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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서류 같은 책, 박쥐 같은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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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자청비 2007. 12. 1. 1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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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계에서 글쓰기
양서류 같은 책, 박쥐 같은 글

 
글쓰기의 망설임과 두려움 그리고 괴로움은, 의미의 발견과 재발견 그리고 소통을 통해 삶의 즐거움과 기쁨과 보람이 될 수 있다. 이 모든 과정이 글쓰기의 쾌락을 이룬다. 
 
글쓰기에 대한 글을 쓴다는 건 이상한 일이다. 우선 글쓰기를 업으로 하는 사람도 평상시 잘 하지 않는 일이라는 점에서 그렇다. 더구나 ‘글쓰기의 쾌락’이라니, 나를 비롯해 글쓰기의 고통을 잘 아는 사람들은 온몸에 전율을 느낄 일이다. 그런데도 나는 이 수상한 제목 아래 글을 쓰고 있다.

 

이 순간, 고통이 있어야 쾌락이 뭔지 만끽할 수 있다는 상투적인 설명이 얼른 떠오른다. 하지만 그것만은 아닌 것 같다. 내게 글쓰기가 즐거움일 수 있는 것은, 무엇보다도 그것이 세상을 다양하게 사는 방법 가운데 하나이기 때문일 게다. 좀더 구체적으로는 인간 문화를 다각적으로 의미 있게 향유하는 데 적격이기 때문일 것이다.

 

방구석에 웅크리고 앉아 글을 써도, 세상 한가운데 있다는 걸 느끼는 것은 그리 작은 행복이 아니다. 글쓰기라는 노동은 세상을 가로 세로로 지르며 활보하게 해 준다. 그래서 글쓰기를 성찰하는 눈도 다각적이어야 한다. 다음의 각 항목은 글쓰기를 여러 차원에서 조명한 것이며, 동시에 그것은 세상을 관찰하는 다양한 문화적 코드이기도 하다.

 

형식 : 학술서에서 칼럼까지

 

글의 형식이라고 하면 흔히 문학의 여러 장르를 떠올릴지 모른다. 시, 소설, 수필, 희곡 등이 그것이다. 그런데 나는 철학을 전공한 인문학자다. 그러면 아마 학술 논문이나 두꺼운 사상서를 떠올릴 것이다. 물론 논문도 썼고 철학서도 썼다. 그러나 몇 년 전부터 글쓰기에 관한 한 내게서 떠나지 않는 물음은 ‘오늘날 이 땅에서 인문학자의 글쓰기란 무엇인가’ 하는 것이다.

 

그것은 학문적 바탕 위에서 다양한 ‘사람들에게 말걸기’를 시도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이런 말걸기가 쉽지 않다. 인문학적 글쓰기는 문학 작품이 가진 이점을 갖고 있지 못하기 때문이다. 시처럼 감동적이기 어렵고, 소설처럼 이야기 구조를 지닌 경우는 매우 드물다. 특히 이야기 아닌 서술로서 독자에게 매력적이기를 바라는 것은 과욕처럼 보인다.

 

더구나 문화 향유의 폭이 넓어진 현대 사회에서 이른바 대중과의 관계는 ‘다가감’만으로 불충분하고, 동시에 ‘끌어당김’을 실현해야 한다. 그렇기 때문에 대중적 글쓰기라는 융통성에 학문적 철저함을 동반한다. 인문학적 글쓰기의 성공 여부는 이 두 가지 요소의 균형에 달려 있다.

 

그래서 나는 ‘양서류 같은 책’을 시도하기도 했고, ‘박쥐 같은 글’을 쓰려고 항상 노력한다. 그러다 보면 “딱히 어느 지점에 서 있다고 할 수 없다”는 것이 내 글에 대한 평이기도 하다. 즉 경계선 위에 서 있다는 말이다. 어디에도 속하지 않는다는 것은 큰 ‘리스크’다. 기존의 범주에 속하는 것이 일단 편하기 때문이다. 경계의 이편인지 저편인지 불분명한 존재는 어느 편으로부터도 배척당하기 십상이다.

