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업무일기는 나와 동료의 욕망과 창조 공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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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자청비 2007. 12. 1. 12: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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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와 동료, 욕망과 창조의 공간
 
업무일기는 회사의 경영·기획·편집·마케팅·총무 각 영역의 업무 노하우나 정보를 나누고 받는 일상 공간이다. 지난 3년 동안 내가 쓴 업무일기는 원고지 3000장에 달한다. 1년에 책 한 권씩 쓴 셈이다.
 
 
 
인류의 역사에서 특정한 시기까지는 한정된 사람에게만 글쓰기가 가능했다. 그러나 현대의 글쓰기는 글쓰기 방식의 변화에서 출발하여 의식의 변화를 거친 뒤, 이제는 각 세대나 영역별로 나타나는 문화적 변동으로까지 이어지는 하나의 화두가 되었다고 볼 수 있다.

 

글쓰기는 자신의 생각과 마음을 전하는 여러 방법 중 하나다. 그 형식과 내용도 무척 다양하다. 하나의 낱말일 수도 있고, 한 줄의 짧은 문장일 수도 있다. 그리고 여러 사람을 설득하려는 목적으로 쓴 원고지 10장 분량의 칼럼일 수도 있고, 200∼500장의 산문이나 중편소설일 수도 있다. 더 나아가 원고지 1000장 가량의 글을 책으로 엮어 다양한 현상들을 자기 식으로 구성해 주장하는 방법도 있다.

 

대다수 사람들은 글쓰기 하면 신문이나 잡지의 칼럼, 발표 논문, 완성된 서사 구조를 갖춘 ‘책’이라는 대상에 생각의 울타리를 친다. 이 순간 우리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머릿속 깊이 내면화되어 있는 관념과 만나게 된다. ‘글쓰기는 아무나 하나!’라는 편견. 이건 편견이다. 내 생각에는 글쓰기는 아무나 하는 것이다.

 

일상에서 하루도 빼먹지 않고 하는 행위 중 하나가 메모이다. 우리는 전화통화를 하면서도 습관적으로 볼펜을 손에 쥐고 메모지에 낙서를 하면서(동그라미나 스프링 모양의 그림을 계속 그리는데, 각자의 패턴이 있는 듯) 상대방과 이야기를 나눈다. 통화 후 메모를 보면 단어와 패턴이 섞여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우리 회사 사람들의 전화통화 장면을 유심히 살펴보면 나를 비롯해 거의 모두가 그랬다. 또 하나 이메일이다. 요즘 직장인치고 이메일을 쓰지 않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이렇듯 글쓰기는 매우 일상화된 행위임에도 그것에 대해 갖는 편견과 스스로 쳐놓은 울타리 때문에 비일상적 행위로 비쳐지는 것 같다.

 

새로운 글쓰기 공간으로서 업무일기

 

나는 회사원! 내가 다니는 회사는 출판사다. 쓰는 쾌락보다는 읽는 즐거움에 익숙한 직장이다. 출판사 역시 기업인지라 다양한 역할을 맡은 다양한 사람들이 존재해야만 한다. 경영, 기획·편집, 마케팅, 총무·인사 등 일반기업과 그 조직이 비슷하다.

 

나는 기획·편집 그룹에 속한다. 편집자는 저자의 원고를 처음 읽는 최초의 독자라 할 수 있는데, 저자나 작가의 글이 처음의 기획 방향으로 구성되어 있는지, 독자층의 눈높이에 맞는 서술인지, 전체적인 흐름은 괜찮은지를 생각하면서 읽기를 시작한다. 글을 읽은 후에는 저자(작가)가 쓴 글의 매력 포인트가 무엇인가를 찾아내, 그것을 적극적으로 드러내는 ‘출간 기획안’을 작성한다. 아마 이런 과정은 일반 기업에서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기안·기획안 등을 작성하고 상품을 평가한 뒤 각종 보고서를 작성하여 부서장에게 결재를 올릴 것이다. 그리고 거래처나 외부 파트너들에게 “어떤 안건으로 미팅할 것인지”를 묻는 이메일을 전송하는 등 직장인들은 일상적으로 이른바 ‘페이퍼’를 작성해야 한다. 규모가 큰 기업에서나 작은 기업에서나 마찬가지일 것이다.

 

기획안, 각종 보고서는 어느 순간에 만들어지는 것은 아니다. 깨알같은 메모나 아이디어들이 모이고 모인 뒤, 그것을 배치하는 과정에서 하나의 완결된 기획안이 나온다. 종이 몇 장이지만 온갖 생각과 감정들이 농축된 ‘페이퍼’이다. 깨알 같은 메모나 아이디어들은 과연 어디에 어떻게 기록해놓아야 할 것인가? 여기까지는 누구나 아는 사실이다. 그렇다면 그것을 기록하고 저장했다가 필요할 때 끄집어내는 기억의 공간이 필요하다. 그 기억의 공간은 어떤 것인가?

