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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지하 vs 황석영

세상보기---------/사람 사는 세상

by 자청비 2007. 8. 27. 16: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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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새롭게 봐야 할 미국’ 말하는 김지하 
미국을 덮어놓고 제국주의라 말할 때 지났다


나이 쉰이 넘도록 해외에 나가지 않아 '최후의 국내파'라는 별명을 얻었던 김지하(66) 시인이 최근 세계여행기를 출간했다. 미국.아시아.유럽 등지를 여행한 얘기다. 그는 국제관계에 있어 미국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나아가 "한국과 미국이 손잡고 신문명, 네오 르네상스를 창출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에 "김지하가 변했다"는 비난도 일었다. 경기도 일산 자택으로 찾아가 그의 생각을 들었다.

‘최후의 국내파’ 김지하(66) 시인이 최근 세계여행기를 출간했다. 제목은 『예감』. 미국·아시아·유럽 등지를 돌며 그가 감지한 인간과 신, 역사와 미래의 통찰과 예지를 묶어 냈다. 책 5분의 1이 미국 얘기다. 출간에 즈음해 연 기자회견에서도 그는 미국 얘기에 상당 부분을 할애했다. 그에겐 ‘콤플렉스의 극복’이었기 때문이다. <본지 8월 15일자 2면> 이를 두고 논란이 뜨거웠다. 심지어 “김지하가 맛 갔다”는 원색적 비난까지 나왔다. 사실 그가 이런 공격을 받은 것은 이번이 처음은 아니다. 1980년 출옥 후 생명운동에 몰두했을 때도, 젊은이들의 분신자살이 이어지던 91년 한 일간지에 ‘죽음의 굿판을 걷어치워라’ 칼럼을 기고했을 때도 그랬다. 일산 자택에서 만난 그가 처음 꺼낸 말도 요즘 자신에 대한 비판을 의식한 것이었다. 기자에게 대뜸 “미국 얘기한 것 가지고 인터넷에서 욕하고 있다던데, 그건 가라앉았나”라고 물었다. 이어 그의 생각을 찬찬히 풀어갔다. 말이 차분하고 나직했다. 그리고 길었다.


-왜 소위 ‘친미발언’을 했나.

“나를 친미파라고 하는 표현은 가당치 않다. 주변 정세 치고 한국처럼 괴상한 나라가 없다. 남북이 찢어진 데다 4강이 붙어 있으니. 반미가 살길이라고 생각하는 것도, 중국을 믿는 것도, 일본을 무조건 나쁜 놈들이라 보는 것도 잘못이다. 이 복잡한 작은 동네를 활용할 수 있어야 우리가 평화 속에서 제대로 먹고산다.”
 
-‘김지하가 변했다’는 말도 나온다.

“과거 난 반미라고 앞에 내세워 미국을 욕한 것은 아니다. 당시 학생운동·사회운동을 하던 이들의 일반적 담론은 제3세계론, 미국의 경제적 식민주의에 대한 비판이었다. 자주적인 민족경제 발전과 민주화와 관련해 미국에 비판적 태도를 갖는 건 당연한 상식이었다. 이후 제3세계론은 썰물처럼 빠져나갔고 이제 동아시아론이 중심이 됐다. 이 입장에서는 미국이란 존재가 재평가돼야 한다. 덮어놓고 제국주의·식민주의라고 말을 꺾어버릴 차원은 아니다.”

(그는 도리어 “올 초 반미·반FTA 난리하다가 평양과 워싱턴이 가까워지자 싹 죽지 않았나”라고 반문했다. 나아가 “한국과 미국이 손잡고 신문명, 네오 르네상스를 창출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왜 한국과 미국인가.

“미국은 과학, 한국은 사상에서 잠재력이 있다. 하드웨어와 소프트웨어의 만남이다. 과거의 문화유산을 여는 열쇠는 현재의 철학적 입장이다. 중국의 경우 유산은 풍부하지만 현재적 입장이 부족하다. 짝퉁이나 만들고 역사 왜곡이나 하고 있지 않나. 일본은 과거의 콘텐트도 부족하지만 침략국가라는 부채가 있다. 한국이 가능성 높다.”

-500여 쪽에 달하는 이번 책에서 말하고 싶었던 것은.

“지난 10년간 곳곳을 떠돌며 한국과 아시아 르네상스의 도래를 봤다. 특히 인상적이었던 곳은 중앙아시아 사마르칸트 해발 1500m 이상 고도의 산정호수에 형성된 고대도시의 시장이었다. 사원 앞 시장은 성(聖)과 속(俗)이 어우러진 현장이었다. 무엇보다 시장경제의 교환 가치를 인정하면서 평등과 복지를 위한 호혜의 가치를 살릴 길이 거기 있었다. 혼돈에 처한 인류문명의 활로를 그곳 신시(神市)에서 찾았다.”

-해외에 나가지 않아 ‘최후의 국내파’라는 별명을 얻었다. 이번 책에서 그 이유에 대해 “조국의 민주화를 기다려야 했고 집을 나가지 않아도 천하를 알 수 있다고 믿었다”라고 썼다.

“과거 민주화운동 하던 이가 해외에 가면 조국에 대한 질문을 받았다. 정부를 욕하거나 칭찬해야 했다. 밖에서 자기 조국에 대해 시비 거는 것은 내게 맞지 않았다. 안에서는 싸우더라도 밖에 나가서는 칭찬은 못할지언정 주의는 하는 게 성숙한 자의 태도라 봤다. 그러니 나갈 수가 없었다. 때가 오지 않았던 것이 문제지만 과거의 나는 우물 안 개구리였던 셈이다. 우리의 삶은 지구적인 삶이다. 바깥으로 나가 크게 보는 것은 당연하다.”

-우리 사회의 정신적 식민주의에 대한 오기로도 읽힌다.

“그렇다. 나는 덮어놓고 유럽 찬양하는 이들을 비판적으로 본다. 동양·동아시아·한국이 가진 근본적 가치를 깊이 생각하고 다른 나라들과의 창조적 결합을 생각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럼 지금은 우리가 정신적 식민주의를 벗어났나?

