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세 컨텐츠

본문 제목

뒤집어 보고, 따져 묻고, 파헤쳐라

읽고쓰기---------/좋은글쓰기

by 자청비 2007. 12. 1. 13:41

본문

비판적 사고와 논증적 글쓰기
뒤집어 보고, 따져 묻고, 파헤쳐라
 
모두가 예라고 할 때 “왜 ‘예’일까? 정말 ‘예’일까?” 따져 묻는 비판적 사고가 필요하다. 의식적으로 튀는 것보다 비판적 사고를 통한 솔직하고 진지한 ‘삐딱이’가 독창성에 다가갈 가능성이 높다.
 
 
몇해 전부터 대학마다 ‘논리와 비판적 사고’ ‘논리와 사고’ 등의 과목을 개설해 학생들의 ‘비판적 사고’를 키우는 데 주력하고 있다. 최근 몇몇 대학에서는 아예 ‘발표와 토론’ ‘독서와 토론’ 같이 종합적이면서 실용적인 과목을 개설했다. 세종대의 경우 비판적 사고를 통한 논증적 글쓰기에 초점을 둔 ‘논술’ 과목을 필수로 채택했다.

 

게다가 대학가에 떠도는 소문들은 ‘비판적 사고’의 중요성을 실감케 한다. 예를 들어 장기적으로 MBA과정이나 로스쿨(Law School)제도가 도입되면 미국처럼 입학생을 뽑을 때 비판적 사고를 평가하는 시험이 시행될 가능성이 높다거나, 또 공대에서 경쟁력 제고를 위해 미국처럼 공학교육인증제를 전면적으로 도입할 경우 교육과정에 ‘비판적 사고’와 관련한 과목이 포함될 가능성이 높다는 이야기도 있다.

 

이런 소문을 증명하듯 이미 대기업들이 채용시험에 비판적 사고를 측정하는 영역을 포함시키고 있으며, 정부는 2004년부터 고시 1차 시험을 능력평가로 바꾸어 이른바 PSAT(공직적격성시험)를 실시한다는 소식도 들린다. 특히 이 시험은 비판적 사고능력을 측정하는 평가가 공식화된다는 점에서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현행 고시제도는 업무수행에 필요한 지식을 얼마나 알고 있는가를 측정하는 데 치중한다.

 

반면, PSAT는 공직과 관련해 문제해결능력과 현실적응력을 ‘공직적격성’이라 규정하고 이를 측정한다. 그래서 특정 영역에서의 성취도 대신 기본적인 학습능력과 문제해결의 잠재력을 측정하는 데 주안점을 두고 있다. 지금까지 알려진 바로는 PSAT가 3가지 영역, 즉 언어논리 영역, 자료해석 영역, 상황판단 영역을 측정한다고 한다. 자료해석 영역을 제외한 나머지 두 영역에서 비판적 사고력은 필수적이며, 자료해석 영역에서도 간접적으로 필요하다.

 

‘비판적 사고’, 현대사회의 만능열쇠

 

그렇다면 비판적 사고란 과연 무엇인가? 사실 비판적 사고는 상당히 복합적인 능력을 가리키는 개념이다. 예를 들면 다양한 문맥에서 언어가 뜻하는 바를 파악해내는 능력, 어떤 주장을 지지하기 위해 적절한 시기에 증거를 제시하는 능력, 증거가 요구될 때 증거의 양과 유형을 판단하는 능력, 일관적으로 생각할 수 있는 능력, 지시와 충고를 이해할 수 있는 능력, 문제를 구성하고 해결할 수 있는 능력, 주어진 정보가 문제와 유관한지 판단하는 능력, 결정과 계획의 가능한 결과들을 개관하는 능력, 선택의 대상 가운데 최선의 선택을 하는 능력 등 다양한 능력들과 관계한다.

 

그렇기 때문에 비판적 사고를 한 가지로 정의할 수는 없다. 조금 좁히고 줄여서 말하면 사람들의 사고를 깊이 있고 다각적인 차원에서 이해하기 위해 그것을 분석하고 평가하는 반성적 사고를 가리킨다. 물론 자신의 주장을 펼칠 때에는 같은 방식의 반성적 사고를 통해 주장을 더 깊이 있고 다각적인 차원에서 정당화시킬 수 있다.

