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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른 글이 아름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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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자청비 2007. 12. 1. 14: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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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른 글이 아름답다
감성 전에 문법, 취향보다 논리

 
바른 글은 아름다울 수 있어도 바르지 않은 글은 결코 아름다울 수 없다. 바른 글이란 구성이 문법적으로 바르고, 쓰인 어휘와 표현이 바르고, 글의 전개가 논리적으로 바른 글이다.
 
 
사람이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것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변함이 없다. 무엇에서나 우리는 아름다움을 추구한다. 얼굴이 아름답고, 옷이 아름답고, 몸매가 아름답고, 집이 아름답고…. 물론 어떤 상태가 아름다움인지는 누구도 완전하게 정의할 수 없지만 아름다움은 우리가 분명히 느낄 수 있고, 그것이 우리의 마음을 기쁘고 즐겁게 만들어 주는 것은 분명하다.

 

그래서 우리는 글에서도 아름다움을 추구한다. 아름다운 글, 아름다운 표현을 끊임없이 추구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난데없이 ‘바른 글이 아름답다’라고 선언했으니 어떤 사람은 ‘글을 바르게 쓰기만 하면 아름답다는 말인가?’ 하고 생각하여 고개를 갸웃거릴지 모르겠다. 미리 말해 두거니와 ‘바른 글이 반드시 아름답다’는 것이 아니라, ‘아름다운 글은 반드시 바르다’는 말을 강조하기 위해서 이렇게 쓴 것이다. 일종의 환위법을 구사한 것인데 약간의 모순이 있더라도 양해해 주기 바란다.

 

60∼70년대 개발 독재 시절에 도시계획을 하던 공무원들은 으레 근대 도시는 평평한 땅에 바둑판처럼 길을 곧게 내어 건설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서울에 있던 야산은 모조리 뭉개어 평평하게 만든 다음에 곧은 길을 내어 시가지를 건설하기에 안간힘을 썼다. 지금 집 값이 천정부지로 올라가고 있는 강남 지역이 그렇게 해서 만들어졌다.

 

그런데 아무리 곧은 길을 내어 도시를 건설하려 해도 서울은 군데군데 야산이 널려 있고, 사방을 커다란 산이 병풍처럼 둘러싸고 있어서 한계가 있었다. 그러다 보니 서울은 빙글빙글 도는 곡선 길과 쪽 곧은 직선 길이 아무렇게나 난 어수선한 도시로 개발되고 말았다. 만일 당시 도시 계획을 세웠던 사람들이 서울의 지형을 이용하여 굽은 길과 곧은 길을 잘 조화시키려는 시도를 했다면 지금보다 훨씬 아름다운 서울을 만들 수 있었을 것이다.

 

직선과 곡선

우리 것을 끔찍히 사랑했던 고(故) 최순우 선생이 쓴 ‘우리의 미술’이란 글에는 다음과 같은 대목이 나온다.


“하늘로 향해 두 귀를 사뿐히 들었지만 뽐냄이 없는 의젓한 추녀의 곡선, 아낙네의 저고리 도련과 붕어밸 지은 긴소매의 맵시 있는 선, 외씨버선 볼의 동탁한 매무새, 초가 지붕과 기와 지붕들이 서로 이마를 마주 비비고 모여선 곳, 여기엔 시새움도 허세도 가식도 그리고 존대도 발을 붙이지 않는다.”


한국 건축의 곡선미를 칭찬한 대목이다. 하늘로 치솟는 추녀의 곡선, 붕어밸처럼 아래로 볼록한 저고리의 도련과 소매의 곡선 등의 아름다움을 최순우 선생은 담담한 멋으로 풀이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직선은 아름답지 않다는 말일까?

 

굽이치듯 달리는 다랑논들의 곡선을 보다가 바둑판처럼 펼쳐진 호남 평야의 직선을 보면 거기에서는 아름다움을 느낄 수 없을까? 한국의 기와 지붕 추녀의 아름다움에 반한 사람은 그리스의 파르테논 신전의 처마 직선에 아무런 아름다움을 느낄 수 없을까? 그렇지는 않을 것이다. 추녀의 곡선이 갖는 미와 서양 건축의 직선미는 각기 그 자체의 미를 가지고 있을 것이다.

