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벌레의 독서일기
책을 먹어치우는 독후감
독후감 쓰기는 읽는 이를 책의 주인으로 만든다. 그리고 감히 말하거니와, 책의 주인 된 자가 세상의 주인으로 당당히 나설 수 있는 법이다.
살고 있는 집에서 자전거 타고 5분 정도 거리에 공립도서관이 지어졌다. 나 같은 사람에게 이런 일은 하늘이 내려주신 복이다. 책 읽는 일을 직업으로 삼고 있으니 집에서 나올 일이 별로 없다. 책상 앞에 앉아 읽다가 힘들면, 누워 읽고, 그러다 지치면 그냥 눈만 감으면 된다. 복 받은 직업이구나 하겠지만, 마냥 좋은 것만은 아니다.
책만 읽어도 돈을 주는 나라가 있다면, 당장 책 보따리 싸들고 이민이라도 가겠지만, 그런 나라는 눈 씻고 찾아봐도 도통 없다. 책 읽어 돈이 되는 게 아니라, 읽은 책에 대한 내 생각을 주절주절 늘어놓는 글을 써야 입에 풀칠이라도 한다. 엄밀히 말하자면, 책을 읽는 게 직업이 아니라 읽은 책에 대해 글을 쓰는 게 직업이라 할 수 있다. 쓰는 일이 직업이 되면 더욱이 바깥으로 나올 일이 없다. 하루종일 똥마려운 개처럼 끙끙대며 집안을 돌아다니는 꼴이다.
그러니 도서관은 나에게 행운일 수밖에 없다. 더운 날에는 시원한 바람이 나오고, 추운 계절에는 따뜻한 공간을 마련해 줄 터이다. 공짜가 이것만 있는 게 아니다. 책벌레가 가장 좋아하는 먹을거리는 의당 책이다. 읽고 싶은 책은 무진장 많은데, 그걸 일일이 돈 들여 사기란 불가능하다. 책벌레의 서식처가 도서관인 이유가 여기에 있는 것 아니겠는가. 읽고 싶은 책을 마음껏 볼 수 있으니, 그곳은 차라리 성소라 해야 마땅하다.
마침내 게으른 몸을 잘 구슬려, 자전거를 타고 도서관에 갔다. 이만하면 잘 지은 셈이다. 건물도 디자인이 잘 됐다. 휴게실이나 식당 같은 부대시설도 그만하면 만족할 만하다. 1층에 마련된 어린이실도 신경을 많이 쓴 흔적이 묻어 있다. 애비 닮아 책벌레 기질이 있는 딸아이를 데리고 놀러와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자전거 타고 도서관에 가다
도서관 담당자가 알면 불쾌할지 모르지만 내 눈은 마치 상급기관에서 감찰이라도 나온 양 도서관 구석구석을 살펴보았고, 이 정도면 만족할 만하다고 평가하고 있었다. 그러나 경험 많은 감찰관은 그렇게 쉽게 점수를 매기지 않는 법인 모양이다. 종합자료실에 들어선 순간 경악을 금치 못했다. 일단 그 크기가 예상보다 작았다. 당장 10년 앞을 내다보더라도 이 정도의 넓이로는 시민들이 원하는 책을 모아놓기란 불가능할 성싶었다.
더 실망스러운 것은 모아놓은 책의 빈약함이었다. 먹다 만 옥수수 형상이라 할 정도로 책이 너무 없었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얼마나 오랫동안 도서관에서 정작 중요한 것은 책이라고 말해왔던가. 나도 옆에서 끼어 들어 기회만 있으면 거들지 않았던가. 실망은 곧바로 분노로 비약했다.
혼자 열 받아봐야 그 사람만 손해다. 내가 아무리 옳더라도 남들이 아니라면 할 수 없는 법이다. 이렇게 스스로를 다독이며 흥분을 가라앉히려다 나는 뜬금 없는 생각을 하나 하게 되었다. 옳거니, 이 일이 여태 해결되지 않는 것은 사람들이 책을 소프트웨어로 여겨서이겠구나, 하는 생각이 든 것이다. 도서관 이야기를 하다가 갑자기 컴퓨터 관련 이야기를 하다니 무슨 귀신 씨나락 까먹는 소리냐 싶겠지만, 찬찬히 수긍이 가리라.
