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영원씨(31·서울 방배동)는 2002년 경기 지역의 한 4년제 대학 경제학과를 나왔다.
하지만 단순한 대학 졸업장만으로는 변변한 일자리를 찾기 어렵다는 것을 깨닫고 지난 3월에야 서울시가 운영 중인 1년 과정의 직업학교(서울종합직업전문학교) 건축환경설비과에 다시 입학했다. 이곳에서 빌딩과 상가,아파트 단지 등 대규모 시설의 냉난방 설비 및 공조기 관련 기술을 익힌 뒤 평생 직업을 찾을 생각이다.
최씨처럼 대학을 졸업하고도 직장을 제대로 구하지 못한 청년 실업자가 속출하고 있는 가운데 수많은 중소기업들은 인력난을 호소하는 일자리 미스매치(불일치)가 심각하다.
교육인적자원부에 따르면 국내 고교생들의 대학 진학률(전문대 포함)은 세계 최고 수준이다. 2006년 기준 82.1%로 미국(63.6%),일본(49.1%)보다 월등히 높다. 270만명을 넘어선 대학생 수는 1980년(56만여명) 대비 5배,1990년(136만여명)에 비해서도 2배 가까이 늘었다.
하지만 대졸자들이 선호하는 대기업 일자리는 계속 줄어드는 추세다. 종업원 300인 이상 대기업 일자리는 1995년 251만개에서 2005년 180만개로 71만개나 감소했다. 같은 기간에 49인 이하 소기업에선 일자리가 151만개 늘었다.
문제는 대졸자들이 소기업 취업을 외면,기능인력이나 사무인력 부족에 시달리는 소기업들이 많다는 점이다. 지난해 노동부 조사에 따르면 5인 이상 사업체의 부족 인력은 20만5000명으로 이 중 19만7000명(96%)이 중소기업에서 발생했다. 대졸자들이 눈높이를 낮추지 않으면 심각한 청년 전문대졸 이상인 20~29세의 실업률(6.7%)을 낮출 수 없다.
중소기업들은 고졸이면 할 수 있는 일을 대졸자에게 시키는 '학력 과잉'의 피해를 입고 있다. 원하는 인력은 뽑지 못하면서 뽑은 인력에 과도한 대우를 해주다 보니 경쟁력이 떨어질 수밖에 없다.
학생들의 수준도 문제다. 인천 남동공단의 한 중소기업체 대표는 "관리직 대졸자를 채용하기 위해 5명을 면접했지만 기본적인 소양이나 업무 능력을 갖춘 지원자가 없었다"고 하소연했다.
스위스 국제경영개발원(IMD)의 경쟁력조사 중 '대학교육의 경쟁사회 요구 부합도' 항목에서 한국은 2004년부터 2006년까지 3년 연속 최하위권인 50위권에 머물렀다.
최근 문제가 되고 있는 대학의 학생선발 기준 논란도 '대학의 자율성 침해'에서 비롯됐지만 뚜렷한 진로 설정 없는 고등교육 선호도 한 요인으로 작용했다.
주무현 한국고용정보원 연구위원은 "과잉 학력 문제를 풀려면 합리적 진로 선택이 이뤄지는 선진국처럼 진로 교육을 획기적으로 강화하는 게 급선무"라고 말했다.
김대일 서울대 교수(경제학)는 "청년 실업의 관점에서는 낮은 대학 교육의 질이 문제"라며 "품질이 좋으면 수요는 늘게 마련"이라고 지적했다.
<ⓒ 한국경제신문 2007-07-01>
[학력 인플레의 늪에 빠진 한국]
10년전 高卒이 하던 일 지금은 大卒이…
경기 안산 반월공단에 있는 중소기업 A사.전력차단기 등 전력기자재를 만들어 대기업에 납품하는 회사다. 10여년 전만 해도 조립 용접 설계 같은 생산공정은 공고(전문계 고교) 출신이 도맡아 했다. 이제는 아니다. 이 회사 최고경영자(CEO)는 "요즘은 공고 나와서 곧장 회사 오는 사람이 없다. 전부 대졸(전문대 포함)이다. 과거 고졸이 하던 일을 지금은 대졸이 한다. 하는 일도 똑같고 생산성도 높아지지 않았다. 학력 인플레로 인건비만 올랐다"고 푸념했다. 이 회사의 신입사원 초임 연봉은 고졸이 2000만원,전문대졸 2200만원,대졸이 2400만원 정도다. 그나마 비싼 임금을 주더라도 사람을 구할 수 있으면 다행이다.
