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세 컨텐츠

본문 제목

재미있는 삶, 맛있는 글

읽고쓰기---------/좋은글쓰기

by 자청비 2007. 12. 1. 13:15

본문

내 글맛의 비결
재미있는 삶, 맛있는 글
 
나는 재미있는 삶을 위해 ‘웃다 죽다 조영남’이라는 묘비명을 작성했다. 죽기 전까지 악착같이 재미있게 살려고 아인슈타인과 파인만의 물리학 이론까지 그냥 읽어제꼈다.
 
 
세상은 무조건 오래 살고 볼 일이다. 오래 살다 보면 별의 별 꼴을 다 보기 때문이다. 날더러 글쎄, ‘글쓰기’에 대해 써달라니 이게 별꼴이 아니고 무엇이냐. 맛있는 글, 글맛의 비결에 대해 쓰라는 ‘신동아’의 요구에 나는 화들짝 놀라 일단 발뺌부터 했다.

 

“여보쇼! 나는 세상이 알다시피 일개 가수에 불과하오. 내가 글맛이 뭔지, 맛의 비결이 뭔지 어찌 안단 말이오. 설령 내가 그런 따위에 대해 가타부타 아는 체한다면 사람들이 얼마나 비웃겠소!”

 

내가 취해야 할 태도는 정확히 취했다. 문제는 저쪽이다. 처절한 반항에 아랑곳없이 “하하 호호” 웃기만 한다. 나는 직업상 청각이 발달해서 예쁜 여자 목소리엔 깜빡 죽는다. 내 최대의 적은 미인계(美人計)고 다음은 미성계(美聲計)다. 그래서 맥없이 “알았어, 알았어” 하며 원고지와 펜을 손에 쥐고 끙끙대기 시작했다. ‘글쓰기의 쾌락’이라니 ‘택’도 없는 소리다. 내 글쓰기는 시종 이런 식으로 떠밀리는 가시밭길이었다. 그렇다면 어쩌다 오늘날 이런 품위 있는 원고청탁을 받기에 이르렀는가. ‘신동아’가 보통잡지인가. 7000만 인구의 남북한 통틀어 월간 잡지 중 둘째가라면 서러워할 ‘신동아’다(2박3일 평양 다녀온 티를 좀 내봤다).

 

미리 말해두지만 글쓰기의 비결은 없다. 적어도 나한테는 그렇다. 어쩌면 나는 영화감독 임권택의 비법을 충실히 따르고 있는지도 모른다. 이것저것 오랫동안 자꾸 만들다 보니까 더러 근사해 뵈는 영화가 빠져나오는 식 말이다. 여기서 유의해야 할 점이 있다. “오래오래 자꾸 쓰기만 하면 좋은 글이 나오는가”라고 섣불리 반문해선 안 된다는 점이다. 오래 자꾸 쓰는 일은 결코 쉽지 않다. 그건 신인가수가 히트곡을 연속으로 날리는 것만큼이나 어려운 일이다. 그럼에도 자꾸 쓰는 게 중요하다.

 

책을 쓰라는 계시를 받다

 

자, 그럼 내가 쓴 글이 제법 좋은 평판을 받고 있다 치고, 어쩌다 이 지경에 이르렀는가. 내 사전에 애당초 글쓰기는 없었고 두 가지, 노래와 그림만 있었다. 그래도 억지로 따져서 말하면 내가 정식으로 글쓰기를 시작한 것은 1978년, 그러니까 정확히 25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때 나는 미국 플로리다에 있는 조그만 침례신학대학에 들어가 기독교에 대한 공부를 하고 있었다. 30대 중반이었고 무엇보다 예수라는 인물에 대해 알고 싶었다. 왜 어머니, 아버지, 가족 전체가 대대로 그를 떠받들며 살아야 했는가, 나도 부모의 뒤를 따라야 하는가, 그게 궁금했다. 일단 나는 예수에 관한 자료를 닥치는 대로 수집했다. 그 중에는 우치무라 간조 같은 일본인이 쓴 책도, 와치만 리 같은 중국 신학자가 쓴 책도 있었다. 정작 씨알갱이도 없는 건 놀랍게도 한국인이, 한국 마인드로 쓴 예수에 관한 책이었다.