 

하지만 박쥐가 날짐승과 길짐승 사이의 ‘인터페이스’를 형성하는 것이라면, 또한 그 인터페이스 자체가 나름대로의 독립적 세계라면 날짐승과 길짐승의 세계가 부수적인 것이 된다. 그렇다. 우리 시대의 인문학적 글쓰기는 남들이 보지 못하는 세계를 독자들에게 되돌려주는 것이다. 그것은 학술성과 대중성, 무거움과 가벼움, 깊이와 피상, 의연함과 신선함 사이의 인터페이스를 형성해주면서 문화 향유의 질을 높이고 폭을 넓히는 일이다.

 

이상은 글의 새로운 형식을 개발하기 위한 방법이다. 그러면서도 한편으로는 사람들에게 말걸기 좋은 기존의 글 형식들을 섭렵하기도 한다. 칼럼, 평론, 서평, 수필 등이 그것이다. 이에 덧붙인다면 ‘북에세이’를 들겠다. 나는 서평을 쓰지만 별로 즐기는 편이 아니다. 작가는 한 권의 책을 쓰기 위해서 피말리는 고통을 감수한다는 것을 잘 알기 때문이다. 그 노고에 비판의 칼날을 갖다 대기가 송구스럽다. 그러므로 내 나름대로 서평과 구분하여 북에세이라는 형식의 글을 신문에 연재하기도 했다. 책에 대해 평을 하기보다는 그 책이 갖고 있는 다양한 의미들을 부담 없이 풀어내 보는 것이다.

 

칼럼을 쓴다면 얼른 일간지나 시사주간지에 기고하는 것을 생각하기 쉽다. 물론 그런 기고도 많이 했지만, 회사의 사보에도 적잖이 기고를 했다. 잡문 쓰기를 절대 거부했던 황순원 선생이라면 꾸지람을 하겠지만, 사보 칼럼은 나름대로 큰 의미가 있다. 사보는 독자의 니즈(needs)를 잘 파악하는 간행물이다. 또한 신문 칼럼처럼 원고량과 논지 전개의 틀이 고정돼 있지 않고, 양과 질에서 다양한 실험을 해볼 수 있는 지면이다.

 

사보에 기고하는 것을 나는 각별하게 생각한다. 학자들의 논문이 전문 분야에서 엄밀한 이론의 지도를 문자화하는 것이라면, 이런 잡문은 세상의 희로애락을 문자화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인간사를 다루는 인문학자가 할 일이다. 내 생각으로는 학문적으로 미진한 경우 대중적 글쓰기에서도 능력을 발휘하지 못하리라고 본다.

 

어쨌든 나는 지금 짧은 칼럼에서 두꺼운 학술서에 이르기까지 글쓰기 능력을 계속 실험하면서, 그 사이에 정말 근사한 인터페이스의 세계를 이루는 ‘박쥐 같은 책’을 탈고할 날을 기다리고 있다.

 

  
소재: 수다에서 애니메이션까지

 
애니메이션의 환상성은 철학자에게 흥미로운 글쓰기 소재다.  다양한 형식의 글을 쓰다보면 당연히 그 소재도 다양해진다. 다양한 소재에 접하려면 사람들이 흔히 하찮다고 여기는 것들에도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즉 세상과 속속들이 친해져야 하는 것이다. 그것을 나는 ‘일상의 철학’을 하며 글감을 얻는 일이라고 부른다.

 

극작가 싱(John M. Synge)은, 대표작 ‘골짜기의 그림자’를 쓰고 있을 때 집필에 도움이 된 것은 다른 어떤 독서보다도 다락방 바닥에 난 구멍이라고 했다. 그것을 통해 부엌 아낙들의 수다를 들을 수 있었기 때문이란다. 나도 마찬가지다. 가끔 노천시장이나 공장지대를 거닐거나, 일부러 지하철을 타고 시내를 한바퀴 돌기도 한다. 서민들의 다양한 삶을 보고 듣기 위해서다. 요즘에는 대학 구내 커피숍에 한참 앉아 있으면서, 학생들의 대화에 귀기울이기도 한다. 사실 엿듣는 것인데, 나쁜 의도로 그러는 게 아니다. 요즘같이 세대차가 두드러지는 때에는 세상의 변화를 감지하는 데 유용하고 그들을 이해하는 데도 도움이 된다. 이렇게 해서 수집한 자료는 좋은 글쓰기 소재가 된다. 일상의 일들은 잡문의 소재만 되는 게 아니다. 그것은 곧 학술적 연구의 대상이 된다.