백과사전을 찾아보니, 하드웨어에 대해 “원래는 쇠붙이라는 뜻인데, 컴퓨터의 중앙처리장치(CPU;central processing unit)·기억장치(memory unit)·입출력장치와 같은 전자·기계장치의 몸체 그 자체를 가리킬 때에 사용한다”라고 정의했다. 소프트웨어는 “컴퓨터를 활용하기 위한 각종 프로그램 체계(體系)”라고 설명하고 있다. 이 정도야 이제는 상식이 된 마당이니 새삼스러울 게 없다. 내가 주목한 것은 다음 구절이다.
“1960년대는 하드웨어만을 중요시하고 소프트웨어는 무료로 공급했으나 이제는 소프트웨어의 중요성과 독립성이 널리 인식되어 소프트웨어의 가격이 하드웨어와 별도로 책정되는 경향이 뚜렷해졌고, 소프트웨어 가격이 하드웨어 가격보다 높은 경우도 많다. 하드웨어 가격이 계속 저렴해지고 또 자주 교체됨에 따라 이제는 컴퓨터시스템을 선택할 때 과거와는 반대로 소프트웨어가 더 중요한 역할을 할 때가 많다. 소프트웨어가 생산성을 얼마나 높여주는가의 여부, 하드웨어가 바뀌더라도 거기에 적응할 수 있는 소프트웨어인가의 여부, 유지보수를 하는 것이 효율적인가의 여부 등이 중요한 요구조건이 되고 있고, 또한 중요한 연구개발 대상이 되고 있다.”
하드웨어와 소프트웨어에 대한 백과사전의 정의는 얼마든지 변주될 수 있다. 큰 것, 움직이지 않는 것, 변하지 않는 것, 바꾸기 힘든 것, 더 이상의 이윤창출이 없는 것 등속이 하드웨어다. 이에 반해 소프트웨어는 작은 것, 움직이는 것, 변하는 것, 자주 바꿀 수밖에 없는 것, 그것으로 더 많은 이윤을 만들어낼 수 있는 것 등속이라고 할 수 있다. 이를 다시 내 식으로 종합해보면, 한번에 큰돈이 들지만 더 이상 이득을 내지 못하는 것은 하드웨어, 더 많은 이윤을 만들어내는 것은 소프트웨어라 정의할 수 있다.
이제 논점을 되돌려 도서관에서 책은 하드웨어인가 소프트웨어인가를 고민해보아야 한다. 나는 본디 에둘러 가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이라 다른 것에 빗대어 설명해 보면 이렇다. 쌀은 하드웨어인가 소프트웨어인가를 먼저 생각해보자. 쌀집의 하드웨어는 가게와 저울일 터이다. 앞에서 말한 하드웨어 정의에 얼추 맞는다. 그렇다면 쌀집에서 쌀은 당연히 소프트웨어다. 그러면 고급음식점에서 쌀은 어디에 해당할까. 이것은 상당히 논쟁적인 질문인데, 서둘러 내 견해를 밝힌다면, 나는 음식점에서 쌀은 하드웨어에 들어간다고 본다. 이유인즉, 일단 쌀은 그 자체로 음식점에서는 부가가치가 없다. 음식점에서 쌀은 솜씨 있는 주방장의 손에서 숱한 변화를 거친다. 쌀을 안치면 그것은 비빔밥, 오곡밥, 자장밥, 짬뽕밥, 쌈밥 등등으로 거듭난다. 음식점에서 쌀 자체로는 아무런 소득을 남길 수 없다. 누가 쌀 사러 음식점에 오겠는가. 그러나 쌀을 재료 삼아 요리한 것은 주인에게 이윤을 남겨준다.
책과 쌀이 같은 이유
책으로 다시 돌아와 이야기를 계속해보자. 책을 만드는 출판사나 책을 파는 서점 입장에서 보면 책은 당연히 소프트웨어다. 문화상품이라는 수사학으로 포장되어 있으나, 출판사나 서점에선 문화보다는 상품에 방점이 찍혀 있게 마련이다. 팔리지 않는 책을 내거나 전시해주는 출판사나 서점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나, 우리시대에 그것은 희귀한, 예외적인 현상에 해당할 뿐이다. 이들에게 책은 지속적으로 이윤을 남겨야 할 상품이다.