“글쎄, 그런 건 답하기 곤란하다. 예전보다는 많이 나아졌다. 요즘 젊은이들은 내 것이라 해서 다 좋은 것도, 남의 것이라 해서 다 나쁜 것도 아니라는 태도다. 상식적인 태도, 제정신이라 볼 수 있다. 중요한 것은 세계 보편화의 전제는 로컬라이즈, 즉 우리의 언어와 정신이 바탕에 깔려 있어야 한다는 점이다.”

-선생은 자주 변했다는 비판에 시달려왔다.

“감옥에서 나올 때부터 그랬다. 생명운동 할 때는 생명교 교주라고들 욕했다. 다 소용없고 아무 책임 없는 비판이다. 문학도, 사는 것도 다 표리(表裏)가 있다. 이면에 숨은 주제가 무엇인가 하는 문제가 중요하다. 내가 22세에 쓴 ‘황톳길’은 민중시의 시작이었다. 생명과 죽음 사이의 문제였다. 표면엔 저항, 이면엔 생명사상이 깔려 있었다. 감옥에서 나온 뒤부터 이 생명의 문제를 추구했다. 오랜 감옥살이로 내게는 부드러운 것, 생명이 결핍돼 있었다. 맨날 똑같은 소리 하면 사람은 전부 퇴보해 버린다. 변화는 결핍에서 온다. 결핍을 채우며 가는 게 진화이고 성장이다. 만족했으니 이제는 다른 거 하겠다며 변화하는 사람 많지 않다. 부족하기 때문에 변화하는 거다.”

-가장 큰 비판은 아무래도 91년 일간지에 기고한 ‘죽음의 굿판을 걷어치워라’ 글에 대한 것이었을텐데.

“내가 그때 비판하고 나서 젊은이들의 분신자살이 뚝 끊겼다. 김이 새 버린 것이다. 당시 이념적으로 정권을 뒤엎을 생각만 했지 생명에 대한 관점이 없었다. 몇 년 전 미국 컬럼비아대에서 강연을 마치자 운동권 출신이라는 한 여학생이 다가왔다. ‘그 칼럼을 증오했었는데, 공부하다 보니 선생 얘기가 이해 간다’고 했다. 그래서 내가 그랬다. ‘내 얘기를 알게 된 게 아니라 당신이 철이 든 것’이라고. ‘보소, 사람이 늙다리 된다고 다 매력 없는 건 아니다. 나이 들면서 깨닫고 그게 어른이 되는 거다’라고 말해줬다. 무슨 판단을 내릴 때는 늘 ‘사람 목숨이란 게 그리 간단치가 않은 거구나’ 하는 존중이 바탕이 돼야 한다.”

-선생은 예순 여섯이다. 늙는다는 건 어떤가.

“나는 나이 드는 것에 슬프지도, 뭔가 기대하지도 않는다. 그러나 혼자 간다는 생각은 자꾸 한다. 예전에는 감옥도 같이 가고 행동도 같이 했다. 그러나 이제는 외롭다. 외롭더라도 내 할 일 하고 내 갈 길을 간다. 전에는 남이 호응해 주지 않으면 굉장히 기분 나빴다. 외롭지만 남이 박수 안 쳐줘도 간다. 안 가면 어쩔텐가. 내가 다시 젊어질 수도 없고. 사람은 어떻게 살아가느냐가 중요하다. 늙어서 뭔가 판단한다는 것은, 어떻게 살아왔느냐에서 결론 난다.”

-선생은 젊은 시절 시대에 맞서 가장 젊은이답게 살았다. 요즘 젊은이들은 어떻게 보나.

“요즘 말로 아주 싸가지가 있다고 본다. 월드컵 때의 붉은 악마를 보자. 신명과 관용이 뭔지 온몸으로 보여줬다. 신명은 우리 고대 축제 때부터 있던 것이다. 젊은이들이 한 많은 그늘을 제치고 그 신명을 끌고 올라왔다. 가능성 있는 세대다. 우리 나이 사람들은 ‘너희들이 하고자 하는 게 이거 아니냐’라고 해석하고 방향을 잡아줘야 한다.”

-요즘 문화계가 학력 위조로 난리다. 선생은 서울대 미학과 출신이다.

“(씨익 웃으며) 솔직히 얘기해서 이놈의 사회는 그게(학벌이 좋은 게) 편해. 그게 문제지만. 이렇게 생각하면 어떨까. 국졸이나 고졸 학력으로 그만큼 사회에 영향을 미치고 그만큼 일한 건 칭찬할 일 아닌가.”

-타이틀 집착, 거짓말은 문제 아닌가.

“물론 그렇다. 하지만 그들도 고생이 있지 않았겠나. 파리 때려잡듯 다 잡으면 어떻게 하나. 무엇보다 스스로 그런 것에 콤플렉스를 안 가지는 게 중요하다.”

<중앙일보>
 





김지하는

“볼기가 확확 불이 나게 맞을 때는 맞더라도/내 별별 이상한 도둑이야길 하나 쓰겄다”

“숨죽여 흐느끼며/네 이름을 남몰래 쓴다/타는 목마름으로/타는 목마름으로/민주주의여 만세”

1970년대의 김지하는 ‘오적(五賊)’과 ‘타는 목마름으로’의 김지하였다. 각각 70년 『사상계』와 75년 『창작과 비평』을 통해 발표된 두 시는 그를 반(反)독재 투쟁의 ‘뜨거운 상징’으로 만들었다. 덕분에 김지하는 구속과 석방, 도피와 재구속을 반복해야 했다. 유신정권이 끝난 80년에야 형 집행정지로 풀려났고, 84년 사면 복권됐다.

80년대부터 김지하는 ‘생명사상’에 몰두했다. 동학사상에 독자적 해석을 더한 ‘율려사상’ ‘신인간운동’을 주창했다. 시에서도 격정과 의분의 외침 대신 축약과 절제, 관조가 두드러졌다. ‘저항시인’ 김지하의 이러한 변화는 ‘변절’ 논란을 불러일으켰다.

“죽음의 찬미를 중지하라. … 개인의 생명은 정권보다도 더 크다.”

