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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리가 아니라 가슴으로 써라

읽고쓰기---------/좋은글쓰기

by 자청비 2007. 12. 1. 12: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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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짜 글과 진짜 글
머리가 아니라 가슴으로 써라
 
감동이 아주 작거나 별로 없는 글을 ‘죽은 글’ ‘좋지 않은 글’ ‘가짜 글’이라 한다. 반대로 자기만의 생생한 삶이 묻어나고 감동이 큰 글을 ‘살아 있는 글’ ‘좋은 글’ ‘진짜 글’이라 한다.
 
 
어른들의 글쓰기는 크게 ‘사실 이야기글’ 쓰기와 ‘만든 이야기글’ 쓰기가 있다. 사실 이야기는 자신이 보고 듣고 겪은 일을 사실대로 쓰는 글인데, 보통 사람들이 흔히 쓰는 글이다. 만든 이야기는 우리의 생활에 있을 법한 이야기나 우리의 생활에는 있지 않은 공상이나 상상의 세계를 만들어 쓰는 글이다.

 

어떤 글이든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글은 글을 쓰는 사람의 마음(뜻)과 글을 읽는 사람의 마음이 가장 가깝게 맞아떨어졌을 때다. 감동을 크게 느낄 때 우리는 ‘어떻게 그렇게 내 마음과 똑같을까!’ ‘어떻게 그렇게 내 처지와 같을까!’ 하는 감탄사가 저절로 나온다. 자신의 삶에 영향을 미치도록 가슴 깊이 느낀 감동이 아닌 단순히 놀라움만 큰 글은 감동이 큰 글로 보지 않아야 한다.

 

누구라도 그럴 것이지만 특히 나는 좋은 글과 좋지 않은 글을 나눌 때 이 ‘감동’을 가장 앞세운다. 감동이 아주 작거나 별로 없는 글을 ‘죽은 글’ ‘좋지 않은 글’ ‘가짜 글’이라 말한다. 그런 글은 삶이 사실대로 또렷이 나타나 있지 않고, 사실이나 생각과 느낌을 거짓으로 꾸며 쓰거나 부풀려져 있다. 또 자기 말이 아닌 말이 많다. 말하자면 다른 사람의 말로 쓰거나 어렵게 쓰고, 관념의 말로 썼다는 것이다. 그런 글 가운데는 말하고자 하는 알맹이가 별로 없거나 알맹이가 있다 하더라도 무엇인지 잘 모르겠고, 또 알맹이는 아주 또렷하다 해도 글을 읽는 사람에게 그 알맹이를 강제로 넣으려고 하는 글이 많다.

 

왜 그런 가짜 글을 쓰게 되는 것일까. 삶은 별로 없는데 머릿속에 지식만 잔뜩 집어넣은 사람이 머리에 든 것으로만 쓰다보니까 그렇게 되는 것이다. 자기의 경험이 모자라면 보통 책 속에서 얻은 지식, 다른 사람의 이론이나 방법을 자기 것처럼 그대로 가져오게 되는데, 그렇게 해서 쓰는 글은 생생할 수가 없다. 그리고 가짜 글을 쓰는 사람 가운데는 일부러 글을 어렵게 써서 보통사람이 잘 알 수 없도록 쓰는 사람도 많다. 그래야 자신이 보통사람과 다른 유식층 사람처럼 보인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다.

 

누구나 알기 쉬워야 진짜 글이다

 

그러니까 어떤 글이든 보통사람들이 이해할 수 없는 글은 유식하게 보이려고 어렵게 썼거나 글쓰기가 매우 서툴기 때문이라고 볼 수밖에 없다. 그리고 가짜 글을 쓰게 되는 또 다른 까닭은 글은 무조건 아름답고 화려하게 꾸며 써야 한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주로 시나 수필 같은 글에서 그런 것들이 많다. 그러나 보통, 사람들은 쓸 것이 없고 쓸 줄 모른다고 한다. 고인이 되신 이오덕 선생님은 이렇게 말씀하셨다.


“글을 쓰려고 해도 쓸 것이 없다고 하는 사람들-우리나라 대부분 사람들은 아주 어릴 때부터 자기 표현을 글로 할 수 없도록 하는, 남의 흉내만 내는 짓에 길이 들어버렸기 때문일까? 그래서 자기표현 대신에 가정에서나 직장에서나 또 버스 안에서나 밤낮 텔레비전과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남의 표현을 받아들이기만 하는 동안 어느덧 그것을 자기표현으로 착각하고 있는 것일까? 둘 중의 하나일 것이다.”