 

물론 지금도 없다. 한국은 교회와 교인수만 세계 최다가 아니다. 예수에 대한 광적 신앙심도 단연 세계 최고를 뛰어넘는다. 단지 그런 ‘느닷없는’ 종교적 현상을 한국식으로 정리해낸 글이 없을 뿐이다. 당시 병아리 신학도로 어디다 불만을 토로할 길도 없었다. 그때 나는 이 사실을 무슨 계시로 여겼다. 날더러 그걸 정리해보라는 계시로 받아들인 거다. 하지만 누가 믿겠는가. 그때까지 나는 글쓰기에 대해 아는 게 쥐뿔도 없었다.

 

‘그렇다면 내가 써야지’ 하는 용기와 배짱이 어디서 생겼는지 지금도 모르겠다. 그렇다. 잘 쓰건 못 쓰건 간에 글을 쓰려면 용기와 배짱이 필요하다. 나는 노래를 잘한다. 그걸 남한테 알리고 좋은 평판을 받기 위해선 우선 타인 앞에서 배짱 좋게 노래를 불러야 한다. 왜냐, 좋은 평판을 얻기 위해서다. 그것이 바로 동기부여다. 선의의 동기가 무적의 용기와 배짱을 부른다. 예수를 한국인의 마음으로 재조명하겠다는 눈물어린 동기가 내 몸 속에 숨어 있던 모든 용기와 배짱을 끄집어냈다.

 

그렇다면 동기부여가 글쓰기의 전부인가. 아니다. 글쓰기 전에 강력한 자기 주장이 있어야 한다. 예수의 문제에 관한 내 주장은 확고했다. 왜 불교, 유교, 기독교 같은 수입종교만 있고 우리 고유종교는 다 어딜 갔는가. 단군교, 동학교, 증산교, 하다못해 정감록 같은 우리네 토종종교는 다 어디 숨어 있는가. 이 애처로운 현상을 일깨워야 한다는 게 내 주장이었다.

 

미국생활 막바지 3년 동안 예수에 관한 글에 온 힘을 다 쏟았다. 생전 처음 잡은 글쓰기 테마가 종교철학이었으니 지금 생각해도 터무니없는 용기와 배짱이었다. 그렇게 쓰여진 책이 바로 ‘예수의 샅바를 잡다’였다. 믿거나 말거나 300쪽 이상의 전문적인 문장을 짜깁기해 쓰다 보니 어느덧 기승전결과 높낮이를 요구하는 글쓰기 구조에 제법 익숙해졌다. 긴 글을 쓰고 나니 짧은 글은 훨씬 쉬웠다.

 

그럼 ‘예수’에 관한 글쓰기는 나에게 무슨 의미였는가. 작게는 글쓰기 기술을 터득케 했고, 크게는 내 삶 자체를 뒤집어놓았다. 나는 종교의 구속으로부터 완전 독립했고 내 방식의 구원과 자유를 동시에 얻었다. 나의 삶이 다른 사람의 시선에 비교적 자유롭게 비친 것은 글쓰기를 통한 자아발견에서 유래했으리라 믿는다.

 

 
이맛저맛, 글맛을 섭렵하다

 

글쓰기의 맛은 김치맛이나 콜라맛처럼 그렇게 구체적인 게 아니다. 내 경우 글쓰기의 맛은 취미생활의 맛과 흡사해서 한 인간의 삶을 확대·확장시켜주었다. ‘예수의 샅바를 잡다’를 쓰면서 내 안에는 나 아닌 또 다른 형체인 신학자 조영남이가 들어앉은 셈이다. 이건 단순한 글쓰기의 맛을 뛰어넘는다. 이런 식으로 나는 신학자에서 닥터 지바고 같은 시인으로 넘어간다.

 

7년 미국생활에 나는 우연히 시인 마종기를 알게 되었다. 마종기 시인과의 연줄로 황동규, 정현종, 김영태 같은 시인을 줄줄이 만나보게 되었고, 천하의 글쟁이 이제하가 존재한다는 것과 기형도의 위대함까지 눈치채게 되었다. 나의 확장작업은 끝이 없었다. 보들레르, 랭보, 말라르메, 에드가 앨런 포, ‘북회귀선’을 쓴 헨리 밀러와도 꽤 깊은 교우를 트고 급기야는 우리네 요절시인 이상(李箱)이, 위에 거론한 시인뿐 아니라 난다 긴다 하는 동서고금의 현대시인들 맨 꼭대기에 제왕처럼 군림한다는 사실도 알게 되었다. 글쓰기의 이맛저맛을 섭렵한 결과였다.

