많이 읽고 제대로 쓰기
책사냥꾼은 책을 사서 읽고 쓴다
당신이 책벌레든 책사냥꾼이든, 열독가든 수집가든, 독서가든 장서가든 책읽기는 글쓰기의 출발점이다.
“작가가 되고 싶다면 무엇보다 두 가지 일을 반드시 해야 한다. 많이 읽고 많이 쓰는 것이다. 이 두 가지를 슬쩍 피해갈 수 있는 방법은 없다. 지름길도 없다.” 얼마 전 ‘전미(全美)도서상’ 평생공로상을 받은 미국 작가 스티븐 킹이 ‘유혹하는 글쓰기’(원제 on Writing, 김영사)에서 한 말이다.
스티븐 킹은 지난 30년 동안 ‘캐리’ ‘미저리’ ‘샤이닝’ 등 발표하는 소설마다 베스트셀러로 만든 출판계의 ‘미다스의 손’. 그가 “많은 소설책을 팔아먹은 사람으로서 글쓰기에 대해 ‘뭔가’ 할 말이 있다”며 쓴 책이 ‘유혹하는 글쓰기’다. 싸구려 추리소설이나 쓰는 대중작가가 무슨 ‘창작론’이냐 싶어 실눈 뜨고 보는 사람도 있겠지만, 그의 적나라한 글쓰기 이야기를 듣다 보면 머리를 끄덕이게 되는 대목이 한두 군데가 아니다. 다음은 ‘쿡’ 하고 터져나오는 웃음을 참으며 읽은 대목이다.
“책을 별로 안 읽는(더러는 전혀 안 읽는) 사람들이 글을 쓰겠다면서 남들이 자기 글을 좋아할 거라고 생각하는 것은 정말 터무니없는 일이다. 그러나 나는 그런 사람을 많이 보았다. 어떤 사람이 나에게 작가가 되고 싶지만 ‘독서할 시간이 없다’고 말할 때마다 꼬박꼬박 5센트씩 모았다면 지금쯤 맛있는 스테이크를 즐길 수 있었을 것이다. 이 문제에 대하여 좀더 솔직히 말해도 될까? 책을 읽을 시간이 없는 사람은 글을 쓸 시간도 없는 사람이다.”
스티븐 킹은 심지어 “종종 좋은 책보다 나쁜 책에서 더 많은 것을 배운다”고 말했다. ‘나도 이것보다는 잘 쓰겠다. 아니, 지금도 이것보다는 훨씬 낫지!’라는 생각이 풋내기 작가에게 얼마나 큰 용기를 주는지 너무나 잘 알기에 할 수 있는 소리다. 그가 말하는 독서의 중요성도 속이 시원할 만큼 실용적이다.
“꾸준히 책을 읽으면 언젠가는 자의식을 느끼지 않으면서 열심히 글을 쓸 수 있는 어떤 지점에 (혹은 마음가짐에) 이르게 된다. 그리고 이미 남들이 써먹은 것은 무엇이고 아직 쓰지 않은 것은 무엇인지, 진부한 것은 무엇이고 새로운 것은 무엇인지, 여전히 효과적인 것은 무엇이고 지면에서 죽어가는(혹은 죽어버린) 것은 무엇인지 등등에 대하여 점점 더 많은 것들을 알게 된다. 그리하여 책을 많이 읽으면 읽을수록 여러분이 펜이나 워드프로세서를 가지고 쓸데없이 바보짓을 할 가능성도 점점 줄어드는 것이다.”
책사냥꾼들의 사냥일지
2년 전 다치바나 다카시가 쓴 ‘나는 이런 책을 읽어왔다’(청어람미디어)가 화제가 됐다. 그의 독서론 제1 명제가 ‘책을 사는 데 돈을 아끼지 말라’다. 저널리스트인 다치바나는 한 사람을 취재하기 위해 대담료보다 더 많은 책을 사보며, 한 권의 책을 펴낼 때마다 500여 권의 관련서적을 읽고, 급기야 넘쳐나는 책의 분량과 무게를 감당하지 못해 아예 3층짜리 서재(고양이 빌딩)를 짓는 화려한 지적 편력을 갖고 있다. 이런 지적 욕구에 대해 그는 책을 쓰고 싶은 욕구가 아니라 ‘어떻게 해서든 알고 싶다’ ‘좀더 자세히 알고 싶다’는 욕구라고 설명했지만, 엄청난 다독(多讀)이 ‘다작(多作)’으로 연결된 것은 당연하다. 그는 읽으면서 쓰고, 쓰면서 읽었다.