“쓰는 방법을 모른다고 하는 사람은 거의 모두가 글을 말과는 아주 다른 것으로 생각하고, 또 글을 쓰는 사람은 특별한 재주를 타고난 사람이거나 남다른 교육을 받은 사람이라고 알고 있다. 글에 대한 잘못된 생각과 태도가 글을 못 쓰게 하고 있는데, 이것 역시 초등학교 때부터 올바른 글쓰기 교육을 받지 못했기 때문이다.”


나는 또 가짜 글과 반대로 감동이 큰 글을 ‘살아 있는 글’ ‘좋은 글’ ‘진짜 글’이라 말한다. 감동이 큰 진짜 글은 다음과 같은 조건이 갖추어져 있는 글이다. 먼저 억지로 쓴 글이 아니라 쓰지 않고는 못 견뎌서, 쓰고 싶은 마음이 철철 넘쳐서 쓴 글이다. 또 그런 마음으로 글을 쓰면 정성껏 쓰기 마련인데 그런 정성이 담겨 있는 글이 좋은 글이다.

 

그리고 누구나 알기 쉽게 쓴 글이 진짜 글이다. 괜히 보통사람들이 이해할 수 없도록 어려운 말을 넣어서 쓰거나, 말장난을 해서 고상하게 보이려고 한 글은 좋지 않다. 자기가 겪은 대로, 자기가 생각하고 느낀 대로 쉬운 말로 써서 알맹이가 또렷이 나타나 있어야 한다. 누구나 읽고 싶은 마음이 일어나야 진짜 글이다. 글이란 꼭 누구에게 보이기 위해서 쓰는 것은 아니지만 어떤 글이든 다른 사람의 흥미를 끌지 못해서 잘 읽히지 않는다면 별 뜻이 없어진다. 코미디처럼 실없이 웃겨서가 아니라 나름대로 글 맛이 살아나 있어서 읽을 맛이 나야 한다는 것이다.

 

또 자기만의 생생한 삶과 자기만의 생각이 나타나 있어야 진짜 자기 냄새가 나는 글이다. 이를테면 개성 있는 글을 말한다. 누구나 다 알고 있는 일을 알고 있는 그대로 쓰면 내 맛도 네 맛도 없는 글이 된다. 꾸며 쓰지 않고 사실 그대로 쓰되 글에 나타나 있는 행동이나 생각이 올발라서 다른 사람이 읽어도 무엇인가 얻을 수 있는 가치 있는 글이라야 한다. 다시 말하지만 글은 무엇보다 감동이 있어야 한다. 겉보기에는 조금 서툴러 보여도 다른 사람의 마음을 찡하게 울려서 ‘아! 그렇지!’ 하는 감탄사가 저절로 나와야 한다.
 
진짜 글, 가짜 글 구별하는 안목 있어야

  
실제로 글 몇 편을 보면서 진짜 글과 가짜 글을 또렷이 가려 보자. 나는 오랫동안 초등학교 아이들의 글쓰기 지도를 해 왔기 때문에 이 아이들의 글을 예문으로 보인다. 아이들의 글이라고 우습게 보지 말고 배웠으면 한다. 너무 긴 글은 중간중간 생략했다.


<글 1-1>

하늘이 / 가진 / 파란 마음 / 걸러 먹고서, // 갈매기가 / 싣고 온 / 구름의 고운 얘기 / 파아란 꿈으로 / 피워 / 출렁거리고, // 맑은 마음 / 가슴에 품고서 / 바위랑 / 오순도순 / 장난칠 때 / 파란 꿈, 맑은 마음 / 동글동글 / 모여서 / 뛰어나간다. // 파아란 / 물결이 가진 마음 / 우리들 맘 되어 / 넓게 / 퍼져 나간다. (물결, 6학년의 시)


<글 1-2>

개구리 한 마리가 찻길을 건너다 / 차에 그만 칭기고 말았어요. / 건너편 논에 알 놓으러 가다가 / 칭기고 말았어요. / 엄마가 아기를 갖고싶어 했던 소원이 / 이루어질라 하는데 / 가다가 차에 칭겨 죽고 말았어요. / 뱃속에 있던 개구리 알은 우무질 안에서 / 가만히 자고 있어요. / 새끼는 어미가 죽었는지도 모르고 / 잠만 자요. / 나는 알을 논에 넣어주었어요. / 나는 알보고 열심히 자라라고 했어요. / 엄마 없다고 너무 많이 울지 마라고 했어요. (개구리, 1999. 4.12, 경북 청도 봉하분교 4학년 ‘최기석’의 시)


<글 2-1>

할아버지께서는 저 세상에서도 바다와 얘기를 나누고 계실까?