 

오늘날 지식인들은 현실 속에서 살아 숨쉬는 학문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쪽으로 ‘진화’해 가고 있는 듯하다. 하지만 정작 하루하루의 삶을 유심히 살펴보는 데에는 인색한 것 같다. 사회를 구성하는 다양한 사람들의 일상생활을 관심 있게 보지 않기 때문이다. 나는 모든 인문학자의 일상생활에 일상의 철학을 위한 자리가 있기를 바란다. 그것이 학문의 전문성을 위한 자리를 침해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마당이 넓으면 앉을 자리도 많은 법이며, 그 자리에서 하는 대화의 깊이는 소재를 어디서 가져오는지에 따라 다른 것이 아니라, 대화를 이끄는 능력에 따라 달라지는 것이기 때문이다. 오늘 이 땅에서 인문학자들의 글쓰기는 이런 대화를 담을 줄 알아야 한다.

 

일상이 있으면 비일상도 있다. 비일상을 이루는 것에는 상상과 환상이 있다. 이런 것들은 책에서도 접할 수 있지만, 오늘날 다양한 영상 작품에서 많이 접할 수 있다. 그래서 나는 SF를 비롯한 팬터지 작품을 자주 본다. 무엇보다도 애니메이션의 환상성을 연구하는 것은 흥미로운 일이다. 사람들은 나를 보고 우리나라에서 애니메이션에 대한 본격적인 철학 담론을 처음 시도한 사람이라고 한다.

 

영화와 애니메이션은 분명히 글쓰기 좋은 소재이다. 특히 요즘같이 모든 것을 영상화하려는 때에, 그 반대의 길을 가고 있다는 것은 의미 있으며 무척 재미있기까지 하다. 사람들은 문자를 영상화하는 데 반해, 나는 영상을 문자화하고 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다른 사람들은 글에서 얻은 소재로 그림 그리기를 하고 있는데, 나는 그림에서 얻은 소재로 글쓰기를 하고 있는 것이다. 아이들을 위한 애니메이션 작품을 철학 이야기로 바꾸어놓은 일은 보람 있었다.

 

그밖에도 나는 여러 가지 남들이 지나치는 소재를 글감으로 삼곤 한다. 한 예로, ‘미운 오리새끼’ ‘피노키오’ ‘피터 팬’ ‘앨리스’ 등 이른바 아동문학의 고전들을 새롭게 해석해서 철학하기를 시도한 것도 내게는 소중한 경험이다. 그렇다고 내가 이들을 경박하게 다루는 것은 아니다. 심각한 철학 사상을 전개하면서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 칸트, 헤겔 등의 저작을 해석 인용하는 것 이상의 정성과 학자적 철저성을 가지고 대한다. 21세기의 철학자에게 동화, 영화, 만화, 애니메이션 등은 진지한 글쓰기의 동반자이다. 이들은 특히 ‘문화의 세기’라고 부르는 이 시대에 걸맞은 글감들이다.

 

언어: 한글에서 ‘그레고리아노’까지

 

나의 글쓰기 편력은 각기 다른 언어 사용의 시기와 병행해왔다. 유학을 가기 전까지 오직 한국어로 글을 썼지만, 유학 기간 중에는 꼼짝 못하고 외국어로 과제를 작성하고 시험을 보고 논문을 쓰는 길밖에 없었다. 그런데 이렇게 말하면, 내 학력을 아는 사람은 이탈리아어로 줄곧 모든 작업을 했으리라고 생각할 것이다. 로마 그레고리안대학교에서 학부부터 박사 과정까지 마쳤고 그곳 교수를 지냈기 때문이다.

 

하지만 사실은 좀 다르다. 로마 그레고리안대 철학과의 강의 가운데 이탈리아어 강의는 3분의 2 정도이고 나머지는 영어, 독일어, 불어, 스페인어 등 다른 언어로 진행된다. 반면 철학과 교수의 3분의 2 정도는 이탈리아 사람이 아니고 바로 이런 언어권의 사람들이다. 그러니까 이들은 자기 모국어로 강의할 때도 있고 이탈리아어로 강의할 때도 있다. 철학사로 유명한 영국 출신 코플스톤(F. Copleston) 교수가 그랬고, 유물론적 변증법 비판의 대가인 오스트리아 출신 베터(G. Wetter) 교수가 그랬다.