 

필자가 근무하고 있는 휴머니스트에선 사원 모두가 회사가 태어난 후 지금까지(2001년 5월∼2003년 10월 현재) 꾸준히 업무일기를 써왔다. 앞서 말한 기억의 공간은 바로 업무일기를 쓰고 저장하는 내 컴퓨터의 한 ‘폴더’이다. 나는 별것 아닌 ‘업무일기’ 이야기를 떠올리면서 직장인의 글쓰기라는 새로운 생각으로 가볍게 미끄러지려고 한다. 휴머니스트에서 일하는 모든 사람들은 입사와 동시에 업무일기를 쓰게 된다. 휴머니스트의 업무일기는 회사의 경영·기획·편집·마케팅·총무 각 영역의 업무 노하우나 정보를 나누고 받는 일상 공간이다.

 
‘일하는 나’와 ‘생각하는 나’가 만나는 글쓰기

 

업무일기는 나의 생각과 나의 행동이 만나는 공간이다. 나는 출퇴근 때 대중교통을 이용하기 때문에 출근 때마다 “오늘 회사에서 어떤 일을 어떻게 처리해야 하지?”라는 질문을 습관처럼 떠올리곤 한다. 그러나 회사에 도착하자마자 컴퓨터를 켜면 나는 기억의 공간으로 들어간다. 이곳에 나의 월 단위, 주 단위 업무 목표가 담겨 있다. 그리고 그 목표를 하나둘 이루어가는 과정이 하루하루 기록된다.


<2003년 9월 미팅 일정>
8일 12:00 ○○○선생, 기획 건- 장소, 휴머니스트
10일 3:00 ○○○선생, 기획 건-연구실(터미널)
17일 5:00∼6:00 ○○○선생, 기획 건(대학교)
21일 12:00∼2:00 ○○○선생, 목차 논의-장소, 휴머니스트


9월 29일(월)- 28일 오후 7:00∼10:00 -‘오만과 편견’의 저자 임지현·사카이 나오키 초청 독자서평회가 무사히 끝났습니다. 감사합니다. 80여 명이 토론회에 참석했는데, 수유연구실 토론회 사상 최대의 대박행사였습니다. …….


업무일기는 말 그대로 업무의 주체인 ‘나’라는 편집자의 일거수일투족이 기록되는 장소다. 여기에 하나를 더 추가한다면 머릿속의 생각이 담겨져 있는 공간이기도 하다. 일을 하다보면 순간순간 ‘긍정’과 ‘부정’의 관념이 무수히 교차한다. 이때 그런 생각들을 그냥 흘려버리는 경우가 많은데, 나 역시 이런 공간을 만나기 전까지는 ‘그냥’ 또는 ‘그저 그렇게’ 흘려보내곤 했다.

 

하지만 업무일기라는 글쓰기 공간에 진입한 뒤, 나는 순간의 기억 조각들도 붙잡을 수 있게 됐다. ‘지금 여기’ 그리고 ‘그때 그 순간’ 내가 어떤 생각을 하고 있었는지, 그리고 그 생각들이 어떤 경로를 통해 들어왔는지를 적어둠으로써, 그것을 내가 원하는 순간마다 다시 끄집어낼 수 있게 된 것이다. ‘일하는 나’와 ‘생각하는 나’가 만나 새로운 생각과 행동으로 옮겨가는 매개 역할을 업무일기가 하고 있다.


2003년 9월 22일(월) - 일요일 저녁에 참 많은 생각을 했다. 휴머니스트를 창립하던 희망의 시간들, 책을 한 권 두 권 발간하던 때의 긴장된 기억들, 2002년의 시장 진입기, 그리고 2003년에 진행 중인 여러 우여곡절들. 한순간은 내가 대견스럽기도 했지만, 여전히 스스로를 무한히 긍정하지 못하는 “약한 자의 심성에 둘러싸인” 내 모습에 짜증도 났다. 회사의 역사와 개인의 기억이 항상 같을 수는 없겠지만, 나에게는 역사와 기억을 대동소이하게 만들어보고 싶은 마음이 여전히 굴뚝같다.