일본의 저명한 한학자 오야나기 시게타(1870~1940)의 생활신조는 ‘책을 사서 읽고 쓴다’였다. 즉 책을 구입하면 반드시 읽고, 읽고 나면 반드시 그 책의 주제에 대한 글을 썼다. 이런 이야기를 들려준 출판칼럼니스트 표정훈씨는 오야나기를 가리켜 “책사냥꾼으로서 입신의 경지에 이른 인물”이라고 감탄했다.
책사냥꾼 생활을 오래 하다 보면, 사냥감을 직접 만들어내고 싶은 법. 자칭 책사냥꾼인 표정훈씨도 자신의 사냥일지를 모아 ‘책은 나름의 운명을 지닌다’(궁리)를 펴냈다. 그 책의 시작이 “나는 책 읽는 방법을 배우기 위해 80년이라는 세월을 바쳤다. 아직까지도 잘 배웠다고 말할 수 없다”는 괴테의 말인 것이 의미심장하다.
한양대 정민 교수(국문학)의 ‘책 읽는 소리’(마음산책)를 읽다 보면 깊은 밤 선인들이 나지막한 목소리로 책 읽는 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예원의 열 가지 즐거움(藝園十趣)’라는 글을 남긴 김창흡은 ‘산 독서’와 ‘죽은 독서’를 이렇게 구분했다. “책을 덮은 뒤에 그 내용이 또렷이 눈앞에 보이면 이것이 산 독서이고, 책을 펴놓았을 때에는 알았다가도 책을 덮은 뒤에 망연하면 죽은 독서다.” 선인들은 이처럼 읽고 또 읽어 완전히 꿸 때까지 읽고 나서 반드시 독서비망록을 남겼다. 송시열의 ‘간서잡록’, 이이의 ‘성학집요’에 실린 ‘독서지법’, 하홍도의 ‘독서설시인’, 성문준의 ‘독서칠결’ 등이 요즘식으로 말하면 ‘독서일기’다.
김현의 ‘행복한 책읽기’(문학과지성사) 이후 독서일기는 글쓰기의 한 장르로 자리잡았다. 1994년 첫선을 보인 ‘장정일의 독서일기’(범우사)는 벌써 5권을 채웠고, 이승하의 ‘헌책방에 얽힌 추억’(모아드림), 이권우의 ‘어느 게으름뱅이의 책읽기’ ‘각주와 이크의 책읽기’(이상 한국출판마케팅연구소), 조희봉의 ‘전작주의자의 꿈’(함께읽는책), 전사섭의 ‘장충동 김씨를 위한 이야기’(시공사) 등 일종의 독서에세이 출간이 붐을 이뤘다.
이들은 자타가 공인하는 ‘책벌레’들이다. 그러나 아무거나 먹지 않고, 아무렇게나 뱉지 않는다. 조희봉씨는 ‘열독가’에 견주어 자신을 ‘수집가’(미처 다 읽지는 못하더라도 좋은 책을 모으고 보는 것에 만족하는 사람)라고 낮추지만 ‘전작주의’라는 읽기 방식을 널리 소개했다. 전작주의란 한마디로 특정 작가의 모든 작품을 읽는 것이다. 그렇다고 무작정 읽는 것이 아니라 작가의 전작에 흐르는 일관된 흐름을 읽어내고, 그의 작품세계가 당대적으로 어떤 의미를 갖는지 찾아낸다. 그는 이런 방식으로 이윤기, 안정효를 읽었고, 나름의 ‘이윤기론’ ‘안정효론’을 썼다. 책과는 그다지 관계 없는 전공(경제학)을 했고, 역시 거리가 먼 일(정보기술회사)을 해왔지만 대학시절부터 10년 넘게 헌책방을 전전한 이력이 책쓰기를 가능케 했다.
이권우씨는 ‘도서평론가’라는 직함 덕분에 한 달에도 100여 권씩 책을 ‘보지만’ 그 가운데 꼼꼼히 ‘읽은’ 책만 모아 두 권의 ‘책읽기 책’을 썼다. 두 번째 독서에세이인 ‘각주와 이크의 책읽기’에는 두 가지 책읽기 방식이 등장한다. 자신의 세계관, 가치관, 감성을 옹호하고 보충하고 지지해주는 책읽기는 ‘각주의 책읽기’, 읽다가 속으로 이크, 하고 소리지를 만큼 지적인 충격을 주는 책을 만날 때는 ‘이크의 책읽기’가 된다. 당신이 책벌레든 책사냥꾼이든, 열독가든 수집가든, 독서가든 장서가든, 책읽기는 글쓰기의 출발점이다.