 

음식맛이나 글맛이나 매한가지다. 많이 먹어본 사람이 음식맛을 잘 알 듯이 여자도, 음악도, 미술도 마찬가지다. 요컨대 뭘 알아야 면장을 할 수 있다. 클래식 음악을 한번도 들어본 적 없는 사람이 바흐의 무반주 첼로 소나타를 알 턱이 없고, 미술에 대해 쥐뿔도 모르는 사람이 온통 파란색만 칠해진 이브 클라인의 추상화를 즐길 턱이 없다. 결론은 이렇다. 아는 것만큼만 즐길 수가 있다. 많이 읽은 만큼 많이 쓸 수 있다는 얘기다.

 

가령 백남준, 이우환이 그런 사람이다. 많이 먹어보고 많이 사귀었기 때문에 그네들은 미술의 맛 분야에서 단연 일등으로 올라섰다. 우리는 설치미술의 세계적 권위자인 백남준이나, 동양 추상현대미술의 선각자인 이우환이 추종불허의 미술이론가라는 점을 명심해야 한다. 세상이 알다시피 세계적으로 인정받는 백남준의 조각작품은 누가 봐도 우스꽝스럽다. 싸구려 TV를 얼기설기 용접해놓고 괴기스러운 영상을 표출해내는 게 전부다. 이우환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커다란 백색 캔버스 위에 먹물 적신 굵은 붓으로 단 한 차례 점을 찍거나 위 아래 일직선으로 쭉 그어놓은 게 뭐 그리 대단한 형상이란 말인가. 평범한 돌멩이 몇 개 놓고 그 옆에 넓적한 쇠철판을 기대놓은 게 뭐 그리 대단한 예술작품이란 말인가. 그럼에도 우리는 백남준이나 이우환의 그 싱거운 예술작품 앞에서 괜히 주눅이 든다. 왜냐하면 그네들의 양손에는 그들의 생각을 글자로 조립하는 가공할 이론의 무기가 들려져 있기 때문이다.

 

나는 오래 살았고 더구나 얼굴 파는 직업의 소유자라서 참으로 많은 사람을 직접 만나는 행운을 누렸다. 박정희부터 노무현까지 대통령을 만났고 부시를 비롯해 클린턴, 옐친, 고르바초프까지 만났다. 그런데 그 중에 백남준보다 더 해박해 보이는 사람을 만난 적이 없다. 역사, 문화, 철학, 예술뿐 아니라 영어, 불어, 독어를 능수능란하게 구사하는데 두 손을 번쩍 들지 않을 수 없었다. 이우환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일본어로 쓴 이우환의 산문이 일본 고등학교 국어교과서에 두 편이나 실려 있는 걸 내 눈으로 확인했다. 이게 보통 일인가.

 

물론 글쓰기가 우리 삶의 필수조건은 아니다. 세계적인 피아니스트가 편지 몇 줄도 제대로 쓰지 못하거나, 탁월한 화가가 자기의 그림을 몇 줄의 글로 표현 못하는 경우가 얼마든지 있다. 그러나 화가가 그 의미를 글로 표현할 수 있다면 타인으로부터 더 큰 신뢰를 받을 수 있다. 여기서 내가 어쩌다 화투를 그리는 화가로 제법 알려졌는지 털어놓겠다. 글쓰기가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나는 음악과 마찬가지로 미술을 병행할 수밖에 없는 숙명을 일찍부터 감지했고, 독창성 차원에서 화투짝을 그리기 시작했다. 그러나 우리나라에선 여전히 이발사가 이발을 해야지 가위 대신 붓을 들면 가차없이 외면당한다. 당연히 ‘가수가 웬 그림이냐’는 분위기가 팽배했다. 1985년경의 일이다.

