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줌마의 창작론
말하기 보다 쉬운 글쓰기
머리에 떠오른 첫 문장은 그 다음 문장을 끌고 나오는 힘이 있다. 그 힘을 믿고 따르는 게 중요하다. 그렇게 써나가다 보면 정말 쓰고 싶었던, 형체가 분명치 않았던 진짜 ‘자기 생각’과 만날 수도 있다.
올여름은 덥지 않았다. 쨍쨍한 여름 햇빛을 본 날을 손가락으로 꼽아야 할 정도였다. 빗소리를 좋아하는 나는 은근히 신이 났고, 끔찍한 열대야가 없어 살맛 났다. 그러면서도 한편으론 농사가 안 되겠다 싶어 은근히 걱정했는데 태풍 매미가 확실하게 걱정을 현실화시켜놓고 갔다. 그러니 시원한 여름이라 좋아라했던 것이 몹시 마음에 걸린다. 시원한 여름? 무덥지 않아 좋은 여름 내내 그래 무엇을 했나. 제대로 글 한 줄 쓰지 않고 시원한 빗소리 들으며 쓸데없는 돈걱정, 생계걱정만 지겹게 했다. 생각해보니 열심히 글을 썼던 날들은 대체로 사람 쪄 죽이게 무더운 열대야였다. 그런 낮과 밤에 곡식과 과일들도 죽어라고 여물어 갔을 것이다.
글쓰는 일에 적합하고 쾌적한 환경은 따로 없다. 내가 아는 문인들 중 더러 산 좋고 물 좋은 곳에 집필실을 마련한 경우가 있어 한동안 그들을 부러워했다. 그런데 그들에게 그곳에 가면 글 참 잘 써지겠다고 하면 하나 같이 고개를 젓는 것이었다. 자기도 그럴 줄 알았는데 좁은 아파트에서 식탁을 책상 삼아 쓸 때와 큰 차이가 없더라는 이야기였다.
풀꽃에 관한 아름다운 글 한 편은 비좁고 어두운 부엌의 식탁이나 온갖 잡동사니가 쌓여 있는 골방의 책상에서 씌어질 가능성이 더 높다. 글을 쓰고자 하는 열망은 대상에 대한 결핍이나 그리움에서부터 시작되는 것이고, 한 편의 글을 끝냈을 때 결핍과 그리움의 빈 자리에 ‘나의 풀꽃’ 하나가 작은 형태로나마 완성된다. ‘가슴으로 쓰는 글’이라면 당신이 지금 처한 환경, 예를 들면 오랜 경기침체로 인한 생활고, 실업, 자녀의 교육(과외)문제, 실연, 실패, 절망 등에서도 얼마든지 출발할 수 있다. 일단 글을 쉽게 시작할 수 있는 방법과 읽는 이에게 감동과 공감을 불러일으킬 수 있는 ‘가슴으로 쓰는 글’의 특징을 알아보자.
횡설수설하더라도 일단 시작한다
글쓰기는 시작이 어렵다. 누구나 그렇게 말한다. 지금 이 글을 쓰고 있는 나 역시 원고 청탁을 받은 후 닷새 가량을 ‘빨리 시작해야지, 해야지, 그런데 어떻게 써야 할까?’와 같은 막연한 생각만 하면서 시간을 보냈다. 하지만 실제로는 컴퓨터 앞에 앉기가 싫어서 온종일 텔레비전만 본다거나 갑자기 안 하던 책상서랍 정리를 시작하고 친구에게 전화 걸어 긴 수다를 떨곤 했다. 있는 대로 뜸을 들이다가 다급해지면 쩔쩔매면서 할 수 없이 시작한다. 일찌감치 쓰기 시작해 마감 전에 원고를 끝마치고 좀 여유 있게 수정을 해서 최종 원고를 넘길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늘 같은 후회를 반복한다.
시작이 어려운 가장 큰 이유는 글쓰기에 대한 공포 때문이다. 이 공포는 자신이 쓰고자 하는 글에 대한 특별한 계획이나 아이디어가 없는 경우의 ‘막연함’과 잘 써야 한다는 ‘부담감’에서 비롯된다.