A사는 지난해 매출액이 600억원이 넘고 코스닥시장에 상장돼 있는데도 해마다 10여명 안팎의 신입사원을 채용하는 데 애를 먹고 있다. 그는 "일단 오려고 하는 사람이 별로 없다. 힘들게 뽑아놓아도 2~3개월을 못 버티고 나가기 일쑤"라며 "배운 사람들이 너무 많아서 수위 할 사람도,공장 돌릴 사람도 없는 게 요즘 중소기업의 현실"이라고 씁쓸해했다.
심각한 청년실업 속에서 중소기업은 극심한 구인난에 시달리고 있다. 채용포털 인크루트가 지난 5월 대기업 63개사,중견·중소기업 123개사를 대상으로 지난해 '신규 채용 현황'을 조사해봤다. 중견·중소기업은 채용 예정 인원의 77.7%밖에 뽑지 못했다. 그나마 입사 인원 중 28.5%는 1년도 안 돼 회사를 나가버렸다.
대기업은 채용 예정 인원의 96.1%를 뽑았고 입사자 중 1년 이내 퇴사자 비율도 4.1%에 그친 것과 대조적이다. 구직자들의 중소기업 기피 현상이 뚜렷하다는 얘기다. 취업난 속 구인난의 원인은 뭘까. 표한형 현대경제연구원 연구위원은 학력 인플레를 지목했다.
"학력 인플레로 직업에 대한 기대 수준이 높아지면서 고학력자들의 구직활동이 대기업에 집중되고 있다"는 것이다. 대졸자들이 갈 만한 일자리가 충분하기만 하다면 학력 인플레가 문제될 것은 없다. 하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 일부 대기업은 이미 '고용 없는 성장'을 넘어 '고용을 줄이는 성장'을 하고 있다.
KT가 대표적이다. KT가 금융감독원에 제출한 사업보고서를 보면 외환위기 직후인 1998년 5만6600명이던 이 회사 직원 수는 지난해 3만7514명으로 33.7%나 줄었다. 사무직 인력만 놓고 봐도 1만1380명에서 8893명으로 21.9% 감소했다. 반면 이 기간 매출은 8조7739억원에서 11조7720억원으로 34.2% 늘었다.
한국직업능력개발원은 지난해 '중장기 인력 수급 전망' 보고서에서 2015년까지 노동시장에 전문대졸 이상 학력자 54만8000명이 초과 공급될 것으로 전망하기도 했다. 그런데도 고학력자들은 여전히 대기업이나 공기업 공무원 같은 '번듯한' 직장에만 몰리고 있다.
대전지역 사립대에 다니는 박모씨(27·회계학과)는 올 상반기에 대기업에만 네 군데 원서를 냈고 이 중 세 곳은 면접까지 가보지도 못했지만 계속 대기업을 노릴 생각이다. 그는 "중소기업은 불안해보인다"고 했다.
올초 국민 우리 등 시중은행의 창구직(금전출납원) 모집에는 석·박사 출신을 비롯해 서울대 연세대 고려대 등 이른바 명문대 출신까지 대거 몰려 채용 담당자들을 놀라게 했다. 창구직 연봉은 2200만~2300만원 정도로 '괜찮은 중소기업' 수준이지만 경쟁률은 우리은행이 30 대 1,국민은행이 36 대 1에 달했다.
정규직 전환 가능성이 부각되면서 작년보다 경쟁률이 두 배나 치솟았다. 과거 고졸 출신이 주로 보던 9급 공무원 시험도 이미 대졸자들 차지가 돼버렸다. 서울시 9급 합격자 중 4년제 대졸 이상 학력자는 1996년 60.9%에서 지난해에는 90.4%로 치솟았다.
수도권의 한 지방대생은 "'칼퇴근'에 정년 보장되고 학벌 상관없이 시험 성적으로만 뽑으니까 공무원의 인기가 높다"며 "1학년 때부터 고시원에 들어가는 학생이 부지기수고 공무원 시험 특강에는 빈 자리가 없다"고 말했다.
대학생들의 중소기업 기피 현상을 해소하려면 대기업과 중소기업 간 임금 격차 등이 줄어야겠지만 이와 함께 대학과 학생들의 의식 전환이 필요하다는 지적이다. 중소기업과의 철저한 산학 협력으로 최근 6년 연속 취업률 100%를 기록한 한국산업기술대학교의 송영승 홍보과장은 "솔직히 눈높이를 낮추고 싶은 대학생이 어디 있느냐.우리는 '눈높이를 다양화하라'고 얘기한다.
시야를 넓히면 괜찮은 중소기업이 많다"며 "취직하려는 학생들에게 중소기업에 대한 마인드를 바꿔주는 게 대학의 역할"이라고 강조했다.