 

비판적 사고는 글쓰기, 특히 논증적 글쓰기와 어떤 관련이 있는가. 비판적 사고의 중요성이 강조됨과 동시에 논증적 글쓰기 능력도 중요한 과제로 부각되고 있다. 말하기를 포함해 논증적 글쓰기 능력이 부각되는 것은 그것이 대학은 물론 사회가 요구하는 기초능력이기 때문이다.

 

우선 말하기와 쓰기는 대학의 학문활동에 필수적이다. 학문활동의 특징 중 하나가 바로 정당화 작업이다. 주장을 하면서 근거를 제시할 수 없다면 학문적 의미를 상실한다. 그런 의미에서 논증적 글쓰기는 학문활동의 기초다. 나아가 이 능력은 합리적이고 민주적인 사회나 기업에서 의사소통을 위해 구성원이 갖추어야 할 기본 능력이다. 근거를 바탕으로 사안을 결정해야 합리적 의사소통이 이루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특히 비판적 사고를 바탕으로 한 논증적 글쓰기 능력은 이 시대의 흐름과 직결된다. 온라인을 통한 소통구조가 일반화되면서 문화는 점차 코드화, 기호화, 이미지화하고 있다. 이는 내레이션(narration)과 텍스트(text)의 가치, 즉 말과 글의 가치는 점점 떨어지고 이미지와 기호의 가치가 올라가는 결과를 가져온다. 이에 따라 인간의 사유와 정서를 내레이션과 텍스트로 제시하는 인문학의 가치도 동반하락하고 있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는 논증적 글쓰기의 중요성이 새롭게 부각되는 측면도 있다. 즉 의사소통의 양이 늘어날수록 의사소통의 합리성이 문제가 된다. 근거를 들어 자신의 견해와 주장을 논리적으로 제시하고, 다른 사람의 주장을 논리적 관점에서 평가할 능력이 없다면 아무리 의사소통의 양이 늘어난다 해도 공허할 뿐이며 제대로 된 의사소통이 아니게 된다. 논증적 글쓰기의 중요성이 부각되는 지점이 바로 여기다. 자, 이제부터 구체적으로 비판적 사고가 논증적 글쓰기 능력을 향상시키는 데 어떻게 작용하는지 살펴보자.

 
1. 비판적 사고를 통해 논증적인 글의 명료성, 분명함, 정확성을 검토한다

 
2003년 6월 서울 강남 코엑스몰에서 열린 취업박람회. 앞으로 기업들은 채용시험에서 비판적 사고능력을 측정할 가능성이 높다.  넓은 의미에서 글의 명료성으로 통칭해보자. 글의 명료성은 논증적 글이 갖추어야 할 가장 기본적인 특성이다. ‘틀린 명료한 주장’이 ‘불명료한 주장’보다는 백 배 낫다. 왜냐하면 틀린 주장이라도 명료하다면 합리적인 토론을 통해 바로잡을 가능성이 열려 있기 때문이다.

 

주장이 명료하다는 것은 애매모호하지 않다는 의미다. 애매함과 모호함, 어떻게 다를까? 그 차이가 애매모호할지도 모른다. ‘애매(曖昧)’란 ‘다의적(多義的)’이라는 뜻이다. 이것 아니면 저것임이 분명한데 도대체 어느 것인지 모른다는 것. 이에 비해 ‘모호(模糊)’란 구체적으로 전달되는 정확한 정보가 없다는 것이다.

 

내(여학생)가 버스에서 친구랑 같이 앉아 있는데 앞에 서 있는 남학생이 쳐다보며 웃는 경우를 가정해보자. 나를 보고 웃는지 친구를 보고 웃는지 모른다면 그것은 애매한 것이다. 그런데 좋아서 웃는지, 음흉한 웃음인지, 아니면 표정이 원래 그런지, 아니면 약간 맛이 간 친구인지 아무 정보가 없어서 도대체 알 수 없다면 그것은 모호한 것이다. 애매한 것이 모호한 것보다 나을 것 같지만 오십보 백보다.