글을 쓰고자 할 때 느끼는 이 막연함은 글쓰기에 대해 우리가 공통적으로 갖고 있는 착각과 관계가 있지 않을까. 즉 생각은, 가만히 앉아서 해야만 하는 ‘조용한 어떤 일’이라고 착각한다. 그래서 내가 써야 할 글에 대한 밑그림이 머릿속에 어느 정도 윤곽을 갖추었을 때 글을 시작할 수 있다는 일종의 강박증에 시달린다. 그런데 조용한 시간에 책상 앞에 앉아서, 혹은 소파에 비스듬히 드러누워서 써야 할 글에 대해 하는 생각이란 괜한 시간낭비일 경우가 더 많다.
자, 여기서 내리는 결론은 글은 미리 생각하고 쓰는 것이 아니라 쓰면서 생각을 진행시켜 나가야 한다는 것이다. 쓰는 행위와 함께 진행되는 생각은, 그 생각이 끊임없이 한 방향으로 가게끔 우리를 통제하며 그 스스로 활성화되어 아이디어를 이끌어 온다.
나는 이 글의 첫 줄을 ‘올 여름은 덥지 않았다’로 시작했다. 특별한 아이디어가 떠오르지 않는다고 막연히 ‘생각’만 하고 있다가는 큰일나겠다 싶어 가장 먼저 머리에 떠오르는 일상적인 말을 적어놓고 본 것이다. 글을 쉽게 시작하려면 머리에 떠오르는 그 어떤 말이라도 첫 문장화할 수 있는 용기가 필요하다. 그리고 첫 문장은 수정 작업을 할 때 지워도 되고 고쳐도 된다. 첫 문장을 써놓고 생각은 쓰면서 한다.
또 잘 써야 한다는 부담은 처음부터 잊어버리자. 지면에 활자화되어 나오는 글 중 90% 이상이 여러 차례 수정작업을 거친 것이다. 완벽에 가까운 그런 글을 모델로 나도 처음부터 멋진 문장을 쓰겠다고 어깨에 힘이 들어가면 더 이상 한 줄도 쓰기 어렵다. 지금 쓰고 있는 글이 횡설수설 해도 좋고, 일관성이나 통일성 없는 글이 되어도, 인식의 깊이가 결여된 표피적인 글이어도 좋다. 그래도 나는 글이 가자는 대로 일단 쓰고 보겠다는 배짱으로 밀고 나가야 한다.
머리에 떠오른 첫 문장은 그 다음 문장을 끌고 나오는 힘이 있다. 그 힘을 믿고 따르며 문장을 진행시키는 것이 중요하다. 그렇게 써나가다 보면 정말 쓰고 싶었던, 형체가 분명치 않았던 진짜 ‘자기 생각’과 만날 수도 있다. 여기서부터 글쓰기의 즐거움은 시작된다.
초등학교 4학년 무렵 명작동화인 ‘플랜더즈의 개’를 읽고 많이 울었던 기억이 있다. 그리고 몇십 년이 지난 뒤 우연히 다시 읽게 되었는데 놀랍게도 또 눈물이 났다. 내가 다른 사람들보다 유별나게 감정이 여리고 풍부해서인가. 그렇지 않다. 슬픈 영화를 볼 때, 다른 사람들 다 울어도 나는 잘 안 우는 편이다.
나이가 사십이 넘어 동화책 읽고 우는 내가 참 신기하기도 하고 해서 그 동화에 대한 글을 한 편 써보기로 하고 컴퓨터 앞에 앉았다. ‘이 동화의 주인공인 네로라는 소년이 너무 불쌍하다’라고 첫 문장을 시작했다. 그리고 왜 네로가 그렇게도 불쌍하게 여겨지는가 하나하나 짚어가다 보니 ‘아, 네로의 죽음은 누가 뭐라 해도 자살이며, 정신과 의사들이 말하는 자살의 여러 가지 조건에 모두 부합된다’는 생각에 이르렀다. 그리고 이런 가혹한 상황이 착하고 재능 있는 어린 소년에게 주어졌다는 점 때문에 마음이 아팠음을 깨달았다. 네로는 얼음보다 더 차가운 성당의 바닥에서 얼어죽었다. 이 또한 얼마나 기가 막힌 일인가. 그 성당은 네로가 그렇게 보고 싶어하던 그림에 휘장을 쳐놓고 돈을 내야만 보여주었다. 어려운 상황에 몰리고 몰린 인간이 마지막으로 구원을 청하게 되는 대상은 신(神)이다. 네로는 그 신의 발 밑에서 스스로 얼어죽기를 택한 것이다.