 

우리는 어떤 특정한 형태, 특정한 가치에서만 미를 찾지 않는다. 아름다움은 그것이 갖는 기본적인 상황에 가장 적절히 맞게 모든 것이 갖추어진 상태에서 느껴지는 것이다. 추녀의 곡선이 아름답다고 해서 독립기념관의 콘크리트 추녀가 아름답다고 할 사람은 없을 것이며, 파르테논 신전의 직선이 아름답다고 해서 성냥갑처럼 만들어 세운 아파트의 직선이 아름답다고 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모든 사물은 그것 자체가 가장 아름다울 수 있는 조건이 있고, 그 조건은 사물마다 다르다. 글을 쓰는 경우에도 글이 쓰이는 상황과 표현하려는 대상에 따라서 아름다움의 조건이 달라질 수 있다. 따라서 아름다운 글을 일률적으로 말할 수는 없다.

 
아름답게 하는 조건은 자신에게 있다

 

아름다운 글로 많은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는 아래의 글을 읽어 보자.


“이지러는 졌으나 보름을 갓 지난 달은 부드러운 빛을 흐뭇이 흘리고 있다. 대화까지는 팔십 리의 밤길, 고개를 둘이나 넘고 개울을 하나 건너고 벌판과 산길을 걸어야 된다. 길은 지금 긴 산허리에 걸려 있다. 밤중을 지난 무렵인지 죽은 듯이 고요한 속에서 짐승 같은 달의 숨소리가 손에 잡힐 듯이 들리며, 콩포기와 옥수수 잎새가 한층 달에 푸르게 젖었다. 산허리는 온통 메밀밭이어서 피기 시작한 꽃이 소금을 뿌린 듯이 흐뭇한 달빛에 숨이 막힐 지경이다. 붉은 대궁이 향기같이 애잔하고 나귀들의 걸음도 시원하다. 길이 좁은 까닭에, 세 사람은 나귀를 타고 외줄로 늘어섰다. 방울소리가 시원스럽게 딸랑딸랑 메밀밭께로 흘러간다.”


익히 읽던 이효석의 ‘메밀꽃 필 무렵’의 한 대목이다. 이 대목이 그렇게 아름답게 여겨지는 이유는 이 글이 속한 상황 속에 매우 잘 어울리기 때문이다. 만일 누가 이 글을 그대로 자기의 글에 옮겨 놓는다고 해 보자. 여기에서처럼 감동을 일으킬 수 있겠는가? 허생원이 품고 있는 아름다운 추억과 강원도의 조용한 산길, 자정이 넘은 무렵에 산자락에 내리비치는 달빛, 달빛에 반사되어 하얗게 두드러져 보이는 메밀꽃, 그곳을 나귀를 타고 지나가는 장사꾼 세 사나이가 어우러져서 우리에게 진한 아름다움을 선사하는 것이 아닐까? 무엇보다 이 글을 우리가 아름답게 느끼는 데 걸림돌이 되는 것이 없다는 점도 우리가 이 글에서 아름다움을 오래오래 느끼게 되는 이유다.

 

나는 이 글을 읽을 때면 조그만 불만을 느낀다. 글의 아름다움을 온전히 만끽할 수 없게 만드는 것이 내 눈에 보이기 때문이다. “대화까지는 팔십 리의 밤길”에서 관형격 조사 ‘의’를 쓴 것이 마음에 걸린다. 이 ‘의’는 주변의 다른 어투와 잘 어울리지 않는다. 만일 ‘대화까지는 팔십 리나 되는 밤길’이라고 했더라면 이 글이 더욱 아름다워지지 않았을까? 그러나 그밖에 이 글을 아름답지 않게 만드는 요소는 없다. 그래서 이 글이 많은 사람들에게 사랑을 받는 것이리라.

 

“있으나마나한 존재이면서 있었고”

 

글이 반드시 심미적으로 아름다워야 하는 것은 아니다. 논설문이라면 논증이 정확하고 합리적이어야 할 것이고, 설명문이라면 사실적이고 쉬워야 할 것이다. 여기서 아름다움이란 글의 목적에 맞추어 가장 적절히 적힌 상태를 가리킨다. 다시 말하면 가장 논리적으로 잘 쓴 논설문이 아름다운 글이고, 가장 자세하고 쉽고 정확하게 풀이한 설명문이 아름다운 글이다. 이런 관점에서 ‘바름’이 ‘아름다움’에 어떤 영향을 끼치는지 검토해 보자.