91년 한 일간지에 기고한 ‘죽음의 굿판을 때려치워라’란 글은 그를 둘러싼 갑론을박의 정점이 됐다. 강경대군 치사사건 이래 열병처럼 번지던 운동권의 분신 투쟁을 나무란 이 글로 그는 완전히 ‘배신자’로 낙인 찍혔다. 민족문학작가회의에서 제명당하는 등 진보 지식인 그룹에서 소외됐다. 하지만 주위 반응이야 어떻든 김지하는 이후 오늘에 이르기까지 꾸준히 ‘생명의 길’을 걷고 있다.

▶본명 김영일 ▶1941년생 ▶66년 서울대 미학과 졸업 ▶75년 ‘제3세계의 노벨상’으로 불리는 로터스 특별상 수상 ▶81년 세계시인대회 ‘위대한 시인상’, 크라이스키 인권상 수상 ▶현재 한국예술종합학교·영남대·명지대 석좌교수

 

 

황석영 "그래도 글을 안쓰면 못 견디니까 계속 썼어"

<손숙의 아주 특별한 인터뷰>리얼리즘의 문학가, 소설가 황석영을 만나다

 


 
중국 만주 땅에서 태어났습니다. 해방 후 외가가 있는 평양으로 들어갔지만 좌우로 생각이 달랐던 가족은 북으로 남으로 헤어지게 되지요!

6.25 4.19 5.16 현대사의 격랑 속에 한 소년은 숱한 방황을 하게 됩니다. 자퇴에 퇴학에 가출에.. 그 속에서 만난 숱한 밑바닥 민중의 삶들은 글재주 있는 한 소년을 튼튼한 소설가로 성장시킵니다.

베트남 전쟁에 해병대 대원으로 참전한 이후 본격적으로 삼포가는 길, 객지, 장길산, 장산곶매 등의 대작을 만들어 냈습니다. 노동과 빈곤, 부와 분배, 분단의 문제를 깊이 파고들었습니다. 해남과 광주에 살면서 민족문화운동을 전개했습니다.

작가에게 현실은 늘 극복의 대상이었습니다. 반쪽의 조국을 바로 알기 위하여 89년 북한으로 들어갔습니다. 그리고 떠돈 유럽에서의 몇 년 동안의 망명, 5년여의 감옥생활, 끊임없이 그 고민들은 작품으로 세상에 나왔습니다.

현실에 깊이 뿌리박고 선 실천하는 지식인으로 한국 리얼리즘 문학을 개척해온 소설가 황석영 선생을 어제에 이어서 8월 17일 CBS 손 숙의 아주 특별한 인터뷰에서 만나보았습니다.

◇ 어머니, 자수성가한 아버지와 떠밀리듯 결혼해 
▶ 고향이 만주 장춘이라고 하셨는데 어린 시절 이야기 좀 해 주세요.

제가 43년생이니까 곧 해방이 되잖아요. 그때 기억은 별로 없어요.외가 쪽이 평양에서 근대화된 집안이에요. 외할아버지가 전홍걸 목사라고 감리교 목사이면서 평양의학전문학교도 만드셨어요. 계몽주의자셨죠.그래서 어머니뿐만 아니라 외삼촌과 이모가 다 일본유학을 다녀오셨는데 그 중에서 일부는 사회주의 운동에 빠지셔서 북에 남은 분들도 있었어요. 가족이 좌우로 갈렸다고 하셨는데 그런 식이죠. 어머니가 결혼하실 때 외할아버지가 신사참배 반대로 감옥에 계셨어요.아버지는 부모가 돌아가시고 누나 밑에서 혼자 중농 정도로 자라셨는데 매형이 땅도 다 팔아먹고 하니까 집을 나와서 상업전수학교를 나오셔서 서비스 공장 같은 걸 하셨는데 돈을 많이 버신 모양이에요. 일제 때 남양에서 고무가 나오니까 타이어를 찍어내는 공장을 하셔서 크게 돈을 벌어가지고 나이가 들어서 고국의 규수를 맞이하겠다고 매파를 앞세우고 평양에 나왔는데 외가가 기울어지니까 어머니가 성큼 결혼하신 거예요.

▶ 형제가 어떻게 되셨어요?

4남매입니다. 위로 누나가 둘, 밑의 동생 하나가 있어요. 맨 밑의 누이동생이 죽었으니까 따지고 보면 5남매죠. 그래서 평양으로 나왔는데 그때부터는 기억이 납니다. 모란봉 밑에 살았는데 을밀대 아침마다 올라가던 거며 그리고 모란봉 밑이 바로 전철 종점이었거든요. 종점에서 어머니를 기다리던 생각도 나요.나중에 북한 갔을 때 찾아갔었는데 그 부근에 큰 경기장이 생겼더라고요. 전쟁 때 동네자체가 없어지고 전쟁 전에 적산가옥들이, 일본식 집들이 모여 있었는데 모란봉 기슭에 한옥들이 빼곡히 들어차 있었어요. 그러다가 48년에 아버지가 남쪽에 직장이 생겨서 가족이 남으로 내려오게 됐죠. 전쟁 전에 3.8선을 넘어서 내려와서 영등포에 정착을 했습니다. 지금은 한전이지만 옛날에는 경성전기라고 했는데 아버지가 그곳에 들어가시고 어머니는 또 어머니대로 직장을 잡아서 다니셨어요. 어머니가 중학교 가사선생을 하시다가 그만두셨어요. 그래서 영등포에서 성장을 했죠.

◇ 일찌감치 틔운 꽃망울, 숱한 방황으로 퇴학까지

▶ 황석영 선생님은 어떤 학생이셨어요?