그러면 도서관이나 독자(소비자) 입장에서도 책이 소프트웨어인가를 고민해보아야 한다. 나는 이미 앞에서 이에 대해 답변을 한 꼴이다. 도서관이 책을 소프트웨어로 여기는 것 같다며 시비를 걸었으니 말이다. 내 입장에서 보자면, 책은 쌀과 같은 운명이다. 쌀집에서 소프트웨어였던 쌀이 음식점에 가면 하드웨어로 바뀌듯이, 출판사와 서점에서는 소프트웨어였던 책이 도서관이나 독자 입장에서는 하드웨어가 되기 때문이다.
그 이유는 책을 구비하거나 샀다고 해서 책이 도서관이나 독자에게 부가이득을 남기지 않는다는 데서 찾을 수 있다. 도서관 책꽂이에 책이 아무리 즐비하게 늘어서 있다고 해서 무슨 이득이 있는가.
도서관은 만인에게 열려 있다. 그 사람의 국적이나 계층이나 연령이나 성별을 구별하지 않고, 책을 읽고자 하는 의지가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수용한다.
아니, 좀더 적극적으로 말하면, 돈이 없어 책을 살 수 없거나 사교육의 혜택을 받지 못하는 어려운 형편의 청소년들이나 다른 직업을 찾고 있는 성인들을 위한 평생교육의 한마당이기도 하다. 바로 이런 사람들이 찾아와서 자기가 필요로 하는 책을 무상으로 빌려가고, 그것을 읽어서 애초에 의도했던 목적을 이룰 때 비로소 도서관의 책은 의미를 갖는 법이다.
가령, 외국인이 우리의 문화를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었다거나, 논술학원에 제돈 내고 다닐 수 없는 청소년이 대출된 책을 읽고 대학에 합격했다거나 실직상태의 고령자가 재취업을 하는 데 도움이 되었거나 할 때 책은 가치를 갖는 것이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는 시구를 연상하면 쉽게 이해할 수 있으리라.
독자의 입장에서도 마찬가지다. 신문에 떠들썩하게 기사가 나거나 연예인들이 나와 소란스럽게 읽을 만하다고 권해 책을 샀다면, 그것은 어디까지나 출판사와 서점에 좋은 일을 한 것에 불과하다. 구슬이 서 말이 있다 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꿰어야 보배라는 건 누구나 다 아는 일. 책장을 열고 읽어나갈 때 비로소 가치 있는 일이 된다.
그렇다고 읽는 것 자체가 책을 소프트웨어로 만드는 건 아니다. 어떤 방식으로 읽느냐에 따라 그것은 다른 결과를 가져온다. 지은이가 그 책에서 무엇을 말하고자 했는지, 그것을 어떤 식으로 만들어가는지, 주장한 것이 있다면 그것을 뒷받침하는 글은 논리적으로 탄탄한지를 따져가며 읽어야 한다.
여기서 그쳐서도 안 된다. 지은이가 말한 것에 대해 나는 어떻게 생각하는지, 그것이 나의 삶과 어떤 관련이 있는지, 다르다면 지은이의 입장을 어떤 근거로 비판할 수 있는지를 깊이 있게 고민해야 한다. 이 과정이 생략되면 읽는 이는 지은이에게 포박당하나 이 점에 충실하면 읽는 이는 하드웨어가 소프트웨어로 바뀌는 놀라운 경험을 하게 된다.
나는 지금껏 독후감을 이야기하기 위해 먼길을 걸어왔다. 현명한 독자야 벌써 수상한 낌새를 눈치채고, 결국 그 말을 할 거면서 허풍을 그리 떨고 있나싶어 혀를 찼으리라. 그러나 너무나 익숙한 것이기에 조금은 다른 시각에서 볼 필요가 있다. 오랫동안 보아온 것일수록 낯설게 보려 노력해야 그것의 새로운 가치를 발견할 수 있는 법이다.
나는 아직도 수학시험을 보는 꿈에 가위눌려 깨어나는 적이 있다. 참으로 한심한 일이 아닐 수 없다. 학교를 마친 게 언제인데 아직도 그런 꿈을 꾸다니. 더욱이 수학 못해 내가 살아오면서 손해 본 게 하나도 없는데, 그런 점에서는 차라리 영어시험 보는 꿈 때문에 가위눌리면 이해라도 할 터이다. 어쨌든 그런 꿈 때문에 잠을 망치다니 억울하기도 하다.