 

아래 글은 ‘동인문학상’을 받은 성석제의 소설 ‘황만근은 이렇게 말했다’의 일부이다. 이 글에서 성석제는 상반된 의미를 대비시킴으로써 독자에게 강한 이미지를 심는 기법을 활용하여 재미를 보았는데 아래 글이 그 예가 되는 것들이다.


“그러나 황만근은 하루밖에 지나지 않았는데도 모든 사람이 그의 부재를 알게 되었다. 그렇지만 누구도 적극적으로 황만근을 찾아 나서려 하지 않았다. 그는 있으나마나한 존재이면서 있었고, 없어서는 안 되는 존재이면서 지금처럼 없기도 했다. 동네 사람들은 그를 바보라고 했다.”


“황만근의 어머니와 아들, 조손은 입맛이 까다로워 비린 반찬이 없으면 먹지를 않는가 하면 비린 반찬이 있으면 밥상머리에서 돌아앉았다.”


앞의 첫 예문에 적힌 표현 “있으나마나한 존재이면서 있었고, 없어서는 안 되는 존재이면서 지금처럼 없기도 했다”는 황만근의 존재 가치를 표현하는 어법으로서 매우 적절해 보인다. 그래서 독자에게 멋진 표현으로 인상에 남을 만하다.

 

그러나 같은 어법이지만 둘째 예문은 그렇지 못하다. 그것은 바른 글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 글의 주어는 ‘황만근의 어머니와 아들, 곧 조손’이다. 그러니 “비린 반찬이 없으면 먹지를 않는가 하면 비린 반찬이 있으면 밥상머리에서 돌아앉았다”라는 상반된 행위의 주체가 ‘할머니와 손자 곧, 조손’이 되는 셈이다. 어떻게 같은 주체가 상반된 행위를 할 수 있겠는가? 작가는 ‘조손’을 분리하여 ‘조’는 비린 반찬이 없으면 먹지를 않고, ‘손’은 비린 반찬이 있으면 밥상머리에서 돌아앉았다는 표현을 하고 싶었겠지만 독자는 그렇게 이해해 주지 않을 것이다. ‘조손’의 각 글자를 독립시켜 주어로 삼는 것은 문법적으로 바르지 못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첫째 예문은 아름다운 글이라고 할 수 있지만 둘째 예문은 아름답다고 할 수 없다. 둘째 예문을 아름답지 못하게 만든 요소가 ‘문법에 맞지 않음’이라면 바름이 글의 아름다움에 분명히 큰 영향을 끼친다고 보지 않을 수 없다. 바른 글이 되어야 아름다운 글을 논할 수 있다는 것이 이런 이유 때문이다.

 

멋진 어휘, 고상한 취향보다 중요한 것

 

그렇다면 바른 글과 아름다운 글 사이에는 어떤 차이가 있을까? 멋진 어휘를 구사하고, 아름다운 문구를 동원하면 아름다운 글이 될까? 다시 말하면 바르지 않은 글이 아름다울 수 있는가? 이에 관한 해답을 아래의 글에서 찾아보자. 아래 글은 최인훈의 출세작이라고 할 수 있는 ‘광장’의 일부이다. 일견 이지적이고 철학적인 듯이 보이는 이 글에서 우리가 느낄 수 있는 것이 무엇일까?


“관조(觀照)에서 오는 회의(懷疑)는 그래도 뼈아픈 결단까지는 요구하지 않는다. 관조란 혹독히 반성하면 오히려 달콤하고 새로 발견한 세계를 놀이개 삼아 다루면서 철학적 회의의 가벼운 베일을 씌워보는 셈이다. 허지만 다복한 아가씨가 불란서 인형과 재롱 부리는 것보다는, 약간이나마 덜 유희적인 것은 인정해 주지 않으면 자기가 너무 불쌍하다고 늘 생각했다.”


“헛궁리에서 오는 어수선함은 그래도 뼈아픈 어떤 걸음을 내딛기까지는 다그치지 않는다. 그것은 오히려 달콤하고 새로 알게 된 곡절을 노리개 삼아 다루면서, 쉬운 일을 어렵게 짠, 말의 비단 보자기를 씌워 보는 셈이다. 하지만 복도 많은 아가씨가 인형과 재롱 부리는 것보다는 조금이나마 덜 소꿉장난임을 몰라주면 자기가 너무 불쌍하다.”