나는 네로의 죽음에 대한 한 편의 글을 끝낼 수 있었다. 글을 시작하지 않았다면 나는 이러한 나의 ‘진짜 생각’과 만나지 못했을 것이다. 분주한 일상사가 가만히 앉아서 이런저런 생각을 하게끔 놔두질 않기 때문이다. 그냥 아, 몇십 년 만에 읽어도 감동적이니 명작은 명작이로구나에서 멈춰버렸을 것이다. 진짜 자기 생각이란 언제나 그 모습을 감추고 있다. 생각의 저 끝에 불분명한 모습으로 당신이 다가와주길 기다린다. 다가감의 가장 좋은 방법이 글쓰기라고 나는 생각한다.
길가에 구르는 돌 하나가 장편소설이 된다
가슴으로 쓰는 글이란 읽는 이에게 감동과 공감을 주는 글이다. 그러면 어떤 것을 써야 할까의 문제가 대두된다. 글쓰는 일이 익숙지 않은 사람은 여기에서부터 헤맨다. 지나간 일들 중에 특히 아름다웠던 기억이나 인상적인 기억들 속을 찾아 헤매다 책상 앞에 앉아 별별 것을 다 기억해내느라 점점 더 산만해지고 곧 지쳐버린다.
‘어떤 것을 써야 할까’라는 질문의 ‘어떤 것’은 글감에 해당된다. 이 글감은 당신의 기억 속에 차곡차곡 저장되어 있다가 당신이 필요로 할 때 시간 맞춰 나타나주는 것이 아니다. ‘뭘 쓸까?’ 막연히 살아온 모든 날들의 그 방대한 기억 속을 헤매는 것은 마치 잃어버린 단추를 찾으려고 온 산을 뒤지는 것과 다름없다. 쓸 글의 글감은 당신이 선택하는 사물들 뒤에 그림자처럼 붙어 있다. 예를 들어 ‘산’이라는 낱말을 하나 써 놓았다고 하자. 그러면 산과 관련된 당신의 기억이 조금씩 그 모습을 드러낸다.
‘산’이라는 단어를 써 놓고 나면, 어릴 적 놀던 뒷산에서부터 등산 갔다가 길을 잃고 큰일날 뻔했던 기억, 산에서 만나 인연을 맺게 된 사람, 혹은 산 같은 이미지의 존경하는 그 누군가의 기억이 줄줄이 딸려 나온다. 그 중에서 가장 쓰고 싶은 것을 선택하면 된다.
‘토지’의 작가 박경리씨는 “길가에 구르는 돌 하나를 두고도 장편소설을 지을 수 있다”고 했다. 이게 무슨 말일까. ‘길가에 구르는 돌 하나’는 우리 주변에 있는 흔하디 흔한 것이고, 쉽고 익숙한 것이다. 그리고 우리의 일상은 대부분 별로 특별할 것 없는 나날들로 이루어진다. 길가에 구르는 돌 하나를 두고도 장편소설을 지을 수 있다는 말은 소설이라는 게, 또 글이라는 게 특별하지 않으며 쉽고 익숙하다는 얘기가 된다. 직장에 나가는 것, 실직 상태의 괴로움, 부부간의 갈등, 친구의 배신 등이 모두 글감이 될 수 있고, 우리는 글감 속에 파묻혀서 정작 좋은 글감을 보지 못한다는 말도 된다. 자신을 에워싸고 있는 일상, 그 많은 글감 속에서 당신은 어떤 것이 자신에게 가장 적합한 글감인가를 알아야만 한다.
우선 당신이 아주 잘 아는 것을 글감으로 선택해야 한다. 여기서 ‘잘 아는 것’은 지식이나 경험을 뜻하는 것이 아니다. 직장에서 당신이 담당하고 있는 일에 대해, 또 당신의 자녀에 대해, 당신이 소중하게 생각하는 사람이나 물건에 대해 누가 당신보다 더 잘 알겠는가.