“할아버지!”

나의 목소리는 섬마을 골짜기로 엷게엷게 번져갔다.

“오! 경난이였구나. 공부는 다 마쳤냐?”

“네, 그런데 할아버진 여기서 뭘 하고 계셔요?”

나는 할아버지의 어깨에 매달리면서 말했다.

“바다와 얘길 하고 있었지.”

할아버지께서는 늘 하시던 이상한 말씀을 하셨다.

“거짓말, 바다가 어떻게 말을 할 수 있어요?”

할아버지께서는 입을 삐쭉거리며 말하는 나를 한참 쳐다보시더니

“하지만, 나는 바다랑 얘길 했잖아. 경난아, 내가 바다하고 얘기할 수 있는 방법을 가르쳐 줄까?”

할아버지께서는 미소를 지으시며 나에게 말씀하셨다.

“네, 할아버지 어서 가르쳐 주셔요.”

나는 애원을 하듯 할아버지의 팔에 매달렸다.

“바다는 말이 없는 것 같지만 말을 하고 있어요. 저 물결을 봐. 저 물결이 잔잔할 때에는 바다가 기분이 좋은 거고 물결이 셀 때에는 성이 난 거란다. 그러니까 바다를 잘 알아야 해.”

할아버지께서는 이 말을 하시면서 무엇인가 골똘히 생각하고 계셨다.

나는 한참 동안을 혼자서 생각해 보았다. 할아버지가 말씀하신 것을!

“아하, 알았어요. 그러니까 서로를 이해하는 마음이 있어야 하는군요. 그리고, 바다와 얘길 하는 게 아니고 물결과 얘길 하시는 거군요.”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런데, 할아버지께서는 내 말이 듣기지 않으시는지 말이 없으셨다.

“내가 죽어 버리면 바다와는 아니, 이 물결과는 얘길 할 수 없을 것 같구나.”

할아버지는 한숨을 내쉬시며 말씀하셨다.

“아녀요, 할아버진 죽지 않아요. 나랑 같이 천년 만년 살 거여요.”

나는 자신 만만하게 말은 했지만 그럴 순 없는 일이었다.

이제 할아버지께선 이 세상에서 찾을 수 없다. 오직 내 가슴속에 살아 계실 뿐…….

나는 언제나 물결과 함께 할아버지의 얘기를 나누면서 할아버지의 몸에서 풍겼던 짠 냄새를 맡았다. 그리고 짠 냄새야말로 할아버지의 마음이며 저 바다의 물결의 마음이라는 것을 느낄 수 있다. 어디선가 풍겨 오는 짠 냄새는 나의 창문을 건너 할아버지의 나라로 가고 있었다. (물결, 6학년의 글)


‘엄마와 소똥을 치면서'<글 2-2>

학교에 갔다 오니까 방에 엄마가 보이지 않았다. 오늘 어디에 갈 데도 없는데 이상했다. 옷을 갈아입는데 소 마구간에서 자꾸 ‘들그락들그락’ 하는 소리가 들렸다. 그래서 소 마구간으로 가보았다.

“어? 엄마, 학교 다녀왔습니다.”

엄마가 소똥을 치고 있었다. 참 힘들어하는 것 같았다. 그래서 나도 헌 신발로 갈아 신고 소똥을 치웠다. … 엄마는 소똥을 다 모아서 퍼 담을 때 너무 힘이 들어 못 들어올리고 있었다.

“엄마, 힘드나? 내가 하꾸마.”

“아이고 고마 됐다. 인제 우리 석이 다 컸네, 게으름도 안 피우고.”