 

첫째 글은 1961년에 소설집으로 발간했던 원본에서 따온 것이고, 둘째 글은 작가가 개작하여 재간행한 것에서 따온 것이다. 아마 앞의 글이 작가에게도 썩 마땅치 않게 여겨져서 뒤의 글로 바꾼 것 같은데 첫째 글이나 둘째 글이나 바른 글의 관점에서 보면 조금도 다르지 않다.

 

“관조란 철학적 회의의 가벼운 베일을 씌워보는 셈이다”나 “그것은 말의 비단 보자기를 씌워 보는 셈이다”는 작가의 독특한 어법으로서 여타 한국인에게는 수수께끼 같은 표현이다. 이를 바른 표현이라고 할 수는 없을 것이다. 또 “인형과 재롱부리는 것보다”는 “인형으로 재롱부리는 것보다”의 잘못일 것이다. 그리고 “인형과 재롱부리는 것보다 조금이나마 덜 소꿉장난임을 몰라주면”이란 표현에서는 입이 딱 벌어지고 만다. 작가는 그가 말했듯이 ‘쉬운 일을 어렵게 짜는’ 노력을 했던 것 같다. 그러다 보니 어법에 맞지 않는 문장이 대량 생산된 것 같다.

 

아래의 글은 여성의 섬세함으로 감성을 자극한 글인데 언뜻 읽기에는 좋아 보이지만 결코 바른 글이라고 할 수 없다. 바른 글이 아니기 때문에 이 글이 아름답다고 적극적으로 옹호하기 어려워지는 것이다. 이주향의 수필집 ‘내 가슴에 달이 들어’의 한 꼭지인 ‘존재는 흔적을 남긴다’에 있는 글을 소개하겠다.


“아프니까 일상이 보입니다. 잃어버렸던 일상이 제 빛깔을 찾아갑니다. 사랑할 존재가 많은데도 자기의 사랑을 받기엔 뭔가 부족하다며 아무 존재도 사랑하지 못해 늘 굳은 얼굴을 하고 사는 사람에겐 그렇게 사는 자체가 벌이듯이 일상이 고마운 건 그 자체가 복입니다.”


‘일상이 고마운 건 그 자체가 복입니다’라는 표현은 누구에게 해당되는 말일까? 늘 굳은 얼굴을 하고 사는 사람일까? 아픈 사람일까? 아니면 늘 고마운 마음을 품고 사는 모든 사람일까? 문장 구성을 바르게 하지 못한 탓에 이런 결과가 나타났다. 조금만 조심했다면 ‘무엇이 누구에게 어떻듯이 무엇이 누구에게 어떻다’라는 문장 흐름을 놓치지 않았을 것이다. 이 글은 ‘일상이 고마운 건 그 자체가 복입니다’라고 하는 대신에 ‘아픈 사람에겐 일상이 고맙게 여겨지는 것 자체가 복입니다’라고 하였다면 바른 문장이 될 수 있었다.

 

위의 두 예에서 보듯이 아무리 독특한 어법을 개발하고 고상한 어휘를 동원하고 감성을 자극하는 취향을 뽐내려 하더라도 글이 바르지 않으면 아름다운 글이 될 수 없음을 알 수 있다.

 

곧아야 할 데 곧고, 굽어야 할 때 굽어야

 

그렇다면 어떤 글을 바른 글이라고 할 수 있을까? 그것은 곧은 길이 바른가 굽은 길이 바른가를 논하는 것처럼 정답이 있는 것이 아니다. 곧아야 할 데서 곧고 굽어야 할 곳에서 굽은 길이 아름다운 길이듯이, 한국어 어법과 글의 흐름에 맞추어서, 사용해야 할 어휘를 사용해야 할 곳에서 자연스럽게 사용한 글이 바른 글이다.

 

한옥은 들보나 서까래 등 가구물(架構物)을 드러내는 것이 멋이라면, 양옥은 철골이나 철근을 속에 감추고 외부를 치장하는 것이 멋이다. 서양식 멋에 탐닉한 나머지 한옥의 서까래를 회칠해 버린다면 한옥의 건축 법칙을 위반한 것이 되어 바른 건축이 될 수 없다. 바른 글이란 글이 처한 상황에 맞게 말의 결을 따라서 자연스럽게 구성한 글이다. 바른 글의 조건을 세 가지 제시하는 것으로 이 글을 마치려 한다.