덧붙이자면 나의 이런 기록들은 다른 분야에서도 매우 유효하게 이용된다. 휴머니스트에서는 대담집이라는 독특한 장르의 책을 기획해왔다. ‘서양과 동양이 127일간 e-mail을 주고받다’(김용석·이승환 대담) ‘오만과 편견’(임지현·사카이 나오키 대담)이 그것인데, 이들 책의 뒷부분에는 편집자의 기획일지가 비교적 상세하게 기록되었다. 대담의 기획과정을 재구성해 독자에게 어떻게 시작되고 어떤 과정을 거쳐 마무리되었는지를 비교적 소상하게 알렸는데, 이런 원고는 업무일기에 기초하지 않고서는 나올 수 없는 글이었다.

 

나와 동료가 만나는 소통의 공간

 

휴머니스트의 업무일기 공간은 나와 동료가 만나는 소통의 공간이다. 그래서 나는 이 공간에 담긴 글이 가장 중요한 내용이라고 생각한다. 대개 직장인들은 회사에 출근하자마자 자신의 컴퓨터를 켠 후 ‘오늘 내가 해야 할 일을 점검’하면서 일을 시작한다. 휴머니스트 구성원은 하나의 과정을 더 거친 뒤 업무를 시작하는데, 그게 뭐냐면 다른 동료가 전날 쓴 업무일기를 열람하는 일이다. “일기를 공개한다구요!” 하는 분들도 있을 수 있겠다. 앞의 글에서도 볼 수 있듯이 업무일기에는 회사 업무와 비전에 대한 그 사람의 생각과 마음, 그리고 행동이 담겨 있기에 소중한 것이다. 일기란 어느 누구의 간섭 없이 각자의 가치 판단에 따라 쓰는 것이 아니던가.

 

나는 다른 이들의 업무일기를 열람하면서 잠깐이나마 생각의 시간을 갖는다. ‘그 사람이 어떤 상황인지’ ‘내가 어떻게 그 사람을 배려해야 할지’ 등을 생각해본다. 반대로 내 업무일기를 열람한 동료나 선후배들은 ‘저 인간을 어떻게 달래나~’ 하고 고민할 것이다.

 

물론 모두가 매일 배려하고, 고민하지는 못한다. 하지만 10명의 휴머니스트 직원 가운데 한두 명은 어떤 사람을 위로하고, 그와 고민을 나눈다. 동료나 선후배가 나를 배려하기도 하고 내가 그들의 고민을 들어주기도 한다.


2002년 11월 28(월) - 일요일! 즐겁게 운동을 했으리라 생각합니다. 아침에 일어날 때 자신의 신체 변화를 감지했을 겁니다. 근육이 땅기고 뻑적지근하고……. 아침저녁 스트레칭을 하세요. 취침 전에 더운물로 샤워를 하면 좋습니다. 이번 경기는 모두들 즐거웠을 것 같군요. ‘승리’는 감정의 만족이란 선물을 안겨줍니다. 추운 날씨에도 열심히 응원을 해주신 휴머니스트 가족들에게 고마운 마음을 전하고 싶습니다.


2002년 9월 7일(월) - 문화컨텐츠진흥원 기획홍보팀 차장을 만났다. 이곳은 음악, 애니메이션, 출판만화 등 이윤을 창출하는 아이템을 선정하고 지원하는 일을 담당하는 곳이었다. 우리가 눈여겨볼 만한 부분은 만화이다. 휴머니스트 편집장이 꼭 만나야 할 기관인 것 같다.

 

소통은 펼치고 나누는 것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다양한 시각을 하나의 점으로 집중해내기도 한다. 나와 동료가 만나는 공간에서는 집중과 분산을 동시에 이루어낼 수도 있었다. 하나의 사안에 대하여 각자의 다양한 의견을 업무일기에 쓰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안건의 제안자는 별도의 회의 없이 다른 사람들의 의견을 참고하여 하나의 방향을 결정할 수 있다. 그 과정에서 담당자는 회사의 최고 의사결정권자와 사전 교감을 통해 최종안을 확정하게 된다.

 

2001년부터 2003년 10월 현재까지 햇수로 3년째 업무일기를 써오다 보니, 업무일기도 ‘진화’의 길을 걷고 있는 듯하다. 왜냐하면 정해진 형식과 내용 없이 각자의 개성대로 자신의 일을 표현하고 있기에 독특한 표현 방법이나 서술방식이 나타나기 때문이다. 진화론자들이 말하는 “진화에는 목적이 없다”는 말이 적용되는 것은 아닐지!

 

나에게는 업무일기가 ‘글쓰기 행위’라는 구체적이고도 실질적인 ‘체험’의 공간으로 다가왔다. 누군가가 내게 “글쓰기를 두려워 말라”고 충고한다면 나는 “그래요 써보니 정말 그렇네요”라고 대답할 수 있을 것이다. 내 경험에 비춰본다면 글쓰기의 관건은 ‘자꾸 써보는 것’이다. 나와 같은 직장인들에게는 ‘업무일기’가 글쓰기 공간으로서 꼭 필요하다.