독후감 쓰는 악몽을 꾸다
그런데 요즘 청소년들한테는 독후감이 꼭 그런 모양이다. 읽기 싫은데 억지로 읽으라 하고, 요리 빼고 저리 피해서 어떻게든 안 읽으려 했더니 그놈의 수행평가라는 전가의 보도를 휘두르며 몰아치니 안 읽을 수도 없다. 그런데 읽는 것만 해도 귀찮아 죽겠는데 거기다 숙제랍시고 독후감을 내주니 이게 꼭 삼장법사가 손오공 머리에 씌운 금테 같아 학생들을 옴짝달싹 못하게 한다.
그러나 어릴 적 우리보다 요즘 아이들은 얼마나 더 되바라졌던가. 아예 정해준 책을 읽지도 않고 독후감 숙제를 해내는 비법을 찾았으니, 그게 바로 인터넷이라더라. 그리하여 지난 8월 인터넷 사이트 최고인기 검색어에 ‘독후감’ 세 글자가 당당히 등재되었다나 어쨌다나.
나이가 들면, 지금 알고 있는 걸 그때 알았으면 얼마나 좋았겠는가 하는 마음이 들 적이 많다. 독후감도 그런 경우다. 독서지도를 하는 교사들의 입장에서 보면 독후감만큼 책을 자기 것으로 만드는 데 유효한 교육이 없다. 지금 알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학생들은 그것이 단지 숙제로만 다가올 뿐이니 먼 훗날 이것을 그때 알았으면 좋았을 터인데 하며 후회할 터이다.
물론 모든 교사들이 독후감의 가치를 제대로 알고 이를 숙제형식으로 내준다고 단언할 수는 없다. 관행이 그래왔으니 평가하기 가장 쉬운 방법이어서 독후감을 활용하는 경우도 없지 않으리라. 하지만 독후감이 여전히 교육현장에서 위력을 발휘하는 데는 그만한 효과가 있기 때문이라고 보는 게 타당하다. 그것이 무엇이냐 하면 방금 말한 나만의 어법에 기대어 표현하건대, 하드웨어를 소프트웨어로 만드는 지름길이다.
하드웨어라는 개념은 투자라는 뜻과 연결되는 면이 있다. 이에 비해 소프트웨어는 소득이라는 뜻과 깊은 관련을 맺고 있다. 책을 사는 것은 투자하는 것이다. 투자자 입장에서 돈을 지불했다면, 그것 이상의 효과를 기대하는 것은 당연하다. 독서는 물론 일반적인 경제행위와 달리 즉각적인 투자효과를 거둘 수는 없다. 그것은 무척 늦게 나타나기 십상이며, 의약으로 치자면 서양의학보다는 한의학에 가깝다. 대증요법적 효과는 기대하기 어렵더라도(이것은 참고서가 해결해줄 것이다) 병인요법적 치료는 가능하다는 이야기다.
하지만 책이 그 어떤 효과를 거두기 위해서는 두 가지의 과정을 거쳐야 하는데, 그 첫 단계는 읽기이고, 두 번째 단계는 그 책의 주제를 자기 것으로 만드는 과정이다. 이것을 위해 책과 대화할 필요가 있다. 비유하자면 배추를 소금에 절여두는 것과 같은 이치다. 뻑뻑한 배추가 영양가 만점의 김치로 바뀌는 데 이바지한 일등공신은 소금이다. 책이라는 하드웨어를 소프트웨어로 바꾸는 연금술사는 방금 말한 두 가지다.
책과 말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저자와의 대화를 들 수 있다. 읽은 이가 저자와 ‘맞짱’ 뜨는 일만큼 흥분되고 즐거운 일은 없다. 그러나 한 독자가 저자를 만나는 것은 현실적으로 너무 어렵다. 두 번째는 대중매체를 통해 저자와 만날 수 있다. 텔레비전의 독서 토론 프로그램에 저자가 나오는 경우 이를 십분 활용할 수 있다. 이 방법은 즉각 활용할 수 있는 장점이 있지만, 일방적이라는 단점이 있다. 내가 묻고 싶은 것, 내가 주장하고 싶은 것이 반영되기 어렵다.
세 번째는 주위 사람들과 같은 책을 읽고 토론하는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가장 권장할 만한 방법이다. 토론이라는 과정을 통해 나와 다른 해석과 가치관을 만난다는 것은 상당히 의미 있는 일이다. 그런데 이도 우리의 환경에서는 쉽지 않다. 책 읽는 사람이 갈수록 줄어든다고 아우성인데다, 짬을 내 같은 책을 읽고 토론하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네 번째가 바로 독후감 쓰기다.