작가의 연장통
다시 ‘유혹하는 글쓰기’로 돌아가보자. 스티븐 킹이 무조건 읽기만 강조한 것은 아니다. 그는 목수들이 갖고 다니는 3단 ‘연장통’을 장황하게 설명하면서 글을 쓰겠다는 사람이라면 적어도 4단 연장통을 갖춰야 한다고 했다. 자주 쓰는 연장을 담는 맨 위층에는 ‘낱말’을 넣어둔다. 그러나 어휘를 늘리려고 의식적으로 노력할 필요는 없으며 책을 읽으면 저절로 해결된다는 충고도 덧붙였다. 낱말 옆 칸에는 ‘문법’을 넣고(다만 ‘여러분이 아직도 문법을 모른다면 이미 때가 늦었다’는 킹의 말에 기죽지 말지어다) 나머지 칸들은 형식과 문체, 문단으로 채운다.
물론 각각의 칸을 채워넣을 때 나름의 기준을 갖는 게 좋다. 예를 들어 스티븐 킹은 ‘낱말’ 칸을 소박하고 쉬운 말 대신 화려하게 치장한 말로 채우는 것을 ‘애완동물에게 야회복 입히기’라고 이죽거린다. ‘하던 일을 멈추고 똥을 누었다’라고 하면 될 것을 ‘하던 일을 멈추고 생리현상을 해결했다’고 쓰지는 말란 말이다. 평이하고 직설적인 표현! 낱말 선택의 제1규칙이다. 킹은 존 스타인벡의 ‘분노의 포도’ 한 구절을 제시하며, 문장구조는 복문이지만 사용된 낱말은 초등학교 1학년 교과서 수준을 넘지 않는다고 말한다. 그런데도 스타인벡은 이 작품으로 1940년 퓰리처상을 수상했다(스타인벡은 1962년 노벨문학상 수상자이기도 하다).
그리고 문법이 골치 아프다고 말하지만, 문장에는 이름을 표시하는 명사와 동작을 표시하는 동사만 있으면 된다는 것을 깨닫는 순간 두통은 사라진다. 아무 명사에 동사만 연결하면 문장이다. 일부러 관계사절, 수식어구, 동격어, 중복문을 끌어들일 필요는 없다. 헤밍웨이는 ‘그는 강으로 갔다. 강은 그곳에 있었다’(헤밍웨이 ‘두 개의 심장을 가진 강’)는 식의 단문을 즐겨 썼다.
문체에서는 ‘해야 하는 것’보다 ‘하지 말아야 할 것’을 강조했다. 첫째, 수동태는 한사코 피하라. ‘작가가 밧줄을 던졌다’이지 ‘작가에 의해 밧줄이 던져졌다’가 아니다. 둘째, 부사는 여러분의 친구가 아니다. 부사는 동사나 형용사를 수식하는 말로 흔히 ‘…하게(-ly)’로 끝나는데 이것을 많이 쓰는 사람은 대개 자기 생각을 분명하게 표현할 자신이 없기 때문에 ‘사족’에 집착하는 것이다.
알고 보면 스티븐 킹의 지적 가운데 새로운 것은 하나도 없다. ‘유혹하는 글쓰기’ 서문에서도 이 사실을 분명히 했다. 윌리엄 스트렁크 2세와 E. B. 화이트의 ‘문체요강’을 반드시 읽어라. 그 책에 실린 ‘작문의 원칙’ 중 17번 규칙이 ‘불필요한 단어는 생략하라’이다. 문법을 복습하고 싶다면 동네 헌책방에 가서 ‘워리너편 영문법과 작문’을 찾아보라(대부분 고등학교 시절 배운 책).
혹시라도 좋은 글을 쉽게 쓸 ‘묘수’가 있지 않을까 기대하고 ‘유혹하는 글쓰기’를 펼쳤다면 실망스러울 수밖에 없다. 베스트셀러 작가의 글쓰기 비밀이 ‘문체요강’과 문법책이었다니!