엄마는 나를 보고 씨익 웃었다. 나도 엄마를 보고 씨익 웃었다. 엄마의 얼굴에 땀이 송송 맺혔다. 참 보기가 좋았다. 시간이 자꾸 갔다. 그 많은 똥이 아직 그대로인 것 같았다. 힘들기도 하고 심심하기도 했다. … 엄마가 시집을 와서 어떤 생활했는지 참 궁금하였다.

“엄마, 시집 와가 어떻게 살았노?”

“요자슥, 별걸 다 묻네. 뭐 별다르게 살지는 않았고. 석아, 잘 들어 봐래이. 시집 와 가꼬 아를 놓았는데 지금 큰누나 경자를 낳았어. 딸이라꼬 할매하고 할배한테 처음에는 눈치만 받고 살았거든. 그 다음 또 아를 놓았는데 아들이야. 할매하고 할배하고 좋아서 야단인기라. 할배가 좋다고 개고기를 먹었는데 그기 아기한테 구시라 캐야 되나 뭐라 캐야 되노. 하여튼 구시 옮겨 가꼬 고마 죽었어. 이제는 죽어서 난린 기라. 나는 3, 4일 내도록 울어서 얼굴이 퉁퉁 붓기도 하고 고마 콱 죽었으면 싶데. 또 아를 낳았거든. 남자야. 또 좋아서 난린 기라. 탯줄을 끊어야 되는데 옛말에 낫으로 탯줄을 끊으면 오래 산다 캐. 그래가 할매가 밖에 나가가 밭에 풀 비다가 흙도 다 묻은 낫 가지고 탯줄을 끊은 기라. 그 낫에 있는 독 때문인강 하여튼 병에 걸려서 또 죽어버렸거든. 또 난린 기라. 이번에는 할매 때문에 아가 죽었는데도 내보고 아들 못 놓는다고 인제 집 나가라 캐. 그런데 너거 아빠가 말리가 이래 안 사나. 할배는 갑자기 병에 걸리가 돌아가시뿌고 딸 너이나 낳뿌어, 맨날 할매한테 머러캐이다가 이제 니를 건강하게 낳았어. 할매가 맨날 칭찬하고 인제 살 것 같데. 그 전에는 너거 작은 엄마가 승희하고 승준이, 아들 둘이나 잘 낳았어. 할매가 승희를 내 아로 만들라 캤다가 그때 니를 나가 다행이었다, 아나? 니는 인제 엄마 말 잘 들어래이.”

엄마 말이 끝났다. 엄마가 참 힘들게 살았다는 것을 이제 알 것 같다. 더 중요한 것은 내 위에 형이 둘이나 더 있었다는 것이다. 첫째 형이 살았더라면 지금 나는 물론이고 누나들 모두 없었을 것이다. 이야기를 하는 엄마의 눈에 눈물이 고여 있는 것 같았다. 엄마가 우니까 나도 눈물이 나올 것 같았다. 엄마, 아빠를 실망시키지 않도록 말을 잘 듣고 착하게 살 것이다.

“엄마, 엄마, 퍼뜩 하자.”

소똥을 다 치웠다. 소똥을 다 치고 밖에 나왔다. 엄마가 참 좋았다. 이런 기회가 더 있으면 다른 이야기, 엄마가 나에게 바라는 것에 대하여 이야기해 달라고 할 것이다. 나는 우리 엄마가 가장 좋다. (‘엄마와 소똥을 치면서’ 1997. 12.9 경북 청도 덕산초등 6학년 ‘오효석’의 글)


<글 3-1>

요즘 우리는 IMF라는 한파로 경제 위기에 처해 있다. 이로 인해 실직 가장이 늘고, 어려움에 처해 있는 사람이 많다. 직장을 잃어서 지하철역, 길가 같은 곳에서 하루를 매우 어렵게 지내고, 하루에 한 끼도 못 먹는 신세를 가진 실직자들을 볼 수 있다. 경제적 어려움을 이기기 위해서 여러 곳에서는 많은 노력을 하고 있다. 그러면 경제적 어려움을 이기기 위해서 어떻게 해야 할까?

첫째, 저축하는 습관을 기르도록 하자. 저축을 하게 되면 국가에 많은 도움을 주게 된다. 그러나 우리들은 쓸데없는 곳에 낭비를 할 뿐, 거의 저축을 하는 모습은 어디를 가도 잘 볼 수 없다. 저축을 하면 이익이 생긴다. 목돈도 마련할 수 있고, 자기가 사고 싶은 물건을 살 수 있다. 저축하는 습관을 길러 국가에 많은 보탬이 되도록 하자.