 
대학 내에서 일반적으로 통용되는 언어는 이탈리아어다. 하지만 그 이탈리아어라는 것은 사실 여러 언어권 교수들의 어법이 교묘하게 얽히고 설켜서 새로 탄생한 말이라고 할 수 있다. 학내에서는 그것을 농담 삼아 ‘그레고리아노(gregoriano)’라고 부른다. 하지만 이 우스갯소리는 대학의 언어 사용 현실을 그대로 담고 있다. 그레고리아노의 특징은 철학적 논지를 전개하는 데 기막히게 적합한 언어라는 것이다. 그레고리아노는 오랜 세월 대학의 전통으로 자리 잡았기 때문에 나름대로 어법과 문법을 갖추었다고 할 수 있다. 그렇다고 학교에서 발행하는 공식 서류와 출판물에 그레고리아노를 쓰는 것은 아니다. 어디까지나 대화, 토론, 강의 등에 사용할 수 있을 뿐이다. 그레고리아노는 일종의 학내 비전(秘傳·esoteric) 언어라고 할 수 있다.

 

나는 그레고리아노의 위력을 특별한 데서 더욱 절실히 느꼈는데, 그것은 글쓰기에서였다. 토론과 강의를 그레고리아노로 하는 데 익숙하다 보니까, 철학적 사고를 신나게 글로 옮길 때도 그 언어를 사용하게 된 것이다. 그레고리아노는 철학적 엑스터시를 동반한 글쓰기에 적합한 언어였다. 나는 물론 이탈리아어를 잘했다. 학생들의 리포트와 논문을 수정해주고 이탈리아어로 공식적인 글을 쓰는 데 문제가 없었다. 하지만 넘치는 사고를 글로 쏟아낼 때는 나도 모르게 그레고리아노를 사용하곤 했다.

 

그런데 문제는 몇 년 전 귀국해서 발생했다. 사용언어가 바뀌면 글쓰기에 익숙한 사람도 바로 글을 써나가기 어렵게 마련이다. 언어의 생소함 때문만은 아니다. 우리가 어떤 언어로 글을 쓴다는 것은 그 언어로 사고하며 자신을 표현한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일단 언어가 바뀌면 생각을 제대로 풀어내지 못하게 된다.

 

1997년 애니메이션과 인문학 콘텐츠의 관계를 다룬 ‘미녀와 야수 그리고 인간’의 원고를 육필로 쓰기 시작했을 때였다. 거의 20여년 만에 전문적인 글을 한글로 써야 했는데, 도저히 글을 써나갈 수가 없었다. 몇 시간씩 백지만 보며 무릎을 꿇고 앉아 있는 등 별짓을 다해 보았지만, 몇 쪽 쓰지 못했다. 할 수 없이 다시 그레고리아노로 글을 쓰기 시작했다. 언어를 바꾼 날 밤 A4 용지로 20장 정도를 일사천리로 써나갈 수 있었다. 그 후 달포 만에 약 400장에 달하는 원고를 탈고할 수 있었다.

 

탈고 3년 뒤 한글 실력이 어느 정도 회복되었을 때 내가 쓴 글을 내 스스로 몇 달 간에 걸쳐 한국어로 번역했는데, 창작을 할 때보다 번역에 더 많은 시간이 들었다. 참 힘들고 우스꽝스럽기도 했지만,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한 소중한 경험이었다.

 

지금은 그레고리아노나 다른 외국어로 글을 쓰는 일이 많이 줄었다. 하지만 지금도 생각은 넘치는데 어떻게 표현해야 할지 모를 때는 이제까지 습득한 모든 언어를 동원해서 글을 쓴다. 어떤 때는 같은 내용을 한국어, 영어, 독일어, 그레고리아노 등 여러 가지 다른 언어로 표현해보기도 하고, 한글로 글을 쓸 때도 외국어로 쓴 표현들을 줄 사이에 삽입해 비교해 보기도 하며, 따로 메모하기도 한다. 이런 것들을 최종 추고 작업 때 종합하기도 한다. 글쓰기 언어에 관한 한 나는 하이브리드 인간이다.