저자와 독자의 은밀한 만남
독후감은 일기가 그러하듯 자신과 저자와의 내면적 만남이다. 책에서 지은이가 말하고자 한 것이 무엇인지를 정리하고, 그것을 어떤 형식으로 꾸며냈는지에 대해 글을 쓰면 된다. 그리고 그 주제에 대해 자신의 생각이 어떠한지, 그리고 다른 사람들은 어떻게 생각할지를 적어 가면 된다.
성인이 되어 쓰는 독후감이라면, 누구에게 보여주려고 하는 것이 아닌 만큼, 그 형식은 자유롭다. 완성된 문장으로 쓰는 것이 가장 좋지만, 여의치 않으면 요점만 정리해도 된다. 일기형식이어도 좋고 편지형식이어도 좋고 가상 대담형식이어도 좋다. 중요한 것은 책에 대해 쓴다는 것이다. 여기서 유의할 사항은 독후감의 뜻을 깊이 생각해야 한다는 점이다.
독후감은 말 그대로 읽고 나서 느낀 소감을 적는 것이다. 책의 내용이나 얼개만 정리하는 게 아니라는 뜻이다. 그 책을 나의 삶이라는 문맥 속에 넣었을 때 어떤 감흥이나 문제의식이 떠올랐는지가 주제가 돼야 한다. 좋은 독후감이 대체로 1인칭으로 씌어진 이유가 여기에 있다.
돈을 주고 사왔든 도서관에서 빌려왔든 그 책의 주인은 읽는 이다. 책에 담겨 있는 내용이나 주제도 그 책의 주인에 의해 자유롭게 해석되고, 그 의미가 새롭게 조명될 수 있다. 더욱이 지은이가 애초에 의도했던 바와 달리, 철저히 자신의 입장에서 그 책에 반응할 수 있다. 주인이면 그렇게 할 수 있다. 어떤 ‘검열’도 거치지 않고 자유롭게 펼쳐질 수 있는 마당이 바로 독후감이다. 백 마디 말보다 이렇게 주장하는 사람이 쓴 독후감을 예로 드는 것이 나을 성싶다. 아랫글은 박혜란의 ‘나이듦에 대하여’를 읽고 내가 쓴 글의 일부다.
‘불의 시대’였던 80년대, 나는 20대였다. 그때 나는, 새로운 세계를 꿈꾸게 하지 못하는 현실에 절망하고 있었다. 아니 이 문장은 바로잡아야 한다. 20대였던 우리 모두가 그러했다라고. 현실의 벽을 뛰어넘지 못한 나는, 그 시절 내내 자살충동에 시달렸다. 젊음이 죄라고 생각했고, 치욕스럽게 질식사하느니 스스로 내 영혼을 자유롭게 하고 싶다고 되뇌었다. 죽음에의 유혹이 강해지면서 나는 가끔 차라리 파파 노인이 되길 소원하기도 했다. 내가 발 딛고 있는 현실에 아무런 책임의식을 느끼지 않아도 되는 ‘치매’의 상태를 원했던 것이다. 그만큼 나는 현실 앞에 비겁했다.
…그래도 내가 지금껏 구차한 삶을 꾸려온 데는 이유가 있다. 세월을 약 삼아 견디다 보면, 마치 몸무게가 1kg이 되는 것과 같은 일이 일어나리라 기대했기 때문이다. 부피는 있으나 무게가 없는 사람이라, 이 얼마나 황홀한 상상인가. 바람이 불면, 몸이 가벼우니, 하늘을 날 수 있을 것이고, 비가 오면, 부피는 있으니, 젖어 물과 함께 흐를 수 있을 터이다. 나이를 먹다보면 일상의 덫을 날렵하게 건너뛰고 좀더 넓고 깊게 세상을 바라볼 수 있으리라 믿었다. 나는 여전히 ‘진보사관’을 버리지 못했던 것이다.
하지만 현실은 정반대였다. 비록 비유라 하더라도, 몸무게가 1kg이 되는 것은 가당치도 않은 일이었다. 나이 먹을수록 배만 나오더니, 급기야 저울이 가리키는 숫자가 90을 넘어서려는 순간의 아찔함이라니! 시간이 흐를수록 영혼은 젖은 외투처럼 더 무거워져 갔다. 그러기에 바람이 불어도 좀처럼 흔들리지 않았고, 비가 와도 도대체 흐르지 않았다. 일상이라는 덫에 꼼짝없이 걸려든 것이다. 떨쳐버릴수록 더 깊이 조여오는 덫에서 벗어나는 방법은 없을까. 그래서 집어든 책이 박혜란의 ‘나이듦에 대하여’(웅진닷컴)이다.
