잡문 쓰는 즐거움
셰익스피어에서 프로레슬링까지
엄격한 규범과 규칙을 준수하고 일정한 절차와 격식에 따라 쓰는 것이 논문이다. 물샐 틈 없는 논문에 비하면 잡문은 자유비행이다. 장난도 치고 소리도 지르고 간식도 먹을 수 있다.
축구팬의 한 사람으로 나는 1970년 브라질이 월드컵에서 우승한 직후 브라질 의회에 제출됐던 의안 하나를 기억하고 있다. 사상 최초로 월드컵 3회 우승의 신화를 만들고 줄리메컵을 영구 소유하게 됐으니 브라질 국기에 그려져 있는 지구를 축구공 도안으로 대체하자는 안건이었다. 대통령궁 발코니에 나와 대통령이 열정적인 삼바춤을 선보이고, 특별공휴일이 아니라 특별공휴주간이 선포된 가운데 이 의안은 근소한 차로 부결됐다.
그 당시 축구공은 오각형의 검은 가죽을 육각형의 흰 가죽이 감싸고 있는 점박이 무늬. 만약 그 안건이 가결됐더라면 어떻게 됐을까. 월드컵 공인구의 도안이 바뀔 때마다 브라질 국기의 도안도 변화를 거듭했을까. 행인지 불행인지 이 의안이 부결된 덕분에 인상적인 문구 하나도 살아남았다. 브라질 국기 지구본 아래를 감싸고 있는 띠에 새겨진 ‘질서와 진보’라는 포르투갈어다. 이 문구는 내 글의 지향점이기도 하다.
내가 이해하는 한, 질서는 논리이고 진보는 정보다.
글쓰기에서 질서란 혹시 한 편의 글 안에서 구축하는 이른바 내재적 논리를 넘어서는 논리가 아닐는지. 셰익스피어학이라는 것이 있다. 셰익스피어의 글, 생애, 문화적 의미, 역사적 변용 및 창조적 이용 사례들을 연구하는 학문 분야다. 그런데 초기 셰익스피어 연구자들을 지속적으로 괴롭힌 의문이 하나 있었다. 셰익스피어 집단 창작설. 말하자면 셰익스피어는 일개 자연인이 아니라 일단의 문사들이 연합하여 만든 회사명, 즉 브랜드명이었다는 설이다. 16세기의 정보유통 속도나 방법 등을 감안해볼 때, 셰익스피어가 다루고 있는 정보의 총량이 개인의 한계를 넘어서고 있다는 게 이러한 주장의 근거였다. 일리 있는 얘기여서 한때 셰익스피어가 실존인물이 아니라는 학설을 펼치는 사람마저 있을 정도였다.
셰익스피어는 개인인가? 개인이다. 그 많은 문헌을 전부 다 혼자 썼다고 확언할 수 있는가? 확언할 수 있다. 그렇다면 그토록 방대한 정보를 다룰 수 있었던 까닭은 무엇인가? 어떤 비평가들은 셰익스피어를 인류사상 최고의 각색자라고 평가한다. 새로운 이야기를 처음부터 만들어낸 것이 아니라, 시중에 떠돌던 이야기들을 수집하고 분류한 뒤 자신의 색깔을 입혀 독특한 이야기로 재창조한 작가라는 의미다. 실제로 셰익스피어 극에 나오는 많은 일화들은 당대 최고의 인기 역사책 ‘홀린셰드 연대기’에 상당 부분 빚을 지고 있다.
말을 바꾸면 시중에 떠돌던 당대의 많은 이야기들이 셰익스피어라는 필터를 통해 예술적으로 재창조됐다는 이야기다. 셰익스피어는 이러한 이야기들에 새로운 질서를 부여한 사람이다. ‘서 말의 구슬을 꿰어 보배로 만든 사람’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기존 정보들을 정리하는 것만으로는 문명(文名)을 날릴 수 없다. 독창성이 없기 때문이다. 진보는 창조의 다른 이름이다. 때로는 무에서 유를 만들어내는 진정한 천재들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대개는 시점과 관점을 바꾸는 것만으로도 많은 것을 창조할 수 있다. 시오노 나나미는 “천재란 남들이 무심히 지나치는 곳에서 가능성을 발견하고 이를 현실에서 구현하는 사람”이라고 했다. 기존 정보를 분해하고 결합하며 응고하고 해빙하면 이제껏 우리가 모르던 무언가가 틀림없이 얼굴을 내밀고 소리칠 것이라는 발언에 나 역시 기꺼이 한 표를 던진다.