어렸을 때는 혼자 놀기를 좋아해서 책을 주로 많이 봤어요. 그때는 야시장에 가면 개인 서가에서 나온 책들을 책꽂이에 꽂아서 팔기도 하고 빌려주기도 했잖아요. 누나들이 이용하기 시작해서 나도 같이 가서 어른들이 보는 책을 초등학교 때 몇 군데씩 옮겨 다니면서 다 읽었어요. 이전에는 어머니가 대구 피난시절에 걸리버 여행기라든지 소공자를 사다주셨는데 읽다 보면 금방 끝나고 별로 재미가 없는 거예요. 그래서 어른들 보는 책을 가서 봤어요. 그래서 초등학교 1학년 때 처음 어른들이 보는 책을 본 게 철가면이라고 굉장히 두꺼운 책이었어요. 그 다음이 초등학교 3,4학년 때 몽테크리스토 백작, 폭풍의 언덕, 제인 에어 등인데 아마도 일본에서 중역된 책일 거예요. 그런 세계명작들을 초등학교 때 봤어요.그리고 학원이라는 잡지가 있었는데 그것도 초등학교 때부터 애독을 했고 그 전에 소년세계라는 게 있었어요. 새 벗도 있었고 다 피난시절에 보던 겁니다.

▶ 피난은 어디로 가셨어요?

대구로 갔어요. 대구에서 중앙초등학교를 1년 다니고 다시 영등포로 돌아왔죠. 그래서 영등포초등학교를 다니고 경복중학교를 들어갔어요. 평소에는 좀 놀다가 시험 때가 되면 벼락치기를 해요.(웃음) 그러면 성적이 올라가곤 했어요.

▶ 학교 때는 공부시간에 주로 소설책을 보셨어요?

그런 걸 봤죠. 그리고 초등학교 고학년이 되면서 톰소여처럼 슬슬 장난이 늘었어요. 여기 목동에 옛날에 오목네가 있었는데 여기는 물론 먼데까지 마포강변에서부터 관악산까지 돌아다녔어요. 땡볕에 가도 가도 끝이 없어서 새까맣게 타도록 걸어다녔죠. 런닝 차림에 남의 밭에서 생옥수수 슬쩍 해서 먹기도 했어요. 이 방송국 근처가 전부 하천부지였어요. 예전에 중국 사람들이 중국음식점에 채소를 대는데 채소밭이 많았어요. 그래서 이 근처에 양배추니 뭐니 심었던 기억이 나요.(웃음)

▶ 고등학교 때부터 문학 쪽에 관심을 가지셨어요?

초등학교 때 백일장을 나가서 뭘 썼는데 그게 최우수상을 받아서 신문에도 났어요. 사회로부터 처음으로 꼬마가 칭찬을 받았잖아요. 나는 작가가 이렇게 고생스러운 거라는 걸 알았으면 안 했을 텐데, 뭔지도 모르고 이 다음에 뭐가 될래? 물으면 작가라고 대답했어요. 저는 중, 고등학교 때 문예반에 들어간 적이 없어요. 여학생은 괜찮은데 남학교 같은 경우에 문예반이나 꽃 가꾸는 원예반은 여자애들이 하는 건데 저걸 사내자식들이 왜 하느냐고 주위에서 그러니까 중학교 때는 수영반에서 수구를 했어요.그리고 고등학교 때는 산악반에 들어갔고요. 거기서 주먹도 쓰면서 싸움 많이 했죠.(웃음)

▶ 아버님은 언제 돌아가셨어요?

아버님은 전쟁 직후에 돌아가셨어요. 고생을 들입다 하고 사선을 넘고 돌아가신 거예요. 어머니가 별의별 장사를 다 하고 고생 많이 하셨죠. 그리고 누나들은 둘 다 경기여고를 다녔는데 고학년이 되니까 학교 가서 늦게 오기도 하고, 저는 동생을 데리고 밥도 먹기도 하고 자취도 했어요.

그러면 어머니가 노트를 찢어서, 제 아명이 수남이인데 ‘수남아, 밥은 밥솥에 덥혀놓았고 국은 곤로에 데워먹어라.’ 써 넣고 가시면 동생이랑 같이 먹었죠. 그러면서 보냈는데 고등학교 가서는 공부도 잘 안 하고 싸움패에 들어갔어요. 등산반이라는 게 이탈하는 코스가 되거든요. 왜냐하면 학교에 있다가 우리끼리, 소년들끼리 모이면 술, 담배도 하게 되고 껄렁껄렁해지면서 불량소년이 되어 버린 거죠. 그러다가 나중에 문학하는 친구들과 어울리게 되었어요. 제가 고등학교 때 싸움을 하는 바람에 퇴학을 맞았는데 학교를 3군데 정도 돌아다녔어요. 그때 어머니가 많이 속상해 하셨는데 저는 지금도 어머니에 대한 회한이 많습니다.

퇴학당했을 때 느낌이 어땠는가 하면 화장실에 서서 창문으로 내다보면 바로 앞에 길이 보이거든요. 아침에 여학생들이 칼라 내밀고 입김을 하얗게 토해내면서 학교 가는 모습을 볼 때마다 내가 저기에서 쫓겨났구나, 그때부터 국외자에 대한 게 있었나 봐요. 작가로서 특별한 경험을 한 거죠.

◇ 어머니가 눈물을 쏟아내며...“집에 가자”

▶ 퇴학당하신 후로는 뭘 하셨어요?

집에서 책도 보고 집에서 가출해서 혼자서 남도를 돌아다녔어요. 부산 칠북에 장춘사인가 하는 절이 진주 외곽에 있어요. 거기서 어떤 스님을 만났는데 그분이 좋게 보고 그때 동래 범어사에 하동산 스님이 조실스님으로 있고 원주 스님이 불광이라는 잡지도 하셨는데 지금은 두 분 다 돌아가셨어요. 고광덕 스님 앞으로 편지를 써서 제가 갔어요. 갔더니 조실 스님한테 데리고 갔는데 그게 구두시험처럼 면접시키는 거예요. 그때 출가를 하려고 했죠.

스님이 “너, 여기 있으면 얼마나 있을끼고?” 그러시더니 더 이상 말씀을 안 하세요. 그게 한 바퀴 돌리는 건데 광덕 스님이 뭐라고 하시더냐고 물으시기에 얼마나 있을 거냐고 하셨다고, 갈 데 없어서 왔는데 있을 만큼 있겠다고 했어요. 자기를 찾으러 왔다는 둥 철학적인 건 딱 질색이거든요. 행자 애들은 내가 가니까, 내 또래 애들이 밥도 갖다 주는데 자세는 아주 겸손하지만 시건방지게 자기를 찾으러 왔냐고 물어봐요. 쑥스러워서 먹고 살길이 없어서 여기 왔다고 이야기를 했죠.