둘째, 아껴 쓰고, 절약하는 생활을 가지자. 경제적 어려움을 이겨내는 데에는 우리 모두가 아껴 쓰고, 절약하는 생활이 필요하다. 100원, 200원 같은 푼돈도 절약하고, 학용품 같은 물건도 아껴 써야 한다. 재활용할 수 있는 물건은 재활용을 하고, 자기에게 필요 없는 물건은 구입을 하지 말아야 한다. 전기도 아껴 에너지 절약에 힘써야 한다. 우리 모두 아껴 쓰고, 절약하는 생활에 힘쓰자.

셋째, 실직자에게 힘과 용기를 주자. 실직자를 비난하고 가까이도 하지 않는다면, 더욱 힘과 용기를 잃을 것이다. 자기 주위에 실직자가 있다면 “아저씨, 힘내세요”라고 따뜻한 말 한마디라도 건네주어야 한다. 그렇게 해야 실직한 아저씨께서 더욱 힘과 용기가 솟아 경제적 어려움을 이겨내는 데 힘쓰실 것이다. 실직자들의 어깨가 축 늘어진 모습을 우리가 보면 얼마나 안타까울까? 그런 모습을 봐서라도 실직자에게 많은 힘과 용기를 주어야 한다.

지금까지 우리는 경제적 어려움을 이겨내기 위해서 해야 할 일을 알아보았다. 저축하는 습관을 기르고, 아껴 쓰고 절약하는 생활을 가지며, 실직자에게 힘과 용기를 주어야 한다. 경제 위기일수록 모두가 힘내고, 용기를 잃지 않고 어려운 사람에게 도움의 손길을 늦추지 않아야 한다. 우리 모두 경제적 어려움을 이기고 참아서 더욱 새로운 모습으로 사회를 발전시키도록 하자. (‘경제적 어려움을 이겨내자’, 5학년의 주장하는 글)


“우리 마을 쉼터 화장실 좀 깨끗이 씁시다”<글 3-2>

사람은 누구나 똥오줌을 눈다. 그 똥오줌을 누지 못하면 큰 병이 나고 끝까지 못 누면 죽는다. 그러니까 똥오줌 누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는 더 말 안 해도 알 것이다. 그러니까 우리가 똥오줌 눌 때 쓰는 화장실도 매우 중요하다. 화장실이 좀 깨끗하고 문이 튼튼하면 똥이 잘 나온다. 더러워서 뭐가 묻을까 하는 불안감도 없고, 누가 들여다본다는 불안감도 없고, 문 잠금장치가 튼튼하니까 누가 함부로 들어온다는 불안감도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우리 마을 쉼터에 있는 화장실을 보면 정말 속이 뒤집힌다. 화장실을 지은 지 얼마 안 되었을 때다. 쉼터에서 놀다가 뒤가 급해서 가까이에 있는 쉼터 화장실에 들어갔다. ‘이럴 때 이런 화장실이 필요하지. 거 참 잘 만들었네’ 하면서 말이다. 그렇게 중얼거리며 화장실 문을 여는 순간 완전히 그 생각이 싹 없어졌다. 냄새가 코를 팍 찌르는 것은 말할 것도 없고, 발판 주위에는 똥이 더덕더덕 묻어 있고 벽에도 아무 곳에나 오줌을 누어서 얼룩덜룩했다. 또 바닥에는 오줌이 강줄기처럼 흥건히 고여 있었다.

“아이, 여기서 똥을 누야 되나 말아야 되나? 우야꼬?”

급해서 할 수 없이 똥을 눴다. … 이렇게 똥오줌을 아무렇게나 누는 사람은 누굴까? 우리 마을 사람도 있겠지만 내가 알고 있기로는 다른 곳에서 우리 마을 가까이로 놀러 온 사람들이 대부분이다. 누가 그랬거나 처음부터 좀 조심해서 똥오줌을 누면 될 것인데 아무 생각 없이 볼일을 보다가 변기 가에 묻혀 놓거나 변기 밖에 오줌이 고이도록 한 것이다. 아무리 깨끗해도 처음 누가 조금 더럽게 해 놓으면 그 뒤부터는 말 안 해도 뻔하다. ‘에라이, 아무 데나 적당히 볼일 보자’ 하고는 눈 질끈 감고 볼일 보고는 뒤도 안 돌아보고 나와버리는 것이다.