팽팽한 긴장감에서 벗어난 글쓰기
이제부터 본론이다. 잡문(雜文) 쓰는 즐거움. ‘잡’이 갖는 뉘앙스가 다소 부정적인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해석하기에 따라서, 그리고 각자의 처지와 사회적 역할에 따라서 ‘잡문’의 정의는 만 갈래로 갈라진다. 글을 써서 먹고 사는 사람으로서 내 스스로 생각하는 정체성은 비교연극 사학자다. 이런 관점에서 나는 논문을 제외한 모든 글을 잡문이라고 통칭한다.
논문은 새로운 사실을 밝히고 드러내는 ‘앎의 보고서’이다. 엄격한 규범과 규칙을 준수하고 일정한 절차와 격식에 따라 글을 쓰는 것이 논문의 묘미다. 물샐 틈을 허락하지 않는 엄정한 세계. 논문에 비하면 잡문은 자유비행이다. 축구장에서 야구를 하거나 잔디밭 한 켠에서 피크닉을 즐길 수도 있다. 심지어 돗자리를 깔고 잠깐 오수를 즐긴다 해도 이의를 제기할 사람이 없다.
누군가의 글이나 말을 인용할 경우, 논문이라면 명확한 출처를 밝혀야 한다. 언제 어디서 출판된 어느 책의 몇 페이지에서 인용했다는 기록을 꼼꼼히 첨부해야 한다. 안 그랬다가는 표절 혐의를 피할 수 없다. 이것이 논문의 규칙이다. 유럽의 경우 남의 책이나 글에서 일곱 단어 이상을 그대로 쓰는 경우 모두 ‘인용’이다. 예외가 없다. 한 번 표절자로 낙인 찍히면 학자로서의 생명은 그 순간 끝난다. 손톱만큼의 ‘지적 절도’도 용납하지 않는 것이 학문의 세계이기 때문이다.
잡문은 이런 팽팽한 긴장감으로부터 한 발짝 떨어진 마음의 정원이다. 장난도 치고 소리도 지르고 간식도 먹을 수 있는 자기만의 공간이다. 그래서 잡문에는 어쩔 수 없이 글쓰는 이의 개인사가 슬쩍 묻어난다. 필자 모르게 그걸 캐두었다가 우연히 만났을 때 창졸간에 기습하는 재미가 여간이 아니라는 걸 적어두기로 하자.
그렇다면 잡문을 잘 쓸 수 있는 비결은 무엇인가. 재미있는 글을 쓰는 방법이 따로 있으랴마는 제목을 그렇게 받았으니 도망갈 길이 없다. 내가 ‘잡문가’로 데뷔한 것은 1994년, 지금은 사라진 ‘리뷰’라는 계간지를 통해서다. ‘스포츠평론가’라는 타이틀을 달고 ‘월드컵을 읽는다’라는 글을 발표했는데 이 글에 대한 반응이 재미있었다. 그래도 칭찬이 더 많았는데, 상찬의 내용인즉 새로운 시각을 보여주었다는 것이다. 축구라는 운동을 스포츠 경기로만 해석하지 않고 사회학적·역사적·문화적 사안들과 연계해 독특하게 풀어내려 시도한 점이 좋았다는 얘기였다.
옳거니! 그로부터 나는 여러 분야를 자유롭게 넘나들며 말을 건넬 수 있는 잡문의 매력을 마음껏 즐겼다. 짐짓 딴 얘기를 하는 척하다 시침 뚝 따고 들어가는 글로 재미를 보기도 했다. 이를테면 프로레슬링과 아일랜드 문예부흥운동과 공상과학 만화영화를 한데 섞어놓고 버무리는 것이다. 말하자면 이런 식이다.
레슬러 김일은 단순한 스포츠맨이 아니다. 1960년대와 1970년대를 관통하는 문화적 코드다. 과장이 아니다. 그의 존재는 동시대 대다수 사람들에게 지속적으로 광범위하게 영향을 끼쳤다. 그것만이 아니다. 그 시대를 살았던 사람들 중 상당수는 김일이라는 레슬러, 혹은 레슬링이라는 스포츠와 잇닿은 개인사적 추억을 적어도 하나 이상은 간직하고 있다. 바로 이 지점에서 김일은 스포츠라는 영역을 훌쩍 뛰어넘고, 사회적·역사적 맥락 안에서 엄청난 존재의의를 지닌 문화적 코드로서의 지위를 획득하는 것이다.