 

 

문장교정의 예. 드넓은 벌판이라도 ‘퍼졌다’는 표현은 적절치 않다.

 

문장교정의 예. 드넓은 벌판이라도 ‘퍼졌다’는 표현은 적절치 않다. 
첫째, 문법에 맞아야 바른 글이 될 수 있다. 문법에 맞는 글이 되려면 주어와 서술어, 목적어와 보어, 부사어와 관형어 같은 문장 성분이 적절히 배치되어야 한다. 물론 주어로 쓰인 어휘, 서술어로 쓰인 어휘 등이 정확하고 적절해야 한다. 아래 글은 문법적으로 바르지 못한 글이다.

 

“공무에 짓눌려 생각조차 못했던, 그토록 좋아했던 승마는 일진이 나빴는지 나가던 날로 다리를 삐어 물리 치료를 받았다.”(최일남의 ‘풍경소리’에서)


위의 문장을 주요 성분만으로 요약하면 ‘승마는 (일진이 나빴는지 나가던 날로 다리를 삐어) 물리 치료를 받았다’가 된다. 주어와 서술어가 서로 어울리지 않으니 둘 가운데 하나를 바꿔야 한다.


둘째, 어휘를 정확하게 사용해야 바른 글이 된다. 문법에는 맞지만 어휘의 사용법이 틀리면 의미가 전달되지 않거나 엉뚱한 의미를 나타내게 되기 때문이다. 아래와 같은 글을 바른 글이라고 할 수는 없을 것이다.

“미장원은 사건이 나던 날 이른 아침 서둘러 문을 열었다. 그 전날 내일 아침 일찍 미용하러 오겠다고 주문한 손님이 있었기 때문이었다.”(마르시아스 심의 ‘미’에서)


‘주문’은 상대에게 무엇을 해 달라고 요청하는 형식을 나타내는 낱말이지 자기가 무슨 일을 하겠다고 말하는 형식을 나타내지 않는다. ‘미용해 달라고’ 주문할 수는 있지만, ‘미용하러 오겠다고’ 주문할 수는 없다.


“한없이 퍼진 허허 벌판이었다. 현은 잃어버린 총을 찾으려고 애를 태웠다. 다리가 땅에 박혀 떨어지질 않았다.”(선우휘의 ‘불꽃’에서)


벌판이 아무리 드넓게 펼쳐져 있다고 해도 그것을 ‘퍼졌다’라고 표현하지 않는다. ‘퍼지다’는 소리, 기운, 소문 따위가 멀리 미침을 나타낼 때에 쓰는 낱말이다. 땅은 아무리 넓어도 퍼질 수는 없다. ‘다리가 땅에 박혀’는 마치 주인공이 진흙밭에 빠져 있는 느낌을 준다. 그러나 실제 상황은 주인공이 빨리 그곳을 빠져나가려 해도 발이 움직이지 않을 뿐이다. 또한, 땅에 다리가 박혔으면 빠지지 않는다고 해야지 떨어지지 않는다고 하는 것은 ‘떨어지다’의 의미를 오해한 탓이리라. ‘다리가 땅에 박혀’를 ‘발이 땅에 붙어’로 바꾸면 틀린 글을 면할 수 있다. 이처럼 어휘를 적절하게 사용하지 않으면 바른 글이 되지 않는다.

 

독자를 외면한 논리의 비약

 

셋째, 논리적이어야 바른 글이 된다. 문장 안에서 각 구절이 논리적으로 연결되어야 하고, 문장과 문장이 논리적으로 전개되어야 한다. 글의 앞뒤가 맞지 않으면 바른 글이라고 할 수 없다. 아래 두 문장을 검토해 보자.


“동생은 남매를 낳을 때까지 시부모와 큰동서 밑에서 고된 시집살이를 하다가 큰형이 혼자서 물려받은 시골 땅값이 오르는 바람에 겨우 작은 집을 하나 얻어 가지고 세간을 날 수가 있었다. 동생의 남편은 착하기만 하고 경제적으로는 무능했기 때문에 동생은 그 집을 유일한 남편 덕으로 알고 여간 대견해한 게 아니었다.”(박완서의 ‘그리움을 위하여’에서)


위 문장에는 두 번의 논리 비약이 있다. ‘큰형이 혼자서 물려받은 시골 땅값이 오른 사실’과 ‘동생이 작은 집을 하나 얻어 세간을 난 사실’ 사이에는 직접적인 인과관계가 없다. 또, ‘동생의 남편이 착하기만 하고 경제적으로 무능한 것’과 ‘동생이 그 집을 유일한 남편의 덕으로 알고 대견해한 것’ 사이에도 직접적인 인과관계가 없다.