 

그런데 논증적인 글에서도 모호한 주장이 자주 등장한다. 자기중심적인 태도에서 나온 결과다. 내 머릿속에는 정보가 들어 있지만 그것이 제대로 전달이 안 되는 것이다. 예를 들어 내가 갑자기 “나는 부자다”라고 주장한다고 하자. 전달되는 정보가 있는가? ‘부자’라는 말의 뜻을 모르는 것은 아니지만 사실 그 말이 어느 정도의 재산을 가리키는지 전달되는 정보가 없다. 그렇다면 그 주장은 모호한 주장이다. 따라서 명료한 주장을 하려면 항상 독자의 입장에 서서 접근해야 한다. ‘역지사지(易地思之)’는 명료한 주장을 위한 기본 조건이다.

 

2. 비판적 사고를 통해 숨겨진 전제나 근본적인 개념 차원까지 쟁점을 확산시킨다.

 

일단 논의의 명료성이 확보된 다음에는 논의를 심층적으로 끌고 나가는 것이 논증적 글의 수준을 높이는 중요한 요점이다. 낙태 문제를 예로 들어보자. 낙태와 관련된 이론적 쟁점은 우선 ‘낙태가 살인인가 아닌가’에서 시작한다. 그런데 이 문제는 ‘태아가 인간인가 아닌가’라는 쟁점과 직결된다. 왜냐하면 만일 태아를 인간으로 본다면 낙태는 살인이 될 것이고, 태아를 완벽한 인간으로 볼 수 없다면 낙태도 살인이라고 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바로 이 차원에서 이른바 종교계로 대변되는 보수주의와 여성계로 대변되는 자유주의가 대립하고 있다.

 

그런데 논리적으로는 더 근본적인 쟁점이 숨어 있다. 바로 ‘인간이란 무엇인가’라는 문제다. 인간을 어떻게 규정하는가에 따라 태아가 인간으로 판단될 수도 있고, 완벽한 인간이 아닌 것으로 판단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인간이 무엇인가에 대해서는 크게 두 경향의 접근이 있다. 하나는 자연적인 접근법이다. 즉 인간을 생물학적이고 유전학적인 차원에서 보아, 특정한 유전인자를 가지고 있는 생물학적 종으로 보는 접근이다.

 

이렇게 보면 태아는 완벽한 인간이다. 인간의 유전자를 완벽히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이런 식으로 접근하면 심지어 인간의 수정란도 인간으로 보아야 하고 따라서 수정되었더라도 착상을 방해해서 임신을 막는 응급피임약도 살인약이 될 것이다.

 

이와 대립하는 것이 인간에 대한 문화적 접근이다. 여기선 인간을 인격체(person)로 본다. 즉 자의식과 반성능력을 가진 존재로 보는 것이다. 우리가 패륜아를 보고 “이 인간도 아닌 놈아”라고 할 때 바로 이런 접근을 하고 있는 것이다. 이 입장에 따르면 태아를 인간으로 볼 수 없다. 왜냐하면 우리가 현재까지 갖고 있는 정보에 따르면 태아가 자의식을 가진다고 보기는 힘들기 때문이다. 태아가 엄마 태내에서 자신의 미래인 출산을 의식하고 자궁벽에 하루하루 금을 그어가며 ‘D-30’이라고 헤아리고 있는 것은 아니지 않는가.

 

이처럼 낙태 문제의 경우, 인간이 무엇인가에 대한 생각, 혹은 인간에 대한 개념 규정이 숨겨진 근본적 전제로서 움직이기 힘든 무게를 가지고 우리의 논증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친다. 따라서 논증의 수준을 높이는 중요한 방법 중 하나는 표면적인 쟁점의 논의에 그치지 않고 비판적 사고의 작동을 통해 깊이 있고 폭넓게 접근함으로써 표면적 쟁점으로부터 논리적으로 확산될 수밖에 없는 근본적 쟁점, 개념 혹은 숨겨진 전제를 문제삼는 데까지 나아가는 것이다.

 

3. 비판적 사고를 통해 독자를 고려하고 논증적 글의 설득력을 높인다

 

앞서 말한 두 가지는 글의 내용에 대한 것이고 여기서는 글의 맥락에 대해 말하기로 한다. 논증적 글이 실용성과 현실 적합성을 갖기 위해서는 독자에 대한 고려가 중요하다. 좀더 일반적인 용어로 말한다면 우리는 주장을 하거나 다른 사람의 주장을 이해할 때, ‘명제’의 관점이 아니라 ‘진술’의 관점에 서야 한다. 명제는 어떤 주장의 ‘겉 말’ 부분으로 말이 가진 글자 그대로의 의미를 가리킨다.