… 화장실을 더럽게 쓰는 것 말고 또 한 가지 큰 문제는 화장실을 부수는 것이다. 화장실이 지어진 지 얼마 안 되었을 때 일이다. 놀러 온 아이들이 화장실 문에 매달려서 그만 내려앉아버렸다. 그때부터 문이 제대로 맞지 않아서 잘 닫히지 않는다. 문을 닫으려고 밀면 분필로 칠판에 글씨 쓸 때 잘못하면 ‘찌이익’ 소리가 나는데 그 소리보다 더 듣기 싫은 소리가 난다. ‘끼이익, 뿌지직’ 하고 소리가 난다. 그리고 그때부터 문을 닫아도 언제나 뻘쭘이 열려 있다. 누가 깨어놓았는지 창문도 박살이 나 있다. 아마 어른들 짓은 아닐 것이고 틀림없이 아이들 짓일 것이다. 놀다가 실수로 깨었으면 또 모르겠는데 깨어진 꼴로 보면 우리 형들쯤 되는 아이들이 돌 같은 것으로 맞히기 시합을 한 것 같다. 화장실 문이 열려 있고, 유리창이 깨어진 뒤로는 가까이만 가도 냄새가 더 난다. 그런데도 다른 곳에서 놀러 온 사람들은 화장실 가까이서 천연스럽게 고기를 구워먹는다. 그 고기가 어떻게 목구멍에 넘어가는지 모르겠다.

… 지금까지 몇 가지 문제를 말했지만 편리하게 쓰라고 만든 화장실이 무슨 죄가 있다고 그 모양을 만들어 놓는지 모르겠다. 마을 어른들은 힘은 들겠지만 좀더 자주 청소하고, 고장 나면 바로 좀 고쳤으면 좋겠다. 그리고 놀러 오는 사람들이나 우리 마을 사람들은 화장실을 쓸 때는 좀 깨끗이 썼으면 좋겠다. 화장실 쓰는 모습을 보면 그 사람들의 문화 수준을 알 수 있다고 한다는데, 우리 마을 쉼터에 있는 화장실을 쓰는 사람들은 대부분 문화 수준이 낮은 것일까? 낮다고 하면 화를 내겠지? (‘우리 마을 쉼터 화장실 좀 깨끗이 씁시다’, 1997. 11.21, 경북 청도 덕산초등 6학년 ‘윤영웅’의 주장하는 글)


삶은 없고 머리로만 쓴 글

 

<글 1-1>은 어른의 흉내를 내어 아주 그럴듯하게 꾸며 썼지만 아주 가짜다. 그러니 감동이 있을 수 없다. 삶에서 우러나온 글이 아니고 머리로 쓴 글이다. 흔히 문학교육이라 해서 이렇게 고상하게 꾸며 쓰도록 지도 받으면 이런 글을 쓸 수밖에 없다.

 

내가 시를 잘 몰라서 그런지는 모르겠지만 어른들의 시에서도 이런 글은 흔하다. 자신의 삶을 있는 그대로 쓰면 될 것을 조그만 물건이나 조그만 일 하나를 놓고 온갖 인생이 다 담겨 있는 것처럼 쓴다거나 아무것도 아닌 걸 괜히 이리 꼬고 저리 꼬아서 고상한 것처럼 만든 글이 얼마나 많은가. 그래서 나는 어려운 어른들의 시보다는 삶이 생생하게 드러나 있는 아이들의 시를 더 좋아한다.

 

<글 1-1>에 견주어 <글 1-2>는 어떤가? 읽어보면 가슴이 뭉클하다. 시골 아스팔트길에서 일어난 일을 시로 쓴 것이다. 온 나라의 들을 가로지르고 산을 뚫고 까뭉개 훤하게 길을 내었다. 가고 싶으면 어디든지 쉽게 잠깐 동안에도 다녀올 수 있는 참 편리한 세상이다. 이것을 발전이라고 해야 하나? 그런데 이것으로 해서 동물들이 얼마나 많이 수난을 당하고 있는지 잘 알 것이다. 차를 타고 시골길에 나가 보면 얼마 안 가서 온갖 동물들이 차에 치여 처참하게 죽어 있는 모습을 볼 수 있을 것이다. 처음에는 참 안타깝게 생각하더니만 이제는 그것도 예삿일로 여기는 것 같다. 그냥 슬쩍 피해 갈 뿐이다. 그런 세상이다.