교문 밖을 나선 후 우리말 ‘문법’을 잊고 지냈다면 이쯤해서 이오덕의 ‘우리글 바로쓰기(3권)’ ‘우리 문장 쓰기’(이상 한길사)에 눈길을 보낼 필요가 있다. 이수열의 ‘우리가 정말 알아야 할 우리말 바로 쓰기’(현암사)나 남영신의 ‘나의 한국어 바로쓰기 노트’(까치)도 좋다. 처음에는 꼬장꼬장한 선생에게 잘못 걸린 기분이지만, 자신의 글쓰기가 얼마나 너저분한지 깨닫게 해준다.
표현의 기술과 글쓰기
패트릭 G. 라일리의 ‘원 페이지 프로포절-강력하고 간결한 한 장의 기획서’(을유문화사)를 보며 떠오른 생각은 일반 글쓰기에 관해서도 이처럼 ‘콤팩트’한 책이 있으면 좋겠다는 것이었다. 스티븐 킹이 마르고 닳도록 칭찬한 ‘문체요강’은 불과 85쪽이었다.
국내 출판 목록을 보면 ‘책읽기에 관한 책’이 날로 종수를 늘려가고 있는 데 비해 ‘글쓰기에 관한 책’은 빈약하기 짝이 없다. 그나마 글쓰기에 대한 괜찮은 책들은 출간된 지 너무 오래돼 낡은 느낌을 주거나 절판됐다(남영신의 ‘문장비평’이나 최성애의 ‘자기표현 시대에 쓸모 있는 글쓰기’ 는 시중에서 구할 수 없다). 그만큼 글쓰기 책은 일반 독자들의 관심 밖에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상황이 조금씩 달라지고 있다. 올해초 영남대 임재춘 교수의 ‘한국의 이공계는 글쓰기가 두렵다’(마이넌)가 화제를 불러일으켰다. 비록 이공계 출신들을 겨냥해 테크니컬 라이팅이라는 특정 분야를 소개하고 있지만 누구나 글쓰기 훈련을 거치면 쉽게 쓸 수 있다는 사실에 많은 이들이 공감했다.
이어 순천대 김형순 교수(신소재공학)의 ‘논문 10%만 고쳐써라’(야스미디어)가 등장했다. 그 동안 논문을 써야 하는 대학원생들의 필독서는 움베르토 에코의 ‘논문 잘 쓰는 방법’(열린책들)이었다. 이 책은 1977년 초판이 나와 1985년 재판을 냈고, 국내에 처음 소개된 것이 1994년이다. 그로부터 지금까지 두 번의 판갈이를 거쳐 18쇄를 찍었다. ‘졸업논문이란 무엇이며 어디에 필요한가’와 같이 논문을 준비하는 데 필요한 마음가짐부터 주제 선택법, 자료조사법, 카드정리법, 원고작성 등 실제 논문 쓰기 과정이 일목요연하게 정리돼 있다.
에코의 ‘논문 잘 쓰는 방법’은 국내에서도 10년 가까이 스테디셀러로 자리잡았지만, 국내 현실에 맞지 않는다는 점과 인문과학 분야로 한정된다는 점에서 독자들의 아쉬움도 뒤따랐다. 그래서 더욱 공대 교수가 쓴 ‘논문 10%만 고쳐써라’의 등장이 반가웠는지도 모른다. 김형순 교수는 이 책에 논문의 올바른 작성법과 함께 해외 유명 학술지에 논문 게재하는 법 등 실용정보를 담았다.
앞의 두 책은 논문을 통해 학문 세계에 첫발을 내디디려는 사람들에게 유용하다. 즉 전문 연구자가 되려는 이들을 겨냥한 지침서다. 그러나 대학 새내기라면 도쿄대학 교수들이 펴낸 ‘지(知)의 기법’(경당)으로 충분하다.
원래 이 책은 1994년 도쿄대에서 신입생들에게 갖가지 학문 연구의 기법(문제 제기 방법, 인식 방법, 논문 작성법, 발표법 등)을 가르치기 위해 여러 교수들의 글을 받아 책으로 엮은 뒤 문과계 1학년 1학기 필수과목인 ‘기초연습’의 부교재로 쓰였다. 그러나 독자들의 반응이 뜨겁자 ‘지의 기법’에 이어 ‘지의 논리’ ‘지의 윤리’ ‘지의 현장’ 등 4권짜리 ‘知시리즈’를 완간했다(국내에서도 4권 모두 출간됐다).