 

반면 진술은 주장의 속내까지 포함한 의미로 어떤 상황에서 특정한 화자(話者)가 특정한 청자(聽者)에게 내뱉은 말이다. 같은 말이라도 누가 어떤 상황에서 누구에게 했는가에 따라 속뜻이 달라질 수 있기 때문에 명제의 관점에서는 같은 주장도 진술의 관점에서는 전혀 다른 주장이 될 수 있다.

 

예를 들어 ‘비가 오네’라는 주장은 명제의 관점에서는 누가 말하건 하늘에서 물방울이 떨어지는 현상일 뿐이다. 그런데 첫 소풍을 손꼽아 기다리던 유치원 꼬마가 소풍 가는 날 아침 일찍 잠에서 깨어 창문을 열고 “비가 오네”라고 하는 진술과, 며칠째 맑은 날씨 때문에 공친 우산 장수가 아침에 창을 열고 “비가 오네”라고 하는 진술은 같을 수 없다.

 

사실 우리가 내뱉는 말들은 다 특정한 상황에서 특정한 화자에게 하는 진술들이고, 우리가 쓰는 논증적인 글들도 대부분 특정 독자를 염두에 두며, 불특정 다수를 대상으로 하는 글도 가상의 논쟁자를 전제로 한다.

 

따라서 대부분의 주장들을 제대로 이해하려면 상황 속에서 하나하나 속뜻을 읽어야 하는 것이 현실이다. 속뜻을 제대로 헤아려 읽지 못하면 한때 유행했던 ‘썰렁이 시리즈’의 주인공이 되어버린다. 예를 들어 조폭 아저씨들이 모였다. 창문이 열려 있어 찬바람이 들어오니 큰형님이 막내를 부르면서 “아그야, 창문 열렸다”고 하자 충성심 강한 막내가 일어나서 큰소리로 “예! 형님! 창문 열렸습니다”라고 대답한다. 큰형님이 다시 한번 “야, 이놈아 창문 열렸다니까” 하니 막내는 다시 한번 큰소리로 “예! 형님! 정말 창문 열렸습니다”라고 답한다. 여기서 말의 속뜻을 읽지 못한 막내의 운명은 어찌 됐을까?

 

진술의 관점은 글 ‘쓰기’ 이전에 글 ‘읽기’에서 필요하다. 심지어 고전을 읽을 때에도 ‘진술’의 관점을 파악해야 그 고전이 주는 메시지를 제대로 이해할 수 있다. 고전의 저자도 특정 상황에서 특정한 독자를 염두에 두고 글을 쓰고 있지만, 그 상황이 가진 보편성 때문에 우리에게 고전으로 평가되는 경우가 대부분이기 때문이다. 심지어는 인류 최대의 고전이라는 성서도 마찬가지다.

 

아마 기독교인이 아니더라도 성서가 고전이니 한번 읽어보려고 시도한 사람들이 꽤 있을 것이다. 그런데 성스럽고 심오한 교훈을 기대하면서 신약성서를 펴 든 사람은 혼란과 당혹감에 빠진다. 마태복음 1장을 펼치면 성스러운 교훈은 찾을 수 없고 ‘누가 누구를 낳고 누가 누구를 낳고…’ 하는 지루한 기록들만 나열된다. 여하튼 이 기록에 따르면 예수는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으로서 요셉의 아들이다. 그런데 일단 인내하고 2장으로 넘어간 독자는 다시 한번 배신감을 느끼게 된다. 2장은 예수의 처녀 탄생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기나긴 부계 족보를 참고 읽었는데, 예수가 신이 직접 잉태시켜 처녀의 몸에서 났다면 앞의 부계 족보는 무슨 의미란 말인가.

 

성급한 독자는 여기서 책을 던져버릴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런 상황도 진술의 관점에서 보면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마태라는 이 글의 저자는 유대지방에서 유대인들을 대상으로 예수가 메시아임을 전파하던 사람이다. 그는 당연히 유대인 독자를 의식하고 글을 썼다. 그런데 유대인들은 메시아에 대해 두 가지 믿음을 가지고 있었다. 하나는 메시아가 정통 다윗 왕가의 자손으로 유대를 복원시킬 것이라는 믿음이고, 다른 하나는 구약의 예언들에 대한 믿음이다. 바로 이 두 믿음을 만족시키기 위해 예수의 부계 족보를 먼저 보여주고 다음으로 예수의 처녀 탄생을 보여주는 것이다. 논증적인 글이 갖는 전형적인 ‘맥락’을 마태복음도 가지고 있는 것이다.