그랬더니 그 이튿날 나가라고 그러더라고요. 아무도 들여다보지도 않고요. 그런데 문 앞에 있다가 웬 스님이 지나가면 따라가 보라고 해서 문 앞에 서있었더니 스님 한 분이 지나가요. 스님 되려고 왔는데 저 좀 데려가 달라고 했더니 따라오라고 해서 따라갔어요. 첫 번째는 역에다가 저를 떼어놓고 도망가 버리고 그 이튿날 기다렸더니 저 어디 울산가는 쪽에 바닷가 오막살이 절에 갔는데 대웅전도 콧구멍만하고 흙방이 옆에 붙어있어요. 청소하라고 해서 먼지 때가 얼마나 꼈는지 다 닦아내고 밥 한술 얻어먹고 자는데 새벽 3시에 와서 막 발로 차더라고요. 이게 중 된다고 온 놈이 시간이 몇 시인데 아직도 자느냐고 당장 나가라고 보따리 채 집어던지더라고요. 또 쫓겨나고, 그렇게 여러 군데를 돌린 다음에 다시 범어사로 가는 거예요. 가서 기다리기를 몇 차례 한 다음에 겨우 배치 받은 곳이 금강원이라고, 지금 유원지가 되어 있는 곳이에요.

선원이 있었는데 그곳 행자로 들어가서 1년 동안 지냈어요. 밥하고 허드렛일하고 심부름하고. 그러다가 스님들 심부름을 나가면 새끼 중이 할 수 있는 일이 딱 2가지가 있어요. 하나는 자장면을 사 먹고 또 하나는 영화구경을 하는 거예요. 이건 신부님도 그렇고 군대 가서 휴가 나온 군인들도 그렇고 코스가 그겁니다. 그래서 역시 자장면 한 그릇 먹고 시간이 있으니까 영화구경을 갔는데 지금도 잊어버리지 않아요. 제목이 ‘오케스트라의 소녀’에요. 그걸 보고 나오는데 누가 바로 옆에 와서 날 잡아요. 보니까 큰 누나 매형의 친구에요. 서울대학교 나오신 분인데 동기동창이라서 우리 집에도 자주 놀러왔던 분이에요. 날 보더니 네가 여기 웬일이냐고, 그러잖아도 어머니가 눈물로 세월을 보내고 있는데, 같이 가자고 안 놔주는 거예요.

그때 계는 아직 안 받았지만 이미 승복입고 머리도 깎아서 모습은 스님의 모습이죠. 가자는 걸 뿌리치고 도망갔어요. 어머니가 아시고 그 길로 부산 근처 일대의 절을 다 뒤졌어요. 스님이 되려면 어디를 가느냐고 물으니까 동래의 범어사를 가라고 누가 시키더래요. 그래서 찾아오셨는데 광덕 스님을 만난 거예요. 처음에는 모른다고 그랬다가 어머니가 며칠 동안을 매일 삼문 앞에 오셔서 기다리고 있으니까, 사실 그런 사람이 여기에 있지만 왜 불가에 들어온 사람을 찾느냐고 물어보셨겠죠.

내가 홀어머니인데 저거 하나 바라보고 이생을 살고 있는데 예수님이나 부처님이나 불쌍한 사람을 보고 가련하게 여기는 건 똑같지 않느냐, 나는 기독교인이지만 그쪽도 마음은 같은 거 같은데 우리 아들이 가출해서 여기까지 온 것 같으니 만나게 해달라고 하셨어요.그랬더니 그러면 어머니가 만나보시고 아들이 우리 쪽을 선택해서 다시 산문 안을 들어오면 우리 사람이니까 찾지 말고, 어머니를 따라가면 어머니 인연이니까 우리도 더 이상 말 안 하겠다, 이렇게 된 거예요.

나는 그런 속도 모르고 아침에 일어나서 마당을 쓸고 있는데 동자승이 오더니 산문 앞에 나가보라고 해요. 누가 왔다고, 올 사람이 어디 있나? 금강원에서 죽 내려오면 양쪽에 나무들이 있고 그 사이로 길이 있는데 큰 길로 나가면 절 앞에 기념품 가게가 있어요. 보니까 어디서 많이 본 여자가 하나 서 있어요.(웃음) 가까이 보니까 우리 어머니에요. 어머니가 붙들더니 눈물을 쏟아내세요. 집에 가자고 하셔서 예, 갑시다 하고 따라 나서서 그 길로 그냥 돌아서 나왔죠.부산 역 앞에 국제시장이 있는데 사복을 사고 승복을 벗어서 보따리에 싸고 모자 하나 쓰고 들어가서 어머니가 사주시는 불고기를 먹었는데 대단히 맛있었다는 기억이 지금도 있어요.(웃음)

◇ 채울 수 없는 허기...자살미수 그리고 베트남


▶ 지금 자녀가 어떻게 되세요?

3남매입니다. 아들 둘에 딸 하나에요.

▶ 만약에 그 아들이 그랬다면 어떠셨을 것 같아요?

다행이 우리 아들은 저 같지 않고 정서가 안정되어 있어요. 측근에 있는 사람들이 저보고 청룡열차라고 해요.(웃음) 우리 어머니는 대단한 분이세요. 제가 자살 미수도 3,4번 했잖아요. 그때마다 살려놓고.그 다음에 베트남 가려고 특수교육대 앞에 차량을 타고 훈련을 받으러 가는데 거기에 민간인이 올 곳이 아닌데 삼거리에 어머니가 와서 기다리고 계세요. 베트남 간다고 어머니께 말씀을 안 드렸거든요.

▶ 베트남에는 왜 가시려고 하셨어요?