1권 ‘지의 기법’ 중 3부 ‘표현의 기술’을 펼치면 조사와 자료수집, 자료의 해석, 참고문헌 작성방법, 인용이나 주(註)를 다는 방법, 리포트에서 박사학위 논문의 집필까지 실제 작성법 등을 압축적으로 소개하고 있다. 재미있는 점은 이 책 각주에서 논문 주제 선택에 관해서는 움베르토 에코의 ‘논문 잘 쓰는 법’이 좋으나 약간 어렵다고 코멘트해 놓은 것이다.
이 책을 펴내는 데 앞장섰던 후나비키 다케오 교수(문화인류학)가 쓴 맺음말은 마치 한국 교육의 현실을 이야기하는 듯해서 두고두고 기억에 남는다. 제목이 ‘18년 동안 맞장구 치기에서 벗어나자’이다. 논문 쓰기든 구두 발표든 자신의 의견을 만들어내려면, 일단 남의 의견을 경청한 후 ‘동의하지 않는’ 자세가 필요하다. 초·중·고 18년 동안 정답이라고 생각하는 것에 맞장구 치는 법만 배워온 학생들은 자신의 의견을 만들어내지 못한다. 그래서 대학에 들어와 제일 먼저 배워야 할 것이 남의 의견에 동의하지 않는 기술과 배짱이다. 논문이란 결국 어떤 문제에 대해 자기 주장을 밝히고 합리적인 방법으로 그것을 입증하는 글이다. 자신의 의견이 없다면 글쓰기 기술이 무슨 의미가 있겠나.
교수나 연구자들이 ‘논문’만 쓰는 건 아니다. 연구 외의 글을 모두 ‘잡문(雜文)’이라 하면 잡문 쓸 일이 훨씬 많을 수도 있다. 그런데 이 ‘잡문’을 잘 쓰는 전문가가 드물다. 좀더 솔직히 말하면 “잡문은 안 쓴다”고 딱 자르는 사람일수록 글쓰기가 서툴 가능성이 높다. 노스웨스턴대학 하워드 S. 베커 교수가 쓴 ‘사회과학자의 글쓰기’(일신사)는 그런 콧대 높은 전문가들에게 권하고 싶은 책이다. 물론 이 책의 주목적은 학술지에 게재할 ‘논문’의 편집과 퇴고 요령을 가르쳐주는 것이지만, 거창하고 난해한 말로 범벅이 된, 아무도 이해할 수 없는 글을 써놓고 스스로 ‘고상하다’고 만족하는 학자들에게 일침을 놓는다.
“나는 왜 글을 쓰는가?”
고상함의 허울을 벗고 솔직한 내 이야기를 쓰고 싶다면 잠시 짬을 내 나탈리 골드버그의 ‘뼛속까지 내려가서 써라’(한문화)를 펼친다. 누구나 할 수 있는 뻔한 이야기라고 생각하겠지만 미국에서 100만부가 팔렸고, 9개 언어로 번역돼 나왔다면 나름의 분명한 이유가 있을 것이다. 그 중 ‘나는 왜 글을 쓰는가?’의 한 대목을 보자.
“나는 왜 글을 쓰는가?” 아주 좋은 질문이다. 우리는 이따금 자신에게 물어 보아야 한다. 대답을 하지 못하면 글쓰기를 중단하라. 시간이 지나면 그 질문 안에 모든 대답이 들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될 것이다. 왜 나는 글을 쓰는가?
-왜냐하면 나는 얼간이니까.
-왜냐하면 나는 어린 소년들에게 영향을 주고 싶으니까.
-글을 쓰는 것이 내 진화와 발전의 시작이므로.
-위대한 소설을 써서 백만장자가 되기 위해서.
-왜냐하면 나는 무언가 할 말이 있으니까.
-왜냐하면 나는 할 말이 전혀 없기 때문에.
나탈리 골드버그는 “나는 왜 글을 쓰는가” 또는 “나는 왜 글을 쓰고 싶어하는가?”를 묻되 깊이 생각하지 말고 당장 펜을 잡고 종이 위에 자신의 대답을 적어보라고 했다. “나는 왜 글을 쓰는가?”
<출처 ; 신동아>
글: 김현미 동아일보 신동아 기자 khmzip@donga.com
1989년 동아일보에 입사해 14년간 ‘잡지’만 만들었다. 그 중에는 패션전문지, 음악전문지, 젊은 여성지, 시사주간지, 시사월간지가 있다. 출판과 교육 분야에 관심이 많다.
<참고목록 http://www.donga.com/docs/magazine/shin/contents/sn09_9.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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