 

도구: 펜에서 ‘하이퍼프로세서’까지

 

내가 만일 19세기 후반 이전에 살았다면, 컴퓨터와 워드프로세싱은 물론 타자기와 타이핑이 무엇인지 몰랐을 것이다. 육필 작업만이 유일한 글쓰기 방식으로 알고 평생을 살았을 것이다. 반면 지금의 젊은 세대는 글쓰기에 주로 컴퓨터를 사용한다. 육필은 그들의 일상에서 점점 사라지고 있으며, 타자기는 이미 과거의 유물이 되었다.

 

나는 지금까지 다양한 글쓰기 도구들을 몸소 체험하며 살아왔다. 졸저 ‘깊이와 넓이 4막 16장’에서 글쓰기 도구와 방식을 펜으로 쓰기(writing), 타자기로 치기(typing), 컴퓨터로 처리하기(processing)로 구분하며 문화적 변동의 문제를 다루었는데, 그것은 내 개인적 경험을 바탕으로 한 것이다. 나는 이 세 단계를 모두 거친 세대에 속하기 때문이다. 더 나아가 다양한 하이퍼텍스트를 바로 작성할 수 있는 ‘하이퍼프로세서(hyperprocessor)’가 일반화하면 그것 또한 경험할 수 있을 것이다.

 

글쓰기 도구가 사람의 의식 구조와 사고 방식에 영향을 끼친다고 보면, 내 생각과 글도 사용 도구에 따라서 변화해 왔다고 할 수 있다. 좀더 정확히 말하면 다양해졌다고 할 수 있다. 나는 펜, 타자기, 컴퓨터 사용의 ‘단계’를 거치는 데 그친 게 아니라, 지금도 이 세 가지 도구를 ‘동시’에 사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글쓰기 도구들이 글의 내용에 다양하게 영향을 주도록 내 스스로 이용하고 있는 것이다.

 

우선 세 가지 도구와 그것을 사용한 글쓰기의 특징을 간단히 살펴보자. 고치기의 관점에서 글쓰기를 보면, 육필 창작의 우선적 특징은 쓴 글의 수정과 복원에서 찾아볼 수 있다. 첫째, 육필 작업은 자꾸 고치지 않기 위해서 문장을 종이에 쓰기 전에 작가로 하여금 심사숙고하게 만든다. 어떤 표현을 선택할 것인지 좀더 내면적으로 고민하게 만들 수 있다. 둘째, 그래도 이미 쓴 글을 고치게 될 경우 고친 것들의 ‘보존 가능성’을 어느 정도 보장한다. 종이 위에 잘못된 부분을 직접 고치는 육필의 수정 방식은 원래 글을 다시 읽을 수 있게 하기 때문이다.

 
타자기를 본격적 글쓰기 수단으로서 사용하기 시작한 것은 유학 시절이었다. 하지만 여기에는 근본적인 장애가 있었다. 그것은 언어의 문제였다. 단순히 언어사용의 문제가 아니라, 사고 자체를 서양 언어로 해야 하는 문제였다. 그것은 외국어를 배우는 차원이 아니라, 그들의 사고 구조와 사고 방식을 마치 내 것처럼 획득하는 문제였다.

 

혹자는 왜 그것이 굳이 타이핑 작업에서만 문제가 되는지 물을 수도 있다. 즉 외국어로 육필 작업을 할 경우도 마찬가지라는 이의를 제기할 수도 있다. 하지만 내 경험으로는 바로 이 점에서 글쓰기로서 타이핑의 본질적 특성이 드러난다고 본다.

 

물론 육필로 단번에 추고 없이 완벽한 외국어 문장을 쓰기 위해서도 위와 같은 자질이 필요하다. 하지만 타이핑일 경우 그런 자질은 필수불가결하다. 흔히 간과하는 것이지만, 타이핑으로 직접 글을 쓸 때에는 쓰는 과정에서 즉각 수정할 수 없다는 사실이 타이핑하는 사람에게 거의 잠재 의식처럼 깔려 있다. 타이핑은 육필처럼 즉각 줄을 긋고 고쳐 쓸 수 없다는 전제 조건 아래에서 하는 작업이다. 머릿속에서 수정하지 않아도 될 문장을 생각해내어 손가락의 움직임을 거쳐 타이핑으로 전이하고 그것은 기계 작동에 의해 깨끗한 원고로 찍혀 나온다. 즉 사고내용-표현결정-문자입력-인쇄출력이 상호 긴밀하게 돌아간다.