[학력 인플레의 늪에 빠진 한국] 학력과잉에 대한 두 가지 견해 세계 최고 수준인 한국의 대학진학률(2006년 82.1%)을 바라보는 시각은 크게 두 가지로 나뉜다. 사회 전반의 학력 중시 풍조로 인해 과잉 학력이 일상화되면서 중소기업 인력난을 비롯한 일자리 불일치 등 사회적 비용을 불러온다는 부정적 시각이 적지 않다.
반면 고등교육에 대한 높은 열기는 궁극적으로 국가 성장 동력을 높이는 탄탄한 기반으로 작용한다는 긍정적인 분석도 많다. 일자리 불균형 등은 단기적으로 발생할 수 있는 문제일 뿐 길게 보면 경제 성장에 필수적인 고급 인력을 확보할 수 있기 때문이다.
도이치뱅크는 한 연구보고서에서 장기적으로 인적자본이 10% 향상되면 국민 1인당 국내총생산(GDP)이 9% 늘어나는 것으로 분석한 뒤 2020년 고성장 국가의 핵심 동력을 인적자본 확충으로 명시하며 한국을 대표 사례로 언급하기도 했다.
이병희 노동연구원 연구위원은 "많은 선진국 학자들은 한국의 고학력화 추세가 궁극적으로 사회 및 국가 발전에 어떤 영향을 끼칠 것인지 주목하고 있다"고 전했다. 그는 또 "다른 나라에는 없는 한국만이 가진 축복이라며 부러워하는 이들도 있다"고 말했다.
하지만 지금의 고학력화 추세를 미래 국가 성장 동력으로 활용하기 위해 넘어야 할 산이 많은 것도 사실이다. 과거 1960∼70년대에는 높은 교육열이 산업화를 이루는 중요한 토대가 된 게 분명하지만 1990년대 이후 보편화된 대학교육과 대졸자 양산이 똑같은 메커니즘에 따라 새로운 성장을 이끌 수 있을지 예단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당장 심각한 대졸 청년 실업난과 중소기업 인력난 등의 현안을 효율적으로 풀어야 한다. 전문가들은 고학력화 추세를 국가 성장의 동력으로 선순환시키기 위해서는 두 가지 요건이 선행돼야 한다고 지적하고 있다. 대학 교육의 질적 수준을 높이면서 양질의 일자리 수요 창출이 병행돼야 한다는 주문이다. 한국은 대학진학률만 세계 최고 수준일 뿐 대학 교육의 질은 국제 수준에 미달하고 배출 인력에 대한 수요자 만족도도 낮다.
전문 인력 양성을 위한 대학의 교육 기반도 취약하다. 인력 수요자인 기업들이 대졸 신입사원의 업무성취도를 평가(경총 조사)한 결과 만족도가 26%에 불과하다는 분석도 나와있다.
스위스 국제경영개발원(IMD)의 국가별 교육경쟁력 평가를 보면 한국의 순위는 2004년 44위,2005년 40위,2006년 42위,2007년 29위 등으로 개선 추세를 보인다지만 여전히 주요국 가운데 중하위권이다.
박천수 직업능력개발원 연구위원은 "대학이 스스로 대학다운 교육을 실시하고 대졸자에 걸맞은 인력을 양성하는 데서부터 문제를 풀어나가야 한다"고 말했다.
경제 및 산업구조 고도화를 통한 괜찮은 일자리 창출은 정부와 기업에 맡겨진 몫이다. 미국도 2차 세계대전 이후 태어난 베이비부머 세대가 대거 대학에 진학한 1970년대 과잉 학력 논쟁이 벌어졌다. 하지만 1980∼90년대 고부가가치 서비스업 일자리가 확대되면서 논쟁은 사그라들었고 오히려 이 인력들은 이후 경제 활성화의 토대가 됐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반면 한국은 제조업 일자리가 줄고 있는 가운데 이를 보완할 고부가가치 서비스산업 일자리 창출이 적어 청년 실업 문제를 증폭시키는 요인이 되고 있다는 지적이다. 고부가가치 서비스산업의 전문직 규모는 한국의 경우 19.2%로 줄잡아 40%에 달하는 영국 독일 등 선진국에 비해 훨씬 낮다.
최강식 연세대 교수(경제학)는 "고학력 청년층이 고부가가치 서비스산업 쪽에 흡수되도록 할 필요가 있다"며 "이를 위해서는 교육 법률 의료 등 전문 서비스산업을 획기적으로 개방하고 관련 산업을 키워야 한다"고 말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