 

화가 조영남, 글쓰기를 시작하다

 

지금은 성곡미술관 학예실장으로 있는 전준엽씨가 ‘문화일보’ 미술기자였을 때 이런 제안을 했다. “그림 자체로는 한국 미술계를 헤쳐나갈 방법이 없다. 특단의 처방을 하자. 당신만의 독특한 필체로 세계 현대미술의 추이를 써라.” 이렇게 해서 월간 ‘미술세계’에 장장 6개월에 걸쳐 ‘세계 속 한국 현대미술의 현주소’를 썼다. 그러자 화랑이나 한국미술계가 나를 달리 대하기 시작했다. 글쓰기의 파워를 그때처럼 실감한 적이 없다. 고맙게도 출판사 ‘문학동네’에서 책으로 내기 위해 그 글을 정리중이다.

 

재작년 ‘월간미술’ 쪽에서 조영남의 안목으로 본 거리의 미술들을 1년반 가량 연재하자는 제의가 들어와, 전국 방방곡곡 건물 안이나 건물 밖에 놓여 있는 미술품들을 일일이 체크해서 독자들에게 알렸다. 그것이 최근 나온 ‘조영남 거리에서 미술을 만나다’라는 제목의 책이다. 내가 말로 표현할 줄도 모르고 글쓰기로 설명할 줄도 몰랐다면 내가 그린 화투 그림이나 바둑 그림, 바구니 그림, 태극기 그림이 과연 지금처럼 대접을 받을 수 있을까. 천만의 말씀이다.

 

작년에는 ‘조선일보’에서 조영남이 만난 사람에 관해 연재를 해보지 않겠냐는 제의가 들어왔다. 나는 내 실력을 몽땅 발휘해서 써댔다. 글이 재미있다는 얘기를 많이 들었다. 내가 오늘날 ‘신동아’로부터 글쓰는 맛이나 비결에 관해서 써달라는 요청을 받은 건 순전히 내 글이 어렵지 않고 재미있다는 이유 때문이다. 그걸 짐작 못할 내가 아니다. 그렇다면 어째서 나 같은 아마추어 글쟁이가 재미있게 글을 쓰는 부류에 속하게 됐단 말인가. 그건 상대적으로 나보다 글을 재미있게 쓰는 사람이 그리 많지 않다는 뜻이다.

 

나는 일찍이 이런 사태를 예감했다. 언젠가는 재밌게 쓰는 게 최고가 되리란 걸 말이다. 자랑이 아니라 나는 어떤 방면의 글을 쓰건 뚜렷한 주제, 확고한 테마, 그리고 재미를 추구한다. 모든 글은 무조건 재미있어야 한다. 글쓰기뿐만 아니라 음악·미술도 마찬가지다. 음악·미술은 우선 관람거리 구경거리여야 한다. 거기에 재미가 없으면 무슨 수로 사람들의 시선을 끌 수 있겠는가.

 

궤변이 아니라 모든 분야에서 철칙처럼 요구되는 독창성이나 독자성은 재미와 직결된다. 늘 듣던 소리, 늘 보던 그림으론 사람의 시선을 끌 수가 없다. 남이 안 낸 소리, 남이 안 그린 그림을 그려내야 한다. 요즘은 정보가 넘쳐나는 시대다. 들을거리, 볼거리가 넘쳐난다. 웬만한 물건엔 사람들이 시선도 안 준다. 무조건 재미있어야 한다.

 

이쯤 해서 반론이 나올 것이다. 재미만 추구하면 내용이 부실해지지 않느냐, 말초신경만 건드리는 것 아니냐고. 단언컨대 그 두 가지는 항상 뒤만 따라오는 느린 자들의 합창소리다. 그것은 관객을 모독하는 소리다. 지금 사람들은 다 똑똑하다. 내용의 부실이나 말초신경의 여부쯤은 본능적으로 분간할 줄 안다.