 

욕망을 창조하는 생성의 공간

 

업무일기에는 무수히 많은 사람들이 등장한다. 내가 꼭 만나야 할 저자, 연구자, 학자들이다. 그들을 만나고 난 뒤에는 그 사람에 대한 생각과 정보를 쓰고, 내가 앞으로 어떻게 다가서야 할 것인지를 나름대로 정리해 쓴다. 저자(작가)들의 정보가 켜켜이 쌓이면 예상치 못한 ‘조합’이 떠오른다. 다양한 사람들의 생각과 정보가 한곳에서 만나게 되니, 비슷한 주제들이 서로 연결되고, 이질적인 것들이 뒤섞여 새로운 아이디어를 만들어내는 창조의 과정으로 연결되는 것이다. 이것은 지금껏 경험하지 못한 신선한 체험이었다.


2002년 6월 4일(화) - 서점의 ○○○씨를 만났다. 휴머니스트의 ‘동의보감’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었다. 책 내용보다는 가치를 중심으로 이야기를 나누었다. 서점의 팀장을 만났다. 원칙을 중시하는 듯한 인상이다. 앞으로 서점 마케팅의 중요한 고리역할을 할 것 같다. ‘깊이와 넓이 4막 16장’과 관련하여 인터넷 서점 콘텐츠 담당자와 편집장들 간의 대화가 있었으면 좋겠다는 대표의 업무일기를 봤다. 그쪽 사람들과 어떻게 만나야 할지에 대한 의견을 제안해봅시다.


2001년, 2002년, 2003년의 업무일기를 출력했다. 1년 동안 쓴 업무일기를 분량으로 헤아려보니 원고지 1000장에 이른다. 3년을 썼으니 3000장이다. 10년을 쓰면 1만장이 되는 셈이다. 원고지 1000장은 300여쪽 되는 책의 한 권 분량이다. 그 내용을 하나의 고리로 연결시킬 수만 있다면 그것은 기억의 공간, 즉 역사가 될 수 있다. 검색어를 치면서 해당 부분을 복사하면 새로운 분류 체계를 만들어낼 수도 있다.

비록 하찮게 보이는 업무일기이지만 최근 2∼3년 동안 내 자신 어떻게 생각하고 어떻게 행동해왔는지를 깊이 성찰하는 시간과 대면한다. 과거의 생각을 담은 글을 보고, 기억해내고, 또 그 기억을 성찰의 대상으로 삼고 있는 것이다. 프로페셔널과 아마추어의 차이를 언급한 어느 선배의 말은 2년이 지난 지금도 나의 가슴에 꽂힌다.


2001년 9월 20일(토) - 프로는 예습에 능하고 아마추어는 복습에 시달린다. 한 번의 실전 연주를 위해 수없이 실전연습을 반복하는 프로 연주자들, 관객들 앞에서 멋진 플레이를 보이는 프로 선수의 끊임없는 실전 연습과정은 프로 자질의 핵심이다. 반면 아마추어는 세심한 생각 없이 늘 일을 저지른 후 반성과 후회, 자책을 일삼는다. 그러나 후회는 늘 반복된다. 관성적 복습은 관성적 행동을 낳는다.


어찌 보면 업무일기는 글쓰기에서 하나의 방식이자, 도구라고 볼 수 있다. 이러한 도구의 다각적 활용은 다양한 사고를 가능하게 한다. 그리고 이 도구가 우리의 생각에 가담하고, 우리의 사고는 이러한 도구의 가담을 기획하고 조직하며 활용한다면, 내가 쓰고 있는 업무일기보다 훨씬 진일보한 새로운 형식이나 도구가 생겨날 것이다.

<출처: 신동아 2003년 11월호 통권 530호 특별부록 실전에서 활용하기>


 

글: 선완규 휴머니스트 인문편집장 swk2001@hmcv.com
축구를 좋아하는 내가 경기 시작 전에 꼭 떠올리는 말이 있다. ‘욕심을 버려야지.’ 나는 철학도 좋아한다. 철학을 공부하면서 ‘삶의 자세’를 배우고 있다. 출판사 편집자로 생활하면서 꼭 챙기는 말이 있다. ‘사람을 가슴에 담자.’ 저자의 원고를 대할 때마다 떠올리는 말이다. 푸른숲 인문팀장을 거쳐 현재 휴머니스트 인문편집장으로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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