 

그런데 <글 1-2>에 나타난 아이의 마음은 참으로 따뜻하다. 개구리 알을 논에 넣어주는 행동이라든지 엄마 없다고 너무 많이 울지마라고 하는 말은 진짜 동심을 가지고 있는 아이가 아니면 할 수가 없다. 어떤 어른이 이런 마음을 가지며 어떤 어른이 이런 시를 쓸 수 있겠나.

 

가짜 글은 그럴듯해 보여도 설득력이 없다

 

<글 2-1>과 <글 2-2>는 겪은 일을 쓴 글이다. <글 2-1>은 오래 전 어느 글쓰기 대회에서 장원으로 당선된 작품이다. ‘할아버지에 대한 그리움’을 나타내어 쓴 글인 듯싶다. 이것 역시 어른들의 문학작품을 흉내내어 쓴 글이다. ‘물결’이란 제목에 할아버지 이야기를 끌어다 붙여 재주를 부린다고 부린 글이다. 자기가 겪은 일이 아닌 일을 만들어 머리로 짜 맞추어 꾸며 쓰다 보니 아주 이상한 글이 되어버렸다. 가짜 글이라도 이런 가짜 글이 어디 잘 있을까 싶다.

 

<글 2-2>는 어떤가? 더 설명할 것도 없이 가슴 뭉클한 글이다. 자기 삶 이야기를 솔직히 있는 그대로 드러내어 썼기 때문이다. <글 2-1>처럼 공연히 그럴듯하게 쓰려고 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을 그대로 보여 준다. 어른들도 이렇게 생생하게 글을 써야 한다.

 

<글 3-1>과 <글 3-2>는 주장하는 글이다. 그 둘 가운데 <글 3-1>은 공식처럼 틀이 짜여진 주장글이다. 다 맞는 말이지만 설득력이라곤 조금도 없다. ‘또 이런 글을 썼구나.’ 이 생각밖에 안 드는 글이다. 말할 것도 없이 삶이 없고 제 생각이 없다. 주워 들은 지식이고 어른들의 말을 듣고 그대로 옮겨놓은 것이다. 어른들이 쓰는 글도 이렇게 뻔히 아는 이야기를 관념으로 써서는 아무 설득력이 없다는 말이다.

 

<글 3-2>를 보면 글 쓴 아이의 생활과 바로 관계되는 이야기다. 누가 봐도 ‘참 그렇구나!’ ‘쉼터에 있는 화장실이고 어느 화장실이고 바르게 잘 써야 되겠구나!’ 싶은 생각이 들고 또 틀림없이 그렇게 행동하게 되어 있다. 이런 글이 진짜 주장하는 글이다. 어설픈 지식만 가지고 주장을 하면 설득력이 있을 수가 없다.

 

이제 진짜 글이 무엇인지 잘 알았을 것이다. 글은 무슨 기술로 쓰는 것도 아니고 재주 있는 사람만이 쓰는 것도 아니다. 글쓰기 전에 먼저 삶이 참되어야 한다는 것, 땀 흘리며 열심히 일해야 한다는 것, 사랑하는 마음이 있어야 한다는 것, 의식이 또렷이 서 있어야 한다는 것쯤은 모두 알고 있을 터이다. 그것이 바탕이 안 되어 있고 기교만 가지고 글을 쓰는 사람에게선 진짜 글이 나오기 어렵다.

 

어느 대학 논술고사 답안지의 80%가 비슷하게 나왔다고 한다. 열이면 열 모두 자기 생각이 나와야 하는데 자기 생각이 아니고 모두 책에 들어 있는 지식으로만 썼기 때문이다. 그런 방법으로 잘 쓰려고 하니까 얼마나 힘이 들겠나. 글은 쉽게 써야 한다. 다음 글은 아주 늦게 한글을 겨우 배워서 쓴 이옥남 할머니의 일기다. 연세가 올해 여든둘이다.