아무리 사정이 급하더라도 이 책을 ‘종합감기약’처럼 여겨서는 안 된다. 단박에 나이듦의 의미를 꿰뚫어볼 수 있는 혜안을 담고 있는 것도 아니니까 말이다(두 눈 비비고 찾아도 이 세상에 그런 책은 없다). 이 땅에 여자로 태어나 나이 든다는 것이 무엇인지 곱씹고 있는 이 책에서 나는, 각별히 나이 들며 지은이가 깨달았다는 것에서 감동을 받았다.
요약하자면, 느슨하게 살자는 것이니, 우리 인생이 꼭 무언가를 남겨야만 하는 건 아니라는 것이 그 첫째다. 지나고 나니 인생은 짧은 즐거움과 긴 괴로움의 연속이었다는 것은 두 번째 깨달음이다. 마지막은 남에게 일어날 수 있는 일은 바로 나에게도 일어날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다. 불행은 모든 사람 앞에 평등하다. 나이 들어 이 정도만이라도 깨달을 수 있다면, 죽지 않고 살아 남은 것에 깊이 감사할 수 있을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지은이가 이 글을 보았다면 불쾌할 수도 있다. 책 내용을 정확하게 요약한 것도 아니고, 주장의 옳고 그름을 가늠하지도 않았다. 그저 읽은 이의 푸념만 늘어놓았을 뿐이다. 하지만 독후감을 쓰는 사람에게 저자는 하등 고려의 대상이 아니다.
늙어감이라는 주제에 외려 나는 20대를 떠올렸고, 나이 들어가면서 그 때의 건강한 꿈이 훼손된 것에 대한 안타까움을 토로했다. 위의 글이 독후감의 표본일 수는 없지만, 이런 유의 독후감도 있음을 보여주는 것은 사실이다. 지은이와 책은 사라지고 읽는 이의 감정과 느낌만 오롯이 남는 것, 내가 가장 좋아하는 독후감이다.
책의 살과 뼈를 샅샅이 발라라
이제 우리는 통념을 바꾸어야 할 때가 왔다. 책이라는 것은 신성한 그 무엇이 아니다. 그러니까 오락거리책도 가치 있다고 말하려는 것이 아니다. 책을 누가 쓰고 무엇을 주제로 삼았든, 탐식가인 읽는 이에 의해 그 내용과 형식이라는 살과 뼈가 샅샅이 발라져야 한다. 그리고 그것은 읽는 이에 의해 재구성되어 또 다른 무엇인가를 낳는 밑거름이 되어야 한다.
나는 단 한번도 책을 경제적 가치로 재단한 적이 없다. 그러나 나는 늘 책을 통해 무엇인가 얻기를 갈구한다. 부가가치를 창출하고 싶어하는 것이며, 하드웨어를 소프트웨어로 바꾸고 싶어하는 것이다. 책이 이윤을 낳는 것은 내 것으로 만들었을 때다. 내 것으로 만드는 가장 손쉬운 방법은 지금껏 말해왔듯 독후감 쓰기다. 독후감 쓰기는 읽는 이를 책의 주인으로 만든다. 그리고 감히 말하거니와, 책의 주인된 자가 세상의 주인으로 당당히 나설 수 있는 법이다.
언제나 인터넷 검색어 인기순위에서 독후감이 빠질 수 있을까. 뒤늦게 깨닫고 후회하지 말고, 지금 그 가치를 제대로 알았으면 하는 바람인데, 바라노니 청소년 흉볼 생각 말고 어른들부터 독후감을 써보길! 변화와 성장이라는 놀라운 경험을 몸소 체험할 수 있으리라.
<출처:신동아 2003년 11월호 통권 530호 특별부록 가슴으로 글쓰기>
글: 이권우 도서평론가 lkw1015@hanmail.net
‘출판저널’ 편집장을 지냈으며 책을 너무 좋아한 나머지 ‘도서평론가’라는 직업을 스스로 만들고 각종 지면과 방송 등을 통해 좋은 책을 소개하는 것을 업으로 삼아 즐겁게 살고 있다. 저서 ‘각주와 이크의 책읽기’ ‘게으름뱅이의 책읽기’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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