군대 신체검사에 3번을 안 갔어요. 다른 이유가 있어서가 아니라 게을러서 안 갔더니 파출소에서 잡으러 오더라고요. 그 달에 나가는 게 뭐가 있나 봤더니 해병대가 있어서 거기에 자원입대해서 간 거예요. 그때 미스코리아 심사하듯이 3군데를 사람을 세워놓고 뽑아요. 학력도 좋고 풍채가 좋으면 의장대와 군악대, 헌병대를 뽑는 거예요. 이게 3대 골병대라고 하는데 왜냐하면 기합이 세거든요. 그래서 떨어진 곳이 헌병대에요.

헌병학교 가서 교육받고 배치 받은 곳이 진해 헌병대인데 거기 가서 교통정리하고 그랬어요. 그러다가 진해 사령부에 근무를 했는데 그때는 가난할 때니까 파견대장 했던 사람이 직업군인이니까 중사쯤 됐어요. 그 사람이 기름을 빼서 팔아요. 나는 졸병이니까 시키는 대로 통과시켰죠. 그런데 그게 걸렸어요. 이 사람이 와서 나는 여기 말뚝이고 처자식도 있는데 어떡하냐, 너는 졸병이니까 졸았다고 해라. 그래서 졸았다고 했죠.결국 영창을 살다가 파병하는데 특수교육대에 가서 교육받고 그대로 베트남으로 갔어요.포항에 있는 특수교육대 앞에 어머니가 서 계시더라고요. 영화장면처럼 차가 달리는데 좇아오시는 거예요. 난 정말 어머니 이야기 나오면 할 말이 없습니다.

▶ 그 당시에 뭐가 그렇게 황석영 선생님을 자살로까지 가게 했을까요?

뭘 채울 수 없는 허기라고 해야 할지, 도달할 수 없는 게 있었던 것 같아요. 여러 가지 갈등이 있었어요. 그런 가운데에서도 글을 계속 썼죠. 1년에 몇 편씩은 썼어요. 쓰지 않으면 못 견디니까요.

▶ 그때가 데뷔를 하셨던 때였나요?

그렇죠. 고등학교 2학년 때 사상계 신인상을 받았으니까요. 이 이야기가 그러고 나서의 일입니다. 고등학교 때 가출도 당선 이후에 한 일들입니다.그리고 그 후에 다녀와서도 대학 재학 시절에 6.3사태가 났을 때도 노량진 경찰서에 집회및 시위에 관한 법률 위반으로 붙잡혀 있었는데 그때만 해도 징역을 보내지 않고 구류를 살렸어요. 경찰서 유치장 구류로 사는데 제 2한강교 교각공사 하러 나왔다가 술 먹고 십장을 폭행한 노동자가 하나 잡혀왔는데 그 사람이 해병대 출신이더라고요. 갈매기 3개를 대위로 바꿔서 별명을 붙였는데 본인도 대위래요. 「삼포가는 길」과 「객지」의 모델이 되는 사람을 만났어요.

그래서 그 사람과 남도를 떠돌았어요. 이때가 대학생이니까 군대 가기 전이에요.이를 테면 삼포가는 길 같은 경우는 우리가 신탄진 연초장 기초공사할 때 한 방에 있다가 비도 오고 구질고 임금도 밀리고 하니까 튀었어요. 조치원에서 청주까지 가는 길이 60여리가 되는데 이 길이 옛날에 참 아름답던 길이에요. 옆에 강 비슷한 개울이 흐르는 길을 오후부터 밤새도록 걸었어요. 그때 비가 왔는데 소설에는 눈으로 바꿨어요.

▶ 재미있는 게, 사람들이 삼포가 어디에 있는 곳이냐고 물어보죠.

삼포는 지상에 없는 장소입니다. 사실 고향이라는 게 지상에 없죠. 그 전에 갔던 공간은 이미 아니니까요.

◇ 불구덩이 속에 들어간 원고, 결국엔 인정해 주셨어

▶ 어머니가 소설 쓰시는 것을 안 좋아하셨다고요.

밥 못 먹을까봐. 의사라든지 실용적인 직업을 택해라. 외삼촌이 용렬한 사람이지만 외삼촌을 가리키면서 난리 통에 살아남을 수 있었던 것도 의술을 갖고 있었기 때문이지, 글 쓰고 소설 쓰면 룸펜밖에 더 되느냐고요.(웃음)내가 원고를 써서 습작을 하면 불구덩이에 집어넣으셨던 적이 많아요. 그런데 그 뒤에 내가 학원문학상도 받고 사상계 신인상도 받고 할 때마다 그래도 인정을 안 하시더니 다 연로하셔서 광주에서 마지막 몇 해를 모시고 살았는데, 그때 장길산을 쓸 때였는데 농촌경험이 없으니까 호남을 택해서 내려가서 있었어요.아침에 신문이 오면 장길산을 연재한 연재물을 돋보기를 쓰고 오리고 계세요. 스크랩해서 붙이셨어요. 그걸 보면서 이제는 어머니가 생업으로 인정을 하셨구나 생각했죠.

▶ 어머니는 언제 돌아가셨어요?

80년 광주항쟁이 끝나고 그 해 겨울에 돌아가셨어요. 제가 감옥 가는 걸 안 보시고 가셔서 다행입니다.(웃음)그런데 광주민주화 항쟁이 초창기에 터질 때 제가 서울로 도피를 했는데 합동수사본부에서 잡으러 왔거든요. 신발 신고 7,8명이 마루에 들어오니까 어머니가 나와서 그 사람들을 밖으로 내쫓는다고 “이 놈들아, 신발 벗어라.” 그러셨다고 합니다. 어머니는 이북 평양 분이시기 때문에 아주 대단하셨거든요.

▶ 황석영 선생님의 첫 작품이 뭐였어요?

세상에 처음 나온 게 「입석부근」이고 그 다음에 나온 게 「탑」이라는 소설이었어요.그리고 중간 중간 썼던 게 재고품이 되었다가 데뷔한 뒤에 사이사이에 나오게 되죠.

◇ 넌 ‘세수 안 한 사슴’이고 난‘억울한 사슴’이야

▶ 황석영이라는 이름을 쓰신 건 언제부터인가요?