프로레슬링과 아일랜드 문예부흥의 상관관계
아일랜드 문예부흥운동은 세계 문화운동 사상 가장 성공한 문화운동이요 민족운동으로서, 20세기 초반 식민지배에 시달리던 여러 민족들에게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우리나라도 그 중의 하나다. 유치진 함세덕 등을 비롯, 수많은 연극운동가들이 아일랜드 연극 및 아일랜드 연극운동을 모본으로 삼아 문화운동, 민족운동으로서 연극운동을 치열하게 전개하였으며 신문 잡지 등에 아일랜드에 관한 숱한 글들을 발표한다.
한때 프로레슬링이라는 스포츠는 텔레비전의 황금시간대를 장악하는 최고의 인기 스포츠였다. 전파와 언론을 석권했을 뿐 아니라 어린이 놀이 문화에도 큰 영향을 끼쳤다. 미래의 레슬러를 꿈꾸는 어린이들이 팬티 바람으로 격전을 벌이고, 상황이 다소 나은 집에서는 두꺼운 요를 여러 겹 깔아 링을 만들기도 했다. 코브라 트위스트나 새우꺾기 같은 기술 외에, 드롭킥이나 보디슬럼 같은 고난도 플라잉 기술을 구사하려면 바닥이 푹신한 편이 절대적으로 유리했기 때문이다. 자체 제작한 가면이나 날개 대용으로 착용하는 보자기도 중요한 소품이었다.
어린이들만 레슬링에 열광했던 것은 아니다. 당시 국내 유일의 실내 체육관이던 장충체육관 주변은 경향 각지에서 몰려온 팬들에 의해 인산인해를 이루곤 했다. 경기를 지켜보던 박정희 대통령이 친히 전화를 걸어 “조국의 명예를 빛내줘서 고맙게 생각합니다, 김일 선수”라고 치하하면, 이를 받아 “아닙니다, 각하! 대한의 남아로서 의당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입니다!”라고 답하던 김일 선수의 씩씩한 목소리는 근 40년이 지난 오늘까지도 여전히 올드팬들의 귓가에 아련한 추억을 드리우고 있다. 그렇다면 프로레슬링이 이토록 전국민의 열광적인 관심을 불러일으켰던 까닭은 무엇인가? 레슬링은 드라마였다. 그것이 인기폭발의 알파요 오메가였다.
레슬링은 정교한 사전 콘티에 따라 진행되는 퍼포먼스다. 메인이벤트는 대개 60분 3판 양승제 태그매치로 거행되는 것이 상례였다. 첫째 판, 김일이 등장하여 상대 선수를 기술로 제압하고 반쯤 넋을 빼놓은 상태에서 우리편과 ‘터치’한다. 가벼운 마무리, 원 투 스리. 둘째 판, 실력으로는 도저히 대적할 수 없다고 판단한 상대팀이 암수를 쓰기 시작한다. 반칙을 자행하고, 팬티 속에서 도구를 꺼내 흉기로 사용한다. 로프 밖의 김일은 거칠게 항의하지만, 심판은 언제나 우리 편 반칙에는 지나치리만큼 냉정하고 상대의 반칙은 거의 보지 못한다. 부당한 폭력 앞에 무력하게 당하는 우리 선수의 모습에 관중석은 공분한다.
선혈이 낭자한 가운데 패전, 세트 스코어 1 대 1. 셋째 판, 우리 편 선수는 여전히 초라하게 내몰린다. 몇 번의 시도가 무위로 돌아가고 마침내 필사의 탈출, 무릎걸음으로 기어와 김일과 터치. 김일은 상대를 실력으로 제압하고 마침내 매트에 뉘여 카운트를 헤아린다. 이때, 상대방의 동료가 재빨리 링으로 뛰어들어 김일의 등을 발로 짓누른다. 그리고, 흉기를 꺼낸다. 더 이상 참을 수 없게 된 관중들이 ‘박치기!’를 연호하기 시작한다. 관중석의 신호를 수신한 김일은 분연한 표정으로 상대에게 박치기를 안긴다. 김일의 박치기에 상대방 레슬러들은 추풍낙엽처럼 쓰러지고 비굴한 표정을 지으며 도망을 친다. 퇴각하는 적을 붙잡아 어깨 누르기. 적은 다시 등판 밟기라는 고전적 반칙을 시도하지만, 링 밖으로 물러나 있던 김일의 동료가 비호처럼 달려들며 적을 저지하고 적법한 승리를 거두는 데 일조한다. 김일은 그와 더불어 동료애를 확인하며 감격의 함성을 내지르는 관중들의 환호에 답한다.