 

이처럼 맥락과 독자에 대한 고려는 논증이 성공하기 위해 필수적인 요소이며, 따라서 비판적 사고를 통해 독자의 특성을 정확히 평가하고, 독자에게 적절한 방식과 강도의 주장을 펼치는 것이 중요하다.

 

4. 비판적 사고를 통해 독창성에 최대한 접근할 수 있다

 

사실 논증적인 글을 쓸 때는 독창성에 집착하게 된다. 이미 알려진 정보를 가지고 아무리 응용한다 해도 주어진 문제의 해결이 쉽지 않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 여백을 메울 수 있는 능력이 필요한데 그것이 바로 상상력과 창의력이고, 독창성은 바로 그런 능력을 극대화할 때 다다를 수 있는 경지이다. 그러나 독창성은 의도한다고 나오는 것이 아니다. 스스로가 평가하기도 쉽지 않다. 어떤 사람이 자기가 쓴 글을 보면서 “야, 참 독창적이다”라고 감탄한다면 그 사람은 제정신이 아니라고 여겨질 것이다. 독창성은 남이 평가하는 것이다. 따라서 독창성 자체를 목적으로 하는 글쓰기는 난센스다. 독창성의 어머니는 솔직함이다. 진짜 자기 이야기를 하다보면 나도 모르게 독창적이라는 평가를 받게 된다.

 

독창성과 관련해 내게는 잊지 못할 경험이 있다. 내가 대학입시를 치르던 시절은 본고사(국·영·수)가 있었다. 국어시험 마지막 문제가 작문이었는데 ‘월매와 향단의 성격을 비교하라’는 문제가 나왔다. 여기서 ‘월매’와 ‘향단’은 ‘月梅’와 ‘香丹’이라는 한자로만 표기되어 있었다.

 

월매와 향단 하면 ‘춘향전’이 떠오르게 마련이고, 따라서 대부분의 수험생들이 ‘춘향전’에서 월매와 향단의 성격을 비교하는 글을 썼다. 그런데 웬일인지 나는 이 문제를 보는 순간 ‘춘향전’ 생각은 꿈에도 나지 않았다. ‘月梅’는 ‘달빛 속에 피어난 매화’로 읽혀졌고, 이런 독해에 맞추다 보니 ‘香丹’도 조금 무리가 있긴 하지만 ‘향기로운 목단(牧丹), 즉 향내를 뿜어내는 모란’으로 보았다. 한마디로 제정신이 아니었던 것이다.

 

나중에 생각해보니 시험 치르기 사흘 전부터 옛시조들을 집중적으로 읽은 탓에 생긴 판독 방식이었다. 여하튼 남녀를 대비시켜가며 달빛 아래 핀 매화는 고전적 여인상의 풍모고, 향기로운 모란은 선비와 지사의 풍모라는 식으로 한참 너스레를 떤 뒤 흐뭇한 마음으로 시험장을 빠져나왔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친구들이 하나같이 작문이 ‘춘향전’에서 나왔다는 것이었다. 그때 나는 요즘식으로 말하면 끝없는 번지점프를 하는 심정이었다. 친구들이 다가와 위로한답시고 “재수(再修)는 필수잖아” 하면서 어깨를 쳐댈 때는 정말 미칠 지경이었다. 그런데 결과는 합격이었다. 나중에 기회가 있어 알아보니 국어성적이 생각보다 훨씬 좋았다. 이유는 하나밖에 없었다. 작문 때문이었다. 왜? 독창적이니까.

 

튀고자 한다면 우선 자기 얘기를 솔직히 해야 한다. 물론 이것만으로는 안 된다. 모두가 예라고 할 때 “왜 ‘예’일까? 정말 ‘예’일까?”라고 따져 묻는 비판적 사고가 필요하다. 의식적으로 튀는 것보다 비판적 사고에 의한 솔직하고 진지한 ‘삐딱이’가 독창성에 다가갈 가능성이 높다.