「탑」부터였어요. 본 이름이 황수영인데 그건 여자이름이잖아요. 빼어날 수, 꽃뿌리 영인데 완전히 여자이름이라서 놀림이 되었어요. 동생이름은 수웅이고요.제 원래 본명은 수남이에요. 빼어날 수, 사내 남, 이게 일본이름이잖아요. 옛날에 여자들한테는 ‘자’를 붙이고 남자들 이름은 ‘웅’, ‘남’ 등 일본식 이름이 많아요. 그대로 호적에 올렸다가 남으로 내려와서 다시 올리면서 수영으로 바꿨다고 그래요. 아버님의 소박한 생각으로는 수영이와 수웅이를 합치면 영웅이 되니까 그러신 것 같아요. 하지만 수영은 여자이름이에요. 그래서 황석영이라는 이름을 제가 지었어요. 수영이보다는 석영이가 발음이 더 좋고 한자도 예쁘고 해서 제가 지었죠.

▶ 황석영 선생님은 정말 끼가 많으세요. 배우로 무대에 서시겠다는 생각은 안 해 보셨어요?

옛날에는 많이 그랬죠. 연극도 많이 했어요.고등학교 때 이순재 선배가 학교에 와서 지도도 하고, 저도 연극반에 가서 활동도 했어요. 그랬는데 친구들 대부분이 글을 쓰다가 대학교를 가더니 연극반에 들어가서 활동을 하더라고요. 70년대 중반을 넘어서면서 문화운동이라는 개념이 생겨요. 민주화운동을 하는데 문학 쪽에서 할 일이 많다고. 김지하 형과 같이 처음 그걸 개척해서 마당극이니 현장극이니 이런 것들을 하게 되죠.

처음에 같이 하다가 김지하 형이 민청학련 사건 이후로 장기간 구속되면서 모여 있던 후배나 친구들한테 후사를 석영이한테 맡긴다고 해서 맡게 된 거예요. 지금은 다 50이 넘었는데 그 세대가 저하고 같이 일을 했죠. 당시에 대학교에서 문화 1세대에요. 화려한 휴가를 제작했던 유인택씨, 이 사람이 2세대정도 되죠. 장선우 감독, 탈하는 부산대학교 최희완 교수, 임진택, 노래하는 김민기 등등 이 사람들이 1세대에요.

▶ 황석영 선생님의 말솜씨를 두고 사람들은 ‘황구라’라고 하는데, 말씀 잘 하시는 건 어머니 쪽인가요, 아니면 아버님 쪽인가요?

경복중학교에 갔더니 애들이 나보다 더 똑똑하고 공부도 잘 하는 것 같아요. 주목을 끌 일을 해야 하는데 재미있는 이야기를 하면 주목을 끌 수 있겠구나 싶어서 곰곰이 생각한 게, 아이들 말로 히트 칠 문구를 생각해 낸다든가 교실 등교를 해서 문을 열 때 아이들이 와르르 웃어야 직성이 풀렸어요. 지금은 손녀도 생기고 하니까 인품이 잡혀서 광대의 비극적 아우라 하고는 거리가 있거든요.(웃음)

▶ 지금은 김훈 선생님한테 자리를 좀 뺏기시는 것 같아요.

김훈은 피리 부는 소년이거든요. 그 친구는 보면 늘 문어체로 말을 해요. ‘구르는 돌에는 이끼가 끼지 않는다’ 꼭 옛날 일기장에 보면 오늘의 명언 같은 게 나오잖아요. 그런 식으로 보통 때 말을 해요. 너는 말씨 좀 고치라고, 평소에도 문어체로 말을 하냐고 그래요.요즘 자기의 모토는 ‘단정하고 경건한 노인네가 되자.’래요. 단정함은 자세를 이야기하고 경건은 마음가짐, 노인네는 연륜을 표한대요. 그래서 제가 그랬죠. “야, 이 사람아.”(웃음)

▶ 예전에는 여성 팬들도 독점하고 계셨는데요.

아니에요. 제 별명이 스스로 ‘억울한 사슴’이에요. 나는 사슴인데 여성분들은 저를 야수로 알아요. 그래서 억울한 사슴이에요. 우리 후배 중에 김훈이 질투하는 상대가 있는데 김훈보다 조금 아래에요. 시인 김사인이라고 있는데 본인이 사슴인 줄 알아요. 오빠부대가 많았는데 지금도 있을 거예요. 노래를 시키면 아주 나직하게 천천히 동요를 정감 있게 부르니까, 늘 보면 쓸쓸하고 먹여주고 싶고 그래요. 그래서 내가 괘심해서 별명을 지어줬어요. 너는 세수 안 한 사슴이라고, 그냥 사슴이라고 하면 억울하잖아요. 그리고 나는 억울한 사슴이라고 하고.(웃음)

그런데 김훈 이 친구는 옛날부터 서울내기 버릇이 있어요. 마초와 같은 위압적 자세를 취하면서 말을 해요. 예를 들어 여자가 좀 터진 옷을 입으면 “어 거, 꿰매 입어라.” 이런다든지.(웃음) 그래도 내가 이 친구를 보고 참 좋다 싶은 건 올해 환갑인데도 청년 같아요. 지금 저 나이에 잊혀지는 사람들이 많은데 참 다행한 일이다 싶어요. 거의 그 나이 또래들이 물러앉아서 동사무소에서 “여러분, 오늘은 노인들을 위해서 설렁탕을 준비했으니 모두 한 분도 빠짐없이 모여주세요.” 그런 방송을 동네에서 듣는다는 거 아닙니까.그런데도 불구하고 소설을 쓰는 거 보면 참 다행이다 싶은데 요즘 말을 안 들어요. 그래서 몇 번 혼을 냈는데 그러고 나니까 사방에 다니면서 형님 다음에 자기라고 그런대요.(웃음)

◇ 지금도 부엌 쟁탈전, 요리는 수준급

▶ 황석영 선생님 하면 음식 이야기를 빼놓을 수가 없는데 요즘에는 뭘 좋아하세요?