또 ‘잘 아는 것’은 글감의 범위를 좁히고 한정한다는 뜻이다. 막연히 ‘가을’이라는 제목으로 글을 쓰려고 해서는 안 된다. ‘가을이면 가고 싶은 곳’이라든가 ‘출근길의 가을’ 등 가을과 관련은 있되 범위를 한정하고 시작해야 한다.
‘잘 알고 싶은 것’, 즉 당신이 관심을 가지고 있는 것들 중에서 글감을 고르는 것도 좋은 방법이다. 이것은 당신의 호기심을 충족시키며 동시에 글쓰기의 발전을 도모하는 길이기도 하다. 만약 신화에 관심이 있다면 관련 서적을 읽어나가며 신화의 세계와 현실 세계, 그리고 신화 속에서 살았던 인물들의 전형적인 특징 등을 당신이 쓰는 글에 충분히 용해시켜 쓸 수 있다. 다음의 예문은 귀신에 관한 이야기이다. 조금 길더라도 끝까지 읽어보자.
잘 알고 있는 것, 알고 싶은 것 그리고 자기 생각
전라도의 한 섬인 우리 고향에서는 오뉘죽이라는 팥죽을 즐겨 먹는다. 큰 무쇠솥에 쌀과 팥과 물을 넣고, 소금으로 알맞게 간을 한 다음, 쌀과 팥의 형체가 완전히 허물어지고, 그 향미가 미묘하게 어우러질 때까지 장작으로 불을 지펴 만든 죽이다. 조리법은 이렇게 매우 간단한데 문제는 소금이다. 옛날에는 바닷물을 가마솥에 넣고 불을 때어 얻어낸 화염을 썼으나, 해방을 전후해 더 이상 제조되지 않은 이 화염의 자리를 천일염이 대신 차지하였다. 천일염은 알다시피 바닷물을 햇빛에 말려 얻은 소금이다. 오래 전에 돌아가신 우리 외할머니는 소금이 바뀐 뒤 제 맛을 지닌 오뉘죽을 먹을 수 없다고 마지막 병석에서까지 한탄하셨다. 천일염은 화염의 맛을 따라가지 못한다. 그러나 오뉘죽에 넣은 소금이 화염인지 천일염인지 그 맛을 구분할 줄 알기로는 내가 아는 사람 가운데 외할머니가 마지막 사람이었다.
그래서 나는 외할머니가 세상을 뜨면서 오뉘죽의 맛을 진정으로 아는 혀도 이 세상에서 사라졌다고 생각한다.
내가 천일염에 관해 나쁘게 말해서는 안 된다. 사실 우리 고향 섬은 한국에서 단위지역으로는 한때 가장 많은 천일염을 생산했고, 그 염전의 대부분이 논으로 바뀐 지금도 시장에서 가장 질이 좋다고 평가되는 소금이 이 섬에서 나온다. 내가 어렸을 때, 섬의 어른들은 모두 소금 맛의 귀신들이었다. 소금 한 알갱이를 입에 넣으면, 섬의 동쪽 염전 소금인지 서쪽 염전 소금인지, 초여름 소금인지 늦가을 소금인지, 거짓말같이 알아맞혔다. 내 말이 믿어지지 않는가, 그러나 사실이다. 이 어른들은 지금 거의 모두 세상을 떴으며, 살아 있더라도 80줄의 노인이다. 내 또래 이후의 힘깨나 쓸 만한 장정들은 하나같이 서울 사람이 되었고, 소금의 생산방식도 이모저모로 달라졌으니, 이 어른들을 마지막으로 소금 맛을 아는 미각이 사라질 것이며, 아예 소금 맛이라는 것조차 없어지고, 이 세상의 모든 소금은 그저 짠맛을 지닐 뿐이리라.