당신은 오늘 재미있게 살았는가

 

그러나 고백컨대 내 글의 결함은 바로 이 지점에 있다. 지나친 ‘재미’ 추구 때문에 자칫 내용이 허술해 보이는 점이다. 내 삶 자체가 두서없고 번잡스러워서 나는 일찍이 40대 중반에 자서전을 썼다. ‘놀멘 놀멘’이 제목이다. 제목부터가 재미를 밝히는 냄새가 물씬 나지 않는가. 나는 사람들이 ‘야 제목 재밌다’ 하며 수천, 수만 권 사갈 줄 알았다. 그러나 그것은 계산착오였다. 재미고 뭐고 간에 사람들은 조영남의 삶에 애당초 관심도 없고 애착도 없었다. 평소에도 잘난 척 까불대는 놈의 책을 돈 주고 사볼 필요가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놀멘 놀멘’을 쓰면서 최소한 모든 사물과 사안에는 일정 부분 재미가 있다는 사실을 터득했다. 쉽게 말해 뭐든지 재미있게 쓸 수 있다는 걸 알았다.

 

말하나마나 모든 사안은 심각과 그 반대로 흥미 있게 쓸 수 있는 구석이 있다. 가령 칫솔에 대해 쓴다고 하자. 심각파는 “아! 몇 개의 칫솔을 더 꺼내 쓰고 나의 생을 마감하게 될까” 하고 비탄조로 쓸 것이다. 반대로 흥미파는 “아! 저 칫솔을 겨우 사백오십두 개 더 쓰고 내가 죽겠구나. 황천엔 지겨운 칫솔질도 소름 끼치는 치과도 없겠지. 그렇다면 빨리 죽어도 원망 말자”처럼 낙관적으로 쓴다. 두 가지를 적절히 혼합하면 글쓰기는 금상첨화다.

 

글을 재미있게 쓰려면 재미있게 살아야 한다. 생각을 재미있게 구축할 줄 알고 재미의 따뜻한 구조를 이해하는 것이다. 희극을 표현하려면 상대적으로 비극을 터득해야 한다. 극단적인 슬픔을 이해하는 자만이 극단적인 재미와 웃음을 연출해낼 수 있는 법이다. 나는 재미있는 삶을 구사하기 위해 일찍이 ‘웃다 죽다 조영남’이라는 묘비명을 작성해놓고 죽기 전까지는 악착같이 재미있게 살려고 노력한다. 심지어 아인슈타인이나 파인만의 물리학 이론까지 뭔소린지 모르면서 그냥 읽어제꼈다. 재미있게 살기 위해.

 

이 풍진 한 세상 어떻게 사는 게 잘사는 것인가. 내가 아는 신학, 철학, 문학, 과학을 잘 배합, 인수분해를 시도해 나름대로 해답을 얻어냈다. 역시 그저 재밌게 살다 죽는 것이 해답이다. 오늘 재밌게 살았는가가 오늘 글을 잘 쓸 수 있는가와 직결된다. 어젯밤 나는 평양방문을 마치고 돌아왔다. 나는 평소 신고 다니던 힐리스(바퀴 달린 운동화)를 그냥 신고 갔다. 무대에도 그걸 신고 올라가 노랠 불렀다. 고려호텔 로비에서나 공연장 무대에서나 내가 미끄러지면 북녘사람들의 눈이 휘둥그래지면서 웃어대니 나는 누구보다도 그쪽 사람들과 금방 친해질 수 있었다. 그것이 내 삶의 방식이다. 옆에 있던 후배들이 계속 “형님, 나잇값 좀 하십쇼” 하지만 나는 여기서 글쓰기로 되받겠다. “어차피 죽는 건데 자연사(自然死) 하는 것과 힐리스 타다 뇌진탕으로 죽는 것이 뭐가 다르냐.” 이렇게 힘든 글쓰기에 비해서 원고료는 너무 짜다. 

<출처:신동아 2003년 11월호 통권 530호  특별부록 가슴으로 글쓰기>
 

글: 조영남 가수
1944년 황해도 남천에서 태어나 한양대와 서울대 음대, 미국 플로리다 트리니티신학대를 졸업했다. 1968년 ‘딜라일라’로 가수로 데뷔. 1973년 한국화랑에서 첫 미술 전시회를 가진 이래 화가로도 활동중이다. 저서로 ‘조영남 길에서 미술을 만나다’ ‘태극기는 바람에 펄럭인다’ ‘조영남씬 천재예요’ ‘예수의 샅바를 잡다’ ‘놀멘 놀멘’ 등이 있다. 
 

관련글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