 

컴퓨터의 워드프로세서는 단순히 글쓰기 도구도, 글쓰는 기계도 아닌 언어처리장치다. 워드프로세싱의 본질적 특징은 마음에 드는 글이 될 때까지 쓴 것을 즉시 수없이 고칠 수 있다는 것이다. 이 무한정한 수정의 가능성과 수정의 즉각성은 라이팅과 타이핑이 가지고 있던 글쓰기 방식과 성격을 본질적으로 바꾸어놓았다. 그러므로 워드프로세싱에는 일단 써놓고 본다는 장점(아니면 단점)이 있다. 이 점에서 라이팅이나 타이핑에서 작가들이 경험하는 ‘백지의 공포’가 줄어들 수도 있다.

 

나는 지금 핸드라이팅, 타이핑, 프로세싱을 모두 활용하고 있으며, 앞으로 하이퍼프로세서가 나오면 그것까지 글쓰기 도구의 범위에 넣을 것이다. 창작에 대한 도구의 영향이 한쪽으로 치우치지 않도록 하기 위함이다. 네 가지 글쓰기 방식을 모두 경험할 수 있는 시대를 타고 태어난 것을 행운으로 받아들인다. 도구의 다각적 활용은 다양한 사고를 가능하게 하기 때문이다. 니체(F. Nietzsche)의 말처럼 “도구가 우리의 사고에 가담한다”고 할 수도 있지만, 반면 우리의 사고는 도구의 다양한 가담을 기획하고 조직하며 활용한다.

 

서락(書樂): 망설임에서 보람까지

 

나에게 글쓰기는 우선 망설임이다. 그러다가 그것이 두려움으로 변하기도 한다. 망설임의 주된 증상은 하루에 끝낼 수 있는 글을 며칠씩 걸려 쓰는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어떤 때는 원고 청탁을 받고 몇 주일씩 잔뜩 뜸을 들이다가, 마감 전날 밤에야 본격적으로 쓰기 시작하는 경우도 있다.

 

뜸을 들인다는 것은 물론 생각이 많다는 뜻이다. 생각하고, 자료 수집하며, 무엇보다도 주제에 대해서 공부한다. 때로는 다른 사람과 대화를 나누기도 한다. 뜸을 들이며 망설이는 것 자체가 글쓰기를 구성하는 요소이다. 책 한 권을 쓰려면 도서관 전체를 뒤져야 한다는 말이 있다. 에코(Umberto Eco)도 글쓰기는 결국 영감보다는 노력이라는 데 동의한다. 나는 ‘글쓰기는 공부’라고 생각한다.

 

어떤 때는 잔뜩 뜸을 들이면서 준비해놓은 것을 막상 이용하지 못하는 경우도 있다. 결국 최종 원고는 전혀 다르게 쓸 경우도 있다. 이런 점에서 글쓰기는 미스터리다. 하지만 기본적으로 많은 공부를 하게 만든다. 마감이 급한 일간지 칼럼을 쓸 때도 글의 내용에 들어갈 사실을 철저히 확인하기 위해 여기저기 자료를 검색한다. 그것도 탐구의 한 방식이다. 그러므로 다양한 글쓰기를 섭렵하는 것은 공부의 방식을 다양하게 경험한다는 뜻일 수 있다.

 

어떤 때는 청탁 받은 원고를 위해서 공부를 하기 시작했는데, 이런저런 책과 자료를 읽다가 재미있어서 삼천포로 빠지는 경우도 있다. 하지만 원고 마감이 이런 이탈을 통제한다. 글 쓰는 사람에게 마감은 독이자 약이다. 마감 때문에 괴로워하고 그 덕에 글을 완성해서 고통으로부터 해방된다. 글쓰기 오르가슴의 한계점에 마감이 있다.