 

여든둘, 이옥남 할머니의 일기

[6월 26일 흐림]

건너 밭에 깻모종을 심었다. 어제 심다가 못다 심어서 오늘도 가서 심었지. 심는데 새소리가 들리는 것이 별 새가 다 있다. 호호로 백쪽쪽 하고 버드낭그에 올라앉아서 우는 것 같은데 어떻게 생겠는가 하고 아무리 찾아봐도 못 찾아서 결국은 못 보고 말았네. 뻑국새 우는 소리를 들으면서 하루 종일 깻모종을 하고 올 때는 길을 비었다. 밭에 가는 길이 너무 풀이 무성하게 자라서 어제는 뱀이 풀섶에 또배사리 하고 공중 올라앉은 걸 집으로 오다가 보고 얼마나 놀랬는지 집에 와서도 가슴이 두근두근 무서운 끝에 오늘은 집으로 오면서 길을 좀 대충 비면서 왔다.

[6월 27일 비]

오늘은 깻모종 심으러 갔다가 비를 졸딱 맞고 왔다. 깻모종을 심으면서 희망을 생각했다. 이 깨가 클 때 깨 대궁에 잎눈마다 새끼 가지가 차면서 크겠지. 또 가지 끝에 잎 피는 눈에는 꽃이 피어서 꼬생이가 생겨 가지고 깨알이 날이 갈수록 여물지. 가을이 되면 다 여물어서 그제서는 낫으로 깨를 꺾어야지. 꺾어 세웠다가 한 십일 정도나 십오일 정도 되면 다 말라서 갑바 깔고 막대기로 털어서 키로 까불어서 한 이삼일 말려서 두고 정도 맞게 나눠서 기름 짜서 먹고 나누어준다. 그 생각하면 깨를 심느라고 허리가 아파도 참고 억지로 하루 해를 채우며 심고 가꾼다. 농사일이라면 뭔 농사구 다 이와 같다. 그래서 힘든 줄 모르고 허리 아파도 참고 풀을 호미로 매고 밭머리 칡넝쿨이며 여러 가지 덤불이며 별별 풀이 다 들이뻗은 걸 낫으로 빈다.

밭에 하루만 안 가봐도 손들어갈 틈도 없이 풀이 나는데 비 때문에 밭에 못 가니 애가 난다. 장마 며칠 치르고 나면 또 밭에 말도 못할 풀이 나올 것을 생각하니 걱정이 태산이다. (한국글쓰기연구회 회보, ‘글쓰기 제95호’에서 따옴)

이틀 동안 쓴 일기인데도 시골에서 농사지으며 살아가는 할머니의 모습이 눈에 보이는 듯하다. 모두들 이렇게 일기쓰기부터 글쓰기를 시작했으면 싶다. 생각해 보면 우리가 살아가는 모든 분야에 글이 없는 곳이 없다. 글을 안 쓰면 생각이 틀에 박혀 자기 발전이 없다. 대학 시절 리포트 써 본 뒤로는 글쓰는 걸 아주 손 놓아버린 사람들, ‘나는 쓸 것이 없어’ 하는 사람들, ‘나는 글재주가 없어’ 하는 사람들은 지금부터라도 나의 진정한 이야기를 써보자. 누구든 언제 어디에 어떤 위치에 있든 제 나름대로 온갖 일들을 겪으며 살아가는데 그걸 있는 그대로 말하듯이 꾸밈없이 솔직하게 써보자.

<출처:신동아 2003년 11월호 통권 530호 특별부록|가슴으로 글쓰기>

 

글: 이호철 경북 장산초 교사 lhch52@hanmail.net
안동교육대학을 졸업하고 경북 지역 농촌학교에서 아이들을 가르치고 있다. 지금은 경북 경산 장산초등학교에 있으며 ‘한국글쓰기연구회’ 회원으로 우리말과 삶을 가꾸는 글쓰기 교육에 전념하고 있다. 저서로 ‘살아 있는 그림 이야기’ ‘재미있는 숙제, 신나는 아이들’ ‘학대받는 아이들’ 등이 있다. 논길 따라 등교하는 농촌 아이들. 자기가 겪은 대로, 생각한 대로 써야 ‘진짜 글’이다. 추수를 돕는 아이들. 글쓴이의 생활과 바로 관계되는 이야기라야 읽는 이에게 감동을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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