나는 방금 ‘소금 맛의 귀신’이라고 말했는데, 초여름 소금과 가을 소금의 미묘한 차이를 만드는 것 그 자체가 귀신의 조화라고밖에는 여길 수 없다. 한때 이 땅에는 그런 귀신들이 참 많았다. 안방에는 술을 익게 하는 귀신들이 있었고, 건넌방에는 메주를 띄우는 귀신들이 있었다. 우리 할아버지는 생전에 건넌방에는 결코 술항아리를 들이지 못하게 하셨다. 술이 메주를 탁한다는 것이었다. ‘탁한다’는 말은 닮는다는 뜻이다. 술항아리가 건넌방에 들어간다고 해서 메주를 닮다니, 어린 시절의 나는 이런 생각을 도저히 이해할 수 없어, 일종의 미신일 것이라고만 치부했다. 안방에는 누룩곰팡이의 뜸씨가 살고 있고, 건넌방에는 메주곰팡이의 뜸씨가 살고 있다고 깨닫게 된 것은 아주 훗날의 일이었다. 어느 집이든, 집에는 성주신이 있고, 부엌에는 조앙신이 있고, 변소에는 측신이 있는데, 이 신들은 모두 뜸씨들과 다른 것이 아니라고 이제 나는 생각한다. 이 신들은 우리와 함께 살아왔고, 우리와 함께 그 영검이 깊어졌으며, 또한 우리 운명의 많은 부분을 지배했다. 그것들은 우리와 숨결을 교환하고 냄새를 교환했다. 그것들은 우리의 고독한 몸을 세상의 만물과 이어주는 연결선이며, 그렇게 맺어온 관계의 흔적들이며, 세상과 사랑을 나눈 내력들이며, 우리 마음속 깊은 곳에 남은 기억의 시간들이었다. 그 귀신들의 조화 속을 몸과 마음의 가장 깊은 곳에서 느끼며 살아가는 동안, 저 오뉘죽의 마지막 혀였던 우리 외할머니처럼 우리들도 모두 죽기 전에 귀신이 된다. 그래서 이 귀신들이 없다면, 한 사람이 백년을 살았어도, 단 한 시간도 살아보지 못한 셈이 된다.
우리 가족이 서울로 모두 이사한 후, 어머니는 며느리인 내 아내에게 청국장 담는 법을 가르치려고 일곱 번 콩을 삶았으나 일곱 번 모두 실패하셨다. 고향집의 청국장 귀신이 서울의 아파트에까지는 따라오지 않은 것이다. 이후 나는 제사상 앞에 절을 해도 건성으로만 한다.
이미 우리 집에 귀신이 없어졌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귀신들은 사라졌다. 내 몸과 마음은 이 세상의 어떤 것과도 진정으로 연결되지 않을 것이며, 내가 살아온 흔적은 모두 규격봉투에 담겨 구청의 쓰레기차에 실려 갈 것이다. 어느 골목길을 돌아가야 그 귀신들을 다시 만나고 이 삶의 영검을 회복할까. (황현산 ‘그 귀신들 어디가고’)
고향의 소금 이야기에서 시작한 위의 글은 소금맛을 귀신처럼 정확히 분별하는 어른들의 이야기에 이어 이 땅의 민속적 귀신들의 의미와 귀신이 가차없이 사라져버린 도시생활의 현실을 별다른 수사 없이 담담하게 쓴 글이다. 그런데 글의 마지막 부분인 ‘귀신들은 사라졌다…’에 이르면 오싹함마저 느껴진다. 고향과 소금과 옛날의 다정한 귀신들 이야기를 읽다가 그만 급소를 찔린 기분이다. 이런 감동은 우리가 그럭저럭 다 감지하고 있지만 언어로 표현하지 못하고 있던 것, 가슴 저 밑바닥에 실존적 불안의 형태로 고여 있던 것을 지극히 평이한 문장으로 나타냈기 때문이다.
글의 앞머리에서 필자는 자신이 ‘잘 알고’ 있는 고향의 소금이야기에 대한 자세한 기억들을 우선 떠올리고 그 다음 필자가 유년시절에 신기해 하면서도 의아했던 귀신들의 이야기를 꺼낸다. 이것은 필자가 ‘알고 싶었던 것’에 해당된다. 그리고 글의 마지막 부분에 ‘진짜 자기 생각’을 덧붙였다.