 

비판적 사고가 논증적 글쓰기 능력을 높이기 위해 작동하는 방식은 주장의 객관성을 높인다든지, 논의의 차원을 명료히 한다든지 여러 가지가 있으나 지면 관계상 네 가지만 정리하였다. 가장 중요한 것은 실제로 써보는 것이라는 평범한 진리로 글을 마무리할까 한다.

 

논증적 글쓰기 vs 정서적 글쓰기
논증적 글쓰기는 설득을 겨냥한 글쓰기다. 이는 의견이 부딪치고 이해관계가 엇갈리는 공동체 속에서 등장하는 것이며, 삶을 고양시키는 적극적 측면보다 우리 삶의 문제를 합리적 의사소통을 통해 해결하려는 소극적인 측면이 더 강하다.

그렇기 때문에 오히려 공감과 감동을 겨냥한 글쓰기가 더 차원 높은 글쓰기라고 할 수도 있다. 즉 문학과 예술과 종교는 바로 이런 공감과 감동을 준다는 점에서 가치가 있다. 따라서 감상문 쓰기를 비롯해 정서와 감정을 표출하는 다양한 글쓰기를 소홀히 해서는 안 된다.

간혹 교육현장에서 ‘논증적 글쓰기’를 가리키는 ‘논술’이라는 말이 글쓰기 일반을 가리키는 말로 사용되는 경우가 있는데 이는 매우 위험천만하다.

오히려 초등학생의 경우 논증적인 글쓰기보다 감상문을 포함한 정서적인 글쓰기에 비중을 두어야 한다. 어린 학생의 경우 자기의 주장을 논리적으로 표현해 상대를 설득하는 영역보다는 자신의 정서를 표출하고 표현하는 영역이 더 중요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요즘 글쓰기 교육에서 정서적 측면을 무시하고 ‘글쓰기’란 말을 ‘논술’로 대치하여 쓰다 보니 논증적 글쓰기에 지나치게 집중되는 부작용이 있다.

또 비판적 사고가 단순히 논증적 글쓰기의 전제조건으로만 기능하는 것이 아니다. 비판적 사고와 논증적 글쓰기는 마치 해석학적 순환처럼 결합되어 있다.

글쓰기 교육을 하면서 여전히 갖고 있는 고민 중 하나가 글쓰기라는 것이 과연 교육의 목표인가 아니면 교육의 과정인가 하는 것이다. 이런 고민은 바로 글쓰기, 혹은 글쓰기 교육 자체가 역동적이고 변증법적인 과정을 거치기 때문에 생기는 것이다.

비판적 사고를 비롯한 다양한 능력을 바탕으로 ‘글쓰기1’이 수행되고, 다시금 이 ‘글쓰기1’ 과정을 통해서 다양한 능력이 길러지며, 그 능력을 기반으로 더욱 더 훌륭한 ‘글쓰기2’를 할 수 있다.

그러나 ‘글쓰기2’도 종착점은 아니며 그것을 통해서 또 다른 능력을 확장시키는 과정으로서의 의미를 갖는다. 이는 글쓰기가 단순히 내용물을 뱉어놓는 작업이 아니며, 글을 잘 쓸 줄 안다는 것은 인식론적 용어로 하자면 어떤 내용을 이해하여 아는 명제적 지식이 아니라 능력을 쌓는 절차적 지식이기 때문에 생기는 현상이다.

가장 좋은 예가 대입 논술시험이다. 논술시험은 단지 자기 실력을 드러내는 차원에 그치지 않는다. 현장에서 논술시험을 치면서 학생의 실력도 향상된다.

이렇게 글쓰기라는 작업은 이중의 의미를 가지기에 단순히 비판적 사고의 적용이 논증적 글쓰기라는 도식은 적절치 않다는 점을 지적해둔다.

<출처: 신동아 2003년 11월호 특별부록 실전에서 글쓰기>

 

글: 박정하 세종대 초빙 교수·철학 pjhy80@chollian.net
현재 세종대 교양학부 논술담당 초빙교수로 있으며 서울대 철학사상연구소 객원연구원, ‘성균관대 비판적 사고와 문화연구소’객원연구원을 겸하고 있다. 저서 ‘대학인을 위한 논술’ ‘동서양 고전 읽고 쓰고 생각하기’(공저). 

 

관련글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