그렇다면 이토록 인기 절정이었던 프로레슬링이 몰락한 원인은 무엇인가? 항간에 알려진 바와 같이 ‘프로레슬링은 쇼’라는 사실이 밝혀졌기 때문인가? 프로레슬링이 쇼라는 이야기는 어느 정도 맞는 말이다. 그러나 그만큼 역동적인 기술들을 보여주기 위해서는 어느 스포츠맨 못지않은 치열한 신체단련을 하지 않을 수 없다는 데 프로레슬링의 역설이 있다. 연습 없이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것. 링 위에서 보여지는 프로레슬링은 쇼라고 할 수 있지만, 링에 오르기까지의 단련과정은 쇼일 수가 없다.
그리고 여기에도 무술 유단자들의 세계처럼 나름대로의 경지와 단계가 있다. 예컨대 흥행을 위해서는 별도의 사전 연습, 즉 리허설이 필수적이다. 그러나 김일이나 이노키 정도의 고수들은 굳이 리허설을 하지 않고도 말로써 모든 상황을 맞춰볼 수 있다고 한다. 진행 상황을 말로 주고받은 뒤 링 위에 올라가고 한치의 오차도 없이 말한 바를 그대로 재연했다. 미리 짜고 치는 경기라는 것이 알만한 사람들에겐 다 알려졌다지만, 이것이 프로레슬링 몰락의 원인은 아니다.
장르를 뒤섞은 칵테일 같은 글
프로레슬링은 처음부터 끝까지 단막극이었다. 선한 사람과 악당의 대결은 늘 당일 저녁에 완결됐고, 다음날이면 거의 똑같은 드라마가 반복됐다. 만약 그럴듯한 악당을 만들고 악당의 득세와 몰락의 과정을 장기간에 걸쳐 기획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아마도 단막극 구조를 연속극이나 대하드라마 구조로 가져갈 수 있었다면 프로레슬링은 그토록 허무하게 무너지지는 않았을 것이다.
김일이 연출한 프로레슬링 드라마는 기실 실질적 몰락 훨씬 이전에 수명이 다한 구도였다. 뻔한 이야기가 생명력을 이어갈 수 있었던 건 선한 한국 사람이 일본인 악당을 혼내준다는 구도에 기대고 있었기 때문이다. 일차원적 민족주의에 기댄, 어쩌면 맹목적인 감정 말이다. 이 대목에서 프로레슬링은 일제시대 연극운동과 비스듬히 조우한다.
말이 길어졌다. 그런데도 아직 원고 매수가 남아 있다. 그렇다면 방법은… 아아, 여기서 몇 가지 결정적인 고백을 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인가. 자체 제작한 가면이나 날개 대용으로 보자기를 착용하고 놀았던 건 나의 과거사다. 그리고 잡문 쓰기는 분명 즐거운 작업이지만 여러 주제를 정신없이 뒤섞는 것은, 모르는 대목을 은근슬쩍 넘어가려는 얄팍한 술수라는 따위. 이런 얘기도 잡문이니까 할 수 있다. 잡문만세다.
<출처:신동아>
글: 장원재 숭실대 교수·문예창작 j12@saint.ssu.ac.kr
고려대 국문과 졸업, 영국 런던대 골드스미스 칼리지에서 연극학 석사, 동대학 로열헐러웨이 칼리지에서 비교연극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숭실대 문예창작과 교수로 있으면서 연극 및 공연관련 강의 및 저술작업 외에 월드컵 기간 축구평론가로 활약했다. 프로레슬링과 만화에도 조예가 깊다. 저서 ‘속을 알면 더 재미있는 축구 이야기’ ‘Again 2002’, 역서 ‘셰익스피어와 영상문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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