이 글의 필자는 대학교수이자 문학평론가이다. 그러니까 이렇게 쓸 수 있겠구나 하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 글에 전문용어나 어려운 단어가 있는가. 전혀 없다. 자신에게 적절한 글감을 선택해서 글쓰기 연습을 지속적으로 한다면 당신은 더 좋은 글을 쓸 수도 있다.
솔직함과 냉정함이 주는 감동
나는 솔직한 글을 좋아한다. 솔직한 글은 읽는 재미도 있고 감동도 있다. 그러면 말을 솔직하게 하는 사람은 글도 솔직하게 쓸까. 꼭 그렇지는 않다. 내 주변에 ‘정말 어쩌면 이렇게 솔직한 사람이 있을까’ 할 정도로 말을 솔직하게 하는 사람이 있었다. 그런데 그 사람이 쓴 글을 보고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글은 말처럼 솔직하지 않았고, 뭔가 멋지게 써보려고 꾸민 흔적이 역력했다. 그래서 나는 솔직한 글을 쓰는 것이 솔직한 말을 하는 것보다 어려운가 보다 생각했다.
솔직한 글이란 글을 통해 고백을 하는 것이다. 고백은 말로 하면 되지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그러나 말로 하는 고백은 늘 불충분하다. 몇 마디 말로 자신의 마음을 대충 요약하는 정도이거나 상황에 따라 자신의 고백을 적당히 미화할 수도 있다. 이러니 말로 하는 고백이 100%의 진실이라고 보기 어렵다.
그래서 글을 쓴다. 논문이나 기사를 제외한 나머지 글들은 거의 다 그 근원이 ‘고백’이라고 생각한다. 고백을 제대로 하자면 용기가 필요하다. 첫 문장을 ‘나는 물건을 훔친 적이 있다’ ‘나는 건달로 살고 싶었다’ 등으로 시작할 용기 말이다. 자신의 마음 저 밑바닥에 있는 열등감이나 욕망 등을 가장 먼저 꺼내놓고 글을 시작할 용기가 있다면, 그리고 그것을 글의 주제와 연결시킬 수 있다면, 글쓰는 일의 즐거움을 온몸으로 느낄 수 있다.
솔직하게 글을 쓰는 것은 자신의 모습을 객관적으로 바라볼 수 있는 시선을 확보하는 것과도 직결된다. 자신의 과거와 현재의 모습을 마치 다른 사람 보듯이 바라볼 수 있는 여유와 냉정함이다. 자신과의 거리확보를 가능케 하는 것은 자기연민으로부터의 자유를 뜻하기도 한다. 형편없는 글들을 보면 대부분 자기 연민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거나 자기과시용에 불과함을 알 수 있다.
자신을 소중하게 여기는 것은 중요하다. 그러나 잠실 야구장이나 상암 축구장에 앉아 있을 때, 출근길 지하철역 계단을 느린 폭포처럼 흘러내리는 억수로 많은 군중 속에 있을 때, 당신은 무엇을 느끼는가. 그 속에서도 ‘이 세상에서 나만이 가장 중요한 존재다’라며 행복해 할 수 있는가.
‘나는 너다’라는 명제가 있다. 나를 연민 없이 바라보는 타인들의 무심한 시선 속에 수많은 내가 존재한다. 당신은 자신이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수많은 모습을 지닌 타인이다. 그리고 그 복합체이며 그 복합체를 비추는 것이 있다면 거울이다.
즉 당신은 당신이 아니다. 그러므로 진정한 당신의 마음이 담긴 글을 쓰려면 자신과 거리를 두어야 함은 물론 자신과 관련된 이 세계의 온갖 것들, 그 중에서 글을 쓰고 싶게 만드는 ‘그리움과 외로움’에게조차 거리를 두는 냉정함이 있어야 한다.
<출처:신동아 2003년11월호 통권 530 호 특별부록 가슴으로 글쓰기>
글: 전영주 작가 jen6297@kornet.net
1986년 마로니에 백일장에서 시 ‘물’로 장원을 했고, 1988년 ‘심상’ 신인상을 받으며 등단했다. 동국대 예술대학원 문예창작과를 졸업. 시집으로 ‘물 속의 물방울’ ‘붉은 닭이 내려오다’와 수필집 ‘밥하기보다 쉬운 글쓰기’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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