 세우게 될 것이고, 마침내 출신 고등학교에 의한
카스트 제도로 고착될 것이다. 강북 학생들은 강남으로, 지방 학생들은 서울로 몰려들어, 서울과 강남의 집값은 더욱 폭등하게 될 것이다. 고액과외도 수 백만 원을 넘어 1000만 원대가 등장하고, 종내에는 돈 없는 사람은 들어가 살지도 못하는 '교육특구'가 생겨날 것이다.이른바 빗장도시(Gated City)가 완성되는 것이다.
기여는 있어도 입학은 없다 기여입학제는 유럽의 경우 '기여는 있어도 입학은 없다'고 보면 된다. 빌 게이츠가 케임브리지 대학에 1억5000만 파운드라는 세계 역사상 최대 기부금을 내고, 미국 실업가 게리 다나카가 런던대
임페리얼 칼리지에 2700만 파운드의 기부금을 냈지만, 그들의 자식이 그 학교에 입학했다는 소식은 들어본 적이 없다. 기부는 '
노블리스 오블리제'의 실천이고 명예로운 일이어서 대가를 요구하지 않는 전통이 있는데다, 실력 없는 자녀가 입학하더라도 졸업을 못한다는 사실을 잘 알기 때문이다.
한국에서 기여입학제가 도입된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재벌뿐 아니라 웬만한 부유층은 집을 팔아서라도 거액의 기부금을 내고 자녀를 명문대에 진학시키려 할 것이다. 교육부나 대학 쪽이 기여입학 정원을 제한할 경우 결국 돈을 많이 지르는 사람이 자녀 합격증을 따가는 경매제로 둔갑할 것이다. 우리나라 상당수 부유층이 돈으로 할 수 없는 마지막 소원이 있다면 자녀의 명문대 입학일 것이다. 돈이 우등생을 만드는 시대이니, 기여입학을 하려는 자는 아무리 돈을 퍼부어도 안 되는 학생일 공산이 크다. 그들 스스로를 위해서나 대학의 면학 분위기를 위해서나 도입돼서는 안 되는 제도라는 사실이 명백해진다. 입학만 하면 대충 졸업시키는 우리나라 대학들은 기여입학제를 도입하느니 차라리 돈 받고 '명예학사 학위'를 주는 게 낫겠다.
기여입학제는 일종의 공공재인 교육기회의 배분을 왜곡시킨다는 점에서 문제가 많다. 기여입학제를 통해 재벌급 부호로부터 거액을 받아낼 수 있는 대학은 서울의 몇몇 유수대학에 국한될 것이다. 기부금이 대학의 주요 수입원이 될 경우 많은 지방대학은 고사위기에 처할 수밖에 없다. 지금 기여입학제를 주장하는 신문 가운데 <조선>이 연세대, <동아>가 고려대, <중앙>이 성균관대와 재단 차원에서 밀접한 관련이 있는 점은 눈여겨볼 대목이다.
그렇지 않아도 이른바 'SKY' 대학과 이화여대 등에는 무슨 '엑스포 박람회장'인 양 삼성관, LG관, 포스코관, SK관 등이 즐비하게 들어서 있다. 건물 짓는 데도 경쟁이 붙어, 외관은 고급 석재를 쓰고, 실내에 들어서면 수입 대리석과 고급 원목, 샹들리에로 장식해 초호화판 호텔을 방불케 한다. 외국의 많은 대학들을 돌아다녀 봐도 이처럼 건물에 많은 돈을 들이는 대학은 본 적이 없다. '기여입학제 못해서 장학금도 못 준다'는 얘기가 공허하게 들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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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빌 게이츠의 거액 기부금으로 지은 건물들 중 하나인 케임브리지대 컴퓨터 실험실. 재벌 기부금으로 지은 우리나라 대학 건물들처럼 사치스럽지 않고 기능성을 중시했다. ⓒ cambridge2000.com |
'경쟁' 외치면서 자기들은 기회 독점 사실 대학재정에 관한 한, 기업은 세금이나 잘 내고, 정부가 일정 기준에 따라 학교별로 지원금을 배분하는 게 옳다. 유럽 대부분 국가들은 정부가 대학의 재정 부담을 지기 때문에 학사관리를 엄격하게 하고 연구비도 실적에 따라 배분한다. 대학은 학문의 자유를 누릴 뿐 학사행정의 자유는 상당히 제약된다. 우리나라 대학 재정에서 차지하는
정부지원금의 비중은 고작 5% 안팎이다. 사실 대학들이 중고교의 보통교육정책까지 좌우할 만큼 발언권이 커진 데는 대학의 재정을 자체 조달하게 하고 대학교육을 시장에 맡겨버린 정부 탓도 크다.
실은 시장주의자들이 존경해 마지않는 아담 스미스까지도 공공교육은 기부금에 의존하거나 시장원리에 맡기지 말고 국가가 나서야 한다고 주장했다. 우리나라 신자유주의 학자들과 보수언론은 입만 벙긋하면 '경쟁'을 외치지만, 기여입학제는 '경쟁을 하지 말자'는 것이니, 한 입으로 할 얘기는 아니다. 본고사와 고교등급제 또한 진정한 실력경쟁이 아니라 기득권층 자녀들의 기회 독과점을 조장하는 제도라는 점에서 자가당착이다. 그런 모순에도 불구하고 선거 국면은 정치권-대학-언론으로 연결되는 기득권 동맹에게 3불정책을 무력화할 절호의 기회를 제공하고 있다.
[프레시안 이봉수/세명대 교수,언론학(경제저널리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