날이 갈수록 특별히 맛있는 것이 없네요. 그리고 다 맛있어요.옛날 음식이 그렇게 맛있어요. 지난번에 후배인 윤한봉이 죽었다고 그래서 나와는 형제 같은 친구인데 파리에 있는 동안 부음을 들어서 미처 오지 못했다가 이번에 새삼스럽게 망월동에 가느라고 잠시 들렀었어요. 상원이하고 노동운동을 하던 여학생 박기순하고 영혼결혼을 시키면서 님을 위한 행진곡을 만들었는데, 박기순의 오빠가 윤한봉의 누이동생과 결혼해서 사는데 그 친구는 건설회사도 하고 성공했어요. 그런데 내가 왔다고 하니까 떡 벌어진 한정식 집에 갔어요. 가정식으로 드시겠느냐고 해서 그러자고 해서 그때 옛날식 굴비를 지져놓은 걸 처음 봤어요.그걸 또 녹차 얼음물에 밥을 말고 굴비 지진 것하고, 적당히 땅에다 묻어놓은 열무김치 삭인 거 조금하고 묵은지를 먹었는데 옛날에 먹던 음식들이 얼마나 맛있던지 한 그릇 반을 먹었어요. 과식하면 속이 답답한데 어떻게 맛있게 먹었는지 두 시간 있으니까 금방 꺼지더라고요. 속이 참 편했어요. 요새 그런 음식이 좋습니다.갈치 새끼처럼 생긴 갈치포를 조린 걸 물에 말아서 먹는 음식들하고 짭짤한 마늘지에다 된장에 재워놓았지만 깨끗한 깻잎, 얼마나 맛있습니까.

▶ 요즘도 직접 음식을 하시나요?

그럼요. 부엌 쟁탈전을 매일 벌이죠. 집 사람은 부엌 더럽힌다고 뒷정리도 깨끗이 못한다고 하는데 깨끗이 한다고 하는데 부엌 권리를 안 내어주네요. 런던이나 파리에 있을 때도 직접 만들어 먹었어요. 국수는 종류별로 한국 것부터 파스타까지 다 해요.

▶ 북한에 가셨을 때 가장 맛있는 음식이 뭐였어요? 언 감자국수라고 있다고요?

문익환 목사님과 몇 번 본 다음에 나 혼자 김일성 주석과 점심을 몇 번 같이 했는데 국수가 보니까 새까맣더라고요. 여기에도 칡으로 냉면을 만들잖아요. 북에서는 그걸 언감자 국수라고 하는데, 그 분 말씀으로는 일제시대 때 그 지역 사람들이 독립군들에게 식량을 직접 전달을 못 하니까 산등성이에 감자를 묻어놓고 표시를 해 뒀대요. 그러면 소위 보급투쟁을 나가서 캐 오는데 언 땅 속에 있었으니까 감자가 다 얼어있을 거잖아요. 먹는 방법을 몰랐는데 강원도 화전민 출신의 병사가 언 감자를 녹말을 내려서 국수를 뽑는 방법을 알고 있더래요. 그걸 뽑아서 눈 녹인 물에 말아서 먹었다고 하더라고요.

당시에 점심에 국수를 뽑아서 콩국에 말고 검은 깨를 뿌리고 그 위에 함경도 들갓을 얹는데 북쪽지방의 갓김치는 젓갈을 안 넣고 고추, 마늘 등의 양념만 해서 맛이 아주 담백하고 깨끗했어요. 들갓이 작은데 그걸 콩국수 위에 놓는데 콩국은 하얗고 국수는 까맣잖아요. 또 검은 깨를 뿌리고 들갓은 초록이고. 그걸 아주 맛있게 먹는데 그런 이야기를 하더라고요. 독일작가 루이제 린저와 늘그막에 두 분이 친하게 지냈던 모양인데, 감자를 주식으로 하는 독일에서 오셨으니까 얼린 감자로 요리하는 걸 본 적이 있는가? 물었더니 처음이라고 하더래요.언감자 국수가 굉장히 찰기가 있어요. 우리는 그게 아릴 것 같은데 찰기가 있고 맛있습니다.

▶ 노티는 뭔가요?

노티는 약과의 일종인데 약과보다는 훨씬 부드럽고 기장쌀이라고 남쪽에는 없는데 북쪽에는 조하고는 조금 다른데 조하고 그 사이에 뭐가 있어요. 그 기장쌀을 가루로 만들어서 엿기름에 넣고 섞어서 잰 것을 적당히 발효시킨 다음에 참기름에 노릿하게 지져요. 이것을 꿀에 잰 과자 같은 간식이에요. 그러고 항아리에 재어놓고 두고두고 먹는 거죠. 이건 평안도 음식이에요. 어디서 들으니까 개성에서도 노티라는 이름으로 있다고 하더라고요.

◇ 리얼리즘의 최고봉, ‘소설은 내가 살아가는 이유’

▶ 바리데기 소설도 나왔고, 다음 계획은 어떤 게 있으세요?

9월 20일까지 여러 일정을 국내에서 소화한 다음에 돌아가서 청산하고 짐 싸가지고 나와야죠. 10월 말이면 완전히 귀국을 합니다.

▶ 시골에 가서 사시겠다는 말도 들었어요.

그래서 몇 군데 보고 있어요. 시골에 정착을 해서 들어앉아서 작품 쓸 일밖에 더 있겠어요. 작품의 소재가 아직도 많이 남아있어요. 계획한 것의 절반도 못 썼어요.(웃음)

▶ 작품 쓰실 때 특별한 버릇 같은 게 있으세요?

제일 나쁜 악습이 담배를 많이 피우고 밤을 새운다는 건데 담배피우는 걸 중지하면 한편으로는 작품이 제대로 나올까 하는 염려도 있지만, 담배를 끊고 작품을 시작했다는 새로운 경지로 들어가지 않을까 해서 담배를 끊고 새로운 작품을 시작하려고 합니다.

▶ 글 쓰는 것 외에 좋아하는 취미는 뭔가요?

젊은 때는 다른 게 있었겠지만 요즘은 글 쓰는 시간 이외에 산책하는 것이 참 좋습니다. 파리에서도 집 근처 숲까지 걸으면 15분 정도 걸리는데, 가서 2시간 정도 숲 속을 걸어 다녔거든요.

<CBS 노컷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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