 

힘들여 공부하고 마감 때문에 괴로워하는 것을 보면 글쓰기는 고통이다. 그러한 고통을 겪어도 글의 실마리를 잡지 못하거나 좋은 글을 써낼 수 없는 경우 글쓰기는 두려움으로 변한다. 그래도 글쓰는 사람은 못 말린다. 이미 2000년 전 로마 시대의 문장가 유베날리스가 간파했듯이 작가에게 아무리 늙어도 고칠 수 없는 병이 있다면 그것은 쓰고자 하는 욕구이다.

 
어떤 사람은 창작의 기쁨을 글쓰기의 고통과 두려움을 상쇄해주는 것으로 본다. 내 경우는 글을 쓰면서 뭔가 의미를 발견하기 때문에 계속 쓸 수 있는 것 같다. 우선 내게는 ‘생각의 회복’과 ‘일상의 발견’이 각별하다. 사람이 생각하는 동물이라고 항상 심혈을 기울여 생각하는 건 아니다. 글쓰기는 확실히 녹슬었던 생각에 기름을 쳐준다. 그러면 우주의 의미조차 다시금 쑤욱 쑥 솟아난다. 그리고 나처럼 잡문 쓰기를 꺼리지 않는 사람에게는 일상의 의미가 항상 새롭게 다가온다. 그건 큰 기쁨이다.

 

그리고 이건 아마 모든 작가에게 공통적일 듯싶은데, 소통의 즐거움이 그것이다. 논어에 있는 “학이시습지 불역열호 유붕자원방래 불역락호(學而時習之 不亦說乎 有朋自遠方來 不亦樂乎)”라는 말은 유명하다. 이 문장에서 불역열호의 ‘열(說)’과 불역락호의 ‘락(樂)’은 모두 기쁨과 즐거움을 뜻한다. 그래서 이 문장을 “배워서 때에 맞추어 익히니 또한 기쁘지 아니한가. 뜻을 같이하는 벗이 먼 곳으로부터 찾아오니 또한 즐겁지 아니한가”라고 해석한다. 그런데 앞의 ‘열(說)’은 각자의 내면에서 우러나오는 기쁨을 뜻하는 말이고, 뒤의 ‘락(樂)’은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에서 나오는 즐거움을 표현하는 말이다.

 

글쓰기는 독자와의 가상적 대화다. 그러므로 소통의 의미와 즐거움이 있다. “사람을 향해 글을 쓰니 또한 즐겁지 아니한가”라는 표현이 이에 어울린다. 말을 만들자면 ‘서락(書樂)’이라고나 할까. 글을 쓴다는 것은 혼자 말하면서 동시에 여러 사람을 향해 말하는 것이다. 그것은 동시대의 사람들을 향해서 말하는 것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먼 미래의 사람들에게 미리 말하며 통시적(通時的) 의미 공유를 시도하는 것이다.

 

글쓰기의 망설임과 두려움 그리고 괴로움은, 의미의 발견과 재발견 그리고 소통을 통해, 삶의 즐거움과 기쁨 그리고 보람이 될 수 있다. 이 모든 과정이 글쓰기의 쾌락을 이룬다.

 

작가를 뜻하는 서양어는 여러 가지가 있다. 그 가운데서도 ‘author’는 라틴어 ‘augere’가 그 뿌리인데 ‘증가시키다’는 뜻이 있다. 글쓰는 사람은 다른 사람에게 삶의 의미와 즐거움을 증가시키는 일을 한다. 글쓰기의 즐거움은 나의 즐거움이기도 하지만, 타인의 즐거움을 증가시키는 일이기 때문에 내겐 무엇보다도 보람있는 일이다.

<출처 신동아 2003년 11월호 통권 530호 특별부록 글쓰기의 쾌락>


글·김용석 영산대 교수·철학 anemos@ysu.ac.kr
철학자. 문화비평가. 로마 그레고리안대학교 철학과를 졸업하고, 철학 석사 및 박사 학위를 받았다. 같은 대학교 철학과 교수를 역임했으며, 성공회대 사이버강좌(애니메이션과 철학) 외래교수를 거쳐, 현재 영산대학교 교양학부 교수로 있다. 한국어 저서로 ‘문화적인 것과 인간적인 것’ ‘미녀와 야수, 그리고 인간’ ‘깊이와 넓이 4막 16장’ ‘일상의 발견’ ‘상상’(공저), ‘서양과 동양이 127일간 e-mail을 주고받다’(공저)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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