 

그런데 작가는 이를 직접 인과관계가 있는 것처럼 문장을 구성했다. 이런 글은 바른 글이라고 할 수 없다. 작가는 자신만 아는 사실을 타인도 알 것으로 믿고 논리의 비약을 감행하였을 것이다. 심정적으로는 작가의 생각을 이해할 수 있지만 글에서는 그런 태도가 용납되지 않는다. ‘큰형’이 ‘동생’의 큰형이 아니고 ‘동생’ 남편 곧 제부(弟夫)의 큰형임도 이 문장을 틀린 문장으로 규정하게 만들고 있다.

 

어떤 이는 연결 어미를 부정확하게 씀으로써 본의 아니게 터무니없는 논리를 펼치게 되는 경우도 있다. 특히 종속적으로 연결하는 어미를 쓸 때에 앞 절과 뒤 절이 이유, 근거, 원인, 목적, 전제 등 어떤 종속적 관계에 따라 연결될 것인지 살피고 그에 맞게 정확한 연결 어미를 사용해야 하는데 감각적으로 아무 것이나 사용함으로써 문제를 일으키는 경우가 많다.


“조선 왕조에서는 왕이 솔선 검약함으로써 국민에게 수범하는 것을 왕도정치의 근본으로 삼았거니와, 따라서 복식에 있어서도 그 평상복은 사대부의 평상복과 그렇게 차이가 있는 것은 아니었다.”(유희경의 ‘한국 복식사 연구’에서)


위의 글에서 ‘-거니와’는 앞의 사실을 인정하되 그와 다른 사실이 있음을 나타내기 위해서 쓰이는 종속적 연결 어미이다. ‘-는데’의 기능과 비슷하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런데 위 글의 종속절은 주절의 근거를 제시하는 기능을 하고 있다. 이런 경우에는 ‘-거니와’를 쓰지 않고 ‘-으므로’를 쓰는 것이 옳다. 어미 ‘-으므로’를 쓰면 접속 부사 ‘따라서’를 쓸 필요가 없어진다. 이처럼 어미를 정확하게 쓰지 않으면 논리적으로 앞뒤가 어긋나 바른 글이 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바른 글이 아름답다. 다시 이를 고쳐 말한다면 바른 글은 아름다울 수 있어도 바르지 않은 글은 결코 아름다울 수 없다. 바른 글이란 구성이 문법적으로 바르고, 쓰인 어휘와 표현이 바르고, 글의 전개가 논리적으로 바른 글이다. 바르고 바르지 않은 기준은 일관되게 정해진 것이 아니고 각 문장이 처한 상황과 담고 있는 의미 내용에 따라서 구체적으로 결정된다.

 

바른 글이 아름다운 글이 되기 위해서 필요한 덕목은 수없이 많다. 이런 덕목에 관해서는 이 책에서 다른 필자들이 논하였을 줄 안다. 그런 덕목을 배우고 익히기 전에 먼저 바른 글을 적도록 힘쓰자. 바른 글을 적을 수 있는 사람만 아름다운 글을 쓸 자격이 있고, 아름답게 쓰는 노력을 할 자격이 있다. 그래서 바른 글만이 아름다운 글이 될 수 있다고 감히 말하는 것이다.


<출처 : 신동아http://www.donga.com/docs/magazine/shin/2003/11/07/200311070500000/200311070500000_1.html>
 

글: 남영신 국어문화운동본부 회장 nopl@barunmal.com
서울대 법대를 졸업한 후 우리말 살리기 운동에 뛰어들어 30여년간 외길을 걸었다. 현재 국어문화운동본부 회장, 한국문장사협회 고문, 국어심의위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저서로 ‘우리말 분류대사전’ ‘국어용례사전’ ‘국어사전’ ‘나의 한국어 바로 쓰기 노트’ ‘국어천년의 실패와 성공’ ‘문장 비평’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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